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02)
“……뭐?”
흑룡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탑 최상위 길드의 수장은 눈꺼풀을 가라앉혔다가 다시 올렸다. 천천히. 말 그대로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그녀는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회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전부터 고민했어요. 선배는 저와 같이 아이김 제국을 횡단했잖아요. 그때 저의 정체를 밝히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옛날에는 아직 선배를 믿지 못했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숨겼습니다.”
“…….”
말이 이어질수록 흑룡주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내가 하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낀 것이다.
“선배가 저한테 종종 말했죠. 어디서 이런 신인 같지 않은 신인이 나타난지 모르겠다고. 나이에 비해 능구렁이 같다고. 선배의 말이 맞아요. 저는 신인이 아니에요.”
나는 스킬 카드를 소환했다.
“스킬 카드 오픈.”
황금빛이 번찍였다.
손 안에서 빛나는 카드를 뒤집어서, 흑룡주에게 보여주었다.
+
[회귀자의 태엽시계]랭크: EX
효과: 죽으면 자동으로 발동. 죽은 순간에서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회귀해도 기억과 능력치는 보존됩니다.
※단, 헌터 랭크가 높아질수록 강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헌터 유수하로부터 복사한 스킬입니다.
+
“잠깐만.”
흑룡주가 왼손을 뻗어서 내 손을 쥐었다. 손으로 들고 있는 카드와 함께. 그 때문에 스킬 카드가 가려져서, 흑룡주는 설명문을 읽을 수 없었다.
내가 스킬을 공개하고자 한 것을 흑룡주 스스로 막아세운 것이다.
“안 돼.”
묵빛의 눈동자.
바닥 모를 우물을 닮아서 새까매진 눈은 어딘지 모르게 다급했다. 다급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눈동자 저 건너편, 밑바닥에, 한 뼘의 차가운 물이 고여 있어서 소리 없이 찰랑이는 듯했다.
“이러지 마. 제발.”
언제나 들어온 목소리일 텐데.
낯선 어조와 떨림이 흐르고 있었다.
“당신이 어떤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 말을 하게 되고 듣게 되면 어떻게 될지, 결말만은 알고 있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이 그어져 있단다. 아무리 가까워도 아무리 친해도 그 선을 넘어선 안 돼.”
흑룡주는 마치 예전부터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예측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 자연스러움은 어쩌면 과거의 숱한 경험에서 비롯한 걸지도 몰랐다.
“당신의 비밀을 내게 말하지 마. 공유하지 마. 지금 당신이 비밀을 밝혀버리면, 사왕. 우리는 돌아가지 못할 강을 건너게 돼. 서로가 서로에게 지나치게 의지할 때 그건 의지가 아니라 의존이 되어버려.”
“알아요. 저도 알고 있어요.”
“……당신과 나는 좋은 친구야. 믿음직스러운 동료.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이상을 바라면 안 되는 법이야. 나는 내 일을 알아서 해결하고, 당신도 당신의 인생을 알아서 살아가. 그게 최선이지 않니.”
흑룡주는 내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진지한 말에 나 역시 다시금 고민했다. 상대방과 어떤 관계를 얼마나 맺어야 할지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곧,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제 말을 듣고 나서 결정해주세요.”
“들으면 이미 늦어.”
“아니에요. 되돌릴 수 있어요. 지금 저희가 대화를 나누어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능력을 가졌어요.”
“…….”
흑룡주가 침묵했다.
해촌(海村)의 광장에선 사람들이 일어나 본능적으로 우물을 찾고 있었다. 오랜 잠으로 인해 체내에 쌓인 독을, 마을 사람들은 신음과 함께 흘렸다. 으어어. 으어. 이곳저곳에서 독기에 물든 숨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여기서 얘기하진 말자꾸나.”
흑룡주는 내 오른손을 잡은 채 중얼거렸다.
“전이.”
다음 순간, 우리는 광장을 벗어나 있었다.
마을의 부두.
선박들이 줄에 묶여 파도에 따라 삐끄덕거렸다. 배들이 내는 불협화음을 바다가 받아주고 있었다. 잠시간 우리는 파도 소리를 엿들었다.
