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93)
“사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아, 그냥 직접 보여줄까? 응. 그 편이 나을 거야.”
공녀는 대가리를 박은 자세로 손뼉을 쳤다. 정말로 꼴사나운 묘기였다. 공녀가 손뼉을 치는 것과 동시에, 하얗기만 했던 공간이 알록 달록 물들었다.
마치 VR처럼 주변에 풍경이 펼쳐졌다.
“어라?”
그런데 이 광경.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여긴 2층 사냥터잖아요?”
“맞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회귀하기 전, F급 헌터 생활을 전전할 적에 매일같이 돌아다닌 장소였으니까. 유수하가 아직 염제로 발돋움하기 전에 없애버린 곳이기도 했다.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씨발.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죽쳐야 하는 거냐.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포니테일 남.
유수하.
저 놈은 입을 열 때마다 욕을 지껄이지 않으면 혀에서 뾰루지가 돋아나는지, 말 끝마다 쌍시옷과 지읒을 현란하게 연주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귓구멍을 씻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욕설이었다.
-젠장. 인생 뭐 있나. 족칠 수 있는 놈만 족치고 다녀야지, 시발.
VR로 구현된 유수하가 슬라임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야! 인마! 거기 안 서!?
슬라임이 총총 도망치고 유수하가 쫓아갔다. 사냥하는 모습에서 초보티가 물씬 풍겼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F급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저게 언제적 유수하예요?”
“옛날 옛적이야. 네 관점에서 말하자면 [회귀하기 전]이겠네.”
여전히 대가리를 박은 채 공녀가 대답했다.
“이 시절에 염제는 당신처럼 2층만 돌아다녔어. 스킬을 각성하지 못했거든. 그런데….”
그런데,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VR에선 금발의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였다.
VR 속의 공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풀숲을 거닐었다. 꼭 산책을 즐기는 것처럼 걸음걸이가 태평했다.
-뭐야? 웬 애새끼가 이런 곳에 있어?
유수하도 공녀의 인기척을 깨닫고 걸어갔다.
-어이, 꼬맹아.
유수하는 공녀의 등 뒤로 걸어가서 단숨에 목깃을 잡아들었다. 아무리 공녀가 겉으로 보기엔 꼬마나 다름없다 해도 굉장히 무례한 짓이었다. 하지만 유수하는 당연하다는 듯 공녀를 들어올렸다.
-너 여기서 뭐하냐?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친 순간.
-축하해!
공녀가 환히 웃으면서 양손으로 팻말을 들었다.
팻말에는 [황금 고블린 복권]이라고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나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잡은 사람에겐 황금색 스킬이 주어져! 당신은 정말 운이 좋구나. 오늘의 당신은 모든 탑을 통틀어서 제일 운수가 좋은 행운아야!
-뭐, 뭐야? 이 미친 꼬마는….
-지금 스테이터스를 확인해보면 황금색 스킬이 생겼을 거야. 그럼 안녕!
공녀는 그걸로 용무가 끝났다는 듯 휙 사라졌다.
풀숲에는 유수하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게 뭔….
VR 환상은 거기서 종료됐다.
내가 서 있는 공간은 다시 하얀 도화지처럼 밋밋해졌다.
영상에서 나온 것과 똑같이 생긴 공녀는, 내 발앞에서 머리를 박고 있었다.
“…….”
나는 공녀의 예쁘장한 뒤통수를 빤히 내려봤다.
“봐도 모르겠는데. 설명해주시죠.”
“나는 가끔 [황금 고블린] 이벤트를 벌여. 일종의 유희야. 아무 탑에나 현현해서 생각없이 걸어다니는데, 나를 제일 처음으로 발견해서 잡는 사람한테….”
“설마 황금 스킬을 퍼주는 건 아니죠?”
“아니. 바로 그게 맞아….”
“이런 미친.”
어처구니가 없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득해진 의식 속에서 어째선지 문득 떠오른 것은, 사람들이 성공의 비결이 뭐냐고 물을 때마다 염제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는 사실이다.
「염제님! 지망생들한테 성공의 비결을 딱 한마디로 정의해서! 조언해주시죠!」
「어차피 될 놈은 된다.」
언제나 염제는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끝입니다. 더 할 말 없으니까 따라오지 마십쇼.」
여태까지 나는 그 발언이 오만에 가득찬 잘난 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일, 정말로 우연히 [황금 고블린]을 붙잡아서 EX급 스킬을 얻은 거라면?
누구한테 밝힐 수도 없다. 말해봤자 미친놈 취급이나 당하겠지.
말 그대로 ‘어차피 될 놈만 된다’는 운빨 인생을 주창할 수밖에!
