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14)
“윽.”
나는 이마를 잡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꾹, 이마골을 눌렀다. 그러자 두통이 사라지고 제정신이 찬찬히 번져 올랐다.
‘그래. 나는 지금 [트라우마] 속에 있다.’
이곳은 다른 세계다. 아니, 어떤 세계를 모방하여 다시 조립해낸 연극이다.
배우들은 자신들이 배우일 줄 모르고, 소품들은 자기들이 소품인 줄 모르지만, 이곳에서 오가는 사람들은 모조리 연극을 위해 고용된 아르바이트 직원들이나 마찬가지다.
‘여기는 탑주의…… [자수정의 트라우마] 속이야.’
나는 한동안 자수정의 일생을 엿보았다.
그녀가 얼마나 재능을 타고 났는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정치적 공세를 돌파했는지. 그녀가 누구와 친해져서 어떻게 권력을 얻었으며, 마침내 용들의 권능마저 빼앗았는지….
‘탑은 용들의 권능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제는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다.
‘그것도 하나의 권능에 의해 건축된 곳이 아니야. [본질]을 다루는 권능, [기억]을 다루는 권능, [시간]을 다루는 권능. 어쩌면 그 이상의 용제들. 수많은 용제들의 힘을 겹쳐서 빚어낸…… 종합 시스템이다.’
두근.
나의 것이 아닌 심장이 나의 리듬으로 두근거렸다.
‘나는 최초로 탑의 구조를 파헤친 사람이야!’
그런 내 두근거림에 응답한 것일까.
트라우마 속인데도 불구하고 탑의 목소리는 기꺼이 내 발견에 화답해주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최초로 탑의 구조를 발견했습니다!] [탑의 구조를 지탱하는 권능(스킬)들을 정확히 기술하면, 추가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탑을 구성하는 4가지 근본 스킬이 무엇인지 밝힐 수 있겠습니까?]나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자수정은 세 마리의 용을 사로잡았다.’
엿본 광경들을 떠올리며,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중 한 명은 지골룡. [기억을 보관하는 권능]을 가진 용제야. 누군가가 지골룡에게 다가가면, 그 사람의 기억이 상자에 담기지.’
나는 지골룡의 권능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그 상자의 [크기]는 정해져 있지 않아.’
+
[지골룡의 두개골]랭크: SSS+
효과: 살아있는 자의 기억을 보관합니다. 보관된 기억은 ‘상자’에 담깁니다. 이 상자는 오직 해당 스킬을 소유한 자에게만 파괴될 수 있습니다.
상자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당신은 똑같은 기억을 계승하는 인물의 육체를 몇 번이고 생산할 수 있습니다. 육체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기억을 쌓고, 이 경험을 다시 상자에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허락한다면 말입니다!
인물의 육체가 파괴되더라도 상자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사의 특권을 베푸십시오.
※단, 파괴된 육체의 기억은 상자에 업데이트할 수 없습니다.
+
나는 생각했다.
‘바깥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언제든 탑에 입장할 수 있어.’
반면 입탑자는 바깥의 모든 것을 남겨둔 채 몸뚱이 하나만 갖고서 들어서게 된다.
나처럼. 마르쿠스 칼렌베리처럼. 원장님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탑에 갖고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
즉.
‘만약 탑이 하나의 거대한 상자라면?’
나는 손을 탁, 튕겼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거라면?’
입탑이 이루어지는 순간, [나의 기억]은 [탑이라는 거대 상자]에 보관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탑에 위탁해둔 채, 탑 안의 세계를 돌아다닌다.
‘이로써 탑은, 탑에 들어온 모든 자들의 정보를 완전히 손에 넣는다.’
생각할수록 확신이 더해졌다.
‘내가 4000일 전으로 회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서 해명이 돼!’
하루를 돌아갈 때마다 내가 속한 탑은 하루 어치의 [데이터 복원 지점]으로 복원된다. 그것을 4000번 반복한 결과, 4000일 이전의 데이터 복원 지점으로 탑은 거슬러 올라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스킬에 의해, 오직 나의 데이터만은 탑에 ‘업데이트’된 것이다.
-4000일 이전의 시점으로 데이터 복원을 시행.
-(스킬로 인한 추가 코드) 김공자라는 인물의 연속성을 유지할 것.
이것이 내가 기억을 잃지 않고 회귀할 수 있었던 이유다.
