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07)
1.
“부인의 말대로 조사해봤다.”
라비엘이 신문지 더미를 쿵, 내려놓았다.
“찾을 수 있으셨나요?”
“그래. 제법 유명한 학생이더군.”
신문지에는 연두색 형광펜이 표시되어 있었다. 형광색으로 밑줄을 친 곳에는 [자모 씨], [J 씨], [자수정]이라고 글자가 적혔다. 미성년자의 본명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이다.
이 시대 언론이란.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통칭 [귀신 보는 탐정].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아무한테나 물어봐도, 둘에 한 명꼴로 알고 있다.”
“공중파 방송을 탄 적이 없는데도 그 정도라니….”
“나이가 어릴수록 잘 아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고등학생, 중학생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무슨 일을 했는지까진 몰라도 적어도 [귀신 보는 탐정]이란 말을 들어본 적은 있다던가.”
그다지 호의적인 관심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아아, 그 사기꾼?]이라고 반응했다. 안타깝군. 그대가 탑주라고 주장하는 인물에겐 인망이 없는 모양이야.”
“……사기꾼이라.”
이틀 전. 탑주를 만난 날.
우부르카와 라비엘은 내 오러를 추적해서 찾아왔다. 나는 두 사람에게 자수정을 탑주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놀라면서도, 일단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잠시 신세를 져도 괜찮겠냐는 말에 [신서중학교 3학년 A반 자수정]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아요. 빈방은 많은걸요. 편하실 대로 머무르시길.」
단, 하고 단서가 붙었다.
「창고에 들어갈 때는 제 허락을 받아주세요. 그리고 오전 1시부터는 되도록 집안을 돌아다니지 말아주세요. 아이들이 노는 시간이니까요.」
나는 얌전히 충고를 받아들였다.
아무리 간덩이가 커도 귀신들이랑 놀 자신은 없지.
오러가 일절 통하지 않는단 점부터, 이미 불가사의하고.
“12건의 행정처분. 걸려있는 민사소송만 8건.”
라비엘이 미간을 좁혔다.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지나치게 평지풍파를 겪고 있다. 이래서야 사기꾼 취급을 받는 것도 당연해. ……귀신을 본다는 것은 과연 놀라운 일이다만. 공자여, 정말로 저 아이가 탑주인가?”
“네. 그건 확실해요.”
탁, 탁, 탁, 탁.
부엌에서 식칼이 춤을 추었다.
탑주(塔主).
이 세계에서 자수정이란 이름을 가진 중학생이 등을 돌린 채 생닭을 썰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것인데, 옆에서 우부르카가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다.
“사실 여기 스테이지를 공략할 때 이상한 점이 몇 가지나 있었어요.”
“이상한 점?”
“예. 원래 이 세계는, 살천성의 트라우마를 구현한 곳이거든요.”
일찍이 50층에서 나는 살천성과 맞붙었다.
살천성의 인형을 1체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그때 내가 죽으면서 엿보게 된 살천성의 트라우마. 그것이 바로 이곳 [등천도시-외전]의 정체다.
“트라우마가 구현되던 순간 저한테 탑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공책에 글씨를 적었다.
+
경고.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구현합니다.
구현에 필요한 자료를 당신의 기억에서 추출합니다.
+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문장.
“이 세계가 그려낸 풍경화는 살천성의 트라우마였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 쓰인 물감은 저한테서 비롯했어요. 그래서 등장인물의 모습들이 전부 제가 아는 사람들로 바뀌었죠.”
반장은 흑룡주로.
학생회장은 라비엘로.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각 스승님과 배후령으로.
하지만 단 한 명- 유일하게 [내 기억에 없는 인물]이 있었다.
“김율만은 얼굴이 안 바뀌었습니다.”
“흐음.”
“저는 살천성이 전생에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모르니까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트라우마의 세계에서 김율만은 처음부터 자기 본연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어요.”
라비엘은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이상하군. 만일 부인의 기억에서 자료를 추출했다면 [김율도 똑같이 다른 누군가의 얼굴]로 변경되어야 했다.”
“그렇죠. 결론은 하나예요. 김율은 저의 기억이 아니라 [다른 데이터]에서 추출됐어요.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빌려온 거지요. 저는 그 [다른 사람]이 바로 탑주라고 확신합니다.”
“근거는?”
“있어요.”