“왜, 왜 그딴 짓을 한 거예요?”
“지극히 사적인 이유와 지극히 공적인 이유,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어느 쪽부터 듣고 싶어?”
“공적인 이유부터 들읍시다.”
“기둥들 중에는 방관파와 개입파가 있어. 난 개입파. 탑을 오르는 아이들한테 적극적으로 개입하자는 쪽이야. 그런 활동의 일환으로 이런저런 이벤트를 많이 벌이는데 그 중 하나가 황금 고블린….”
“사적인 이유는 뭡니까?”
“재미있잖아.”
“대가리 싸게 박으십쇼.”
“네….”
그동안 왜 내가 탑의 높으신 분들한테 배려를 받았는지 알겠다.
나는 염제 유수하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다. 그리고 염제를 성공시킨 스킬, [회귀자의 태엽시계]는 다름 아니라 기둥 중 한 명이 재미 삼아서 건네준 기술이다. 즉.
“피해자 보상 차원이었다니….”
“그런 면이 아예 없지는 않았어.”
머리가 아파온다.
“왜 유수하처럼 개차반인 녀석이 그렇게 좋은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의아스럽긴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뭐 재미삼아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었다는 수준의 이야기도 아니고….”
“정말로 미안.”
“쯔쯧.”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혹시 벌받으러 내려오신 거예요? 기둥씩이나 되는 분께서?”
“맞아. Mula… 탑주님이 이참에 정신 좀 차리고 오라 명령했어. 금제까지 걸어서. 지금 나는 본래에 비하면 체력, 무력, 지능, 매력, 모든 면에서 열화된 상태라구. 조금 너무하지 않아?”
“탑주님이 성군이시네. 참 성군이셔.”
영명하신 판단이다.
“아무튼 나도 개인적으로 사왕한테 보상을 해주고 싶어. 지금까지 사왕 때문에 회의가 소집될 때마다 은근히 편들어주긴 했지만, 그거로는 부족한 느낌이잖아?”
“으음.”
나는 턱을 짚었다.
‘딱히 이제 와서 염제 건으로 보상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유수하가 [회귀자의 태엽시계]를 가진 덕분에 나 역시 [너처럼 되고 싶다]를 발동할 수 있었다. 성공한 삶을 살게 되었고, 스승님과 라비엘을 만나서 행복해졌다.
나는 불운했을지언정 불행하진 않다.
-야. 좀비야. 아까부터 기둥이니 뭐니 무슨 소리냐?
고민에 잠겨 있자니 배후령이 말을 걸었다. 배후령은 나와 모든 역정을 함께했지만, 기둥과 만날 때만은 배제되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나중에 설명드릴…… 아.’
배후령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러게요. 제가 공녀님한테 보상을 받아야겠습니다.”
“어떤 거? 종족 포인트를 잔뜩 챙겨줄까?”
“그것도 땡기지만….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떠난 다음 아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세요.”
“응?”
“쏘니아, 아리카, 유마르, 사쿰. 제 손끝이 머물다가 떠나버린 애들이요. 제가 없어지고 나서 어떻게 살았는지, 아이들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우부르카와 고르케도요.”
내 아이들의 후일담(後旧談).
나는 그것이 보고 싶었다.
몹시나.
“…….”
공녀가 천천히 머리를 일으켜세웠다.
나를 올려다보는 공녀의 눈빛엔 호의가 담겨 있었다.
“사왕은 정말로 욕심쟁이구나.”
“예.”
“알았어.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들어줄게.”
새하얀 공간이 풍경으로 물들었다.
곧, 아이들의 얼굴이 비추었다.
2.
쏘니아는 배우를 그만두지 않았다.
-괜찮아.
내가 떠난 이후로 쏘니아는 악평에 시달렸다. 갑자기 오러의 솜씨가 떨어졌다는둥, 예전만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둥. 이미 눈썰미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지정족들에게 ‘쏘니아’의 혈화극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다.
-잘 될 거야.
하지만 쏘니아는 그만두지 않았다.
손톱이 깨지고 발톱이 바스라지도록 연습을 거듭했다.
-할 수 있어.
쏘니아는 말수가 적어졌다. 공연하거나 연습할 때를 제외하면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무대 위가 아니라면 인생을 살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였다.
그런 쏘니아 곁에는 외눈의 아리카와 외팔의 유마르, 외귀의 사쿰이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이면 충분하다.
극단의 명성이 떨어졌으나 배우들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엔 무용극이 참신해서 충격을 줄 수 있었지만, 이젠 관객들도 익숙해졌다. 그뿐이다. 실망하지 말고 계속 공연을 올리면 언젠가 찬사가 되돌아올 거다.