‘좋아. 그렇다면 탑은 하나의 거대한 기억 상자다. 우리의 기억은 우리 뇌 속에 있는 게 아니라, 탑 속에 있다. 이곳은 기억을 보관한 대도서관! 아니, 영혼의 대도서관이다. 이것이 내가 추론한 탑의 정체 중 하나다. 어떠냐!’
탑의 목소리는 신속하게 반응했다.
[정답.] [제1관문을 돌파한 것을 인정합니다.] [지골룡의 상자는 탑의 외곽을 이룹니다.]오케이.
‘세계와 세계 사이를 넘나드는 것도 비슷한 이치일 거야.’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의 세계와 [천마실록]의 세계를 나는 이동했다.그 이동은, 엄밀하게 말하면 ‘전송’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알기 어려운 건, 어쩌다가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 나 [천마실록] 이 우리랑 마찬가지로 탑에 편입되었느냐 하는 문제인데…….’
나는 눈쌀을 찌푸린 채 미간을 짚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성가신데 주위의 귀족들이 말을 떠들었다.
“이, 이제 자작님이 공작위를 받게 되면 공작님이라 불러야겠지요? 뭔가 조금 더 멀어지신 느낌이에요….”
“음. 자수정은 자기를 누가 어떻게 부르든 마음에 들기만 하면 허락하니까, 의외로 애칭을 하나 만들어서 공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애칭…….”
“후작도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심안찰 자작은 자수정에게 [소인의 공주님]이라 불리고, 궁극검 공작은 [소인의 낭군님]이라 불린다. 오직 그 사람들만이 독점하는 이름이지. 후작도 하나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거, 옆에서 남이 듣고 있으면 조금 부끄럽지요….”
“대신에 자수정이 귀여워해주지 않는가.”
“고민되네요….”
신경을 끄고 싶어도 끄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탑주(塔主)와 관련된 대화다.
이 세상을 창조한 주인에 대해 사람들이 자꾸 정보를 흘리는데, 제아무리 잡담이나 다름없다 해도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문득, [지금의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체내에 흐르는 마력. 더 정확히 말하면, 몸 전체가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울을 보지 못해서 지금 내가 어떤 외모를 갖추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의 살, 피, 뼈, 팔다리는 전부 마력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했다.
요컨대, 뇌도 마찬가지였다.
『의식—가속—시간.』
뇌의 신경이 마력을 머금으면서 변이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의식의 빠르기가 바뀐다. 만일 바라기만 한다면,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육체]로 변이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이 몸의 주인이 누구든 간에 어마어마한 괴물인 게 틀림없다.
‘흐음.’
좋아. 시간이 느려졌다.
백설토 후작과 순흑신 자작이 0.1x 배속에 걸린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내 몸도 덩달아 느려졌지만, 의식은 여전히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한결 여유로워진 보폭의 세상 속에서 추리를 이어나갔다.
‘[천마실록] 이든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든, 세계 그 자체가 제 발로 탑에 걸어들어 올 수는 없어. 우리 같은 인간과는 다르단 말이지. 어떻게 세계를 통째로 탑에 들여온 걸까?’
나는 빡세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여전히 상상이 안 되었다.
‘진짜 어떻게 세계를 탑에다가 옮겨…? 똑같은 걸 만들면 모를까.’
나는 눈을 찌푸렸다.
‘똑같은 걸 만든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굳이 세계를 고스란히 탑에 쑤셔박을 필요가 있을까? [천마실록]의 세계와 정확히 똑같은 세계를 탑 안에서 구현하면 그만 아닌가? 애당초 나도 기억은 탑에 기록되어 있어. 세계도 자신의 시간을 탑에 기록해두면 그만이잖아.’
그럴 수는 있다.
그것은 세계를 탑에 물리적으로 쑤셔넣는 것보다, 훨씬 더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첫 번째, 지골룡의 상자는 [살아있는 자의 기억을 보관]한다. 스킬에 그렇게 설명되어 있다. 세계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둘째치더라도, 세계 그 차제는 [살아있는 자]라고 말하기 좀 뭐하다. 세계가 스스로 탑에 들어갈 것을 결정한다거나, 그럴 일은 없겠지.
두 번째, 다름 아니라— 탑주의 성격이다.
“…….”
탑주는 고개를 돌리어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맑게 올려진 미소에는 풋풋한 장난기가 맴돌았다,
보랏빛 눈동자.