나는 다시 연필을 잡았다.
“제가 이 세계를 클리어했을 당시에 탑이 이상한 소리를 했어요.”
내게 들려왔던 목소리들을 복기했다.
+
클리어 요건 달성.
해당 스테이지의 특이점을 감안하여 판단을 요청합니다.
판단 완료.
만생의 주인이 ‘스테이지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
“지금까지 탑에서는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를 담당 성좌들한테 맡겼어요. 21층부터 30층을 담당한 성좌는 [만상의 대도서관장]. 하무스트라예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세계만은 [만생의 주인]이 직접 판단을 내렸습니다.”
“즉, 이 스테이지는 특별히 [만생의 주인]이 직접 관리했어요.”
증거는 또 있다.
“스테이지 클리어가 인정된 직후에도 수상쩍은 메시지가 전달되었지요.”
+
금일, 29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만생의 주인이 탑을 대신하여 알립니다.
고생하셨어요, 여러분.
여러분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
중간에 뭔가 긴 메시지가 있었지만 그거까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걸로도 충분하지.
[만생의 주인]은 예외적으로 자신이 직접 축하의 인사를 전한 것이다.“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탑주는 이 스테이지를 관장했습니다.”
나는 말에 확신을 담았다.
“김율의 얼굴을 구현한 것도 탑주예요.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한 말에 따르면 탑주는 이 세계에서 살았어요. 제일 불행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 공교롭게도, 저 자수정이란 아이는 김율을 알고 있지요.”
“……학교 사육장을 같이 관리한다는 인연이 있었는가.”
“예.”
그러니 탑주의 기억을 이용하면 김율을 재현할 수 있었다.
데이터의 공백은 이로써 사라진다.
“사리에 맞군. 하지만 만일 저 소녀가 탑주라면 어째서 권능과 기억을 잃어버린 것인가?”
“…….”
나는 부엌에 선 자수정의 뒷모습을 봤다.
자글자글.
낡은 냄비에선 닭이 끓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있으나?”
“제가 본 탑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탑의 일에 크게 개입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죠.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닌 이상 평범한 인간으로 있는다] 같은 제한을, 스스로 걸어뒀을지 몰라요.”
나는 연필을 놀렸다.
라비엘이 내 어깨에 붙어 같이 공책을 내려봤다.
+
트라우마에 관하여.
+
“예를 들어 트라우마. 저는 저를 죽인 자의 트라우마를 볼 수 있어요. 이건 제가 가진 스킬 [회귀자의 태엽시계]에 의해 보장된 규칙입니다. 다만 도대체 뭘 기준으로 트라우마를 정하느냐, 라는 문제가 있어요.”
슥슥.
두 가지 가능성이 지면에 적혔다.
+
트라우마에 관하여.
1. 당사자가 기억하는 트라우마.
2. 설령 당사자가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당사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트라우마.
+
“처음에 저는 1번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 세계의 스테이지로 인하여 1번이 부정되었는가.”
“네. 왜냐면, 살천성은 김율 시절의 트라우마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니까]요.”
정답은 2번.
당사자가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인생에 영향을 끼친 사건.
그것이 내 스킬이 보여주는 트라우마의 정체다.
“탑은, 모순이 발생할 경우에 어떻게든 봉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살천성의 트라우마가 재현될 때 일어난 모순은 이거예요.”
+
1. 살천성의 과거 트라우마를 재현해야 한다.
2. 그러나 살천성은 스킬에 의해 과거를 전부 잃었다.
3. 트라우마를 구현하는 [김공자의 스킬]과 과거를 삭제하는 [살천성의 스킬 ]이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4. 모순 발생.
+
“탑은 이걸 위기 상황으로 인식했어요. 그래서 평범한 중학생, [자수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탑주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시적으로 각성했지요. 탑주는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떠올렸지만…….”
+
5. 급한 대로 살천성의 기억이 아니라 김공자의 기억에서 자료를 추출한다.
+
“마지막 퍼즐을 완성시킬 지점에서 망설인 거예요. 탑주는 생각했겠죠. 과연, 트라우마의 원주인인 김율까지 다른 사람의 얼굴로 충당하는 것이 옳을까?”
“…….”
