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03)
3.
“아아아. 왠지, 이렇게 될 거 같더라.”
파도 소리가 귀에 익어 잔잔해졌을 즈음.
흑룡주는 개운해진 표정으로 기지개를 쭉 폈다.
“뭐, 언젠가는 당신이랑 이런 사이가 되지 않을까 내심 예상했어.”
“어라. 그랬어요?”
“응. 나는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딱 견적이 나오거든. 이 사람이랑 어디까지 친해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친해질 것인지. 25살 이후부터 내 감은 틀려본 적이 없단다.”
“거 신기하네.”
“다 경험의 산물이지.”
흑룡주는 코웃음쳤다.
“기대했다가 실패하기를 반복하면 대충 인간들의 끈기에 대해 알게 되거든. 아, 참참. 다른 애들 앞에서는 계속 본명이 아니라 이명으로 부를게. 그래도 상관없지?”
“상관없긴 한데…. 어, 왜요?”
“왜긴. 남들 보는 앞에서 너한테만 본명으로 불리면 부끄럽잖니.”
전혀 안 부끄럽다는 얼굴로 잘도 말했다.
“[선배]라는 호칭도 웬만하면 자제해주렴. 목덜미에서 생닭이 올라. 다른 사람들한테 관계를 과시하는 거, 진짜 질색이야.”
“아니. 뭐.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지만…. 둘이 있을 때만 다르게 부르는 게 오히려 더 쑥쓰럽지 않아요…?”
“철학의 차이구나. 좋아. 빠르게도 의견이 갈라졌네.”
흑룡주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아이템 보관] 스킬로 무언가를 꺼내었다.
동글동글한 점들이 알알이 박힌 정육면체. 만국의 도박장에서 애용되는 소품, 주사위였다.
그뿐만 아니라 종이와 팬까지 들고 나왔다.
“김공자 씨.”
흑룡주가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뭐, 뭡니까. 무섭게.”
“이제부터 당신은 나와 [우정 계약서]를 찍습니다.”
“……네?”
뭐시기 계약서?
“난 자고로 사람 사이의 관계란 건 뭐든 문서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흑룡주는 당당했다.
“인간이란 실수를 저질러. 밤을 새서 맛이 갔든지, 20일 내내 일만 해서 뇌가 곤죽이 되어버렸든지, 아무튼 언젠가 한 번은 삑사리가 나기 마련이야. 아니.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더라도 사소한 감정들이 5년, 10년 쌓이면, 결국은 문제가 되어버려.”
“어어….”
“바로 그런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계약서는 반드시 쓰여야 한단다. 건강하고 건전한 관계를 바란다면 필수지.”
뭔 소리야?
진짜 뭔 소리인데?
“물론 [약속]은 당신과 나의 합의로 이루어져야 해. 어느 한 쪽도 강요할 수 없어. 나는, 우리 계약서의 첫 번째 조항으로 [의견 차이가 발생할 경우엔 주사위를 던져 높은 눈을 낸 사람의 의향에 따른다]를 기입하고 싶어.”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과연.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배후령이 코를 팠다.
-이해했다. 좀비야. 귀찮은 애랑 친구를 먹었구나….
난 당황했다.
내 짧지 않은 인생에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어, 어. 음. 아마 괜찮지 않을까요?”
“진지하게 생각해!”
흑룡주가 화를 냈다.
워째서.
“뭘 모르는 사람들은 따지지 않고 묻지 않고 마냥 솔직하게 구는 걸 우정이라 생각하지만, 절대 아니야. 그런 관계는 어쩌다 우연히 서로 성격이 잘 맞았을 때만 가능하지. 정말로 관계를 유지하려거든 머리를 써야 해! 그래, 대가리. 당신 대가리를 열심히 굴려야 우정도 성립한다고!”
“오, 옳은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굳이 계약서까지…?”
“계약을 어기면 바로 친구를 관둘 수 있으니까 편하잖아.”
뭐야. 혼란스럽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살아온 친구 개념이 흔들리고 있다.
“흐물흐물거리는 태도론 흐물흐물한 관계밖에 못 맺어. 김공자. 어차피 시작할 거면 시작할 때부터 기반을 단단히 다져야 해. 얼른 조항에 동의하든가, 아니면 제대로 논리를 갖추어서 반론하렴.”
“…….”
나는 평소에 안 쓰는 대가리의 용량까지 끌어다가 열나게 궁리했다.
그 결과, 우리 두 사람의 [우정 계약서]는 매우 역사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
[우정계약서(友情契約書)]본 계약서는 아나스타샤 젤렌스키(이하, A)의 요청에 김공자(이하, C)가 수긍함으로써 체결된다.
A는 인간 감정의 유효기간을 신뢰하지 않는바, 오직 바지런한 자세와 부지런한 지성만이 두 사람의 관계를 반석에 올릴 것이라 확신 한다. 이에 따라 A와 C는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1. 모든 약속은 두 사람이 동의했을 때만 유효하다.