무언가를 되비치기에는 너무나도 천한 색깔이었다. 그녀와 마주보면 눈동자의 색을 넘을 필요가 있었다, 희미한 하얀색 마루를 벗겨 내어, 간신히, 보석과 같은 눈동자에 맞닿은다.
그녀의 눈은 뱀처럼 아가리를 벌려 내 눈을 집어삼킨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우리가 앉은 좌석에서 옥좌까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로 코앞에서 자수정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냄새가 여기서 풍겨서요.”
멀찍이서 자수정 자작이 입술을 오므린다. 편다. 발음한다. 하지만 그녀의 발음들은 바로 내 코앞까지 다가와서 귓속을 흐트려 놓는다.
‘오러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의식의 시간을 0.1x배로 설정해놨다는 사실을 어떻게 간파한 것인지, 자수정 자작은 정확히 내 속도에 맞추어서 오러를 흘려보냈다. 이 몸의 주인은 대마법사 천재였다. 그러나 자수정은 괴물이었다.
“무슨 재미난 일을 보여주려는 건가요, 소인의 두 번째 자문사? 소인의 뒷선 지팡이? 구원하 자문사는 뭐 가만히 있기만 해도 재미있어서 소인의 심심한 인생을 위로해주는, 몇 안 되는 감로수라 할 수 있지만요. 유달리, 특별히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요?”
“……탑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작.”
[피대상자의 자아가 길항됩니다.] [트라우마 재현을 속행합니다!]나는 공자로서의 말투를 뱉으려 했는데, 정작 입술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혓바닥이 마음대로 돌아갔다. 나는 공손한 귀족이 되어서 양손을 앞에 가지런히 모았다.
“탑의 구조요?”
멀리서, 여전히 국왕 전하와 애정을 과시하는 채, 자수정 자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금탑의 구조를 말하는 건가요? 아, 뭐. 여기 확실히 구조가 신기하긴 하죠. 왕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어두운 군주가 쓰던 건물이었는데 그 때문에 용들도 지나다닐 수 있도록 큼직큼직 높이높이 설계했다고…….”
“이 탑이 아닙니다.”
“흐응? 그럼요? 탄원의 탑? 아, 소인이 이번에 정벌한 황천루?”
“저는 자작께서 세우게 되실 [탑]의 구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 순간, 자수정 자작은 옥좌 아래서 일어났다.
“자수정 자작?”
옥좌에 앉은 국왕이 다소 당황했는지 자수정을 올려보았다.
“송구하여요. 전하. 소인은 잠시 파벌 동지와 나누어야 할 말이 있어서….”
“음. 알았소. 천천히 다녀오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와 함께하지 못한 1초를 소인의 심장에서 10초로 늘려, 돌아올 때면 이미 간절히 달여진 마음으로 전하를 뵙겠나이다.”
자수정 자작이 발길을 돌렸다.
뚜벅.
자수정 자작의 옷차림은 양옆이 트렸다. 치마가 길게 이어져 자신이 지나간 길을 천의 흔적으로 남겼다. 귀족이 아니고, 차기 공작도 아니며, 오로지 [왕의 첩실]이라는 의미로 입고 온 옷이었다. 신성스러운 의회장에서 이런 옷을 강요할 만큼의 권력과 인맥이, 자수정 자작에게는 있었다.
“자아. 구원하 자문사.”
모든 귀족이 모여든 이 의회장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지닌 귀족.
그녀는 나의 주인이었고, 나는 그녀의 가신이었다.
다른 귀족들이 나를 [남작]이라는 왕국 공식 호칭으로 부를 때, 오직 자수정 자작만은 나를 [자문사]라는 가문 내부의 직위로 호명했다.
“소인이 방금 귀에 꼬챙이가 달린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어림없이 [탑]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아. 백설토 후작님이랑 순흑신 자작님은 잠깐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앗, 네. 자작님….”
“알겠다. 당수(黨首).”
자수정 자작은 허리를 굽혀 백설토 후작의 이마에 키스했다. 백설토 후작은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행복한지 헤헤, 웃었다. 그리고 쪼르르 좌석에서 벗어났다.
자수정 자작은 왼손을 들어 순흑신 자작에게 건네었다. 순흑신 자작은, 당연하다는 듯 무릎을 꿇어 그 왼손가락을 키스하고 핥았다. 그리고 만족했는지 무덤덤한 얼굴로 ‘음’ 하고 좌석을 벗어났다.