“이곳은 어디까지나 [김율의 트라우마]. 주변 인물들을 다른 이미지로 덧씌우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 쳐도…. 김율마저 다른 인물로 바꾸어버리면 그건 더 이상 [김율의 트라우마]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탑주는 김율을 다른 얼굴로 바꾸는 것만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인 것이다.
결국에.
+
6. 김율의 모습만은 자신의 기억을 이용해서 복원한다.
7.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고 난 다음엔 다시 자신의 권능과 기억을 회수하여, 평범한 [자수정]으로 살아간다.
+
“이것이, 제가 추측한 이 세계의 진상이에요.”
“과연. 여전히 의문점은 많다만…… 훌륭하군.”
라비엘은 내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탑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바쁠 텐데 지나온 길을 복기하여, 진상에 가까이 다가서도록 노력한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그대의 가장 빛나는 재능이다. 그대만큼 탑에 관심을 기울이는 헌터는 없을 터.”
“뭘요. 이 정돈 기본이죠.”
“아니, 그대이기에 가능한 추리다. 그대가 아니라면 탑주에 대한 정보를 모으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대의 스킬이 아니라면 탑주를 끌어들이지도 못했지. 순순히 자랑스러워해라.”
라비엘이 나를 칭찬했다.
우히히.
“공자여. 앞으로는 어찌할 생각인가? 설혹 저 소녀가 탑주였다 해도 이젠 권능도 기억도 없다. 귀신을 보는 능력이야 놀랍지만 그뿐 아닌가.”
음.
“저의 추리가 맞다면…… [만생의 주인]을 다시 강림시키는 방법이 한 가지 있어요.”
“호오?”
“스킬로 인해 생겨난 모순은, 탑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탑주의 판단이 필요하다. 그럼 또 모순을 일으키면 탑주가 등장할 거예요.”
“일리가 있군. 정확히 어떤 모순을 일으키려는 것인가?”
“……제가 자수정의 손에 죽어요.”
“…….”
라비엘이 입술을 닫았다.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면, 트라우마 재현에 문제가 생깁니다. 트라우마는 당사자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을 조명해요.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즉…….”
+
자수정(탑주)의 트라우마.
1.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학생 자수정의 트라우마.
2. 자수정의 삶을 살기 이전, 탑주로서의 트라우마.
+
“충돌이 생깁니다. 탑에서는 [어느 쪽]의 트라우마를 보여줄 것인지 결정할 수 없어요.”
“…….”
“살천성의 예를 따르면 [탑주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게 옳죠. 그쪽이 원류(原流)니까요. 저는 아직 50층을 깨기도 전에 탑의 진실을, 이 탑을 만들어내고 다스리는 주인의 정체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서게 됩니다.”
“…….”
“아마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예요.”
툭. 툭.
라비엘은 손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마지막 기회라고 단언할 수 있나? 어찌면 50층, 60층, 70층을 넘으면 탑주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단언할 수 있어요.”
나는 슬쩍 옆을 돌아봤다.
배후령이 팔짱을 낀 채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음.
배후령은 코끝을 찡그렸다.
-난 99층까지 올라갔지만. 탑주 같은 인물은 만나본 적 없어. 심지어 [기둥] 이란 존재도 김좀비 너를 만난 다음에야 듣게 되었다.
그것은 경험자의 증언이었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100층에 오르는 건 엔딩을 보는 거야. 엔딩에 걸맞는 상품이 준비되어 있겠지. 하지만 [게임을 만든 개발자] 따윈 엔딩이랑 전혀 상관없잖아? 개발자의 정체라거나, 인생사라거나, 아무래도 쓸모없어. 나도 100층은 못 올라갔으니 100% 단언할 수 없다만…. 아마도 100층과 탑주는 무관계할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배후령이 말하기를 최소한 99층까진 탑주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고 해요.”
이것은 탑의 진행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말하자면 이스터 에그.
오직 탑의 창조주, 스테이지의 개발자에 대한 정보다.
“저는 탑주의 정체를 알고 싶어요.”
“…….”
“저 사람이 왜 탑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탑을 만들었는지. 어째서 하필이면 각 세계들에서 제일 불행한 자의 인생을 대신 살려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기회를 잡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인가.”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창세의 비밀.
창조주의 인생.
그것이라면 한 번의 삶을 걸 가치가 있다.
“라비엘.”
나는 라비엘의 눈동자를 정중히 바라보았다.
“제가 저 아이한테 죽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20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