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28)
하지만 나는 팔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카드를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나보다 훨씬 작은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을 얽혀 잡아버린 것이다.
“그러면 안 되지요. 공자 씨.”
“예?”
“그래서는 재미있지가 않아요.”
자수정이 숨결을 흘렸다.
“소인을 여기까지 도발해놓은 주제에, 마지막에 와서 멋없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으실 거지요?”
나는 잠깐 등이 저릿했다.
내 손가락에 얽혀온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숨결이 형체를 이룬 것 같았다. 따뜻하고, 서늘하며, 안개와 같은 감촉이 내 손을 좀먹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후후.”
반대로, 자수정의 숨소리는 손가락을 닮은 양했다. 그녀가 내 손을 잡은 채 가까이 다가와서 귓속말로 속삭일 때마다, 손가락 같은 숨결이, 내 귓가를 가르작, 가르작, 부드럽게 갉았다.
“공자 씨는 최초로 얻은 카드를 들이밀면서, 소인한테 보상을 내놓으라 말씀하셨지만……. 보세요? 바로 그 카드에 명백히 적혀 있는 걸요.”
툭. 툭.
자수정은 얇은 손톱으로 내 손에 놓인 카드를 건드렸다. 탑주의 손톱이 내린 진동에 황금색 카드는 마치 정전기에 감염된 듯 부르르 떨었다.
+
[너처럼 되고 싶다]랭크: S+
효과: 적에게 죽으면 자동으로 발동. 당신을 죽인 적의 스킬 중 1개를 복사하여, 당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이미 1번 복사한 상대를 다시 복사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스킬을 복사할지는 무작위로 정해집니다.
※단, 죽습니다!
+
“보세요. 공자 씨.”
손가락이 되어버린 숨결이 내 고막을 훅, 건드렸다.
“분명히 적혀 있지요? 여기에…… 아니요, 거기가 아니고요. 여기. 맨마지막 부분. 확실하게, [어떤 스킬을 복사할지는 무작위로 정해집니다]라고 되어 있잖아요.”
자수정이 키득 웃었다.
못된 장난을 치는 소녀 같았다.
“공자 씨. [탑에서 정한 룰]에 따라 제게 스킬을 내놓으라 말하셨지요.”
아마도, 그것이 자수정이라는 인간이 내보일 수 있는 최고의 순수일 것이다.
“공자 씨도 룰을 지켜주세요?”
탁.
손 튕기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마자 황금색 카드들이 후두두두두둑, 갑자기 흩어졌다. 마치 폭죽 소리에 놀라 불꽃에 섞여드는 반딧불처럼.
“무작위.”
자수정이 내 팔에 몸을 대고 속삭였다.
“소인의 살조각을 한 점 앗아가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부디, 탑의 공명정대한 법도에 따라, [무작위]로 어느 부위의 살점을 택할 것인지 결정해주세요.”
머리를 들어 위를 보니, 밤하늘. 9개의 황금빛 반딧불들이 끊임없이 휘돌아다녔다. 별자리가 깨지자 카드 한장한장이 유성이 되어, 그것이 밤하늘을 가를 적에는 뒤로 긴 혜성의 꼬리가 이어졌다.
“여태까지 좋은 시절 다 누리셨지요? 검제 씨를 만나서. 어떤 스킬을 고를지, 전부 다 뒤에서 보면서 알려주었잖아요. 공자 씨는 그냥 편하게 아이스크림 고르듯 손가락만 까닥거렸지요.”
“…….”
“그러나 모든 운빨갓흥겜에는 종말이 찾아오는 법.”
나는 보라색 눈동자를 보았다.
보라색 눈동자도 나를 보았다.
아마도 그녀의 눈만큼 투명한 거울은 없을 것이다. 나는 기껏해야 보라색 눈동자의 막을 보았을 뿐, 그 너머로는 끝없이 반사된 속눈이 이어져 있었다. 거울이 거울에 반사되어, 다시 거울에 거울이 맺혔고, 다시 맺힌 거울에 거울이…… 보라색 거울이…….
“이제는 공자 씨의 운에 맡겨보세요.”