“…….”
“귀여운 분들이지요.”
자수정 자작이 옷소매로 하관을 가리어 쿡쿡 웃었다.
“그래서, 탑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자문사. 소인이 기억하기로 지금까지 소인은 단 한 번도 자문사에게 탑의 구상을 말한 적 없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 살짝 혼란스럽네요. 설마,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었나요?”
“……아닙니다. 자작. 제게 예지능력은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왕국에서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 사막에서 동정수련을 하고 있는 신안예지(神眼豫知) 군뿐이니까요. 그놈은 남자 주제에 뭐 그렇게 동정을 사수하려는지 몰라. [내가 동정이 아니게 되면 이 세상이 멸망해]라고, 저번엔 엄청 진지한 얼굴로 말하더라니까요? 말이 되어요, 자문사? 이거 그냥 소인을 쫓아내려고 구라 까는 거지요?”
“…….”
나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자작의 말에 경청했다.
자작께선 본래 말이 많으시어 한 번 떠들기 시작하면 대화거리가 수 갈래, 백 갈래, 천 갈래로 찢겨졌다. 그럴 때는 그냥 자작께서 스스로 돌아오시도록 기다리는 게 최선……임을 이 몸의 주인은 알고 있다.
“아. 아무튼 그래서, 탑이요.”
지금처럼.
“예지능력이 아니라면 독심술? 그건 예지능력보다 힘들 텐데요. 자문사도 알겠지만 소인의 정신은 지금 최소한 4겹의 방벽을 치고 있어요. 소인이 탑에 대해 구상하고 있는 곳은 1겹 안쪽, 그러니까 소인의 최심부에요. 자이도 알 수 없을걸요?”
자이, 는 경계선 공작의 본명이다.
경계선 공작의 본명을 허물없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왕국에서 오직 단 한 사람, 내 눈앞에 서 계신 자수정 자작뿐이다. 경계선 공작의 본명을 불렀는데도 목이 날아가지 않은 사람도 자수정 자작 혼자이시다.
그 경계선 공작에겐 사람의 심리를 읽는 능력이 있었고, 따라서 [경계선 공작조차 읽지 못한 내면의 계획을 어떻게 당신이?] 하는 의심이 내게 오는 것도 당연했다.
“자작.”
“네, 소인의 자문사. 소인의 자문사라고 부르지만 언제나 두 번째 자문사여서, 언젠가는 선배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소인의 유일한 자문사가 되기를 바라는 소인의 자문사.”
“생각을 정반대로 뒤바꾸는 것은 어떠하올지요.”
“호오? 정반대?”
“제가 탑에 대해서 [이미] 예지를 한 것이 아닙니다. 자작. 이미 탑은 완성되었으며, 그 탑의 논리에 따라 저희가 [뒤늦게] 지금 상황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
보라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자수정 자작은 왼쪽을 한 번, 오른쪽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왼손 검지와 중지로 입술을 툭, 툭, 두들겼다.
“와오.”
자수정 자작이란 인물이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그 정도였다.
“개쩌는데요?”
“…….”
“일단 확인하지요. 자문사. 당신은 지금 미래에서 왔나요? 그러니까, 소인이 이미 탑을 만들어서 탑을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미래에서 왔어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설령 탑이 만들어지더라도 자문사는 절대 [탑]의 존재를 몰라요. 이 세계에서, 탑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황금룡과 지골룡, 빙하룡, 흑염룡 공작님, 마지막으로 심안찰 자작님뿐이에요. 이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냥 알 수가 없어요. ……으흠?”
자수정 자작이 턱을 쓰다듬었다.
“과연.”
그리고 입끝으로 씩, 웃었다.
“당신. 구원하 자문사가 아니군요?”
“…….”
“구원하 자문사의 모습에 빙의된 다른 누군가이겠지요. 헤에. 흐응. 역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하네요. 재밌어라.”
“……예. 저는 이 사람이 아닙니다. 김공자라고 합니다.”
“이 쪽 세계 사람도 아니지요? 소인은 장담해서 장을 꺼내고 담을 잘라서 내기에 걸 수도 있어요.”
“예. 맞습니다. 저는… 등천도시라고 이름붙여진 탑의 헌터입니다.”
“헌터? 아아. 결국 그 명칭으로 가기로 했나 보군요. 등천도시라. 혹시 바깥세상에도 이름 붙어져 있어요?”