2. 모든 약속은 두 사람이 동의하면 폐기할 수 있다.
3. 단, 약속의 성립이나 폐기는 오직 그 주의 주말(토요일 혹은 일요일)에만 가능하다.
4. 두 사람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길 경우, 주사위를 굴려 높은 눈이 나온 사람의 의견을 따른다.
성명: 아나스타샤 젤렌스키(印)
성명: 김공자(印)
+
나는 대략 멍한 정신으로 계약서를 내려봤다.
정녕 이것이 최선이란 말인가?
“…….”
“뭐하니? 어서 도장 찍으려무나.”
흑룡주가 재촉했다.
좀 무섭다.
“저 사실 도장을 판 게 없어서….”
“손가락 달렸잖아. 지장으로 찍으면 되지.”
“그렇죠….”
찍었다.
엄지로 붉은 지문을 내면서 든 생각은 ‘그래도 혈서를 쓰자고 제안하진 않았으니까 천만다행 아닐까?’였다.
이 30분 동안, 흑룡주가 어떤 성격인가를 매우 상세히 파악하게 된 것이다.
“좋아.”
흑룡주는 만족스러운 낯으로 계약서를 살폈다.
“이 정도면 시작으로 나쁘지 않네. 뭐, 이래 봤자 2년차나 6년차에 고비를 맞이하겠지만. 어쩔 수 없네. 내가 잘해야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고비가 있다고요…?”
“김공자.”
흑룡주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인간의 줏대 없음을 우습게 보지 마. 원래 털 없는 짐승들은 반 년만 지나도 다른 인간이 되어버린단다.”
굉장한 확신이 담긴 단언이다.
“애비여! 애비의 동료여!”
생애 최초로 우정계약서라는 걸 맺어본 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아들, 우부르카가 부두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둘이서만 어디로 쏙 사라졌던 것인가! 한참을 찾았다.”
“아, 미안. 잠깐 아나…….”
스타샤 선배, 라고 말을 끝내지 전에 흑룡주의 부츠가 내 발등을 찍었다.
“으허허커허헉!?”
고통이 다리를 타고 목구멍까지 올라와 화려히 비명이 되어 터졌다.
사람 발을 한두 번 밟아본 솜씨가 아니었다.
“……흐, 흑룡주랑 잠깐 나눠야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사왕과 나만 공유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단다.”
흑룡주가 살포시 웃었다.
“당신 아버지랑 내가 조금 특별한 사이거든.”
우부르카가 뚝 멈춰섰다.
“트, 특별한 사이?”
“응.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사이라고 할까.”
“유일한……?”
“창피해라. 내가 애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아무튼, 우리 둘은 얘기가 끝났어. 무슨 일로 왔니?”
“마을 주민들이… 모두 눈을 떠서… 대체로 문제가 해결된 듯하여…… 그걸 보고하러, 찾았다…….”
우부르카는 중얼거리다가 돌연 나를 쳐다봤다.
안광이 무시무시하게 빛났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당신에게 설명을 요구합니다!]아니.
오해다, 이 놈아.
설명이고 자시고 이건 그냥 널 차려고 나를 이용하는 거야!
“애비여, 방금 말이 진실인가…?”
“사왕. 내가 한 말에 틀린 부분이 있었어?”
아들과 친우가 나란히 나를 바라보았다.
수없이 반복한 죽음에서도 이딴 시츄에이션은 없었다.
아들의 사랑을 응원하는 부정(父情)인가, 아니면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는 우정인가.
“…아들아.”
“말해라. 애비.”
“여기 있는 흑룡주와 이 아비는…….”
나는 침을 삼켰다.
“……특별한 사이가 맞긴 맞다.”
우부르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침묵.
홉고블린의 두꺼운 입술이 우르르 떨렸고, 긴 눈꺼풀이 와르르 진동했다.
“아비 따윈, 정말로 싫다!”
사춘기 소년 전용의 대사를 날리며 우부르카는 저 멀리 뛰쳐갔다. 오러를 운용하여 도망치는 발놀림은 그야말로 경공(輕功). 닭똥 같은 눈물만 남긴 채 우부르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수백 년 만에 찾아온 첫사랑이 와장창 아작나는 순간이었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습니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의 인간불신도가 상승합니다.]아아, 아아아….
나는 좌절했다.
“아니다, 우부르카야. 아들놈아. 이 아비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한 분만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거늘…. 어찌하여 그런 오해를…. 내가 개떡같이 지껄여도 찰떡처럼 알아들을 것이지….”
“고마워.”
우부르카가 사라진 즉시 흑룡주는 무덤덤해졌다.
사르륵, 그녀의 손등이 옆머리를 우아하게 넘겼다.
“덕분에 부담스러운 아이가 떨어졌네. 앞으로도 귀찮은 애가 붙으면 종종 부탁할게, 김공자.”
“명색이 친구인데 너무 편하게 써먹는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니. 정말.”
흑룡주가 환히 웃었다.
“친구니까 편하게 써먹는 거야.”
