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22)
1.
돌이켜보건대.
자수정 자작은 내게 분명히 경고했다.
-소인을 막으려 들지 마세요. 이건 경고예요.
아직 내가 자작의 자물쇠를 열어버리기 직전.
그녀는 내 손에 자물쇠가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만일 자작이 무뢰한이었다면 열쇠를 아예 못 쓰게 만들겠지. 내가 건네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내가 찌르는 심문에 정답을 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수정 자작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고.
그러지 아니했다.
그녀는 다만 담담히 예고했다. 내가 열어젖힌 자물쇠는 어떤 비밀스러운 방으로 이어질 것이며, 그곳에서 상처를 입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니라 내가 될 것이라고.
-소인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무심코 망가트리는 버릇이 있거든요.
나는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 신이 경고한 대가를 받았다.
2.
-유수하 씨.
낯익은 술집.
어두컴컴한 공기.
탑 1층에는 비싼 주점이 많았다. 완전히 본격적으로 경영하는 술집이야 뭐, 바깥세상과 다를 바 없이 꾸며놓고, 바깥세상에서도 고급으로 통하는 술병들을 잔뜩 수입해와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가격으로 팔아댔다.
바가지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나 바가지 긁히는 걸 어깨 마사지쯤으로 달게 받아들이는 고객들이 있는 법. 아무리 비싸도 사겠다는 손님은 줄을 섰다.
이제는 돌아가지 못할 고향. 바깥세상.
마치 잠시간 바깥의 평범한 술집에 들려,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환상은, 금화를 몇 푼이나 쏟아붓더라도 만끽할 가치가 있다.
-유수하 씨.
-아아앙…?
유수하가 깨어난 주점은 맥주집.
소위 호프다.
드넓은 바빌론에서도 한국식 호프를 구현해놓은 가게는 오직 한 군데밖에 없다. 가게에는 큼직한 냉장고가 박혀 있고, 냉장고 안에는 익숙한 상표의 맥주캔이 나래비로 놓여 있다.
싸구려 은광을 뽐내면서 괜히 쿨한 느낌을 살리겠다며 푸른색 글자로 브랜드명을 과시하는 맥주캔. 촌스러운 금빛 테투리를 두른 주제에, 꼴에 금색이라며 자신의 고급성을 과시하는 맥주캔. 등등.
우습게도 어느 브랜드든 라벨에 한글이 쓰여 있지 않았다. 죄다 영어였다.
-아, 또 뭐야…….
유수하에겐 그 맥주캔들이야말로 고향의 증거였다.
그가 살다 도망친 나라는, 자기 나라 글자를 사랑한다 소리높여 말해야만 했던 곳이다. 달리 말해서 고향의 글자는 그다지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곳에서 태어난 모든 것이 사랑을 받지 못했다.
국민은 국민을 싫어했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싫어했고,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를 싫어했다.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학교(學敎)라는 건물을 세웠다. 거기서 또 싫어했다.
-왜 깨우는 건데, 왜애……?
유수하가 그 나라에서 배운 교리라고는 사람을 싫어하는 방법뿐.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나,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자라났다. 달리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수학? 언어? 도덕 시간만큼이나 쓸모없다. 본질적으로, 유수하가 그곳에서 배운 것은 증오뿐이다.
자신들을 임신해서 낳은 부모들 가운데 대체 몇 명이나 소리높여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을 좋아합니다]라고.몇 명이나 되는 부모가 아무런 거짓 없이, 인간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겠는가.
부모뿐만이 아니었다.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다. 6년, 3년, 3년, 자그마치 12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선생들이 유수하의 시간을 점유했다. 그 사람들이 내쉬는 숨을 유수하는 자신의 폐로 이식받았다.
유수하는 묻고 싶었다.
[선생님은 정말로 인간을 좋아합니까?]아마도 아니겠지.
하지만, 정반대의 질문에 대해선 간단히 반응을 예상할 수 있었다.