“어. 음. 어떤 성좌가 첨탑세계라고 부르는 건 들은 적 있습니다만….”
“…….”
첨탑세계라는 말을 듣자 보라색 눈동자가 기이하게 가늘어졌다.
“완전히 우연은 아닌 모양이군요.”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여기서 소인이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한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게 아니라 단순히 당신의 속을 뒤집어 엎어 놓고 싶어서 아무것도 아니라 말했을 뿐이에요. 이러면 호기심이 우심방과 좌심방을 장악하여 두근두근거리게 되지요? 심장은, 두근거릴 때 건강하답니다. 소인이 그대에게 건강함을 선물한 셈이니 마땅히 소인에게 감사하세요.”
“…….”
이해했다.
이 사람, 말이 엄청 많다.
심지어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이쪽의 성질을 팍팍 긁어온다.
“그런데 어떻게 탑 내부의 인간이 이런 과거까지 건너왔대요? 너무 신기해서, 그 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하여, 소인으로서는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인데요.”
“과거로 건너온 게 아닙니다. 자작.”
“먀옹?”
새로운 정보. 탑주는 고양이 울음을 흉내낼 때가 있다.
정말 쓰잘데기 없는 정보구나.
“여긴 자작의 세계가 아니에요. 저의 세계도 아닙니다.”
“그렇다면요?”
“이곳은 단순히 재현된 꿈. 다시 만들어진 기억. 자작. 저는 지금, 자작의 트라우마 속에 있습니다.”
“…….”
자수정 자작이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저한테 스킬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든 저를 죽이면, 저는 절 죽인 사람의 트라우마를 엿볼 수 있어요. 그런 스킬입니다.”
“뭔가요. 존나 재밌어 보이는 스킬이네요. 만일 누군가가 그런 스킬을 만들자고 제안했다면 소인은 냉큼 쌍수 들고 환영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김공자 씨. 여기가 소인의 트라우마라는 것은 [소인이 김공자 씨를 죽였다]는 말이 되어요?”
천천히.
자수정 자작의 머리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그건 거의 불가능해요. 김공자 씨가 세균(世菌)…… 이계의 악신 중 악신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소인은 다른 세계의 사람을 죽이지 않을 예정이거든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한테 소인이 죽으면 죽지.”
“첨탑세계.”
나는 원장님이 살았고, 김율이 살았으며, 내가 살았고, 자수정이라는 어느 중학생이 살았던 세계의 이름을 말했다.
“거기에, 자작과 똑같은 사람이 한 명 있지요.”
“…….”
“그 분께 죽여달라 부탁드렸습니다. 다름 아니라 자작. 당신과 만나기 위해서요.”
침묵.
자수정 자작은 빤히 나를 올려보았다. 완전한 무표정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흐응” 하고 비음을 흘리거나, “헤에” 하고 숨결을 흐드려놓았고, 마침내 “과연”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네요.”
자수정 자작은 손을 뻗어 내 뺨을 매만졌다.
“상당히. 무척, 재미있어요.”
자수정 자작은 환히 웃었다.
“당신이 지금 얼마나 극악의 우연과 우연에 거쳐, 실낱 같은 오류를 가능성으로 엮어, 이곳에 도달한 것인지. 아니. 이곳으로 소인을 불러들인 것인지, 아마도 별로 실감하지 못하겠지요. 허나, 치하드리겠어요. 김공자 씨. 당신은 기적을 이루었어요.”
“…….”
“그래요. 오늘이 소인의 [트라우마]라. 뭐, 충분히 그럴 법하지요.”
자수정 자작의 숨소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
“기적을 뚫고 오신 용사님.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저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침을 삼켰다.
“탑을 세운 분… 탑을 세우게 된 분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후후.”
자수정 자작의 눈이 반개했다.
“귀여워라.”
그리고 내 뺨을 서서히 놓았다.
“좋아요. 부디, 만족하실 때까지 소인이 어떤 인간인지 보도록 하세요. 마침 당신이 빙의한 사람은 구원하 남작. 소인의 자문사이지요. 언제 어디든 소인을 따라다니는 것이 구원하 자문사의 역할이니, 소인과 계속 함께 있어도 의심받을 일은 없을 것이에요.”
자수정 자작은 나를 돌아보았다.
“자아. 따라오세요. 김공자 씨.”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소인의 세계를 소개시켜 드릴게요.
21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