그것은 내가 세 번째로 보는 미소였고.
아마, 이제부터 수없이 보게 될 얼굴이었다.
4.
후일담으로 말할 게 있다.
“너희는 틀렸다.”
-…….
일곱 살 시절의 아나스타샤 선배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몽환세계.
잠에 빠진 신대륙의 개척자들은 이제 모두 일어났다. 바다 건너편으로 떠난 선원들도, 몇몇 불행한 희생자를 제외하면 무사히 귀환했다. 그 때문에 흑룡주와 내가 문명 포인트를 써야 했다만.
“이 말을 하려고 다시 온 거다.”
사건이 일단락되고, 오늘, 나는 몽환세계로 재차 돌입했다.
-…뭐가 잘못된다는 말인지 모르겠는걸.
어린 서큐버스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몽마족의 뒤편으로는 저번과 똑같이 철책이 펼쳐졌다.
이 빠진 철조망과 낡은 울타리.
어떤 내전의 잔흔(殘癌).
상처가 된 자국에서 꿈의 종족은 기생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너희가 말했지. 아나스타샤 선배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의 죽음부터 상상하는 습성이 있다고.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이며, 고로, 끝없이 준비하고 대비하기 위해 무한한 권력을 얻으려 한다고.”
-맞아.
“하지만 나는 선배에게 한 명의 예외가 됐다.”
총성이 울려퍼졌다.
“너희도 봐서 알 거다.”
한 명의 남자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철책을 향해 도망쳐오고 있었다.
꼭, 고장난 바람에 똑같은 부분만 계속해서 반복하는 비디오 테이프 같았다.
망가진 영상의 세상에서 나는 조용히 말했다.
“너희는 아나스타샤 선배를 파악할 뿐, 선배를 바꿀 순 없어. 당연한 한계야. 이미 지나간 과거의 트라우마에서만 살아가는 종족이니까.”
-…….
“나는 너희를 힘으로 제압했다. 너희도 나보다 힘으로 달려서 물러났지. 그렇다고 해서, 저 너머의 세계에서 우리들이 맺는 관계가 힘의 논리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까불지 말라는 소리다. 애송이들아.”
나는 사방으로 붉은 오러를 피워냈다.
분홍색으로 얼룩진 세상이 조금 더 진해졌다.
몽마족이 흠칫, 어깨를 좁혔다.
“말로는 얼마든지 떠들 수 있어. [힘]이니 [논리]이니 그럴싸한 말들을 갖다 붙이면 마치 너희 마음대로 세상을 재단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하지만 세상은 너희의 가위질 따위에 오려질 정도로 얇지 않아.”
-…….
“너희의 어법에 따르면 이 하늘 아래 힘이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나는 손날에 오러를 실었다.
“사람을 제압하는 것도 힘이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도 힘이야. 그 사람의 과거를 나눠받아 같이 걸어가는 것도 그렇다면 하나의 힘이다. 너희는 그저 사람의 꿈을 반복할 만큼 유능한 것이고, 딱 그 이상으로는 무능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절대로 아나스타샤 선배를 바꿀 수 없지. 나는 그걸 해냈고. 너희는 나보다 무능하고, 나보다 약하며, 결국에 패배한 거다.”
나는 손을 휘둘렀다.
오러가 공간을 갈랐다.
철책이 끊어져 순식간에 분홍빛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비좁은 출구로 탈출하려던 부녀 역시, 녹아내렸다.
“내가 다음 시대에 올 때까지는 조금 더 유능해져 있어 봐.”
-…….
“기껏 수백 년의 시간을 주는데 다시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으면, 글쎄. 시간을 되돌려서 그 때야말로 너희를 멸종시킬 수밖에 없겠지.”
간단한 일이다.
내 백귀에 몽마족이 추가될 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래봤자, 몇 명이나 되겠어?
몽마가 나를 노려보았다.
-한 명? 두 명? 열 명이나 될까. 스무 명은 될까. 백 명은 될 수 있을까. 된다 해도, 너희가 사는 세계에선 한줌도 되지 않는 먼지에 지나지 않아.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어?
나는 코웃음을 흘렸다.
“숫자가 걱정이시면 댁들이 좀 도와주던가.”
-…….
나는 오러를 퍼트려서 주변을 몽환세계와 단절시켰다.
스승님이라면 일격에 이곳을 참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아직 그 정도의 경지는 내게 힘들다.
그저 내가 운신할 폭을 마련하는 것이 작금의 최선이다.
[퀘스트 클리어!]그리고 나의 최선은 이번 스테이지에서도 통했다.
몽환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나는 몽마족을 바라보았다.
어린 흑룡주는 무척 분한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를 기대하마.”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한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자, 환한 빛이 눈앞을 감쌌다.
[스테이지 클리어!] [35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보상 정산은 36층 진입 후 이루어집니다.] [연쇄 계층 진행중 – 당신은 36층으로 강제 전송됩니다!]내 친우가 기다리는 곳으로.
20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