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20)
1.
왕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바치자고 얘기할 때, 자수정 자작은 환히도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불현듯,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을 전부 떠올렸다.
‘그래.’
단순히 내가 김공자라는 사실, 마천의 소교주이자 이반시아가의 달이라는 것을 넘어서, 이 트라우마에 빠질 적에 지켜봤던 환시(幻視)들이 기억난 것이다.
‘나는 탑주의 인생을 거의 다 훑어봤다.’
자수정이 귀족위에 오르던 순간.
처음에 남작위를 받아서, 왕도를 순식간에 정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어, 자신과 동성인 친척과 결혼하던 순간.
‘어느 기억에서든 자수정 자작은 웃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자작이 행복하게 웃는 순간들까지 전부 보았다.
내 능력은 [트라우마]를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뿐만이 아니야.’
나는 자수정이 결국 공작위를 받는다는 것까지도 보아 알고 있었다.
이 다음 시점조차도, 나는 이미 한 차례 [보았던] 것이다.
‘어째서?’
나는 왜 자수정이 행복해하는 순간들까지도 보았는가?
나는 왜 이 다음 순간까지도 보았는가?
‘설마….’
자수정 자작의 권능을 알게 된 나는, 어느 가능성에 대해 깨달았다.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가능성이었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떠올리는 일조차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4000일의 회귀를 자행한 자로서 용이하게 해답에 도달할 수 있었다.
‘탑주는 인생 전체가 트라우마다.’
그녀가 아무리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고 해도.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 이 때까지, 쭉, [트라우마가 아닌 시간]이 없는 거야.’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부지불식간에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자수정 자작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이 황금률이라는 것을 집행할 생각입니까?”
자수정 자작은 미소를 지었다.
“영원히요.”
“이 지상에서 억울한 백성이 한 명도 없어질 때까지 말입니까?”
“예. 굳이 백성뿐만이 아니에요. 소인이 자문사, 아니 공자 씨한테는 말씀드렸지요?”
자수정 자작이 내게 몸을 기대어,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소인은 왕국을 넘어서 모든 세계를 망라할 것이라고.”
“…….”
“죄송하지만, 공자 씨의 기억을 엿보았어요. 공자 씨도 지금 소인의 기억을 엿보고 있는 거니까 서로 괜찮은 거래를 한 셈이네요.”
예상했다.
자수정 자작에겐 상대방의 지난날을 직관하는 권능이 있다.
나 같은 이레귤러가 나타났는데, 내 과거를 들춰보지 않았을 리 없다.
“마천(魔天)의 소교주라. 흥미로운 집단의 수장을 맡고 계시네요, 공자 씨. 하긴. 그만한 인연이 있어야 이만큼 고와질 수 있겠어요.”
자작은 아끼는 후배를 바라보듯 나를 보았다.
“소인을 막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요.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따위, 당신 같은 사람이 용납할 리 없지요. 하지만 공자 씨. 부디 자신의 직책에 충실해주세요.”
직책.
“당신은 누구보다 힘없는 백성들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사람이에요. 누구보다 앞장서서 황금률을 집행해야 하는 사람이지요. 약자들의 비명을 대신하는 것. 그것이 당신이 짊어진 업이 아니던가요?”
“저는…….”
“막으려 들지 마세요. 이건 경고예요.”
자수정 자작은 내 귀를 매만졌다.
“소인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면 무심코 망가트리는 버릇이 있거든요.”
“…….”
“소인을 막으려 한 사람이 공자 씨가 최초라고 생각하진 않겠지요? 저 옥좌에 앉아계신 폐하께서 얼만큼의 옥루를 흘리셨는지 아시나요? 소인이 연인들한테 받은 눈물만 모아도 내년에 가뭄을 걱정할 일이 없을 정도예요.”
그건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내게 보낸 경고 또한 허풍이 아닐 것이다.
