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95)
1.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성좌 중에 가장 강력했던 이는 단연코 아귀(餓鬼)다.
가을비의 마왕.
마물들의 성녀는 한 번의 칼질로 시체의 산을 잘도 쌓았다. 그녀의 칼끝에서 대륙은 붉은 핏물에 물들었으니, 혈염산하(血染山河), 산줄기가 피웅덩이에 잠겼고 강줄기는 혈향으로 그윽했다.
“크하하하!”
그런데 오늘 내 마음속 순위가 바뀔 거 같다.
“역시 애비다!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하는군!”
코앞에서 주먹이 빗나갔다. 부후우우웅! 공기가 갈라지면서 낸 소리라기엔 지나치게 폭력적인 굉음이 들렸다. 맙소사. 다리에 힘을 줬기에 망정이지 자칫 풍압에 휘말려 날아갈 뻔했다.
“아, 아들아!”
“말해라! 애비여!”
“우리끼리 꼭 이럴 필요가 있겠느냐!”
난 절실한 마음으로 소리쳤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좀 더 회포도 풀고, 부자지간에 즐거운 대화도 나누고….”
“나는 지금이 제일 즐겁다!”
“애비를 죽일 셈이냐!”
“내 주먹에 죽는다면 애비의 실력이 그 정도에 불과했다는 뜻. 나를 원망치 말고 애비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라!”
폭발음이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우부르카가 쏘아낸 오러에 설산이 무너지고 있었다.
“미친.”
스승님과 같이 마음으로 세계의 자락을 잘라내는 경지에야 감히 비할 수 없겠으나, 파괴력 하나만큼은 무지막지했다.
과연 내가 저 주먹에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 설산의 산봉우리와 내 두개골 중에 어느 쪽이 더 단단한가 고려해본다면, 계산은 싸게 나왔다.
“애비 살려어!”
나는 절규했다.
“동네 사람들! 여기 애비 대가리를 터트리려는 불효 자식이 있어요! 자기한테 오러운용법도 가르쳐주고 마천신공까지 전수해줬는데 이놈의 자식이 은혜도 모르고 애비를 죽인다!”
“본인은! 주먹으로 효도한다!”
희대의 개잡소리를 외치며 우부르카는 자세를 취했다.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자세였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일식第一式.
아사유검飯死流劍.
사방에서 오러가 피어올라 내 몸을 집어삼켰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옛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치 오러 운용이 능숙하지 않은가.
-호오.
배후령이 탄성을 흘렸다. 그것과 정확히 동시에 사물을 인지하는 나의 감각이 끝없이 느려졌다. 배후령의 목소리는 내게 ‘호오오오’로 들렸고, 눈바람이 그의 말끝을 미처 낚아채기도 전에 나는 반격했다.
‘강대강으로 붙으면 진다.’
전신에서 오러를 끌어올렸다.
단 1초라도 마음을 풀었다가는 속수무책으로 패배할 상황.
‘될까?’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타계책이 떠올랐다.
‘해보지.’
동작은 결심보다 빨랐다.
나는 발을 내디였다. 바스락! 신발 아래서 눈이 부서졌다. 잘게 부서진 눈꽃으로 나의 오러가 급속도로 스며들었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일식第一式.
아사유검飯死流劍.
나는 우부르카의 공격을 맞받아치지 않았다.
도리어 장악했다.
마천신공은 결국 시전자의 기억, 심상(心像)에 의지하여 타오른다. 제아무리 수십 갈래로 나뉘어져 공격해온다 한들, 어느 갈랫길이 거칠고 어느 갈랫길이 무른지, 시전자의 심상만 속속들이 이해한다면 파훼할 수 있다.
‘신공을 얼만큼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향방이 달라진다.’
조용히 상대방의 공세를 들여다보았다.
내 눈에는 오러의 불꽃이 생생한 손짓들로 비추었다.
우부르카가 택한 주요 공격로는 두 갈래.
‘겨루어볼까.’
한 호흡.
제일 거칠게 쇄도해온 불길부터 꺾었다. 굶주림의 고통. 어린아이의 비명이 담긴 공격이었다.
‘정석이구나.’
나는 기민하게 신공을 운용했다. 어린 자식의 비명을 코앞에서 들어야만 하는 어미의 손짓을 떠올렸다.
고통과 아픔이 맞부딪혔다. 내 오러는 마치 양손으로 목을 조르듯, 우부르카의 오러를 쥐고 비틀었다.
공격 방향이 역으로 꺾였다.
“……!”
두 호흡.
우부르카는 안광이 사나워졌다. 무력의 강함이 아니라 무공의 이해도를 걸고 싸우자는 내 의도를 짚어낸 것이다.
“애비는 여전히 얄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
우부르카가 목소리에 오러를 구겨넣었다.
