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27)
1.
[나] 는.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홈런! 홈런!
-홈런입니다! 아아, 공이 시원하게 담장을 넘어갑니다!
유수하 길드.
바빌론의 노른자를 차지한 건물 2층 테라스에선, 한국야구를 중계하는 소리가 담담히 흘렀다. 어느 여름의 매미가 울어대는 듯 중계진들의 목소리는, 사람이 나누는 대화보단 저 멀리 흐르는 배경에 더 가까웠다.
“아.”
유수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긁적긁적 매만지면서.
조금 전, 유수하 스스로 머리통을 꿰뚫은 그 부위였다.
“야구 존나 재미없네.”
“…….”
“얘들아. 나 잠깐 술 좀 마시고 온다.”
유수하가 하품하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혼자 마시고 싶은 기분이니까 괜히 따라오지 말고. 외박하고 올 거니까 연락하지도 말고. 전화 걸어도 씹을 거니까 그런 줄 알아라.”
“과음하지 마세요. 유수하 씨.”
타닥, 타닥.
내 맞은편에서 자수정이 노트북 타자기를 두들겼다.
바빌론 광장에 떠도는 초여름의 바람이 자수정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소인이 또 유수하 씨를 찾으러 바빌론 전체를 순례하길 바라지 않는다면요.”
“오냐.”
유수하는 우리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등을 돌린 채 오른손만 흔들흔들거릴 뿐.
곧, 유수하의 뒷모습이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
나는 이를 꾹 물었다.
“자수정 매니저님.”
“예. 김공자 씨.”
“자수정 자작님.”
“예. 자문사.”
“탑주.”
“예. 사왕.”
세 번의 호칭이 오갔고 세 번의 이해가 오갔다.
“이게 당신이 저한테 보여주시는 가능성입니까?”
“그러해요.”
테라스 너머 광장에선 행인들이 북적거렸다.
내 세계의 현재에서 11년 뒤의 [미래].
혹은, 나의 현재로부터 11년 전의 [과거].
[만일 자수정이 있었다면]이라는 가정 아래에 성립된 세상.“……이런 세상보다.”
나는 자수정을 노려보았다.
“이 따위 세상보다, 제가 일구어낸 세상이 훨씬 평화롭습니다!”
“…….”
“뭡니까 이게! 엉망진창이잖아요! 흑룡주는,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혼자서 고독해요! 이단심문관도…… 밤볼리나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망가진 채, 자기가 망가졌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길드장들의 관계를 제자리로 돌려놨습니다!”
내 세상에서.
검성은 오만과 편견을 버렸다.
흑룡주는 성기사를 다시 친구라 여기게 되었다.
성기사는 과거의 숙청으로 인한 불신을 유보했다.
이단심문관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내게 머리를 숙였다.
서로 대화하게 되었으며, 서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길드장들은 여전히 자기들 권좌에 틀어박혀 있고, 탑은 여전히 엉망진창이고. 바깥세상에 휘둘리기만 해요. 이건…….”
“하지만.”
자수정이 고개를 들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나와 직선으로 마주했다.
“유수하 씨를 죽이셨지요.”
바람이 불었다.
“바꾸지 못하셨지요. 유수하 씨를.”
딸랑.
테라스 창가에 매인 풍경(風聲)이 울렸다.
“그건,”
“유수하 씨가 도저히 개심할 수 없는 악인이라서 그러했다?”
야구경기를 중계하는 배경음이 바람에 실려 흔들렸다.
“유수하 씨는 악인 중 악인이고, 싸이코패스 중 싸이코패스여서, 어쩔 수 없이 죽였다. 어쩔 수 없이 죽였으므로 나의 잘못도 나의 무능도 아니다.”
“…….”
“하지만, 보세요. 공자 씨.”
초여름의 바람에 풍경이 삭았고 배경이 고였다.
“이 세상에서 유수하 씨는 다른 사람을 위해 움직이고 있어요.”
염제는.
자수정이 죽고 내가 죽자, 스스로 [회귀]를 감행했다.
자신의 하루를 죽이는 대가로 24시간을 되돌렸다.