“좋아. 알았어.”
마침내 결심을 했는지 흑룡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당신의 말을 들어볼게.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맨정신으로 나눌 순 없지.”
흑룡주가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검은색 소용돌이가 쳤다. 마치 세상에서 한 군데만 오려다가 흑색으로 칠한 것 같았다. 흑룡주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잠시 뒤, 그녀의 손에 술병이 들려왔다.
나는 조금 놀랐다.
“스킬이에요?”
“응. [아이템 보관]. 한정적으로만 물건을 수납할 수밖에 없긴 해도, 사람을 죽인 다음 증거를 인멸하기엔 이거보다 편한 스킬이 없지.”
흑룡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다음 물컵까지 두 잔 꺼냈다.
“영광으로 알렴. 내가 이런 스킬을 가졌다는 건 정말 아무도 모르거든.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헌터들 중에 이 스킬을 목격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사왕.”
흑룡주한테서 컵을 넘겨받았다.
한동안 조용히 술병만 비워졌다.
취기가 의식을 좀먹기 전,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회귀자입니다.”
다시 한 번 제대로 말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될지 잘 모르겠네요…. 제게는 시간을 돌리는 스킬이 있어요. 정확히는, 죽으면 24시간 전으로 돌아가는 능력이요. 이 능력 덕택에 저는 무수한 난관을 돌파한 거예요. 10층도. 20층도. 전부 회귀 스킬을 써서 살아남았지요.”
흑룡주에게 스킬 카드를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다만 아아, 하고 탄식했다.
오래 전부터 찾아 헤맨 마지막 퍼즐 조각을 손에 쥔 사람처럼.
“눈치 채고 계셨어요?”
“아주 약간은. 적어도 [예언가]가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
흑룡주가 컵을 기울였다.
“아무리 봐도 너무 편리한 변명이었으니까. 옆에서 쭉 지켜봤지만,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게 아니었어. 항상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싸웠지. 그래. 미래를 아는 게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는 거였구나.”
흑룡주는 새삼 내 얼굴을 보았다.
“당신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말씀하세요.”
“11층의 전투.”
그녀의 입에서 오래 묵은 의아심이 흘러나왔다.
“11층에서 우리 탑은 처음으로 집단전을 경험했지. 다들, 수 년 만에 10층 다음의 스테이지가 열렸다는 거에 흥분해서 11층에 뛰어 들었어. 거기서 마왕군과 싸웠고. 기억나니?”
“예.”
“그때 기적적으로 단 한 명의 헌터도 목숨을 잃지 않았어. 다친 사람은 있었지만 아무튼 죽은 사람은 없었단다. 그런데…….”
그런데, 하고 흑룡주는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혹시…….”
“예.”
“……그때도 회귀한 거니?”
“예.”
“전사자가 한 명도 안 나올 때까지?”
“예.”
흑룡주가 입술을 다물었다.
눈동자 밑에 잠긴 우물이 조금 더 찰랑였다.
“몇 번이나……?”
“많이요.”
“열 번? 스무 번?”
“조금 더 많았던 것 같아요.”
“12층도?”
“그 이후로도 계속. 라비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항상 그런 느낌이었어요.”
“…….”
흑룡주가 숨을 내쉬는 간격이 짧아졌다.
“왜?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당신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잖아.”
“제가 착한 성격을 타고나서 그런 게 아니에요. 만일 저 혼자만 11층에 올라갔다면 절대로 수십 번 수백 번을 되풀이하지 못했을 거예요. 언제나, 제 등을 떠밀어주는 사람은 여러분이었습니다.”
나는 흑룡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스테이지에서 죽어나간 인간이 줄어들 때마다 흑룡주는 조금씩 웃었어요.”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흑룡주가 웃는 모습을 본 적 없어요. 비웃음 말고, 정말로 기뻐서 환하게 짓는 미소요. 공략 도중에 헌터가 수백 명 단위로 죽을 땐 무표정하게, 딱딱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지만…. 사상자가 두 자릿수로 줄어들었을 때부터 흑룡주는 조금 달라졌어요.”
