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04)
1.
내겐 제법 중요한 과제가 한 가지 있다.
탑을 공략하는 것과는 완전 무관하지만,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일.
나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라비엘에게 우부르카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35층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직후.
우리는 예의 하얀 공간으로 소환되었다.
동료들끼리 회포를 푸는 가운데, 나는 성좌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에게 부탁한 것이다.
“아니, 꼭 소개해야만 해요. 지금까지 미뤘지만 더는 유예할 수 없습니다.”
“흐으음….”
공녀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네. 친아들이 아니긴 해도 아무튼 저는 지정족들을 자식으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저희는 부부예요. 라비엘이 알아야 하는 일이고, 제가 라비엘한테 알려야 하는 일이죠.”
“사왕의 개인적인 사정이야 알겠지만…. 너희는 지금 30층부터 연쇄적으로 공략을 하고 있어. 공략에 참여하고 있는 주민이 멋대로 다른 층으로 놀러갈 순 없는걸.”
“라비엘을 잠깐 여기로 불러오는 건 안 됩니까?”
“안 돼, 안 돼!”
공녀는 양팔을 교차시켜 X 자를 만들었다.
“은심이는 공략에 참여하지 않았어. 게다가, 걔는 아직 너희 탑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도 아니야. 여기로 부르는 건 불가.”
아무래도 은심이란 [은으로 도금된 심장]을 줄여서 부르는 말인 듯했다. 이 성좌. 사람 이름을 별명으로 부르는 버릇이 있군.
“왜요? 라비엘의 스테이지는 이미 클리어했잖아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응. 은심이는, 비자가 없는 외국인이라고 보면 돼.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지역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지역도 있지? 똑같아. 30층 이하라면 모를까 여기로 불러들일 순 없어. 이건 탑의 규칙! 불만이 있어도 고쳐주기 힘들어.”
나는 고민했다.
“…그럼 저랑 우부르카가 잠시만 라비엘의 세계에 들르는 건요?”
“으응, 그것도 어렵네에. 실연돼지는 일단 성좌니까. 다른 층에 방문할 자격이 있긴 한데…….”
과연. 우부르카는 실연돼지로구나.
아빠가 첫사랑을 응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규칙상 가능은 하지만, 허락해줄지 말지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느낌? 왜냐면 사왕. 너도 공략 도중이구. 공략조에서 탈락한다면 모를까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순 없지.”
“오케이. 우리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35층을 클리어한 보수로 우부르카와 저한테 방문권을 주십쇼. 하다못해, 우부르카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헤에?”
공녀의 눈에 흥미가 서렸다.
“그건 또 왜?”
“우부르카가 수명에 따라 죽었다면 몰라도 이젠 성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36층으로 건너가면 다시 수백 년의 시간이 스킵될 건데…. 우부르카 혼자 저기에 내버려둔 채 방치하고 싶진 않습니다.”
“즉,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라는 거지?”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네요.”
“알았어.”
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나도 높으신 분들을 설득할 명분이 있지. 탑주는 모정(母情)이라거나, 부모의 도리라거나,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기거든! 잠깐만 기다려.”
공녀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공녀의 앞머리카락이 부스스 떠오르더니 마치 안테나처럼 굽어졌다. 앞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설마 통신 중인 건가? 저걸로?
“응. 교신 완료.”
공녀가 눈을 떴다.
“사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허락이 떨어졌어.”
“오오.”
“단! 라비엘이 태어난 세계에서 만나는 건 안 돼. 접선이 허락되는 장소는 오직 29층뿐. 사왕, 우부르카, 라비엘, 너희 세 명이 29층에서 만나는 건 허락하겠대.”
“……?”
공녀의 말에 나는 머리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어. 왜 하필 29층만 된다는 거예요?”
29층은 평범한 층이 아니다.
다름 아니라 김율의 스테이지였던 곳.
신서중고등학교(神模中高等學校) 및 주변 상권이 구현된 층이다.
“거긴 진짜 세계도 아니잖아요.”
그렇다.
도서관장이 이름 붙이기를, 등천도시의 [외전].
우리 세계의 정사(正史)에 편입되지 못해서 한낱 환상으로 구현된 도시다.
별다른 자원도 없으며, 독특한 관광지도 없다.
콕 집어서 29층만 특별히 취급해줘야 할 이유가 있는가?
“—미안.”
돌연, 공녀가 무표정해졌다.
“이유는 말해줄 수 없어.”
그녀의 얼굴에서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난 사왕한테 진 빚이 많아. [채무들]이 있지. 그래서 웬만하면 사왕의 부탁을 다 들어주고 싶지만. 이건 안 돼.”