[여러분은 인간을 싫어합니까?]그럼 자신의 부모가 제일 먼저 손을 들 것이다. “예.” 내 옆의 동급생 뒤에 선 학부형도 손을 들 것이다. “예.” 마침내 모든 학부형과 학생들이 손을 든 가운데, 마지막으로, 교탁에 선 선생님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다.
-물론 저도 인간을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엿 먹으라고.
-유수하 씨, 완전히 취하셨네요.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작은 손이었다.
-여긴 교실 아니에요. 유수하 씨. 소인이 보여요?
-아, 씨이바아알…. 좆 같네, 싸앙…. 뭔데…… 뭐야? 어디야……?
-그래요. 사실 여기는 학교예요. 예. 유수하 씨가 다니는 고등학교 교실이 맞아요.
-언제는 학교 아니라매애애……?
-세상에 어떤 학교에서 급식으로 맥주캔을 주겠어요.
툭.
누군가가 탁자 위로 거대한 맥주캔을 두 짝 내려놓았다.
술에 취한 유수하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리고 술에 절은 눈동자로 자기 코앞에 박힌, 거대한 두 개의 기둥을 바라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으버버어……?
-맥주예요. 유수하 씨가 없으면 죽겠다고 노래를 부르는 한국산 맥주요. 소인이 생각하기엔 이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맥주를 꼽으라면 바로 이 자리에 강림한 요 맥주들 아닐까 싶지만, 어느 섬나라 사람들도 자기 고향 음식을 사랑한다는데, 한국맥주를 제일 맛나게 쳐 마시는 인종도 한두 명쯤 있겠지요. 자아. 쳐드세요.
-우어어어… 워따여…….
유수하가 흐물흐물거리는 손으로 맥주캔을 쥐었다.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와 몹시 차가울 텐데, 유수하는 신경 안 썼다. 얼른 캔을 따버린 다음, 맥주를 자신의 목구멍으로 벌컥벌컥 쑤셔넣었다.
-파하아아아아!
-좋으세요?
-휘우. 우우, 좋다. 좋아. 아! 좋다. 여기 어디야?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말해봐! 우리 매니저님!
-첫 번째로, 지금 유수하 씨는 학교 야자를 쨌어요. 그리고 친구들끼리 스쿠터를 타면서 저 멀리 삼청동의 술집 거리까지 갔지요. 소주는 너무 안 땡기니 맥주나 마시자며, 왠지 그럴싸해보이는 호프집으로 들어왔고, 거기서 꽐라가 될 때까지 쳐마신 것이에요.
-꽐라! 꽐-라! 꽈아알라!
유수하는 고대의 야만적인 전사가 된 기분으로 맥주캔을 흔들었다.
맥주캔은 자신의 몸통에 담긴 액체를 오바이트했고, 유수하는 기꺼이 디오니소스께서 하사하신 성수를 머리통째 받았다.
유수하는 신경 쓰지 않았으며, 술집 주인도 신경 쓰지 않았고, 유수하한테 말하고 있는 어느 누군가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번째 가능성은, 유수하 씨가 더는 고등학생도 아니며, 여긴 삼청동의 싸구려 술집거리도 아니거니와, 심지어 한국조차 아닌데, 이미 S급 헌터가 된 유수하 씨가 괜히 고향의 풍취를 느껴보겠다며 쓸데없이 호프집에 돌격해서 꽐라가 될 때까지 퍼마셨다는 것이에요.
-으음.
-어느 시나리오가 더 마음에 드시나요, 유수하 씨?
-지금…… 바깥세상 날씨가 어땠더라……?
-지금 한반도 날씨는 한마디로 말해서 장마. 어제 내린 비가 오늘도 내리고, 오늘 내린 비는 오늘 두 번 내려요. 찝찝한 수증기가 온 동네에 영글어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데, 이 길거리를 지나치면 저절로 스트레스 수치가 -1, -1, -1, 씩 도트뎀을 받아버릴 거예요.
-나 우산 가져왔나……?
-없지요. 소인도 없어요.
-시발. 그럼 뭐 두 번째 가능성으로 해! 씨발!
