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00)
4.
-뭐?
눈앞이 온통 새하얘졌다.
머릿속에서, 아니, 내 정신 속에서 마물이 당황한 소리를 냈다. 심상치 않은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을 몽마도 알아차린 거다.
-지금 무슨 짓을… 설마 [우리 세계]에 침입을 시도하는 것인가? 말도 안 된다. 너희에겐 우리로 통하는 단말(端未)이 없을 터다. 도대체 어떻게….
“쫄리냐?”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몽마가 멈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현재 내게는 웃음을 실어나를 입도 없었지만, 상대방을 도발하는 의사와 감정은 순조로이 전달되었다.
-건방진…!
“자신이 없으면 원래 혀가 길어져. 아. 사슴이라서 혓바닥은 원래 길구나.”
-비루한 물질계에서 살아가는 종자 주제에, 오만방자하군. 우리는 삼라만상의 꿈을 거느리고 있다. 설령 네가 걸음을 디딘다 한들 일각이라도 제정신을 유지할 성싶은가.
“내가 들어가는 걸 허락한다 이 말이지?”
-어디 와볼 테면 와보거라!
오케이.
나는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동의해주신 거로 알겠습니다. 손님.”
흰색으로만 물들어 있던 시야가 일변했다.
나의 정신이 몽마족의 정신에 덧씌워졌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최초로 몽환세계(夢幻世界)에 방문한 이방인입니다.] [당신은 최초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에게 3000 종족 포인트가 주어집니다!]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별천지였다.
분홍빛 하늘.
보기만 해도 입안이 달아질 것 같은 색깔이었다. 꼭 어린애가 모험심을 발휘하여 색칠한 하늘을,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정성스럽게 구현해놓은 것 같았다.
“……! 읍!”
분홍색은 하늘뿐만 아니라 내 의식 속까지 침범했다. 의식 속? 아니다. 의식의 속과 바깥을 분간할 수 없다. 지금 나는 의식 그 자체다.
“어….”
기억이 급속도로 멀어진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 지금까지 김공자가 밟아온 발자국들이 지워진다. 모래사장에 찍힌 발자취가 한 번의 파도짓에 쓸려가듯. 빠르게, 분홍빛으로 물든 파도가 내 기억의 해변을 침식한다.
“—–.”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환청.
환각.
어느새 하늘은 분홍색이 아니라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내 정신의 색채도 덩달아 누래졌다.
하늘이 파래졌다. 나의 의식도 푸르게 상했다.
“음.”
나의 존재는 삼각 플라스크에 담긴 물처럼 투명했다. 이 세계가 알록달록한 물감을 한 방울씩 떨어트릴 때마다, 나의 물이 빨갛게 누렇게 파랗게 물들었다.
찰나와 찰나가 깜빡깜빡 이어지는 세상.
이곳이 몽마족들이 살아가는 장소였다.
“이거, 좀, 위험한데.”
과거가 사라진다. 기억이 옅어진다.
사라진 과거만큼 내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옅어진 기억만큼 내 그림자가 희미해진다.
약에 취한 듯 의식이 몽롱하다.
이제 내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
아주 약간이라도 방심하면 자아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나 혼자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테지.’
그러나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나는 조급해진 마음으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백귀환생(百鬼還生).”
돌연, 나의 그림자가 팽창했다.
[스킬을 발동합니다.]나의 그림자는 흑색이었다. 반투명한 그늘이 아니라 단지 새까만 흑색. 다른 어떠한 색도 허락하지 않는 칠흑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다.
차아아아-
검은색이 분홍빛 하늘을 잡아먹는다. 노란색을 집어삼킨다. 푸른색마저.
나의 그림자는 수만 갈래의 손가락이 되어 이 세계의 하늘을 모서리부터 할퀴었다. 까만 손톱에 긁힌 하늘은, 알록달록한 핏물을 흘렸다.
“아니. 씨발?”
분홍색 물감이 녹아 흘러내린 곳에서 나의 백귀들, 나의 기억을 조금씩 대여받았으며, 그리하여 내 존재를 이루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또 무슨 족보 없는 개판이야?”
염제(炎帝).
포니테일을 묶은 미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
아귀(餓鬼).
짐승의 뼈를 가면으로 삼아 얼굴을 반절 가린 소녀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엔 서늘한 냉기가 스며 있었다. 아귀는 어느 짐승의 시체를 바라보듯 세상을 오시했다.
“아니요, 바로 차를 다시 우려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지금 다시 태어났다는 기분으로 기필코 향 좋은 차를……. 어? 어. 뭡니까. 시발? 뭐죠?”
금사매(金絲梅).
시녀복을 착용한 아가씨가 얼빵하게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오체투지한 자세로 말이다. 참고로 금사매 영애, 실비아 에비나일은 우리 공작가에서 시녀 살이를 하고 있었다.
‘라비엘….’
우리 공작님한테 한창 갈금을 당하던 도중에 소환됐나 보다.
인생을 즐기고 계신 것 같아서 저도 기쁩니다, 저의 사랑.
“여기가 어디인가?”