오직 나만이 기억하는 그녀의 변천.
「세상에! 아마 헌터가 40명도 안 죽었을 거야!」
「말도 안 돼…. 어쩌면, 10명도 안 죽었을지 몰라.」
「이런 게 가능하다니. 가능했다니. 이런 전장에서.」
꾹 다물린 꽃잎이 만개하듯 피어나던 웃음.
그 순간을 지금도 똑똑이 기억한다.
“저는 그걸 보고,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
“행복했어요. 저라는 존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소 짓게 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흑룡주. 선배.”
“어째서……?”
“저 혼자서는 절대로 걷지 못했을 길을 선배 덕분에 걷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저의 삶을 사랑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선배가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저는 선배가 그 날 보여준 미소 때문에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어요.”
이걸 말하고 싶었다.
전하고 싶었다.
“선배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분이에요. 적어도 저에겐 그렇습니다. 선배는 혼자가 아닙니다. 설령 선배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과 작별하는 날을 걱정하더라도, 저만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나에게는 죽은 하루를 되돌리는 스킬이 있다.
“전 괜찮습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저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막지 않아도 되어요. 막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노심초사하지 마세요. 저는 여기에 있고, 선배가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여기 있을 거예요.”
“…….”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말을…….”
“이제는 실패를 두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선배가 이루고 싶은 걸 이루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요.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제가 선배에게 몇 번이고 다시 기회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흑룡주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성기사와 셋이서 취했을 적에도 흑룡주는 중얼거린 것이다.
「늦으면 안 돼. 사왕.」
「항상 늦으면 안 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
흑룡주는 그것을 제일 두려워했다.
그러기에, 나는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선물 중에 가장 간절한 선물을 주기로 결심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건네줄 수 있는 한 마디를.
“조금 늦어도 돼요.”
“…….”
가시에 찔린 것처럼 흑룡주가 멈칫했다.
“제가 곁에 있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건 없어요.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모험을 하고 도박을 걸어도 좋습니다. 선배. 선배에겐 그럴 자격이 있어요.”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흑룡주의 검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선배는 저보다 훨씬 더 능숙하세요. 조직을 관리하고 사업을 시작하고…. 탑 전체를 통치하고. 그건 저에게 없는 재능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시작하는 재능은 어쩌다 선배가 아니라 저한테 주어졌을 뿐이에요.”
나의 소중한 친우.
“저희는 두 사람일 때 훨씬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가 흘리는 눈물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서, 단지 흑룡주의 손을 잡았다.
“저는 이미 선배에게 의지하고 있으니, 선배도 제게 의지해주세요.”
“당신……, 정말로.”
흑룡주가 한 모금씩 목소리를 삼켰다.
“나쁜 사람이구나. 이렇게 말해놓고, 이 이야기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다고? 그거. 당신이 죽어서 하루 전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한 대화도 사라지니 괜찮다는 말이잖아. 그래서, 내가 대화를 없던 일로 만들고 싶다면 죽을 생각이야…?”
“예.”
“미친놈.”
흑룡주가 내 손을 꾹 쥐었다.
“미친놈….”
흑룡주는 중얼거렸다.
“두고 봐. 당신이 질릴 때까지 이용해줄 테니까. 뭐? 회귀? 그런 능력을 가졌으면서 무서운 줄도 모르고 감히 나한테 공유를 해? 흑룡 길드의 수장이 어떤 인간인지 정말 모르는구나. 두고 봐. 미친놈, 미친 새끼…….”
나는 흑룡주의 떨림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서,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흑룡주가 말했다.
“아나스타샤.”
“…….”
“그게 내 본명이야. 김공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흑룡주는 묽어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대로 이용해줄 테니 앞으로 각오하렴.”
“예.”
나 또한 진심으로 웃었다.
“아나스타샤 선배.”
탑을 오르는 사람들.
그 중에서, 나의 비밀을 공유하는 동료가 처음으로 생겼다.
20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