만일 평범한 사람이 들었다면 방금 우부르카의 말이 다만 ■로 들렸겠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발성 음절로.
그러나 ■는 오러에 의해 이리저리 구부러졌고, 굴곡졌다. 오로지 한없이 느리게 연장된 우리의 시간 속에서만 ■는 평평하게 퍼졌다. 상당히 높은 경지가 필요한 음공(音功)이었다.
“나를 무식하게 힘만 쎈 멧돼지로 만들 셈인가!”
“오냐.”
우리 부자는 수준 높은 대화를 마음껏 뽐냈다.
“지기 싫으면 네놈이 먼저 마천신공을 풀든가.”
“절대로 싫다! 나도 신공으로 애비를 이길 테다! 무공빨로 먹고 사는 애비의 코를 납짝하게 찍어눌러서 처절히 나락으로 굴러뜨린 다음, 마침내 마음의 저 깊숙한 저변부터 나를 인정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이놈이 삼백 년 동안 배우라는 오러는 안 배우고 허언증만 깨달았네. 얌전히 내 마수에 당하기나 하거라.”
“우거!”
우거는 지정족의 언어로써 대략 [아니다] [별로다] [꼽다] [꺼져] [이런 엿장수 같은 놈]처럼 매우 다채로운 의미를 가졌다.
“삼백육십 년이 넘게 기다렸는데 또 패배할 순 없다!”
“삼백 년이든 삼천 년이든, 삼만 년이든.”
세 호흡.
나는 우부르카가 펼친 마천신공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부르카가 그려놓은 밑그림에 내가 색채를 덧칠하는 것과 같았으며, 더욱 정확하게는, 우부르카의 음악에 내 즉흥연주를 끼얹는 것과 같았다.
“이 애비는 얌전히 교주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 없단다.”
우부르카가 자식의 고통을 담아내면, 나는 오직 자식 한 명만을 먹이고 자신들은 굶는 부모를 그렸다.
어느 것이 더 굶주림을 뼈아프게 표하는가.
어느 굶주림이 만인의 비명에 더욱 적합한가.
하나의 신공을 두고 두 명의 아사유검(載死流劍)이 얽혔다.
“아가야.”
“뭔가!”
“네 경지가 족히 일가를 이루었으니 이제 좀 심도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겠다.”
나는 손등으로 우부르카의 권격을 흘렸다. 힘으로 밀어낸 게 아니다. 공격의 경로를 예측하여 이미 내 몸은 회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손등 치기는 단지 회피에 필요한 마지막 동작이었을 뿐.
우거!
우부르카는 약이 바짝 올라서 달려들었다.
“무인도 직업이다. 마교의 교인이라면 특히 그렇지. 세상의 고통을 관조만 하려면 출가해서 절에 들어가면 돼. 마천신공은 아픔 속에 머무르겠다는 의지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한다.”
우부르카가 주먹을 뻗을 때마다 설봉이 한 군데씩 박살났다.
그러나 어느 일격도 내 몸을 맞추지는 못했다.
콰르르르-
우리 두 사람을 정중앙에 두고 동서남북으로 눈사태가 일어났다.
암술과 수술의 변두리에서 꽃잎들이 만개하듯.
혈화(血花).
눈보라가 하얗게 무너져 내렸다.
“세상에…….”
우리한테서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서 흑룡주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우부르카의 무지막지한 힘에 놀란 것인가. 아니면 그런 우부르카를 아슬아슬하게 다루는 내 묘기에 감탄한 것일까.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우부르카에게 말했다.
“조심해야 한단다. 우리 마교는 자칫 아픔을 자랑하는 전시회장으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아픔을 자랑하는 전시회장?”
“누가 더 아픈지를 두고 싸우지 말라는 거다. 너의 아픔이 너를 위한 권력이 되지 않도록 살피고 또 살펴. 네가 그럴 아이는 아님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말해두마.”
네 호흡.
나는 우부르카의 모든 공격 루트를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우부르카는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그의 오러가 뻗어나갈 경로는 협소했다.
“크읍!”
우부르카가 이빨을 꽉 물었다. 어떻게든 공간을 열어내려고 붉은 오러가 거세게 타올랐으나 나는 솜씨 좋게 불꽃의 끄트머리를 잡아 끌어, 원하는 곳으로 흘려보냈다.
“혼자만 아픔을 감내하면 네 주변 사람들은 말라 비틀어져. 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수록 더 말라간다. 그만하라고 말리고 싶지만, 네가 세상의 아픔을 짊어지겠다는데 뭐라 반론할 수 있겠냐? 아픔이 인간을 증거한다고 한다면 너 혼자만 인간이 되는 거다.”
우부르카가 내 말을 쫓아오고 있을까.
확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길을 이어나갔다.
너무 이른 조언일지 몰라도, 흑룡주가 말했다시피, 너무 늦는 것보다는 너무 이른 것이 훨씬 낫다.
