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94)
3.
우리는 다음 층으로 진입할 준비를 끝냈다.
지난 스테이지에선 전원이 퀘스트를 성공했다. 그래서 탈락자를 가려내기 곤란해졌지만, 마침 기권을 자청한 동료가 한 명 있었다.
“정 한 명을 뽑아야 한다면 나로 해라.”
손을 든 사람은 성기사였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지만, 성기사는 머리를 저었다.
“괜찮다. 어차피 흑기사를 창설하려면 1층에 내려가볼 필요가 있다. 자경단을 오래 비워두기도 마음이 편치 않아.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다만…. 나는 굳이 새기족이 대륙의 패권을 쥐길 바라지 않는다. 먹고 살 만하면 족하다.”
벌어들이는 돈 대부분을 고아원에 기부하는 그녀다웠다.
“흐응.”
흑룡주는 뭔가를 따로 아는 눈치였다.
“과연 이유가 그거뿐이시려나?”
“……무슨 소리인가.”
“그냥? 혼자 있으면 외롭겠지 싶어서.”
흑룡주는 볕 좋은 창가에 앉은 고양이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흑기사 설립은 당신한테 맡길게. 만일 우리 길드원 중에 방해하는 애가 있으면 [마녀가 운영하는 카페는 삼거리를 지나 골목 반지하층에 있다]고 말하렴. 메뉴가 뭐나고 물으면, [호박라떼에 아이스 빼고]라고 하면 돼.”
“흑룡의 암구호인가?”
“응, 이번 달 꺼. 아직 갱신 안 됐을 거야.”
“여전히 취향이 독특하군….”
성기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먼저 공략조에서 나가게 되어 미안하다. 사왕. 미안한 분만큼 길드의 토대를 잘 만들어두지. 네가 40층을 클리어하고 돌아오는 날엔 이미 준비가 완료되어 있을 것이다.”
“음. 정말 미안하시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다. 말해라.”
“이번 공략이 마무리되면 저 음악 좀 가르쳐주세요.”
성기사가 아아, 하고 눈썹을 좁혔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 이반시아 공한테 들려주고 싶다고 했나?”
“네. 라비엘한테 고백할 때 음악 배워서 연주해주기로 약속했거든요.”
“좋군. 재즈는 사랑이지.”
성기사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를 지었다.
“누구보다 로맨틱한 연인을 두었으니 응당 음악이 필요할 것이다. 남을 가르치는 재주는 없다만 최선을 다해보마.”
“그 때는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음.”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뒤를 맡긴다. 공자여.”
성기사의 미소가 빛에 좀먹혔다.
[성기사가 스테이지에서 탈락합니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포인트를 정산합니다.] [당신은 1510 종족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7112입니다.]성기사가 보유한 포인트는 우리에게 분배되었다.
종족을 자식으로 치면, 이 포인트는 이른바 양육비.
지정족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을 위해 쓰는 편이 바람직하겠지.
‘하지만 당장 급한 건 종족의 안위가 아니야.’
나는 주먹을 쥐었다.
오직 나와 만나고자 자그마치 수백 년을 기다린 아이가 있다.
‘기다리렴, 우부르카야.’
35층으로 전이되면서 빛이 눈앞을 감쌌다.
‘지금 애비가 간다!’
4.
35층의 시대에 강림한 직후.
나는 흑룡주를 졸라서 같이 움직였다.
“빨리요! 무조건 대륙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가면 됩니다!”
“당신 말이야…. 설마 나를 택시 기사로 취급하는 건 아니지?”
“언제나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말이라도 못하면….”
흑룡주는 한숨을 쉬면서도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정신체로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보다 흑룡주의 [순간전이]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빨랐다.
“저쪽인가?”
구름을 징검다리 삼아 한참이나 하늘을 가로지르니 어느덧, 발 아래로 산맥이 펼쳐졌다. 고산(高山). 땅이 구부러져서 접힌 흔적이 세상에 남겨져 있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산봉우리의 머리들이 하얗게 샜다.
“……히말라야보다 높은 거 같은데.”
흑룡주는 떨떠름한 얼굴로 산줄기를 둘러봤다.