유수하는 한 캔을 더 비워버리고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사장님! 크허프, 음. 여기 계산이요!
-계산이고 나발이고 일단 이직보행부터 제대로 해주세요.
한 소녀가 유수하의 지갑을 낚아챘다. 지갑에는 한국은행에서 찍은 지폐들이 수두룩 접혀 있었다. 지폐의 숫자를 헤아린 다음 소녀가 물었다.
-얼마 나왔나요, 사장님?
-형씨가 많이 잡수었어. 안주값 더해서 6만 원 나왔네.
-세상에.
소녀가 뒤를 돌아보고 유수하를 노려봤다.
-그렇게 많이 처드셨어요?
-미안. 나 지금 트름 나올 거 같다….
-트름이 아니라 알콜을 도로 내뱉지요, 왜. 그럼 할인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안주 다섯 개에 맥주캔 11개를 시켰는데. 그럼 그게 뱃덩어리 안에 다 들어가요?
-우, 그으…… 그읍, 흡, 훕…… 큽! 웨에에엑! 크웨에에에엑!
-미친.
소녀는 표정이 썩었다.
-저건 소인이 치울게요. 주인장.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저것도 다 서비스의 일환인데요. 아무튼 6만 원 받겠습니다.
소녀는 지갑에서 한국지폐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술집의 환상]을 만들어주는 묘기가 펼쳐졌다.
-한화 10만어치 지폐 당 금화가 1닢이지요?
-요즘은 잠깐 시세가 더 높아졌습니다. 한국돈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아요.
주점 주인이 속삭였다.
-중국돈이나 일본돈은 쉽게 끌어올 수 있는데, 한국돈은 정말 바벨탑에선 수집용 이외에 목적이 없으니까…….
-금화 2닢 더 드릴게요. 돈뭉치 넉넉히 챙겨주세요. 그래야 손님들이 많이 썼을 때 한국돈으로 돈 내고 한국돈으로 돈 받잖아요. -아이고, 역시 유수하 씨 매니저님입니다. 어쩜 그리 똑똑하시고 저희 가게 사정까지 빠꼼하게 살펴주실까.
술집 주인이 작은 소녀에게 연거푸 머리를 숙였다.
그렇다.
바벨탑에서 술집이란 [마술]의 공간.
이곳은 한국이다. 오직 한국돈만 받고 한국돈만 낸다. 그리하여 손님은 한국 호프집에 흔히 들어온 맥주들을, 자국산 맥주, 벨기에식 맥주, 중국 병맥주를 맛볼 수 있다. 또한 주방장이 직접 요리한 순살치킨과 양념치킨, 맛이 미묘한 피자까지 즐길 수 있다.
-최근 들어 대한해협 상의 군사도발이 날이 갈수록 격화되는 가운데…….
심지어 술집의 텔레비전에선 바깥세상 뉴스, 그것도 한국 뉴스가 흘러나온다.
그건 기묘한 광경이었다.
이 한국풍 맥주집의 메뉴에는 한국술이 얼마 없었다. 얼마 없는 한국술도 브랜드명은 전부 영어였다. 안주는 치킨이거나 피자였고, 어느 쪽도 한국에서 태어난 음식은 아니었다.
이 맥주집에서는 한국돈으로 계산을 치렀다. 앞에서만 말이다. 뒤에서는 금화와 한화의 교환가치를 세어가며, 한화라는 이름의 [카지노칩]이 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저기서 맥주잔을 부딪치며 건배! 외치는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중 어느 누구도.
나라를 버리고 탑에 들어온 자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모두 국적을 박탈당했다.
나라가 없는 곳에서 손님들은 어느 나라의 애국을 외쳤고, 나라가 없는 손님들이 정치에 대해 격앙하여 소리를 다투거나 때로는 우격다짐을 했다.
-유수하 씨.
실향자들의 도시.
-이제 술 좀 깨셨어요?
-어어, 뭐. 대충은…… 와. 평소라면 오러 한 바퀴 돌려서 숙취 싹 씻어내면 끝! 인데. 이게 오늘 약속이 걸려서 안 되네…… 나 술 마시다 뒈지는 줄 알았지 뭐냐.