“세상을 위한다면서 정작 너의 사람들을 초라하게 만들지 마. 본말전도다.”
“…….”
“동반자를 만들어. 동행자를 만들어. 네 뜻으로 사람을 설득해. 산에 올라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제 하산할 때다. 너의 심장을 맡기고 너의 머리를 대신해줄 인간들을 찾아. 그 사람들과 많이 얘기하고. 인간이 되려거든, 그들과 함께 인간이 되려무나.”
“그런 인간이…….”
“이미 있다.”
다섯 호흡.
나는 오러를 퍼트렸다.
“봐라, 아이야!”
우부르카의 눈동자에 내 눈동자가 비추었다.
거울에 거울을 되비친 양 우리 둘의 눈동자가 끝없이 서로를 머금었다.
“내가 왜 너에게 내 뜻을 전했겠냐!”
오러가 터졌다.
나의 힘이 아니었다.
우부르카가 토해낸 오러의 격류.
나는 그저 흐름만 조종한 것이다.
“같은 하늘을 나누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꿈꿔온 풍경을 붉은 붓칠로 그려냈다.
우부르카는 무한한 물감이었으며 나는 한 자루의 붓이었다.
동일한 오러운용법, 동일한 마공, 동일한 심상을 품어야만 가능한 묘기가 하얀 산마루에 강림했다.
마천진법魔天陳法.
제일법第一法.
염상유택炎上遊宅.
여섯 호흡.
일대의 풍경이 바뀌었다.
붉은색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갖가지 형상을 이루었다.
촛대. 촛대에 밝혀진 촛불. 촛불에서 녹아내리는 촛농마저.
화려한 바닥과 계단. 저택을 수놓은 장식품까지, 전부.
“잠깐만. 여기는……?”
흑룡주가 경악했다.
그녀의 검정 눈동자에 이 광경은 익숙해 보였다.
수백 줄기의 촛불이 타올랐고, 촛대와 촛대 사이마다, 오러로 이루어진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까르르.
낯익은 음(音).
촛농처럼 미끄러지는 웃음소리였다.
-술래야?
-누가…….
-우리랑…….
그 순간, 풍경이 허물어졌다.
아마도 시간으로 따지자면 고작 3초 남짓 유지되었을 것이다.
우부르카의 막대한 오러양에도 한계가 있었고, 나의 절묘한 오러 운용에도 제한이 있었다. 우리 두 사람만으로 사물을, 소리를, 하나의 공간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해낸 것이다.
비록 찰나에 가까웠다고 해도.
나는 불지옥 저택을 재현하는 것에 성공했다.
“…….”
우부르카가 넋을 잃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덧 풍경은 설산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방금 자신이 목격한 것이 환각이나 망상이 아님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우부르카야.”
나는 몸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오러를 갈무리했다.
“삼백육십삼 년 전에 너한테 말한 진법이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오러에 심상을 담아 쏘아내는 게 아니다. 오러로 심상을 강림시키는 거다.”
우부르카에게 마천신공을 전수한 것.
혈화극을 꽃피워 지정족에게 퍼트린 것.
전부 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경지(境地)를 세상에 펼치기 위해서였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 봤자 홀로는 1초도 유지할 수 없어. 순식간에 오러가 바닥나서, 열 걸음 거리도 채우지 못하고 스러지겠지. 너와 오러를 겹대어도 3초가 한계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열두 명의 전사가 더해지면?”
“…….”
“스물네 명, 수백 명, 아니. 천 명의 지정족이 더불어 진법을 펼친다면 어찌 될까.”
우부르카는 내가 말한 광경을 상상했다.
그의 눈길이 어떤 풍경을 더듬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지정족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서 심상을 공유했어. 다듬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우리만은 해낼수 있을 거야. 우리는 똑같은 악보를 나누게 된 연주자들이다.”
“그건……”
우부르카가 입을 열었다.
“그건 고통을 노래하는 일이지만…….”
“아름답겠지.”
“우고르. 아름다울 것이다.”
흥분되는 일이었다.
“이 애비와 같이 하산하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통을 노래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즐거울 거란다.”
“이상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이 애비는 잘난 놈이야. 너도 잘난 놈이지. 애비가 너를 인정하고 네가 애비를 인정한다. 최선을 다해서 최고로 달려가는 사람이 나를 인정하고 좋아해주는데, 어찌 하루가 즐겁지 않을까.”
나는 우부르카에게 오른손을 건넸다.
“나는 너로 인해서 조금 더 행복해지고, 너는 나로 인해서 조금 더 자주 웃을 거다.”
“내려가자. 나의 패륜아야.”
우부르카는 내 오른손을 잡았다.
[당신은 새로운 스킬을 창조했습니다!]바로 그때, 탑의 목소리가 울렸다.
[스킬 카드를 형성합니다!]19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