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13)
1.
저의 주인.
저의 심장. 저의 피.
이 세상의 모든 것.
2.
뚜욱-
어디선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방울은 떨어질 적에 지상이 아니라 영원으로 투신했다. 뚜욱. 뚝. 물소리가 울리는 잠깐 동안, 주위의 중력이 증발하고 오직 시간만 느릿느릿 흘렀다.
“…….”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순간에야 내가 여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언제부터 머리를 숙이고 있었을까?
지금은 언제인가.
모르겠다.
[경고.] [피대상자의 자아가 불안정합니다.]“윽.”
나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짚었다.
머리가 몸시 아팠다.
입으로 게워내지 못한 토사물이 뇌수에 둥둥 떠다니는 감각.
“구원하(久達河) 남작님?”
그때, 여린 목소리가 들렸다.
“괘, 괜찮으세요?”
나는 힘겹게 눈을 떠서 옆을 쳐다봤다.
눈토끼처럼 머리카락이 하얀 아이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이 쪽을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일 텐데, 어째서일까.
내 입술은 그녀의 작위를 쉽게 발음했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후작 각하.”
백설토(白雪免) 후작.
올해로 고작 열여섯 살.
선대 후작이 급사해버리는 탓에 지나치게 어린 어깨가 지나치게 무거운 망토를 짊어지게 됐다. 가문에서 떠도는 얘기들에 따르면 한 때 폐작까지 거론되었다던가.
만일 자수정 자작께서 돌봐주시지 않았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했을….
[경고.] [피대상자의 자아가 불안정합니다.] [트라우마 재현을 속행합니다.]지이이잉-.
‘으윽!’
또다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나는 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혀에서 느껴지는 쓴맛을 으깨어 씹으며, 입안으로 시어(詩語)를 읆조렸다.
『안정—아울러—완화.』
정신을 안정시키기 위한 시어를 한 절.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시어를 한 절. 연결어를 하나. 3절에 해당하는 마법을 발동 하자 서서히 두통이 가라앉았다.
‘후우.’
나는 한숨을 놓았다.
고매한 시를 짓기엔 시간이 없어 급한 대로 단어를 주워담았는데,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이럴 때는 자신이 왕국에서 열 두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마법사임을 실감한다.
“지, 진짜로 괜찮으신 건가요? 얼굴이 엄청 창백하세요.”
“……아무런 이상 없습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말요? 정말 불편하신 곳이 없는 거지요?”
백설토 후작은 몇 번이나 내 몸상태를 확인했다. 후작에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머리 한구석으로 냉정하게 이상징후를 진단하였다.
‘기억을 떠올리는 데 지장이 있어.’
두통은 사라졌다. 그러나 기억 부분에서 묘한 거북함이 느껴졌다.
‘설마 정신마법?’
생각하기 어려운 가능성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정신에 작용하는 마법 따원 왕국의 역사를 통틀어보아도 거의 없다.
하물며 지금 이곳은 백금탑의 대의회장.
왕국의 모든 귀족이 모여 가열차게 회의를 벌이는 장소.
의회를 지키기 위해 동원된 경호병력은 보기만 해도 눈부셨다. 왕실 직속의 무사들이 개미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하게 진용을 갖추었다. 이런 곳에서 어설픈 짓을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용제나 아신이라 해도 목이 날아갈 것이다.
‘단순히 피곤한 탓일지도 몰라.’
나는 가볍게 마법을 발동시켰다.
기억이 흐릿해서 문제라면, 되살릴 뿐.
『정보—백설토—복원.』
왠지 모르겠지만 내겐 기억을 잃었다는 현상이 익숙했다. 낯설지 않았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계책까지 마련해두었다.
나의 치밀한 준비물이 눈앞에 떠올랐다.
+
[백설토]신분: 귀족. 왕도후작.
관계: 자작의 의동생.
위험도: 백白.
비고: 토끼 후작가의 가주. 어릴 때 부모를 잃음. 조부인 백미토(白屋免) 후작에게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
천재로 유명한 조부와 달리, 백설토는 영애 시절부터 머저리로 악명이 높았다. 12살 겨울에 자유민 아동을 채찍질로 때려 죽였다. 사유는 ‘가족과 화기애애하게 우는 또래의 모습이 싫어서’.
조부의 교육이 상당히 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을 받지 못했고 칭찬을 받지 못했다. 현재는 의연한 태도를 보이나, 결여된 사랑과 칭찬을 자수정 자작께 갈구한다. 자수정 자작을 어머니이자 언니로 인식하고 있다.
아군.
죽일 필요가 없다.