-우고르.
한물 간 극단.
그런 평가를 받으면서도 배우들은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아리카에겐 오랜 옛날 떠난 어미가 돌아왔다. 이미 인생을 공유할 기회를 잃어버린 두 사람이 이제 와서 모자의 관계를 맺기란 어려웠다. 다만, 아리카는 어미가 제 인생에 들어와 이따금 함께 식사하는 것을 허락했다.
유마르는 배우 생활을 하면서 번 돈을 상당 부분 고향에 쾌척했다. 젊은이들이 거의 다 죽어버린 탓에 고향은 쇠퇴하고 있었다. 유마르의 기부 덕택에, 마을은 다음 세대가 자라날 때까지 숨을 간직했다.
사쿰은 옛날에 모시던 주인댁이 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아이가 아니었다. 사쿰은 얼른 달려가서, 거지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은 옛 주인한테 동전 한 푼을 던져줬다. 멍하게 쳐다보는 주인을 버려두고 사쿰은 희희낙락 떠났다.
시간이 흘렀다.
-…….
쏘니아의 얼굴엔 어느덧 주름이 잡혔다.
평생을 무대 위에서 살아온 쏘니아는 눈이 맑았다. 그녀의 삶은 좁았지만, 좁은 곳에서 충만했다.
쏘니아는 텅 빈 관객석에 홀로 앉은 채, 극장 무대를, 자신의 발끝이 스쳐보지 않은 부분이 없는 나무바닥을 바라보았다.
-잘 살았구나.
쏘니아는 가느다란 눈으로 무대의 어둠을 들여다봤다.
그곳에서 자신이 춤추던 모습들을 그림자처럼 반추하며.
-조금 더, 사람들한테 친절했을걸 그랬어.
쏘니아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케케륵케르 님….
그리고 풍경이 달라졌다.
여리여리한 쏘니아와 다르게, 산처럼 거대한 몸을 가진 홉고블린. 지정족 역사에서 명실공인 최강으로 인정받은 전사. 화하평의회 서열 1위의 의장. 우부르카였다.
-더는 내가 통치해서 좋을 게 없다.
나를 떠나보내고 20년이 넘도록 우부르카는 정상에서 군림했다.
수십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전사가 우부르카에게 도전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패배를 겪지 않았다.
무패의 전사.
그는 어느 날 돌연 사퇴를 표명했다.
-이제 의장직을 내려놓고 오로지 무(武)의 길만을 걷겠다.
홉고블린들은 난리를 피웠다. 이들은 슬슬 우부르카의 철권통치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제왕이 퇴위하겠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부르카는 단호했다.
-오히려 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 우거. 산와족들을 안정시키고 대륙을 평정하느라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20년 전에 내가 철없이 일으켰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니, 지금부턴 나를 위한 삶을 살겠다. 걱정하지 마라.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나는 속세와 인연을 끊으마.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의장?
-내가 가는 것이 아니다.
우부르카가 씩 웃었다.
-내 애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지.
우부르카는 구루를 떠나 산으로 올랐다.
대륙에서 제일 험춘한 영산(靈山).
사시사철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그 꼭대기에서, 우부르카는 가부좌를 틀었다.
-애비는 수백 년을 주기로 지상에 강림하지.
명상에 침잠하며 우부르카가 중얼거렸다.
-작금의 나로는 고작 백오십 년을 버티는 것이 한계일 터. 경지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겠군.
우부르카의 목소리에선 즐거움이 묻어나왔다.
-어서 오거라. 애비여. 내 기다리고 있겠노라.
눈보라가 우부르카를 파묻었다.
이제 끊기려니 싶었던 풍경은 그러나,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
공녀는 후일담의 광경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1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나도 내 주변에선 영산의 눈바람이 몰아쳤다.
“저기, 공녀님?”
“응.”
“우부르카의 후일담은 전부 본 것 같습니다만.”
“아니야.”
공녀가 빙그레 웃었다.
“아직 안 끝났어.”
공녀의 미소에는 비밀스러운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
설마.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입을 열었다.
“혹시, 아직 살아 있는 거예요?”
우부르카.
나와 작별할 적에 ‘아주 오래 살아야겠군’ 하고 웃은 아이의 얼굴이 생생히 떠올랐다.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다. 지정족들에게 이미 우부르카는 전설 속의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만약 우부르카가 반로환동(返老還童)에 성공했다면.
“살아남는 데 성공한 겁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런 나를 보면서 공녀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응.”
“만나보고 싶어?”
다음 스테이지.
35층에서, 내가 반드시 만나야 할 아이가 결정되었다.
19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