어느덧 나는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한 번 자수정의 눈 속을 제대로 보자, 어디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마치 교묘하게 쳐진 덫에 걸린 느낌이었다. 보라색 눈동자에 내 눈동자가 비추었고, 다시 보라색 눈동자에 비친 내 눈동자가 내 눈동자에 비치었다…….
‘아.’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정신 차리자.’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말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몇 시간이고, 수십 시간이고, 수백 시간이고, 다만 자수정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석상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에.
나는 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대로 그런 상황에서 제가 원하는 걸 뽑아보겠습니다.”
“아하핫.”
“하지만 룰을 정하지요.”
“무엇인가요?”
“[저는 절대로 카드의 뒷면을 보지 않습니다.] 당신이 직접 뒤를 까서 보여주면 모를까, 그러지 않는 이상에야, 제가 직접 카드의 뒷면을 보지는 않겠습니다.”
“예, 뭐. 당연하지만 기특한 이야기네요.”
“단.”
나는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오러로 안력을 강화하여 오직,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카드를 잡는다고 해서 곧바로 그 카드를 선택한 거로 취급하진 말아주십쇼.”
“으흠? 무슨 소리일까요?”
“카드를 보고, 만지고, 이리저리 다뤄보는 시간을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어차피 제 눈으로 뒷면을 볼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만일 제가 카드를 뒤집어서 설명문을 보게 될 경우엔, 그냥, 스킬 취소해버려도 상관없습니다.”
“흐응…….”
자수정이 교태로운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네요. 어떤 짓을 하려는 건지. 좋아요, 공자 씨. 소인은 공자 씨의 선택을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어요. 원한다면 [빙하룡의 숨결]을 이용해서 지금 이 세계의 시간까지 멈춰버릴 수 있는걸요.”
“그런 배려는 필요없습니다.”
“알겠어요. 어디 한 번 해보시지요!”
나는 먼저 아홉 장에 이르는 황금의 카드들을 다 수거해왔다. 매우 유명한 판타지 소설의 어느 스포츠 경기에 등장하는 황금볼처럼 카드들이 휙휙휙 돌아다녔지만, 아서라, 꼬맹이들아. 오러를 연마한 내게 너희는 그저 반딧불이에 불과하단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내 손은 카드뭉치에서 한 장씩, 한 장씩, 아주 신중하게 카드를 뽑았다.
그리고.
“…….”
맞은편에 앉은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사이에 카드뭉치만 둔 채, 가까이서 시선을 주고받았다.
“……?”
아니야.
이 카드는 내가 원하는 스킬이 아니다.
나는 바로 판단을 내린 다음, 첫 카드를 내려놓았다.
“어라?”
자수정 자작이 웃었다.
“혹시 소인의 표정을 보고 카드를 알아맞히려는 것인가요?”
헛웃음과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무슨 포커 플레이 하세요, 공자 씨? 소인은 누구한테 표정이 읽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소인의 얼굴을 읽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완벽한 미에 대한 찬양, 고귀한 기품에 대한 경악,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무한한 환희뿐이지요.”
나는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자작님.”
“예.”
“어디 가서 개소리 좀 그만 집어치우라는 얘기 안 들으세요?”
“소인의 가신(家臣)들이 주로 그러네요. 정말 너무하지요? 소인만큼 가신들을 대접해주고 사랑해주고 보다듬어주는 가주가 없건만.”
자수정이 개소리를 늘어놓는 동안에도 나는 신중히, 차분히, 카드를 한 장씩 걷어냈다.
“…….”
이 카드도 아니야. 다음.
이 카드도 아니다. 다음.
다음, 다음, 다음…….
“……?”
자수정이 이상한 기류를 알아채린 것은, 9장의 카드가 3장의 카드로 줄었을 때였다.
“공자 씨. 당신…….”
어쩌면 내가 단지 자수정의 표정을 읽고 카드를 추측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내게 명확한 방법이 있어 카드들을 세심하게 구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의혹이 뒤늦게 탑주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겠지.
“뭐하는 거지요? 무슨 수로 카드를 알아내는 것 인가요?”
“글쎄요.”
나는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또 어떤 스킬빨로 넘어가는 걸지도 모르죠.”