강점: [자기 파악], [강한 윤리], [인맥], [자본]
약점: [자유민 살해], [아동 살해], [죄책감], [무기력], [선함], [일시적 유아퇴행], [극도로 낮은 자신감]
주의: 후작가에서 다수의 귀족이 식객 살이를 하고 있다. 암살은 어렵다.
+
“…….”
정보를 인지하고 안심하려는 찰나.
나는 묘한 느낌이 들어 눈을 깜빡거렸다.
‘어라.’
역시 무언가가 이상했다.
‘내게, 이런 능력이 있었나?’
아마도 눈앞에 떠오른 정보들은 내가 직접 기록한 메모다. 과거의 내가 적어놓은 흔적이다. 이걸 보면 [아, 내가 저런 걸 썼지]라고 기시감이 느껴져야 하는데…….
‘이상해.’
기시감은커녕 낯선 기분만 더 강해졌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이빨 사이에 생선뼈가 낀 것처럼 입안이 거북했다.
‘뭐야. 이거.’
혹시나 싶어서 정신왜곡에 걸린 건지 마법으로 점검했지만 역시나 이상이 없어…… 잠깐만. [마법]이라니?왕국에서 열 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법사라고? 내가? 아니. 저는 이런 천박한 말투는 쓰지 않습니다. 조금 더 예의를 갖추어서, 귀족답게…….
[경고.] [피대상자의 자아가 침식됩니다.]……그렇습니다.
왜 저는 여태까지 반말을 쓴 것일까요.
마법이란 언어를 가다듬어 사물로 빚어내는 작업. 언제 어느 때라도 조심해서 언어를 다루어야만 합니다.
설령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혼잣말일지언정, 항상 자신을 낮은 곳에 위치시켜야 이 세계에 대한 경이를 잊지 않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런 마음으로 마도(魔道)를 걸어왔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천 번의 말이 쌓여 백 가지의 습관으로 변합니다.
백 번의 습관이 쌓여 열 가지의 행동양식으로 굳습니다.
그리고 열 가지의 행동양식이 한 번의 인생을 결정짓습니다.
자작을 지척에서 모시는 마법사로서, 사소한 낱말 하나라도 가벼이 다루어선 안 될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소란스럽군.”
간신히 마음을 다잡는 사이, 또다른 인물이 접근합니다.
백설토 후작이 그녀를 알아보고 먼저 고개를 숙입니다.
“아. 순흑신(純黑神) 자작님….”
“오셨습니까.”
저 역시 고개를 숙입니다.
“오늘 마지막 휴식시간입니다. 조금 더 휴게실에서 쉬고 오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휴게실에서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다른 파벌 귀족들이 힐끔거리더군.”
순흑신 자작이 쓴웃음을 짓습니다.
“우리한테 막말을 쏟아내고 싶어서 참지 못하겠다는 느낌이다. 차라리 시원하게 욕이라도 날리면 이 쪽도 마음이 편하겠다만…. 후작처럼 회의장에 쭉 머무를 걸 그랬어.”
“아. 여, 역시 분위기가 조금…?”
“음.”
“반석파 분들이 눈치를 주나요?”
“반석파, 내경파, 종교파, 파벌을 가릴 게 없다. 우리를 죄인 보듯이 보고 있다. 뭐, 크게 틀린 말도 아니라는 사실이 슬프군.”
저는 후작과 자작이 나누는 대화를 공손히 들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저희 거울파의 간부.
특히 순흑신 자작은 위원장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파벌의 요직 중 요직입니다. 그만큼 자작께도 총애를 받고 있지요.
…….
으음.
틀림없이 총애를 받는 귀족, 일 것입니다만.
어쩐지 기억에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망설이며 정보마법을 시전했습니다.
+
[순흑신]신분: 귀족. 근경자작.
관계: 자작의 애인.
위험도: 청靑.
비고: 흑신 자작가의 가주. 20년 전 반란을 일으킨 가문. 왕도에서 파견된 무위식 공작에 의해 반란은 진압되었다. 당시 순흑신 영애는 가문에서 유일하게 생존했다.
이 사건으로 순흑신은 가족과 가신을 전부 잃어버렸다. 일말의 자비를 보여주지 않은 무위식 공작과 왕국에 복수를 맹세.
스스로 실종되어, 반란 수괴 흑색마녀(黑色魔女)의 휘하로 들어갔다.
흑색마녀에게 ‘어둠의 의식’을 치르는 방법을 전수받았다. 자세한 방법은 불명이나, 이 의식을 위해 300명 이상의 인간이 순흑신에게 포식당했다.
의식이 완성되기 직전에 자수정 자작께서 생포.
이후, 무위식 공작과 자수정 자작의 장난감으로 전락했지만, 6개월 뒤에 이지를 되찾아 해방되었다. 그러나 식습관은 바뀌지 않아서 지금도 자수정 자작께서 가끔 ‘사료’를 하사하신다.
