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16)
“왜…….”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사람들만 모아서 연인으로 삼으신 겁니까?”
탑주 자수정.
그녀는 언젠가 탑을 세워 모든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들을 모은다. 종교적 광신에 희생된 어린아이들, 불합리한 재해에 죽은 무인들, 항거할 수 없는 이적(異跡)에 삶이 유폐되어 버린 여인…. 버려지고 망가진 인생들을 탑으로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준다.
‘희생자들을 위해 탑을 지은 자.’
그런 사람이 어째서 하필이면 살인자들을 연인으로 두었는가?
나는 의문을 표하며 자수정 자작을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들이라….”
자수정 자작은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 어떤 분들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자문사?”
“너무 큰 죄를 지은 사람들 말입니다. 아이를 채찍찔로 때려 죽였고, 사람들을 인육으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전쟁을 벌여서 수많은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았죠. 왜 그런 사람들을 사랑해주세요? 왜, 아직도 저들이 귀족위에 앉아 있게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당신은 장차 탑을 건설하실 분입니다. 거의 전능한 힘을 가졌어요. 그런데도 왜 저들을 벌하지 않고…….”
“자문사는.”
자수정 자작이 불쑥 말했다.
“되게 착한 분이네요.”
“예?”
“자문사랑 같이 탑을 오르는 분들은 많이 행복하겠어요.”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자수정 자작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 앉은 채 앞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 역시 그녀의 시선에 이끌려 눈앞의 광경을 보았다.
“아직 20살도 안 된 자를 공작위로 천거한다는 거 자체가 우스갯거리다!”
휴게실에선 갑론을박이 뜨겁게 오가고 있었다.
보수 파벌의 귀족… 분명히 아루호 백작이라고 했던가.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처럼 사납게 뻗친 귀족이 신경질을 냈다.
“자수정 자작의 나이는 열여덟이다. 열여덟. 제아무리 무수한 반란을 진압했고 수많은 용국을 정벌했다 하여도, 왕국에는 엄연히 위 아래가 있고 순서가 있어.”
“과연.”
후우-.
이번에는 자수정 자작의 파벌에 속한 귀족이 물담배를 머금었다.
“백작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반란군들이 토벌되긴커녕, 왜 날이 갈수록 세력을 더 불려가는가 저는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만…. 오늘 각하의 말씀을 들으니 개안하는 느낌입니다. 열여덟 살짜리 아해가 반군과 피땀 흘려 싸워가는 동안, 백작 각하와 같은 대귀족들께선 반상의 법도를 바로잡고 계셨군요. 덕분에 왕국이 여태 멸망하지 않고 번영하였음을 알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흘렀다.
방금 발언한 동료에게 가세하여, 자수정 자작 파벌의 귀족들이 비웃었다.
“정말이로군. 나는 지금까지 어린 소녀에게 모든 짐을 떠맡겼다 싶어 자책했는데, 이제 보니 어린 것 주제에 감히 군공을 세웠다고 비난해야 마땅했어.”
“그러게 말입니다. 만일 저희 당수(黨首)께서 나서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황금룡을 토벌하는 데 20만에 달하는 희생자가 나왔겠지요. 아니, 붉은 손톱을 토벌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수백 만 신민들이 고통에 신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슨 소용입니까? 수십만 군졸의 목숨과 수백만 백성의 안위를 지켰다 한들 아직 열여덟 살에 불과한 아해. 공작위 따윈 말도 안 됩니다.”
“옳소. 왕국의 법도를 염려하시는 아루호 백작 각하의 인덕이 참으로 아름다우시오!”
귀족들이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그들은 모두 자수정 자작의 연인이었다.
“하…….”
아루호 백작의 얼굴이 울긋불긋 일그러졌다.
말싸움에서 밀렸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운 것일까.
백작은 창졸간에 중얼거리고 말았다.
“기생(波生)의 개들이…… 왈왈 짖는 솜씨 하나는 일품이군.”
그 한마디에 사위가 적막해졌다.
여태까지 여유롭게 백작을 비아냥거린 귀족들은, 일제히 표정이 차가워졌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것이다. 그들의 눈빛에서 분노가 무표정을 가장하여 타올랐다.
“어떤가요, 김공자 씨?”
자수정 자작이 소곤거렸다.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
“재미있지 않나요?”
“…….”
“저기에서 소인의 편을 드는 사람들은 김공자 씨가 말한 대로 전부 살인자예요. 학살자들이지요. 죄인들이에요. 하지만, 보세요. 지금 저 사람들의 얼굴을 봐보세요.”