“저기 보십시오. 하늘 색깔이 퍽 요상합니다.”
“도원경이라기엔 너무 요사스럽구먼. 거 참. 우리 도련님은 재미난 곳만 골라서 쏘다닌다니까!”
“허어….”
사마군(四魔君).
묵색 도포를 휘날리는 마교의 정예들이 소환되었다. 사마군은 별천지의 풍경에 감탄했다. 그들의 도포 자락이 한 번, 두 번, 폴락거릴 즈음, 어느덧 일천의 마교 군세도 소환이 완료됐다.
“후우.”
비로소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 숨결을 받아줄 장소가 이곳에 마련된 것이다.
“모두, 오랜만입니다.”
백귀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들을 보았다. 시선이 교차하자, 멀어진 과거가 다시 돌아왔다. 기억이 명료해졌다. 나라는 존재의 윤곽이 더 뚜렷해졌다.
염제에게 나는 원수다.
아귀에게 나는 군주다.
금사매에게 나는 연적의 남자다.
교인들에게 나는 소교주다.
나의 복수, 의무, 사랑, 책임. 모든 것이 백귀들의 시선에 담겨 있었다. 그들이 나로 인하여 환생하는 백귀가 되었듯이, 그들로 인하여 나 역시 작금의 김공자에 이르렀다.
그들이 있어주는 이상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들 반갑네요. 저기서 시발거리는 침팬지 한 마리만 빼고요.”
“아앙? 그거 나 말하는 거냐?”
유수하가 안면을 찡그렸다.
“그럼 새끼야, 일하고 있을 때 불려나왔는데 말이 곱게 나와?”
그는 갈색 앞치마를 입었다. 앞치마엔 [카페 플라네타리움]이라 적혀 있었다. 도서관장이 운영하고 있는 카페에서 유수하는 알바를 뛰었는데, 김율과 더불어서 손님 유치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중이었다.
유수하도 김율도 포니테일.
한 쪽은 말끝마다 욕설이 붙는 망나니. 나머지 한 쪽은 과묵한 차도남. 마침 헤어 컬러도 흑색과 백색으로 쌍쌍바다. 단골 손님들이 매일같이 카페인 중독에 걸릴 때까지 아메리카노를 지를 만했다.
“내가 뭐 네가 부르면 나오는 출장 서비스 이발사야? 하, 나이도 어린 새끼가 아주 버릇만 못되게 들었어. 안 그래도 생전에 E급도 못 따서 억울한데 내가 죽어서까지 애새끼 뒤치닥거리….”
“저기서 춤추고 있으렴.”
“시발!”
한켠에서 유수하가 힙합 댄스를 피로하는 동안, 나는 백귀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헤에. 꿈에 기생하는 종족이라. 재밌네요.”
내 이야기를 듣고 금사매 영애가 턱을 쓰다듬었다. ‘제국 사교계의 꽃’이라 칭송받았던 짬이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닌지, 시녀복을 입고 있음에도 귀태가 반짝거렸다.
“그러면 이곳은 몽중몽(夢中夢)…. 꿈에서 사는 서큐버스들이 다시 꾼 꿈인 걸까요? 성좌에 의해 침식된 상태와 비슷해요. 낭만적인데요? 전 낭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사.”
“나는 네 집사가 아니라 공작 부인이야.”
“에이,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집사. 그러다간 탈모에 걸린답니다. 제가 볼 땐 집사한테는 탈모의 기운이 있어요! 느껴진다구요. 아아, 보이네요. 저에겐 보인답니다! 탈모에 걸린 집사를 두고 이반시아 공작이 한숨을 쉬며 당신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광경이….”
“응. 너도 저기 가서 춤추고 있어.”
“시발!!”
유수하 옆에서 금사매가 왈츠를 선보이는 동안, 나머지 정상인들끼리 작전을 회의했다.
“저 금발 시녀가 지적한 대로 몽마족의 특성은 성좌와 유사해 보입니다.”
아귀가 말했다.
“분류하면 전투형 성좌가 아니라 특질형 성좌. 자신의 사상을 현실에 침투시켜 현상을 왜곡하는 종류입니다. …이런 것들은 무력으로 꺾을 수 없나이다.”
“자기 마음대로 룰을 결정하는 애들이란 뜻이군.”
“정확하옵니다. 주군.”
달그락.
아귀가 해골 가면을 매만졌다.
“자고로 꿈이란 경험의 재현이자 소망의 실현. 과거를 곱씹거나 미래를 더듬는 행위. 이 중에 주군께서 중히 여기실 부분은, 후자라 사려합니다. 몽마족이 이루어낸 꿈보다 주군께서 더 만족스럽게 소망을 이루어주신다면, 저절로 이 세계를 격퇴할 수…….”
그때 아귀가 입을 다물었다.
사시사철 무심할 것 같은 아귀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비단 아귀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아하하하! 제가 누구인지 말해보세요!
찰싹.
저 편에서, 으리으리한 사두 마차를 탄 아가씨가 나타났다. 마차를 끌고 있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헐벗은 사람들. 그들을 향해 아가씨는 신나게 채찍을 휘둘렀다.