그리고 방금 [술을 마시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폭탄테러를 일으킨 범인. 만신전에 잠입해 있는 배반자. 흑룡주의 뒤를 찌른 암살자. 무엇보다, 자신을 공격한 성녀. 그들을 없애기 위해 유수하 씨는 지금 움직이고 있어요.”
자수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멀리 광장을 바라보았다.
“당신보다 악하고, 당신보다 덜 적극적이고, 당신보다 책임도 덜 질뿐더러, 당신보다 세상을 바꿀 의지도 없거니와, 당신보다 세상에 끼친 영향도 적지만. 김공자 씨보다 훨씬 더 못한 인간이지만.”
광장.
행인들이 북적거리는 거리 한복판.
어느 헌터의 검은색 뒷머리가 찰랑거렸다.
“그래도 다른 누군가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이 된 거예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었어요. 유수하 씨는.”
아아.
“당신이 유수하 씨를 죽였을 때. 김공자 씨의 어법에 따르자면, 유수하 씨를 [사냥]했을 때. 그 유수하 씨는 김공자 씨를 죽인 염제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염제의 과거인, 염제가 될지도 모를, 아직 어린 F급 헌터 유수하에 불과했지요. 어찌면 이 세상의 염제처럼 되었을지도 모를 유수하였던 거예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는.”
잇소리가 나왔다.
“저도, 그 녀석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녀석을 죽이지 않으려고 내가,
“저는 연극을 했습니다. 다짜고짜 죽인 게 아니라 기회를 줬습니다. 그 녀석이 상처 입은 사람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는지, 도움에 대가를 요구할지언정 부상 당한 약자를 해치려 들지는 않는지 어떤지를…….”
“마치 인간을 갖고 노는 신처럼, 그토록 [어려운] 시험을 말이지요.”
탑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어렵다니요! 저를 잠자코 치료해주기만 했으면, 죽이려 들지만 않았으면…….”
“그건 정말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요?”
탑주가 나를 바라보았다.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 돈에 쪼들리는 사람이 부상자를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것]은 정말로 [용서할 수 없고 개심할 수 없는 특별한 악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가요?”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과할 수 있다고요?”
정적.
“유수하 씨의 죽음은 아무런 뉴스도 되지 못한 채 사라졌지요. [하급 헌터의 실종]은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이것이 시사하는 바를 김공자 씨는 알고 있지 않나요? 본인이 하급 헌터였던 만큼?”
“…….”
“과연 사람들 중 몇 할이나 공자 씨의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
초여름의 향기가 독했다.
공기는 찐득했고 바람은 습했다. 주변에 떠도는 공기 자체가, 아직 사람이 숨쉬기 전의 공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이미 숨쉰 다음에 내뱉은 숨결 같았다. 내 폐에 들어오는 산소는 이미 여름이 한 번 되씹고 난 잔여물이었다.
“그래요.”
그 중에 보라색으로 물든 숨소리도 있었다.
“유수하 씨는 당신을 돕지 않았어요. 사냥터에서 쓰러진 당신을 구해주지 않았고, 도리어 해치려 들었어요. 당신을 죽이려 들었지요.”
“하지만, 아귀 씨는?”
자수정이 중얼거렸다.
“가을비의 마왕은? 아귀 씨도 당신을 죽이려 들었지요. 실제로 죽였고요. 수십 번, 수백 번, 아귀 씨가 휘두른 칼에 죽임을 당하셨지요. 가을비의 마왕이 흩뿌린 핏줄기에 대륙은 한 번 멸망했어요. 그런데도, 김공자 씨는 마왕에게 한 번의 삶을 더 허락했어요.”
아귀에게 삶을 주었다.
“금사매 영애는? 살천성 씨는? 이단심문관 씨는 어떠한가요. 흑룡주는 어떤가요. 검성은 어떠한가요?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살인자]가 아닌 자가 있으며, 단 한 명이라도 어린 유수하 씨보다 인간을 덜 죽인 자가 있던가요?”
“…….”
“사왕은 그런 사람들을 전부 바꾸었어요.”
하지만.
“유수하 씨를 제외하고.”
그 녀석만은.
“왜냐하면, 사왕. 당신은 영원히 모르는 채로 있을 수밖에 없어요.”
저 개자식만은.