자수정 자작은 엉덩이를 들어 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괴로워하고 있어요.”
그녀의 입술이 속삭임을 흘리며 다가왔다.
“단지 소인이 기생이라고 욕을 들었을 뿐.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요. 소인은 음악으로, 춤으로, 달콤한 밀어로, 수많은 귀족과 왕족을 홀렸으니까요. 온갖 기예로 사람을 홀린 인생이라. 하여, 기생. 저래 봬도 아루호 백작은 말을 가린 셈이에요. 저잣거리에선 소인을 공공연히 창녀라고 욕하거든요.”
꾸욱.
자수정 자작은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보세요. 김공자 씨.”
작은 중력에 이끌려 나는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내 어깨가 그녀의 얼굴과 수평선을 이루게 되자, 자수정은 내 귓가에 소곤거렸다.
“어린아이를 채찍질로 죽인 사람이, 인간을 폭식한 귀족이, 민간인을 학살한 장군이, 그저 소인이 기생이라는 욕을 들었을 뿐인데 저리 상처를 입고 있잖아요.”
“…….”
“너무 재미있지요.”
자수정 자작은 귓속말을 흘려넣으며 내 오른팔에 팔짱을 끼었다.
한 마리의 뱀이 몸통을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왕국에는 수백 권에 달하는 법전이 있어요. 명시한 법률에 따라, 저 [죄인]들의 죄를 계산하고 과오를 측량하여 책임을 도출할 수 있어요. 귀찮지만 쉬운 일이지요. 소인이 바라기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죄인들을 처형시킬 수도 있답니다. 어쩔까요, 김공자 씨? 다 죽여버릴까요?”
“그건…….”
“예.”
뱀이 눈웃음을 지었다.
긴 눈꺼풀 아래에서 뱀의 눈동자는 보라색으로 반짝였다.
“[그건 조금 심하다]고 생각하시지요?”
“…….”
“소인이 보기에 김공자 씨는 그런 분이에요. 착하신 거지요.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죽여버리는 게 [심하다]고 느끼는 시점에서, 이미 김공자 씨는 소인과는 완전히 다른 인종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고작 죽여버리는 게 심한 짓일 리 없잖아요.”
자수정 자작은 내 뺨을 잡았다.
그리고 내 시선을 강제로 돌렸다.
우리 두 사람의 눈길이 향한 곳에는 눈토끼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귀족. 백설토 후작이 쩔쩔매는 얼굴로, 양 파벌의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백설토 후작님은 미성년자일 적에 똑같은 미성년자를 살해했어요. 후작가에선 유가족한테 합의금을 전달했지요. 한 쪽은 왕도에서 잘 나가는 대귀족 가문. 다른 한 쪽은 평범한 자유민 가족. 말이 합의금이지, 뭐 실상은 통첩이겠지요?”
그랬을 것이다.
“죄인은 범행 당시에 미성년자였어요. 심지어 귀족인 데다 피해 유가족과 합의한 사실까지 있네요. 이러면 백설토 후작님이 받게 될 형량은…… 글쎄요? 아무리 때려 박아도 기껏해야 폐작(廢舊)일까요? 짜잔. 그게 법에서 보장하는 처벌이에요.”
자수정 자작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반대로 유가족은 망했지요.”
“…….”
“귀족 가문과 달리 평민 가족이란 건 놀라우리 만치 쉽게 망가지거든요. 그 가족. 손녀와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세 명이서 살았어요. 백설토 후작님한테 살해당한 손녀가 유일한 자손이었어요. 그런 손녀가 죽었고요.”
자수정 자작이 귓가에 속삭였다.
“아시겠나요, 김공자 씨? 그 가족은 망했어요. 망가졌어요. 부서졌어요. 합의금으로 억천금을 받은들 무슨 소용일까요? 부서진 아이의 육신을 황금으로 조립할 수 있나요? 위대하고도 존엄한 왕국법에 따라, 아아, 선량하시고 공정하신 재판장 각하의 위엄에 따라, 기적적으로 백설토 후작님을 폐작시키는 데 성공하면, 그걸로 유가족의 한은 다 풀어지나요?”
“…….”