신은 인간을 망가트리기 전에 언제나 한 번은 경고하기 마련이므로.
이미 한 차례, 탑주는 내가 트라우마를 보고자 하는 것을 경고하여 막으려 한 바 있었다.
“당신은…….”
그리고 나는 그때처럼, 경고를 감안하고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렇게 해서, 행복합니까?”
“예.”
작은 손톱이 내 귓가를 살며시 긁었다.
“보면 느껴지지 않나요? 소인은 즐거워요. 소인은 연인들의 행복을 소유했고, 불행을 소유했어요. 저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데엔 소인의 미소 한 번으로 충분하고, 저 아이들이 불행해지는 데엔 소인의 눈짓 한 번으로도 족해요.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할까요?”
“앞으로 쭉 고문당하더라도?”
“앞으로 쭉 고문당하더라도.”
“어째서… 당신은 아픈 것조차 행복으로 받아들입니까?”
자수정 자작이 미소를 지었다.
“아픈 것은 아파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달콤한 보상이 눈앞에 있어요.”
“무엇입니까?”
“소인의 연인들이 흘릴 눈물. 소인이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면서, 무너져내릴 심장과 망가져버릴 얼굴. 너무나도 달콤해서 계속 지켜 보고 싶은 광경일 테지요.”
“……당신은 연인들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에 빠트리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소인이 사랑하는 아이들은 전부 누군가를 죽이거나 망쳐버린 인간들이지요.”
“…….”
“그런 아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정의 아닌가요?”
“…….”
“말씀드렸잖아요, 공자 씨. 소인을 설득하려고 한 사람은 공자 씨가 최초가 아니고, 최후도 아닐 거예요. 소인은 이 순간을 위해 소인을 만들어왔어요.”
“만들었다……?”
“예. 불행을 탐닉하는 취미. 망가진 이들을 보고 아름다워 하는 취향. 그들을 함락시킬 정도의 외모와 언변. 재능.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업적과 아무도 항의하지 못할 실력. 그 모든 것을 소인은 이루고자 노력했으며, 이루었어요.”
“…….”
“증명해 드릴까요?”
바로 그 순간, 의석 한가운데서 소란이 일어났다.
“환란은 모두 지났어!”
머리에 뿔이 달렸으며 덩치가 무척 큰 귀족이었다. 덩치만큼이나 목소리도 우렁차서, 귀족이 일갈하자 양수의 수면이 일렁거렸다.
“반란은 진압되었어! 큰 난리는 모조리 끝난 거야! 우리는 이제 그 뒷수습을 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런 극단적인 법률까지 준비할 필요가 어디에…….”
나는 구원하 남작의 정보마법을 이용하여 귀족의 신상을 읽어내렸다.
+
[파산우(破山牛)]신분: 귀족. 변경백.
관계: 자작의 정적.
위험도: 백白.
비고: 소 백작령의 가주. 과거, 다른 가문의 영애를 납치하는 사건에 깊이 개입했다. 납치를 방조하거나 방조했으며 결과, 봉지 중 한 곳이 통째로 파멸해버렸다. 동북에 광산업으로 유명한 곰 백작령을 이웃으로 두고 있다. 이웃 영지에서 도망쳐오는 광노(鑛奴)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다시 곰 백작령에게 넘긴다.
중립.
죽일 수 있다.
+
파산우 백작뿐만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아니…….”
자수정 자작과 또래로 보이는 귀족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귀족은 법안 서류를 낱장으로 넘기다가, 두 장, 석 장, 넉 장을 한꺼번에 넘기기 시작했고, 마침내 서류를 통째로 쥐었다.
“자작 파벌의 의원들은…… 당신들은? 이걸?”
자수정 자작의 뒤편에 배석한 자들은 아무런 대답도 안 했다. 그러자, 귀족이 이빨을 악 물었다.
“나와 나이차도 얼마 없는 여자아이를,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아니. 여자아이가 아니라도 똑같아. 어떤 논리든 상관없어. 나는, 이 법안이 싫어. 그냥 싫어!”