“마왕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당신은 마왕의 과거를 엿보았어요. 도플갱어가 어쩌다 성녀가 되었는지. 성녀가 어쩌다 마녀로 몰렸는지. 마녀가 왜 마왕이 되어야만 했는지. 그 사람이 악이 되어버린 이유를 다 보았어요.”
어느 어두운 골목.
“살천성에게 죽었을 때, 당신은 김율의 과거를 봐버렸어요. 옥상에 지는 노을을. 운동장에 떨어진 석양을. 깨져버린 핸드폰과 잊히게 될 문자 메세지를 보았지요.”
아주 오래 전은 아닌 옛날에.
나는 서열 1위의 헌터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 헌터가 골목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당신은 검성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흑룡주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신을 죽인 사람들,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전부 알아버렸어요. 그래서 당신은 그들을 버리지 못해요.”
그 헌터가 나를 죽였다.
“오직, 유수하 씨의 과거만이 당신에겐 맹목으로 남아 있어요.”
개 같은 자식.
“당신은 유수하 씨의 트라우마를 영원히 엿볼 수 없어요.”
날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았는가.
“그리고, 엿보려 들지 않았지요.”
왜.
설명해줄 수도 있었잖아.
사정을 이야기해줄 수도 있었잖아.
“알고 싶어하지 않았지요.”
나는 그렇게 널 동경했는데.
너라는 새끼는 대체 왜.
“공자 씨.”
어떻게 나를 그딴 식으로…….
“당신은 유수하 씨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눈을 감아 어두워진 시야.
자수정의 목소리가 조용히 건너왔다.
“그래서 유수하 씨를 증오하고 있어요.”
정적이 흘렀다.
한국야구 중계음이 멈추었다.
바람이 끊겼다.
창가에 매달린 풍경이 정지했다.
시간이 흘렀다.
광장의 인파들 사이로 노을이 저며들었다.
노을에는 국적이 없었고, 노을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국적이 없었다.
“아니에요.”
나는 중얼거렸다.
“아니었다고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러차례 저었다.
“그 놈은 괴물이 됐을 거예요. 아무튼 괴물이 됐을 겁니다.”
열병에 걸린 것처럼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든, 뭘 경험했든 그 새끼는 괴물이 됐을 거예요. 죽일 수밖에 없어요. 죽여야만 해요.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구요. 날 위해서가 아니예요. 내 기분의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용납하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탑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그놈의 존재를 허락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나는.
“저는 그 새끼를…….”
나는 너를 동경하고 있었어.
“약했어요.”
“그때의 공자 씨는 약했던 거예요.”
심장이 울렸다.
“소인이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심장이 크게 울렸다.
“김공자 씨는 유수하 씨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어요. 용납하지 못했어요. 유수하 씨에게도 과거가 있을 테고, 사정이 있을 테지만, 알아볼 능력이 없었고 알아줄 여유가 없었어요. 단순히. 그때의 김공자 씨는 너무도 약했어요.”
탑의 주인이 말했다.
“약해서, 분하셨지요?”
“유수하 씨에 대한 열등감과 배신감. 자신의 살인에 대한 분노. 아무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 자신이 아무리 아끼고 동경해도, 상대에겐 결국 단 한 번도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초조함. 자기 자신이 절대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감각.”
나는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
“그러니 상대에게 의미 있는 인간이 되어야만.”
그래.
“나는 무력하지 않다. 나는 유수하와 다르다. 달라야만 한다. 내가 구하는 사람들도, 내 부하와 동료들도, 결코 유수하 같은 악인이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아니야.
“불타는 저택의 아이들을 구한 것도.”
아냐.
“유수하 씨가 검성을 죽이기로 선택한 것과 정반대로, 공자 씨, 당신이 검성을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을 선택한 것도. 이단심문관을 부하로 받아들이고 흑룡주를 친구로 받아들인 것도.”
나는—
“김율 씨의 아픔도, 원장 씨의 후회도, 아니, 천마 씨에 대한 헌신과 이반시아 공작에 대한 사랑조차도, 김공자 씨가 회귀 이후 행해온 일들은, 버려지기 싫어서. 다시는 약해지기 싫어서. 자신은 유수하 씨와 다르며, 다른 사람들도 유수하 씨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아닙니다!!”