“내 삶을 망치고 내 가족을 망가뜨린 죄인. 설령 그 죄인을 죽여버린다 해도, 원한은 풀리지 않아요. 생각해보세요. 손녀가 죽었어요? 어느 겨울날, 새하얀 눈밭 위에서, 귀족이 휘두른 채찍질에 등살이 파이고 등뼈가 아작나서 죽었어요. 그게 꼴랑 죽음 한 번으로 퉁쳐지겠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자작의 말을 이해했다.
그건 살천성을 거둬들이면서 내가 한 고민과 결을 같이했다.
이미 죄를 지어버린 자들. 그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망가져버린 인생에 보답할 수 있을까?
흑룡주 같은 선인조차 손에 무수한 피를 묻혔다. 나는 그런 흑룡주와 우정을 나누고 있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올바르지 않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고통.”
탑의 주인은 대답했다.
“오직 고통만이 유일한 해답이에요.”
그녀는 내 옆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녀를 잃은 고통. 손녀가 없어지고 나서 살아야 했던 지난 6년의 고통. 손녀를 다시는 보지 못할, 남은 인생의 고통. 그 모든 고통과 [정확히 똑같은 고통]을 죄인에게도 돌려주는 것. 그것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법도이며, 소인이 왕국에서 이루고자 하는 법률이에요.”
자수정 자작은 마치 아끼는 후배한테 조언해주는 선배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 보라색 눈동자는, 아무리 상냥한 배려라도 악의 어린 저주처럼 비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겠지. 자수정 자작은 후배를 아끼는 선배로 보이기도 했으며, 행인을 유혹하는 악마로 보이기도 했다.
“소인은 이 왕국을 고통의 율법 아래에 다시 건국할 것이에요. 왕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세계 또한. 소인의 발이 거닐고 소인의 눈이 비치는 삼라만상 전부를.”
“…….”
“탑은 그러기 위한 수단이에요.”
나는 말문이 잠시 막혔다.
“그런 일이…… 가능해요?”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드는 데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미치는 거. 미쳐서 망상에 빠져, 공상 속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면 돼요.”
“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권력자가 되는 것이에요.”
자수정 자작은 키득거렸다.
“권력이란 소유하는 거예요. 지배하는 거지요. 소인은 여섯 명의 공작님을 홀리고 한 분의 폐하를 유혹했으며, 세 명의 용제를 사로잡았어요.”
자수정 자작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오직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
툭.
툭.
자수정 자작은 의자 팔걸이를 두 번 두들겼다.
“…….”
그러자 자수정 파벌의 귀족들이 일제히 이곳을 쳐다보았다.
“…….”
아루호 백작을 노려보던 사람들이 툭, 툭, 팔걸이가 두 번 울리는 소리를 들은 즉시 하던 행동을 멈추었고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이 보낸 신호에 고개를 돌렸다.
반대 파벌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계속 떠들었지만, 상대방들이 한꺼번에 시선을 돌리니 이들도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반대편의 귀족들이 자수정 자작을 돌아보게 되었다.
귀족들이 한 곳을 쳐다보자 술을 서빙하던 시종들이, 음악을 선곡하던 연주자들이, 또한 자수정 자작을 바라보았다.
13초.
드넓은 휴게실에서 수백 명의 인간이 오로지 자수정 자작을 보게 된 데 걸린 시간이었다. 사나운 고성과 교묘한 비아냥, 차가운 분노가 일순 정지하였다.
사방이 조용했다.
“친애하는 귀족 동료 여러분.”
수백의 시선을 받으며 자수정 자작은 입술을 열었다.
“쉬기 위해서 휴게실에 나왔을 텐데 여기서도 열심히 토론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연 왕국의 일원으로서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네요. 과연 의회에서 여러분께 잔업수당이나 지불해줄지 걱정이에요. 돈도 안 나오는데 이런 곳에서 잔업이나 하고 있을 순 없지요.”
자수정 자작은 내 어깨를 디딤대로 삼아 일어났다.
“휴식은 충분. 이만 대의회장으로 돌아가서, 본업을 재개하세요.”
그와 동시에 자작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이 벌떡 일어섰다.
그들이 일어서고 남은 자리에 빈 술잔, 아직 덜 빈 술잔, 채 입술에 대지도 않은 술잔이 덩그러니들 남았다. 귀족들은 일망의 망설임도 없이 자수정 자작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평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자라는 걸 감안하면, 참으로 기이한 장면이었다.
“자아.”
기이한 광경 속에서 자수정 자작은 나의 손목을 잡았다.
“김공자 씨.”
“오늘 밤, 소인이 기적을 보여드릴게요.”
자수정은 환히 웃고 있었다.
21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