“실연돼지에겐 성좌의 자격이 있음을 인정할게. 사왕이 보호자가 된다면 29층에 들르는 것도 허락하겠어. 이거로 보상은 충분하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29층에 뭔가 비밀이 있구나.’
저토록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어떻게 억지로 캐묻겠는가.
공녀는 나의 아군이다.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기둥을 굳이 몰아세울 필요가 없다.
‘원하는 것들은 이미 얻었고.’
우부르카를 수백 년의 기다림에서 해방시키는 것.
라비엘한테 우부르카를 소개시키는 것.
두 가지 목적을 전부 달성했으므로, 조급해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기둥씩이나 되는 존재를 저렇게 진지하게 만드는 비밀이라.
대체 무엇일까?
나는 가슴속에 호기심을 꾹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예. 보상은 방금 말씀하신 것들로 충분합니다.”
“좋아! 그러면 지금 29층에 방문하고 있는 애들은 미안하지만 잠시 퇴장해주고-.”
[성좌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임시로 29층의 관리 권한을 승계받습니다.] [성좌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29층의 헌터들을 전원 퇴장시킵니다.]공녀는 얍, 하고 손을 휘저었다.
“하는 김에 현지 시간도 조정해줄게.”
[관리자 권능 – ‘쇄국(鎖國)’을 발동합니다.] [29층을 등천도시에서 봉쇄합니다.] [29층에 입장할 수 있는 등급을 상향 조정합니다.] [당신에게 29층에 입장 가능한 자격을 부여합니다!]“좋아.”
공녀는 만족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사왕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29층에 들어갈 수 없어. 성좌들이 끼어들지도 못할 거야. 오직 사왕을 위해서 마련한 장소니까. 가족들끼리 마음껏 오붓한 대화를 나누도록 해!”
“어…. 가,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무슨 조치가 가해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나 때문에 어마어마한 월권 행위가 벌어졌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먼저 29층에 가 있어. 은심이랑 실연돼지도 곧 거기로 보낼게. 뭐, 이것도 서비스야. 부담 없이 받아.”
공녀는 손을 탁, 튕겼다.
“돌아오고 싶어지면 내 얼굴을 떠올리면서 [귀환]이라고 말하면 돼. 그 전에는 나도 29층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주의해줘. 잘 다녀와!”
공녀가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사왕의 자격 요건을 확인.] [‘등천도시 – 외전’으로의 입장을 허가합니다.]새까만 그늘이 내 눈앞을 덮쳤다.
2.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느 건널목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빠아아앙!
자동차 경적이 사거리를 울렸다. 시끄럽게도 말이다. 덕분에 나는 전송 직후의 현기증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돌리니, 자동차 운전자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야! 죽고 싶어? 어린 놈이 빨리 비키지 못해!?”
초면인데도 무례하게.
그러나 운전자의 쌍욕에도 일리가 있었다. 빨간 신호등. 보행 금지를 알리는 사인이 붉게 반짝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얼른 가! 하여간 젊은 것들이….”
나는 건널목 가운데에서 벗어났다. 나로 인해 멈춰져 있던 자동차들이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전자들이 한 번씩 내게 눈총을 던졌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자동차들이 이열로 행진했으며, 이내 ‘도시’는 나란 존재에 완전히 무관심해져 그들만의 스케줄에 따라 흘러갔다.
도시가 내게 무관심해졌듯이.
“음.”
나 역시 그들에게 관심이 사라졌다.
건널목 반대편에서, 너무나도 그리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비엘!”
간편한 드레스.
현대의 도시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옷차림.
라비엘은 붉은 신호등 아래서 그녀만의 성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공자인가.”
아직 전송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걸까. 라비엘이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환각 마법인가? 또 다른 성좌의 침략인가. 부인이 눈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데 쓰다듬어주지 못하고, 그 진위부터 염려해야 하는 처지가 슬프다…….”
“아. 혹시 어지러우세요? 앉을까요? 아니다. 여긴 너무 덥네요.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서 쉬지요. 일단 저한테 안기세요.”
“음, 이 팔불출. 나의 사랑이 확실하다.”
라비엘은 좁혀진 미간을 풀고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한 순간이나마 의심해서 미안하다. 공자여.”
“괜찮습니다. 저희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일 큰 약점이니, 언제나 주의할 필요가 있지요. 저도 35층을 뚫을 때 라비엘을 흉내 낸 몽마랑 마주쳤는걸요.”
“호오? 그건 내 귀를 잡아당기는 소리로군. 몇 초 만에 내가 아님을 꿰뚫어 보았는가?”