나는 그 귀족의 정보 또한 읽었다.
+
[선조해(鮮潮普)]신분: 귀족. 근경 후작.
관계: 없음.
위험도: 백白.
비고: 게 후작령의 가주. 어린 시절 모험심이 투철하여 바다를 떠돌았고, 그때 기뢰룡을 만나 저주를 받았다. 기억을 상실했으며 자아를 망실했다. 영애의 철없는 행동으로 인하여 후작가는 가운이 기울어졌고, 이후 용국에서 암수를 뻗어 후작가와 후작령의 기반을 침식했다.
겉모습에 비해 자아의 연령은 13살 이하다.
자신의 영지에서 반란군이 집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리지 못하여, 동쪽 바다에서 큰 반란이 일어나는 것에 일조했다.
중립.
죽일 수 있다.
+
이후로도 많은 귀족들이 입을 열었다.
그때마다 나는 정보를 읽었고, 어느 정보에서도 [동일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없어.’
단 한 명도 없다.
‘죄가 없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
그것은 이 몸의 원래 주인.
구원하 남작이라는 자가 써내린 기록이었다.
‘이 넓은 의회에. 한 사람조차.’
백설토 후작은 아이를 살해했다. 순흑신 자작은 식인을 행했다. 대하란 자작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파산우 백작은 봉지 하나를 말아먹었다. 선조해 후작은 반란을 막지 못했다. 해명섬 남작은, 무위식 공작은, 태양왕은……..
누구는 무지했다. 누구는 무능했다. 누구는 다만 무관심했다. 백 명의 귀족이 백 개의 사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 개의 사정에 대해 다시 천 마디의 변명을 늘여놓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공통점은 분명하다.
이 중에.
죄를 범하지 않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
“여러분.”
그러기에 자수정 자작은 여유로운 것이다.
“여러분은 지난 천 년 동안, 특히 육백 년 동안, 더욱이 육십 년 동안, 너무나도 게을렀어요.”
이 중에 누구도 자수정 자작보다 더 많은 백성을 구하지 못했다.
“곰 백작령에서 수만 명의 아인종 노예가 광석을 캐내며 죽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했나요? 몰랐나요? 간섭할 힘이 부족했나요? 준비가 되지 않았나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변명이 통용되기엔 수백 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어요.”
이 중에 누구도 자수정 자작보다 유능하지 못했다.
“환란이 모두 지났다? 반란이 모두 끝났다?”
“…….”
“눈에 띄는 적들을 타도하였으니 환란은 다 지나갔나요? 그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나요? 여러분.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만 참고 있는 것이에요. 등에 채찍을 맞아본 자는 결코 자신이 받은 아픔을 잊지 않아요.”
그렇다.
“가족이 죽은 자는 결코 그 무덤을 이룬 흙의 온도를 잊지 않아요.”
그러기에 이 세계가 아닌 어떤 세계에서, 천마님, 이라고 누군가는 절을 올렸다.
“마차를 피해 길의 가외로 피해야 했던 이는 그 굴욕을 잊지 않아요. 징병 당해 돌아오지 못한 아들이 침대에서 누워 자던 어느 날의 모습을 어미는 결코 잊지 않아요. 먹을 것이 없어 벗겨 먹어야 했던 겨울 날 나무 껍질이 할퀴고 지나간 입 안의 아픔을 사람은 결코 잊지 않아요.”
그리하여 천마님, 이라고 누군가는 절을 올렸다.
그리하여 천마님, 이라고 누군가는 절을 올렸다.
그리하여 천마님, 이라고 누군가는 절을 올렸다.
“그들이 사라졌나요? 전부 지나간 이야기인가요? 그들의 원한은 해묵은 것이어서 해소할 필요가 없고, 그들의 원망은 지루한 것이어서 들어줄 가치마저 없나요?”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러기에 그들은 절을 올렸던 것이다.