아군.
죽일 수 없다.
강점: [천재], [강한 정신력], [승천인]
약점: [반란군의 후예], [인육포식자], [전 현상범], [음악]
주의: 매우 유능한 암살자를 한 명 가신으로 두고 있다.
+
“…….”
여전히 이상한 느낌이군요.
정보는 이해하겠습니다만, 꼭 다른 사람이 써둔 글귀를 읽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왜 저는 [죽일 수 없다] 같은 말을 써놓은 겁니까?’
심지어 백설토 후작의 정보에도 비슷한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저쪽은 [죽일 필요가 없다]군요. 이래서야 마치 제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하는 미치광이같이 느껴집니다.
저는 정상적인 윤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 자신이 스스로 느끼기엔 그러합니다.
왜 이런 문구가 적히게 되었는지 도저히 알기 어렵습니다.
“물론 오늘 같은 날에 한탄만 하고 있을 순 없지.”
순흑신 자작이 한숨을 쉬며 제 어깨를 두들깁니다.
그때 불현듯, 제 마음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스칩니다.
‘귀찮군요. 친한 척도 적당히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 틈날 때마다 자신과 제가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걸 티내고 싶어서 안달이지요. 살인귀 주제에. 동족과 부대껴야만 삶을 실감하는 족속은 언제 봐도 불쌍합니다. 하긴, 이 사람이 동족을 찾으려면 우선 지옥에 떨어지고 나서 탐색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지긴 싫으니 저한테 들러붙는 것일 테지요.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습니다.’
…….
어라?
어라아.
방금, 제가 무슨 생각을?
“음? 구원하 남작. 안색이 안 좋군. 어디 불편한가?”
“마, 맞아요.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으세요. 남작님이야말로 휴게실에 가서 쉬서야 한다니까요.”
“……아닙니다.”
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습니다. 입을 열자, 제가 생각하지도 않은 말들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벌써 다섯 번이나 휴식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이 이상 쉬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안건들이 저희 파벌의 핵심 의제이니, 되도록 계속 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과연…….”
순흑신 자작은 어쩐지 저를 이해했다는 표정입니다.
“하기사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왕국이 천 년 만에 새로운 공작을 맞이하게 되는 날이니. 나도 만감이 교차한다.”
순흑신 자작이 고개를 돌립니다.
저도 백설토 후작도 자연히 시선이 이동합니다.
“—자수정은, 기뻐하고 있군.”
대의회장 가운데.
그곳에 금발의 귀족이 앉아 있습니다.
아니. [앉아 있다]고 말하기에는 적이 교태롭습니다. 귀족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 옥좌에 뺨을 기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옥좌에서는, 국왕이 미소를 짓고 귀족의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암군과 간신.
성스러운 의회 한복판에서 애정을 과시하다니, 보수적인 귀족이 본다면 나라가 망했다며 탄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순흑신 자작이 말했습니다.
“저 모습을 보지 못하겠다고 휴게실로 도망쳐온 귀족들이 많았다. 내가 진담 삼아 사랑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느냐고 말하니까 싹 정색하더군. 고리타분한 작자들이다.”
지금 설마 저와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것입니까?
살인귀와 생각이 겹치다니. 날 잡아서 뇌를 한 번 세척해야겠습니다.
저는 두개골을 청소하는 방법을 떠올리면서 금발의 귀족을, 제게 누구보다 소중한 분을 바라보았습니다.
『정보—자수정—복원.』
그러자 눈앞에 글자들이 떠올랐습니다.
다른 자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간결한 문장.
하지만 무엇보다 정확한 글귀가 허공에 새겨집니다.
+
[자수정]저의 주인.
저의 심장.
저의 피.
이 세상의 모든 것.
+
“…….”
응?
‘내 주인은 저 사람이 아닌데?’
그 순간에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내 심장 주인은 라비엘이지. 뭔 소리야.’
아니, 머리가 맑아졌다.
머릿속에 낀 안개가 단번에 사라진 것이다.
‘백설토는 누구야? 순흑신은 또 누구인데? 여긴 어디고? 이 엿 같은 존댓말은 누구 껀데. 마법사? 구원하? 남작? 이게 뭔 공자님이 헬로하는 소리여?’
나는 악몽에 놀라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확 떴다.
‘난 김공자다. 김공자. 등천도시의 사왕이다. 이반시아 공작가의 달이며, 마교의 소교주이고, 지정족의 동반자다!’
비로소 탑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대상자의 자아가 복원됩니다.] [피대상자의 자아가 유지된 것을 확인.] [트라우마 재현을 속행합니다!]21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