“보기만 해도 추워진다, 얘. 정말로 여기에 네 사도가 있는 거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공녀가 환상으로 잠깐 보여줬어요.”
이 부근이 확실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근처에 있을 텐데….”
문득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지난번 스테이지와 이번 스테이지 사이엔 약 150년의 격차가 있다.
어쩌면 우부르카는 150년을 넘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마음의 심지가 새까맣게 타기 시작했다. 만일 그렇다면, 우부르카와 재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다.
꽈악.
200년이 넘도록 홀로 버틴 우부르카를 떠올리자 이빨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나는 본능적으로 상의를 매만졌다.
가슴 주머니엔 청장미 향이 묻은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여차하면 회귀할 수 있다.’
우리 두 사람은 설봉에 발을 디뎠다. 어떻게 라비엘에게 회귀를 허락받을지 고민하면서, 나는 두 눈으로 산마루를 살살이 뒤졌다.
사방에 오러를 흩뿌렸지만 생명은 감지되지 않았다.
“사왕.”
다만 무언가가 눈에 밟혔다.
“저기…….”
흑룡주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 미라가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
나는 숨이 멈췄다.
미라는 바싹 말라 껍질밖에 안 남았다.
한여름에 갈사하여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매미의 시체처럼.
미라의 피부에선 생명의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늦었구나.’
심장이 조여왔다.
‘내가 늦어버렸어.’
미라의 얼굴은 주름이 심하게 졌다. 그러나 나는 우부르카의 자취를 느꼈다.
한없이 평온한 표정.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눈보라에 들썩였다.
이 세상의 고생을 다 벗어던지고 가뿐해진 얼굴에, 차마 눈물을 흘릴 수조차 없었다.
‘미안하다….’
손을 뻗어 우부르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애비여?”
귀에 익은 진동이 스며들었다.
나는 손 뻗는 걸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우고르.”
묘하게도 세상사에 달관한 목소리.
언제 어느 때나 심장의 구석에 웃음기를 한 모금 머금고 있는 울림이 설산의 대기를 타고 전해졌다.
“정말로 애비로군.”
우부르카는 새하얀 눈밭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아이의 어깨 너머로는 험준한 산맥이 이어졌다.
이곳은 대륙에서 제일 높은 고지였기에, 이 세상에서 우리와 똑같은 고도를 공유하는 사람은 더 없을 것이었다.
“우,”
내가 입을 열었다.
“우부르카……?”
“반갑다. 삼백육십삼 년 하고도 대충 일곱 개월만이다, 나의 애비. 처음 보는 귀인과 함께 찾아왔군.”
“맙소사.”
나는 귀신에 홀린 것마냥 우부르카와 미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 어떻게 된 일이나? 난 네가 죽어서 미라가 된 줄로만….”
“아. 그거 말인가?”
우부르카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미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건 시체가 아니라 허물이다. 왜, 애벌레가 나비로 거듭나려면 먼저 고치의 감옥을 인내해야지 않는가. 이건 나의 고치다.”
우부르카가 큼직한 검지로 툭, 미라를 건드렸다.
그러자 미라는 균형을 일고 스르륵 녹아내렸다.
눈밭으로 침몰하는 허물을 보며 나는 입을 쩍 벌렸다.
“허, 허물…?”
“60일 내내 명상에 잠겨 있자니 깨달음이 찾아왔다. 우고르. 눈앞에서 꿈 같은 풍경이 떠올랐고, 발을 내딛자 어느새 꿈 속에서 살게 되었다.”
내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경지에 대해 우부르카가 떠들었다.
“그 꿈속에서 나는 명문 무가(武家)의 자제로 태어났다. 다만 선천적으로 오러를 쓰지 못하는 체질을 타고났지. 장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러를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무시를 당했다. 우거, 결국은 정치와 음모로 가주직을 따냈다만.”
“꾸,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세하구나.”
“아마도 그것이 나의 전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몸이 병약하여 26살이라는 나이에 병사했다만. 꿈에서 깨니, 본래의 신체가 허물처럼 흘러내리더군.”