“웃기지 말라고 하세요.”
이 세계도 다르지 않다. 어느 세계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절을 올리고 있었다.
이 세계 또한 그러하다.
신월석 남작구에서 누가 건드리지도 않은 돌이 저 스스로 굴렀다. 반석의 영토에서 멋대로 돌멩이가 돌아다닌 것이니 흉한 징조라며 백성들이 수군거렸다.
그리고 백설토 영애는 평민의 아이를 채찍으로 때려 죽였다.
대하에서 밤마다 까닭 없이 강물이 끓었다. 수로마다 개구리가 뛰어오르더니 머리를 꼬라박아 죽었다. 왕도에서 하루에만 날벼락이 스물여섯 번 내리쳤는데, “숫자 열셋이 위아래로 겹쳐 스물여섯을 이루니 흉조다”라고, 북문의 점쟁이가 지껄였다.
그리고 대하란 자작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함부로 나라의 길흉을 점쳤으므로 점쟁이는 죄가 컸다. 왕도경비대가 점쟁이를 끌어내어 모가지를 쳤다. 그 날, 아직 장마가 오지 않았으나 강물이 크게 범람하여, 왕도로 통하는 길이 사방팔방으로 막혔다.
그리고 태양왕은 궁궐에서 나오지 않았다.
“여러분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지난 시간의 책임을 져야만 해요.”
흉년이 거듭했다. 돌림병이 연이었다. 세월은 썩은 척추와 같아, 거듭되고 연이어지는 마디마다 고름이 고였다.
범람하는 강물 위로 백성들의 주검이 흘렀다.
“이 모든 사태를 누군가가 의도했고 방치했으며, 그리하여 만 백성들이 규탄하여 마땅한 자를, 여러분은 골라야 할 것이고.”
무너져 가던 세계의 한복판, 어느 십이월에, 소녀 형상의 기둥이 있어 그것을 떠받치고자 했다.
“여러분은 소인을 고르게 될 것이에요.”
양수가 침묵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선조해 후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건, 싫어.”
자수정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그리고 말했다.
“달리 어떤 결말이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했나요?”
2.
이 몸의 원래 주인은 필사적으로 찾았을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좋다.’
구원하 남작은 자수정 자작을 사랑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그 연유를 보지 못했으나, 남작이 남긴 글귀에서 그녀의 사랑이 지니는 무게를 느낄 수는 있었다.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이 빌어먹을 왕국의 지배자들 중에 무죄한 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남작은 기록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법을 이용하여, 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적을 조사했고, 조사한 바를 적었다.
그녀의 몸을 이어받은 나 역시 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을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정보를 읽어내렸다.
하지만 구원하가 남긴 기록은 변치 않았다.
‘살인자.’
학살자.
‘반란을 일으킨 자.’
민란을 탄압한 자.
‘노예를 산 이.’
노예를 판 이.
‘무지하여 잘못을 범한 자.’
무능하여 잘못을 만든 자.
구원하 남작이 기록해 놓은 정보는 죄상의 폭로문이었다. 양수에 담긴 수백 명의 발 중에, 백성의 피를 머금지 않은 발이 없었다.
그리하여 구원하 남작은 포기한 것이다.
자신의 주인을, 막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지금 몸의 통제권을 되찾은 이유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움직였다.
“어라?”
자수정 자작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 앞을 막고 선 날 되비치고 있었다.
“경고하지 않았던가요, 공자 씨? 저는-”
“트라우마.”
내가 말했다.
자수정 자작이 고개를 한층 더 기울였다.
“네?”
“자작. 저는 당신의 트라우마를 보았습니다.”
“알아요. 지금도 보고 있잖아요?”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닙니다. 당신이 남작위를 처음 하사받던 순간, 부인과 결혼하던 순간……. 저는 당신의 인생을 거의 전부 훑었어요.”