-자아! 어서!
-제, 제국에서 제일 밝은 달이시며, 만민이 우러러보는 실비아 에비나일 황후 마마이십니다!
-아하, 듣기에 달콤한걸요! 하지만 목소리가 영 시원찮아요. 조금 더 애달픈 보이스. 조금 더 물걸레를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로 저를 찬양하시길!
-아아, 자비로우시고 아름다우신 황후 마마……!
-조금 더!
금사매였다.
정확하게는, 금사매랑 똑같이 생긴 꿈속 인물이었다.
“…….”
“…….”
음.
우리는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한 쪽을 쳐다봤다.
그곳에선 여전히 시녀복을 입은 금사매가 열심히 왈츠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저, 저건 제가 아니에요! 거짓된 환상! 우민들의 날조와 선동이랍니다!”
“아니…. 하지만 여긴 꿈의 세계잖아. 달리 말하면 [저것]이 너의 꿈이라는 소리….”
“불쾌하군요, 집사! 제국 법정에 고소해버리겠습니다!”
“그 법정에서 판사 노릇하는 귀족들 중 절반이 우리 이반시아 공작가한테 후원 받고 있는데. 알고 있지…?”
“제기랄! 이래서 권력자들이란!”
시녀복을 입은 금사매가 트리플 악셀을 선보였다.
그 옆에선 금사매의 꿈… 그러니까 몽마족이 구현한 파편이 ‘아하하!’ 웃으면서 찰싹, 찰싹, 마차에 매인 사람들을 채찍질했다.
과연 꿈속의 세계.
개떡같이 혼란스러웠다.
“아.”
아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저어…. 이게. 저희들의 꿈도 반영되기 시작한 모양이옵니다.”
“그런 것 같구나.”
“여기는 이계(異界)입니다. 주군.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본래 주군께서 품고 계셨던 상식이 일그러지고 지식이 어그러질 것입니다. 되도록 빨리 세계의 핵을 찾아내어, 해결해야만, 정신줄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나이다.”
아마도 아귀는 ‘그래야 정신줄을 놓지 않을 수 있나이다’라고 말하려 했을 거다. 십분 동감했다.
“핵이 어디 있을까? 짐작되는 곳 있어?”
“이런 곳에서 장소는 의미가 거의 없습니다. 방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옵고, 차례와 순서가 중요합니다.”
“흐음.”
“주군의 세계에서 흔히 즐기는 게임을 비유로 들자면, 샌드박스형이 아니라 선형입니다. 주군께 펼쳐지는 꿈을 하나씩 견뎌 나가시면 언젠가… 몽마족들이 꾼 [최초의 꿈]에 도달하시지 않을련지…… 아.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뒤로 갈수록 아귀의 말이 더듬거린 이유가 있다.
-유수하 님. 여기 주문하신 시그니쳐 칵테일입니다.
-음. 별로 맛없잖아? 이런 건 동네 바에서도 마실 수 있다고.
-죄송합니다. 유수하 님의 고결한 입맛을 더럽히다니, 백번천번 죽어 마땅합니다.
-아니, 뭐. 그럴 필요까지야 없고.
-역시 유수하 님….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유수하 님의 심성에는 벼알이 들어갈 틈새도 없겠지요.
-야. 야. 과언이다, 인마.
-죄송합니다. 그만, 제가 진심을 말해버렸습니다….
-뭐. 진심이면 어쩔 수 없군.
꿈의 세계에서 구현된 유수하는 나시티에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그런 유수하 주변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들이 끝없이 몰려왔다.
-유수하 님. 이번에 저희 브랜드에서 새롭게 출시할 예정인 시계입니다. 유수하 님의 고귀한 손목에 이 허름한 쓰레기를 걸쳐주신다면, 저희 무지몽매한 족속에게는 참으로 영광이겠습니다.
-엉? 별론데. 뭐, 성의를 봐서 써주마. 이틀만 쓰고 버릴 거지만.
-그 이틀을 향후 천 년 동안 기억하겠습니다.
-유수하 님. 탑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들을 모아 풀코스를 준비했습니다. 유수하 님의 구강이 본 요리를 조금이라도 즐겨주신다면….
-아, 진짜 시끄럽구먼. 한 번 가져와봐.
-저에게 시끄럽다고 말씀해주시다니…. 감격입니다.
저 멀리서 하늘이 분홍분홍하게 빛났다.
우리는 조용히, ‘진짜’ 유수하를 쳐다봤다.
유수하는 자기가 삼킨 가래침이 어쩌다 역류해서 다시 혓바닥 위로 돌아온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시발. 너흰 뭐 깨끗할 거 같아?”
“……주군.”
아귀가 말했다.
해골 가면 너머에 비친 아귀의 눈은 진지했다.
저딴 존재들과 똑같은 백귀 취급을 받기 싫다는 눈빛.
“소신이 주청드리건대, 휘하에 누구를 거두실 요량이옵시면 부디 현명히 거르고 또 걸러서 받아들이소서.”
어쩐지 내가 미안해진다.
20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