“1초요. 제가 마신 숨을 다시 내쉬기 전에 알아봤지요.”
나는 환히 웃었다.
“몽마인 주제에 멍청하게 결혼반지도 안 끼고 나왔더라고요.”
“과연. 결정적인 실수로다.”
라비엘이 작게 키득거렸다.
나는 웃음소리가 잦아들기 전에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라비엘이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매만지고, 손을 살짝 잡아당겨, 그녀에게 키스했다.
“보고 싶었어요.”
“보게 되어 행복하다.”
“가문에는 별일 없나요?”
“아아. 안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금사매 시녀까지 별안간 사라져서, 저택 운용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지. 만일 공작가의 주인이 조금만 덜 유능했더라면 가세가 기울었을지도 모른다.”
“저런. 누군지 몰라도 그런 유능한 분과 결혼하게 된 사람은,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세 번은 구한 사람이겠어요.”
“내가 듣기로는 세상을 몇 번쯤 구했다는군.”
이번에는 라비엘 쪽에서 키스해왔다.
우리는 잠시 동안 서로의 눈동자를 탐했다.
“……그나저나 어찌 된 일인가? 공자여. 오전 업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금발의 꼬마아이가 바닥에서 솟아났다. [안녕? 미안. 사왕이 부탁해서 잠깐 29층에 가줘야겠어!] 라고 말하던데.”
“아. 그 사람은… 기둥이에요.”
“기둥?”
“네. 성좌 위의 성좌라고 말할까요. 탑을 관리하는 사람 중 한 명이지요. 제가 35층을 공략한 대가로 잠깐 라비엘을 만나게 해달라고 말하니까, 들어주었어요. 으음, 그런데 그렇게 막무가내로 전송할 줄이야.”
“아하.”
라비엘이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참고로 되짚자면 이곳은 사거리다.
자동차가 지나다니고 그만큼 행인도 돌아다닌다.
“세상에. 요즘 아이들이란….”
“교육이 심각한 수준….”
“교실 붕괴가 괜한 소리가 아니야….”
길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멈춰서서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뭐. 라비엘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백주대낮에 애정을 과시하고 있으니,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 한 점도 주지 않았다.
몇 달 만에 라비엘과 재회했는데 왜 다른 존재에게 내 의식의 공간을 한 뼘이라도 허락해줘야 하는가? 내 머리는 현재 라비엘의 얼굴과 미소를 찍어다가 보관하기에도 바쁘다.
[등천도시 – 외전]은 나로 인해서 생겨난 세계나 다름없으니, 이 정도 행동쯤은 용납해다오.“귀여운 보상을 요구했군. 그토록 내가 보고 싶었는가.”
“음. 사실, 라비엘. 라비엘한테 긴히 들려줄 이야기가 있…….”
“애비여?”
그때, 세상이 한 순간 멈췄다.
“애비로군? 아무리 봐도 애비가 맞다.”
라비엘과 내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선 우부르카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라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비]?”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어. 아니. 잠깐만요. 라비엘,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맙소사!”
우부르카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실망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료와 그렇게 히히덕거린 주제에, 이제는 다른 사람이랑 입술을 부딪히고 사랑을 나누려는 것인가. 애비에 대한 희망이 나날이 사라져 간다!”
꿈틀.
라비엘의 눈썹이 약 11도 내려갔다.
“……동료? 히히덕거려?”
라비엘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공자여. 저 괴한이 흥미로운 단어와 문장을 발음하는구나. 내가 여태까지 언어학을 게을리 배운 것이 아니라면, 나의 의심과 추론이 특정한 방향으로 쏠리는 것을 멈추기 힘들어 보인다만.”
“아니. 아니. 아니! 라비엘! 그게 아니고요!”
“정말로 파렴치한 애비다. 내가 보는 앞에서 [나는 흑룡주와 특별한 관계가 맞다]고 당당히 밝혔으면서, 무슨 염치로 또 다른 사람과 만나려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
호오.
라비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흑룡주라면 분명히 상견례에도 참여한 그 사람이렷다.”
라비엘이 손을 뻗어 내 목을 쥐었다.
손아귀의 힘은 결코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왕한테 목이 잡혀도 이만큼 두렵진 않았을 거다.
“물론 나는 그대의 사랑을 믿는다. 바람이나, 외도나, 그런 단어가 행여라도 그대의 인생에 도입될 예정은 없겠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대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싶구나. 왠지 모르게 말이다. 공자여. 정확히 60초를 줄 테니 그대의 목숨과 나의 평화를 위해 말해 보거라.”
난 억울해!
20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