아니다.
그렇지 않아.
나는 자수정을 노려보았다.
“…….”
감히.
감히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어.
“어째서인가요?”
탑주는 양팔을 펼쳤다.
옷자락이 나비의 날개처럼 팔락거렸다.
나는,
“유수하가, 그 녀석이, 내 인생의 의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약했다.
약했었다.
싸이코패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성공해도, 저택 속에서 불타오르는 아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유수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되새기고 또 되새긴 나날이 분명히 있었다.
“저는 이미 유수하를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제 인생에서 유수하가 차지하는 비중 따윈, 이제, 너무 사소해서 차라리 깔보고 웃어줄 정도입니다!”
배후령을 만났다.
스승님을 만났다.
라비엘을 만났다.
원장님을 만났다.
“제 인생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들.
“누가 의미가 될 것인지는,”
내가 곁에 있기로 한 자들.
“제가 결정합니다!”
“내 삶의 이유가 되어줄 사람들은, 내가, 나만이 정합니다.”
나는 오직 그들을 위해 강해진다.
유수하 따위 때문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유수하에 대한 열등감으로, 누군가에 대한 배신감으로, 타인에 대한 불안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것들이 더 이상 내 삶의 이유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나는 어제보다 더 강해졌다.
“…….”
자수정은 나를 바라보았다.
“유수하 씨가 더는 당신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인가요?”
“예.”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저는 하루에 그 새끼를 떠올리지도 않습니다. 꺼져버리라지.”
“하지만, 여전히 유수하 씨를 증오하시잖아요.”
“씨발.”
“김공자 씨의 인생에 여전히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아니, 용서하지 말아야 할 만큼.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되기에 유수하 씨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싸이코패스로 취급하고 계시지요.”
“좋습니다.”
나는 이를 물었다.
“유수하도 바뀔 수 있는 새끼였다는 걸 증명해주셔서, 정말, 빌어먹게 고맙습니다.”
“…….”
“이제 그 새끼가 저한테 아무런 의미도 못 된다는 걸 증명해드리지요.”
개 같은 자식.
“자수정 자작.”
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유수하를 바꿨다고, 당신만이 바꿀 수 있었다고, 제 앞에서 잘난 척한 거지요?”
“예.”
“저는 영원히 유수하를 증오할 거고, 이걸 저는 바꿀 수가 없어서, 그만큼 저는 약하다. 그러니 제가 당신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당신이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바꿀 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라 이 말이지요?”
“예.”
“꺼지라 하십시오.”
나는 일어섰다.
“유수하 같은 놈한텐 이제 증오와 경멸조차 주지 않을 겁니다.”
석양을 등지고 앉아 있는 자수정을 내려보았다.
“그놈은, 제 인생에서, 이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아니.
가지지 못하도록 하겠다.
더는 그런 새끼를 증오하는 것조차 지긋지긋하다!
“저는 강해졌습니다.”
나는 카드를 꺼냈다.
내가 최초로 받은 스킬.
나의 출발점.
+
[너처럼 되고 싶다]랭크: S+
효과: 적에게 죽으면 자동으로 발동. 당신을 죽인 적의 스킬 중 1개를 복사하여, 당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이미 1번 복사한 상대를 다시 복사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스킬을 복사할지는 무작위로 정해집니다.
※단, 죽습니다!
+
“내가, 유수하를 바꾸겠습니다.”
나는 만생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대륙을 멸망시킨 아귀를 바꾸었어요. 검성 어르신도, 흑룡주도, 이단심문관도, 모두 바뀌었습니다. 유수하…… 그런 개잡 호로놈을 제가 바꾸지 못할 거 같습니까? 제가?”
“예.”
“당신의 IF 세계 따위는 필요없습니다.”
내 목소리는 불을 삼킨 것처럼 뜨거웠다.
“아귀도, 칼렌베리 어르신도, 아나스타샤도, 밤볼리나도, 라비엘도, 제가 바꾸었습니다. 제가 제일 행복하게 만들 거예요. 당신의 존재를 가정한 IF 따윈 필요 없습니다. 저와 함께 있는 현실이, 그 사람들의 베스트 시나리오입니다.”
“…….”
“당신은 나만큼 스승님을 행복하게 만들어드릴 수 없어.”