우부르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본래는 기념 삼아 그대로 놔둘 생각이었다만 애비가 돌아왔으니 상관없다. 기다림의 증거는 오직 만남의 환희를 위해서 간직해두는 것이다. 다시 만났으니, 나의 기다림은 이미 기쁨이 되었다.”
“우부르카야…….”
코끝이 찡해졌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나 멋지게 자라다니.
“사왕.”
그때 흑룡주가 내 어깨를 쳤다.
“팔불출을 마음껏 드러내는 건 좋은데 당신, 뭔가 이상한 점 눈치채지 못했어?”
“네?”
“우리 지금 아무런 아이템도 안 쓰고 있잖아.”
흑룡주는 깊이 침잠한 눈으로 우부르카를 보고 있었다.
“[동물 빙의]도 [인물 빙의]도 안 썼어. 아직 정신체인 상태야.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은 우리를 절대로 알아볼 수 없다고. 그런데 어떻게 저 아이는 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인식하는 거니?”
아.
그제야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게?’
정신체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알아차릴 수 없다. 그것은 31층부터 34층까지 줄곧 증명된 철칙이다. 하지만 우부르카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나와 대화를 나누었고, 심지어 흑룡주의 존재까지 인지했다.
더군다나.
‘아까 분명 오러로 주변을 탐색했는데 생명이 감지되지 않았어.’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우부르카와 시선을 마주쳤다.
“우부르카야. 너 어떻게 우리를…….”
“우고르.”
우부르카는 목운동을 상하좌우로 했다.
빠드득!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깨달음을 얻어 현생을 탈피하니 그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계란 궁극의 타자다. 세계를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면, 나 역시 세계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어.”
이 아이가 뭔 소리를 읊는 거야.
내 두뇌는 일단 어려운 단어가 입력되면 버벅거리는 특징이 있다. 나는 우부르카가 한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얘야. 무슨 애기를 하는 거냐?”
“쉽게 말해서 이런 뜻이다. 애비여.”
우부르카가 손가락을 튕겼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뭐?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는 당신과 재회하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세상에.
나는 멍하게 우부르카를 쳐다봤다.
누가 삽으로 머리를 후려친 것 같았다.
“너, 너어…….”
“삼라만상에는 참으로 신비한 이치가 많더군.”
나를 보는 우부르카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한결 더 진해졌다.
“애비의 얼 빠진 얼굴을 보니 열심히 수련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떤가? 내가 알기로 이 땅에서 나보다 높은 경지를 이룩한 자는 아직 전무하다. 명실상부 고금 최강의 전사로 등극한 것이다.”
“아니…….”
홉고블린의 몸으로 성좌에 올라버리다니.
얘가 천재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나저나 애비여.”
성좌가 된 아들이 실실 웃었다.
“본인의 이야기는 나중에 언제든 회포를 풀 수 있다. 오늘은 우리 부자가 경사스럽게도 다시 만난 날이다. 삼백오십 년의 한을 서로 나눠야지 않겠는가?”
“아, 아아. 오냐. 네 말이 맞다.”
내 입장에선 얼마 안 흘렀지만 우부르카에겐 실로 길고도 긴 세월.
오랜만에 만나게 된 부모와 자식이 나누어야 할 기쁨은, 이런 대화가 아니라 몸짓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나는 팔을 활짝 벌렸다.
“이리로 오렴, 우부르카. 내가 비록 너에 비하면 쪼그맣지만 기쁘게 안아주겠…….”
“우고르.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가겠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는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응?
“각오해라. 애비여.”
우부르카는 양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내, 오늘과 같은 날이 다가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리고 나한테로 달려들었다.
우부르카가 한 발자국 내디디자 산맥이 요동쳤다. 설봉의 눈밭이 무너져서 아래로 쏟아내렸으며, 눈보라의 풍향이 뒤바뀌어 하늘로 치솟았다.
“자, 잠깐만. 아들아. 잠깐 기다—.”
“삼백오십 년 전에는 꼴사납게 패배했지만 오늘은 좀 다를 것이다!”
우부르카는 일권(一奉)을 내질렀으며.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포효합니다.]그 순간, 천지가 뒤흔들렸다.
19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