나는 자수정 자작의 손목을 잡았다.
“만일 당신이 정말로 행복하다면, 그 광경들이 제 눈에 비추었을 리 없습니다.”
“글쎄요?”
자수정 자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최근 들어서야 좀 행복해지기 시작한 걸지도 모르잖아요? 이래 봬도 소인의 인생, 역경이란 고난은 죄다 전시되었거든요. 오늘부터 진정한 행복 시작이지요.”
“아닙니다.”
당신의 미소는 그 날부터 변한 것이 없다.
“저는 당신이 결국 공작위를 받는다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당신의 미소는 그 후로도 변한 것이 없다.
“오늘도, 오늘 이후로도, 계속해서 당신에겐 트라우마의 시간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건 이상한 말씀이네요. 사왕(死王).”
자수정 자작은 내가 한 번도 알려주지 않은 나의 이명을 불렀다.
내 과거를 읽었다는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설마 소인이 사실은 불행하고, 말로만 행복하다 흉내낼 뿐이라는 건가요? 좀 기분 나쁜데요. 애당초 소인이 그런 거짓말을 했다면 소인의 연인들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지요? 저는-”
“[결코 회귀하지 않는 신].”
나는 자수정 자작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의 일생 전체가 고통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연해요.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다른 누군가의 과거]를 보고 있으니까요. 백설토 후작의 과거를 보았고, 대하란 자작의 과거를 보았으며, 제가 모르는 새 저의 과거까지 보았습니다.”
즉.
“당신은 단 한 순간이라도 누군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게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어요. 그래서 당신은 일생이 수억의 트라우마로 얼룩진 것입니다.”
더 가까이.
“하지만, 이상하지요. 당신이 [황금룡의 눈]과 [빙하룡의 숨결]을 얻은 시점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다른 사람의 과거를 마음대로 엿 볼 수 있게 된 건 의외로 얼마 안 지났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일생 전체에 걸쳐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수정 자작이 용들을 거둬들이지 않았을 때의 시절 역시 보았다.
그때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읽으며 고통스러워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 시절의 자수정에겐 용들의 권능이 없을 텐데, 어떻게 지금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고통을 이식받았는가?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다.
“[결코 회귀하지 않는 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
“당신은 [계속 회귀하는 신]이에요.”
나는 어린 귀족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용의 권능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다른 이의 트라우마를 볼 수 있었어요.”
무위식 공작과 마주했을 때 자수정 자작은 순식간에 공작의 인생을 간파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양왕을 접견했을 때 자수정 자작은 이미 국왕의 삶을 알았다.
오래 전부터 짐작했다는 듯이.
“당신은 끊임없이 지금의 삶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
“회귀해서, 돌아가고. 돌아가서, 똑같은 삶을 살고 있어요. 그때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부 아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이 삶을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
“그래서 당신은 일생이 전부 트라우마인 것입니다.”
자수정 자작이 침묵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몇 번째 인생을 반복하고 있습니까, 탑주?”
자수정 자작은 웃지 않았다.
“몇 번째인지 세어는, 봤습니까?”
무표정했다.
어느덧 대의회장의 시간은 정지해 있었다.
분통해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는 선조해 후작도, 아무런 말없이 그저 앉아 있던 태양왕도, 전부 멈추어 있었다.
“공자 씨.”
시계가 망가진 시간 속에서 자수정 자작은 입술을 열었다.
“피안으로 흐르는 강물의 모래를 세어본 적이 있나요?”
항하사恒河沙.
“소인의 대답은 정해져 있어요.”
자수정 자작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무표정했던 것처럼 얼굴에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그것이 본래 그녀의 얼굴인 양했다. 보라색 눈동자는 무심하게 세상을 비추었고, 입술은 무언가를 조롱하지도, 축복하지도, 비웃지도 않았다.
“영원히요.”
그 순간, 풍경이 깨졌다.
22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