당신의 구원 따위는 필요 없다.
“당신은 나만큼 라비엘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어.”
우리의 약함을 당신으로 땜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제 더는 약하지 않으니까.
우리에게 황금은 필요 없다.
“그리고 당신은.”
나는 선언했다.
“나만큼 유수하 씹새끼를 바꿀 수 없을 겁니다.”
“…….”
“이 세계에서 시시껄렁 소주나 처마시고 다니는 유수하, 줘도 안 가집니다. 당신이 바꾼 개새끼 따위보다, 제가 바꾸게 될 개새끼가 훨씬 더 잘나고 행복한 개새끼가 될 겁니다. 내가 당신보다 유능하니까. 강하니까.”
“아하.”
내 선전포고를 듣고.
자수정은 웃었다. 또 다시 한참을 웃었다.
웃다가 물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말로만 천국을 건설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저는 말로만 지껄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새끼라서요.”
“그렇네요. 그랬지요. 허면, 이건 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공자 씨?”
“결투입니다.”
“소인은 언제나 결투를 환영하지요.”
열여덟 살의 얼굴을 지닌 신이 즐겁다는 듯 흥얼거렸다.
“결투를 하는 자는 전사라. 오직 전사만이 자신의 목숨을 짊어진 인간이니. 소인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며, 모든 피를 아름답다 찬양하며, 모든 도전자를 좌절시키는 데 즐거움을 느껴요. 소인은 강하거든요.”
“저도 강합니다.”
“소인은 삼라만상 제일의 강자(强者)예요.”
무표정한 소녀가 즐거워하고 있다.
“소인은 육십 년을 유폐한 태양왕 전하의 심장을 녹였어요. 소인은 천 년 동안 썩어문드러진 무위식 공작 각하의 가슴을 위무했어요. 소인은 칠천 년이 멈추어진 용제의 시간을 해동했어요. 하물며 그 모든 것은 서장에 불과하지요.”
탑주는 고개를 기울였다.
“소인은 탑을 세웠어요. 그리하여 모든 세계의 불운한 자, 불행한 자, 약한 자, 악한 자, 학살자, 살인귀, 식인귀, 모든 약자와 악인을, 소인은 감싸고 다시 살도록 해주게 되어요. 소인의 심장은 무한하며, 소인의 삶은 영원하여, 세상에 의해 찢어진 모든 아해들의 상처를 달랠 수 있어요. 김공자 씨조차 소인이 세운 탑에 발 딛어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으시면서, 어떻게 감히 결투를 청하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럼.”
나는 말했다.
“저보다 라비엘을 더 행복하게 해보시지요.”
당신의 삶이 당신의 강함을 입증하듯.
내 삶 또한 나의 강함을 증명한다.
“저보다 스승님을 더 환히 웃게 해보십시오.”
나와 함께해주는 사람들이 나를 증명한다.
“해보라고.”
“아하하.”
자수정이 웃었다.
“좋네요.”
노을에 웃음이 번졌다.
“아주, 좋아요.”
보랏빛 눈동자가 반개했다.
초여름의 공기에 자주색의 향기가 섞였다.
“그래서? 어떻게?”
썩은 독초의 향을 흐드러지게 풍겼다.
“무슨 수로?”
향이 내게 다가왔다.
“대체 무슨 수로 유수하 씨를 소인보다 더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거지요? 예? 수단이 있나요? 방법이 있나요?”
자향(紫香)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소인에겐 만생이 있지요. 소인이, 소인의 재능과, 소인의 인생을 걸고, 만생이라는 능력을 얻었어요. 건축했어요. 완성시켰어요. 그런 수단이— 방법이, 당신에게 있나요? 김공자 씨?”
왕국의 기생이 내 귀에 속삭였다.
수많은 귀족과 왕족, 용제를 홀린 목소리로.
달콤하게.
“당신은 이미 유수하 씨를 죽였잖아요.”
“…….”
“아, 유수하 씨를 죽이기 전의 과거로 회귀하시겠어요? 이미 4000번도 넘게 해보셨는데. 수백 일 정도야 불가능할 것도 없네요. 다만 그동안 공자 씨가 흑룡주와, 검성과, 천마와, 살천성과, 그야말로 많은 분들과 쌓아올린 인연은 다 날아가버리겠지만요?”