“공자 씨에겐 투시 스킬이 없어요. 설혹 투시 스킬이 있다 하더라도, 스킬 카드를 꿰뚫어보는 건 불가능하고요. 정말 특수한 재질로 구현해낸 마법인걸요. 대체 무슨 수로…….”
자수정이 미간을 좁혔을 때 나는 1장의 카드를 더 버렸다.
마지막 두 장.
나는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
“재미있는 카드가 남았군요.”
나는 여전히 카드의 앞면만 보고 있었다. 카드 앞면은 황금색으로 색칠되었다. 그리고 뭔지 모를 문양이 새겨졌는데, 이 문양이 사실 헌터들 사이에선 갑론을박을 일으킨 소재였다. 도대체 뭘 그린 거냐면서.
문양은 이렇다. 일단 정중앙에 주사위인지 뭔지 모를 다면체가 덩그러니 떠 있다. 그리고 두 마리의 뱀이 구불구불거리며 다면체를 감싼다. 마지막으로, 무슨 식물인지 모를 이파리와 꽃이 가장자리를 환하게 수놓는다.
헌터들은 수도없이 논쟁을 벌였다.
「왜 스킬 카드엔 이런 문양이 새겨진 거냐?」
「다면체는 성배를 뜻한다. 두 마리의 뱀은 사탄을 가리킨다. 즉, 악마들이 성배를 둘러싸고 있다며 탑에선 우리한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럼 이 파리랑 꽃은 뭐냐?」
「악마들이 환경운동에 관심 있다는 뜻인가?」
「개소리가 들어오니 씹소리가 나가는군. 좋은 딜교야.」
하지만 이에 대해 명백한 답을 내린 헌터는 없었다.
아마 모르긴 모르되 100층에 올라가면 힌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 정도가 그나마 대세였다. 11년 뒤에도 말이다.
“흐.”
문득 헛웃음이 흘렀다.
자수정 자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우습나요?”
“아뇨. 저희 탑 애들이 뻘짓하는 게 생각나서요. 여기 문양요. 카드에 새겨진 문양. 이것 가지고 헌터들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을 진짜인 것처럼 막 늘어놓았거든요.”
근데.
“이거, 그냥 자작님 가문기잖아요.”
자수정이 눈을 깜빡거렸다.
“네. 그런데요?”
“푸하하하하.”
사정은 이렇다.
왕국에선 [마법]이나 [마법사]를 [뱀]으로 상징한다. 왜냐면 뱀들이 용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마법 역시 용들이 개발한 것이다. 용에게서 비롯한 기적인 만큼 [뱀]으로 형상화하는 건 당연하다.
따라서 가문의 시조가 마법사거나, 아니면, 가문의 시조가 마법사를 족쳤거나. 두 경우에 속한다면 그 가문의 문양에는 반드시 뱀이 들어간다.
자수정 자작의 먼 선조는 꽤 유명한 마법사를 사살했다고 한다. 그렇게 뒈진 마법사의 시체가 귀족 가문의 문양으로 들어갔다.
대마법사가 살았던 곳이 수정림(水晶林)이라는 매우 광활한 숲이었다. 그래서 뱀 주변에 이파리 몇 조각이랑 꽃 몇 덩이가 장식된 거다. [이 마법사는 숲에서 뒈졌습니다]하고.
자수정 자작의 선조는 원래 대마법사가 통치하던 영토를 고스란히 먹어삼켰다. 그래서 가문 이름도 숲의 이름을 따와서 수정(水晶)이 되었다. 문양 한복판에 그려진 뭔지 모를 다면체는 바로 수정이다.
즉.
[이 가문의 선조는 숲에서 살던 마법사를 찢어 죽였는데 그 공이 가상하여 수정이라는 이름의 작위를 하사받음].이게 카드 앞면에 새겨진 문양의 뜻이다.
그게 전부다. 끝.
“자작님 진짜 또라이시다. 왜 자기 가문기를 카드 앞면에 때려박아요?”
“갑자기 왜 또라이라고 욕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야 당연히 탑은 소인이 만들었으니까요. 소인은 왕국의 귀족이고요. 자기가 만든 작품에다 자기 사인을 했는데 뭐 불만 있나요?”