-소인이랑 약속하셨으니까요.
소녀의 목소리를 한 누군가가 담담히 말했다.
-오늘 하루는 절대로 오러를 쓰지 말기로요.
-응, 뭐어……. 야. 쌍. 어쩌다 그런 약속을 해버렸지? 기억이 안 나는데.
-이번 스테이지 공략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흑룡주가 암살자들 이끌고 습격해올지 말지, 소인과 내기했잖아요. 유수하 씨는 습격한다에 걸었고. 소인은 습격 안 한다에 걸었어요.
-아아아, 아.
유수하는 눈썹을 찡그렸다.
-기억났다. 씨발. 흑룡주. 개 같은 새끼. 새끼 같은 개새끼. 야, 수정아. 너 그거 아냐? [개새끼] 라는 글자는 잘 보면 진짜 강아지를 그려놓은 거 같다? 와. [개]는 개 머리랑 앞발이고. [새]는 몸통이랑 뒷다리고. [끼]는 엉덩이랑 꼬리야. 봐. 개새끼. 와아. 나 천재다. 개새끼 진짜 개새끼 아니냐?
-그러네요. 유수하 새끼도 진짜 유수하 새끼예요.
-우우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셨다지만 그 어느 정도가 소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네요. 설마 유수하 씨. 내일 면접까지 까먹은 건 아니겠지요?
-내일…… 면저어어어업……?
-예.
소녀.
자수정의 모습을 한 헌터가 짧게 대답했다.
-매니저를 새로 뽑는 면접이요.
덥썩!
유수하가 자수정의 작은 어깨를 휘어잡았다.
-나 새로운 매니저 필요없다니까 그러네!
-아파요.
-야, 수정아! 너 나한테 뭐 섭섭한 일 있냐? 섭섭하면 말해. 말하면 이 오빠는 다 들어준다. 월급이 짜니? 아예 입안에서 짠물이 나올 때까지 현금을 들이다 부어줄까? 누가 너 괴롭혀? 어떤 새끼야, 이 좆만한 새끼들이…… 어? 아주 그냥 사지를 잘라다가 2층 사냥터 외진 곳에 던져버려야 지 주제를 알 새끼들이……. 어? 수정아! 나 통큰 남자야. 말하라고!
-소인.
-응! 뭔데, 뭐? 아무거나 들어줄게!
-힘이 없어서 물건 옮기는 게 힘들어요.
-…….
-키가 작아서 운전대 잡는 것도 고역이에요. 유수하 씨 뒤에 앉혀놓고 운전할 때마다 엉덩이랑 등이랑 목이 아파요.
-어어어…….
-매니저를 새로 들여와야 해요. 유수하 씨. 유수하 씨 같은 스타급 헌터한테는 어쩔 수 없이 인력이 필요해져요.
-그 짐 그냥 내가 들어주면 되지 않아?
-운전도 유수하 씨가 직접 하고요?
-응.
-괜찮겠어요?
-존나 폼 안 살겠지. 미안. 안 되겠다……. 이 오빠가, 다른 건 다 되는데 폼이 죽는 거 하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매니저 새로 안 뽑으면 소인은 과로사에 죽어버릴 지경이에요. 뽑으세요. 안 그러면 퇴직하겠어요.
-아! 아! 뭐! 뭘 퇴직까지 고려하시나, 자수정 대리!
-언제부터 저희들 사이에 대리라는 직함이 생겼나요?
-방금. 내 길드니까 내가 사장이고 내가 왕이지. 넌 이제부터 자수정 대리다.
-하아…….
자수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예정대로 내일 매니저 면접 심사에 들어갈게요.
-그거 나도 하는 거 맞지? 엉?
-당연하지요. 유수하 씨의 매니저를 뽑는 일인데요.
길드 건물로 돌아가자, 이미 화려한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
[세계랭킹 1위, S급 헌터, 바벨탑의 폭군, 헌터 유수하의 매니저를 모집합니다.]22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