“…….”
“유수하 씨를 바꾸기 위해서 다른 인연들을 포기한다. 그러게요. 정말로 [유수하라는 인간이 김공자 씨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이겠어요. 안 그런가요? 얼마나 의미가 없으면 지난 수백 일의 의미보다 더 거대하겠나요?”
개 같은.
머리가 뜨거워졌다.
심장에서, 열이 뻗어올랐다.
나는 열을 억누르지 않고 입밖으로 뱉었다.
“보상.”
“흐응?”
자수정이 머리를 기울였다.
“보상이라니요?”
“보상이나 내놓으십시오.”
내가 괜히 카드를 꺼내든 것이 아니다.
“당신은 아직 저한테 줄 게 남았습니다.
나는 카드의 뒷면을 뒤집었다.
그곳엔 스킬 설명이 적혀 있었다.
+
적에게 죽으면 자동으로 발동.
당신을 죽인 적의 스킬 중 1개를 복사하여, 당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
“당신이 만든 룰.
당신이 세운 탑.
“내가 정당하게 얻은 수단.”
탑에서 내가 맡아둔 단검.
“이에 의거해, 저는 당신한테 보상을 줄 것을 요구합니다.”
“헤에.”
자수정이 눈웃음을 지었다.
“소인한테서 스킬을 빼앗아, 소인보다 더 강해지겠다?”
“예.”
“혹시 [만생(萬生)]을 빼앗아볼 생각인가요? 안타까워라. 그거, 여러 스킬이 복합되어야 의미가 있는 기술이거든요. [황금룡의 눈]과 [빙하룡의 숨결]을 가지고 계신다면야 소인 같은 묘기를 부릴 수 있겠지만……. 이걸 어쩐담?”
자수정이 흥얼거렸다.
“공자 씨는 스킬을 딱 1가지만 가져갈 수 있잖아요?”
그녀의 즐거움이 진해지고 있었다.
“소인의 스킬을 하나 가져간다 해서, 소인보다 강해지긴커녕, 유수하 씨를 바꿀 수나 있겠어요? 소인 같은 먼치킨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준비물이 무척, 아주, 매우 많아요. 공자 씨.”
“쫄립니까?”
신 혼자서만 즐거움을 보게 냅둘 수는 없다.
“아하?”
“못 주겠으면 말고요. 쫄리는 거잖습니까. 쫄리면 패배를 인정하시든가요. 저는 스킬의 페널티를 받아서 당신의 인생을 다 봐야 했는 데, 페널티만 주고 보상은 안 준다? 탑 운영 꼬라지도 알 만하죠.”
“귀여운 도발이군요. 정말.”
자수정이 짙게 웃었다.
“그리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도발이에요.”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을 연주했다.
“좋아요. 사왕. 뭐든지 빼앗아 보세요.”
탑의 목소리가 울렸다.
[스킬 조건이 달성됩니다.] [‘만생(萬生)의 주인’의 스킬을 무작위로 카피합니다!]탁!
자수정이 손가락을 튕겼다.
“어디 소인이 걸어온 인생의 한 조각을 앗아가서, 자신이 한 말을 증명해보세요. 사왕. 자문사. 김공자 씨.”
촤르르르륵.
허공에 황금빛 카드들이 나열되었다.
[스킬 카드를 형성합니다!]노을이 져 어느덧 테라스엔 밤이 드리웠다.
어두운 밤하늘.
탑주의 황금들은 마치, 북극성처럼 반짝였다.
[광기에 대한 광증(狂症)] [왕도삼악(王道三樂)] [주사위에 사랑받는 자] [왕사(王師)] [아인의 수호자] [황금룡의 눈길] [지골룡의 두개골] [빙하룡의 숨결] [만생(萬生)]하나하나로 빛나는 별들.
그것들이 이어져서, 탑주(塔主)라는 이름의 별자리를 수놓는다.
저것이 탑주의 인생이고, 이것이, 탑 그 자체다.
“…….”
나는 밤하늘의 별을 향하여 손을 뻗었다.
그리고.
황금의 불빛을 손에 쥐었다.
22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