“이거 가지고 바깥세상에서 사제들 수십만이 뭐 신의 뜻이시다 하느님의 예고이시다 뭐 북 치고 장구 치고 온갖 삽질을 다했는데…….”
“소인은 신이기도 하니, 소인의 뜻이 곧 신의 뜻 아닐까요?”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또라이가 아닌 자가 없다.
하여튼.
나는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음, 이 카드도 아니네요. 탈락.”
“…….”
나는 마지막 남은 두 카드 중에 한 장을 버렸다.
자수정이 미간을 좁혔다.
“방금 카드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나요?”
“예. 어마어마하게 좋은 스킬이었죠.”
“말해보세요.”
자수정은 내게 증거를 요구했다.
기꺼이 그녀의 요구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주사위에 사랑받는 자].”
“…….”
“랭크는 자그마치 SSS급. 효과도 심플하지요.”
이 스킬을 설명하는 문장은 고작 한 줄. 아니, 단 한 단어다.
+
[주사위에 사랑받는 자]랭크: SSS
천운(天運).
+
천운.
“한마디로 말해서 [운이 좋아지는] 스킬입니다. 황금룡의 눈이고 뭐고, 사실 이게 제일 사기 스킬이에요. 운이 좋아진다? 게임 끝이죠. 아무리 어려운 퀘스트가 떨어지든, 아무리 난해한 스테이지에 입장하든, 운빨이 좋은데 뭐.”
그래서 내가 마지막 2장에 남겨둔 카드였다.
“고민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이 카드로 할지 저 카드로 할지, 진짜 고민 많이 했어요. 아마 자수정 매니지님…… 에이, 됐다. 때려치죠. 당신이 저를 도발하지만 않으셨어도 전 무조건 [주사위에 사랑받는 자]로 올인했습니다.”
자고로 오래 전부터 탑에서 전해지는 격언이 있다.
실력갓흥겜, 운빨똥망겜.
어떤 스킬을 가지게 되느냐에 따라 헌터의 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주사위에 사랑받는 자]는 최강의 스킬이다.
“하지만 저는 이 스킬을 택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저는 다른 걸 택할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카드들을 선별하고 선택하는 동안 내내, 오로지 자수정만 바라보았다.
“…….”
더 정확히는.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하.”
뒤늦게.
“과연, 과연.”
자수정은 내 속임수를 깨닫고 웃었다.
“공자 씨.”
“예.”
“소인의 눈을 보았군요.”
그렇다.
“맞습니다.”
간단한 방법이었다.
나는 자수정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보라색 눈동자에 비친 것을 저는 보았을 뿐입니다.”
자수정이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를 지은 채 침묵하여, 그저 미동도 없이, 쭉 나를 보았다.
“지금도 잘 보이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 투명해서.
보라색은 무언가를 비추기에는 제일 천한 색깔일 텐데도.
자수정의 눈동자는 끝없이 반사되는 거울 같았다.
“읽어주시겠어요?”
“조금 더 가까이서 봐 보세요.”
우리 두 사람의 거리는 이미 충분히 가까웠다.
나는 마지막 남은 1장의 카드를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보았다.
오러에 의해 강화된 내 시야는 그녀의 눈동자에— 거울 미로에 갇혔다.
“읽어보세요.”
자수정 자작이 속삭였다.
“…….”
시각과 청각의 격차.
서로 맞물리지 않는 감각에 숨을 가다듬으며, 나는 내 황금이 될 것을 읽었다.
“지골룡의 두개골.”
“예.”
“랭크. SSS+.”
“맞아요. 소인이 측정했지요.”
“효과. 살아있는 자의 기억을 보관합니다. 보관된 기억은 [상자]에 담깁니다. 이 상자는 오직 해당스킬을 소유한 자에게만 파괴될 수 있습니다…….”
“계속 말해보세요.”
자수정 자작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어쩌면 단순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비정상적으로 강화된 시력에 의해, 지금 내 눈에는, 거울에 둥그랗게 맺힌 보라빛 글자들만이 보이니까.
“상자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당신은 똑같은 기억을 계승하는 인물의 육체를 몇 번이고 생산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기억의 원본을 상자에 담아두기만 하면, 기억을 담아낼 육체는 몇 번이든,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에요. 다만 동시다발적으로는 안 돼요. 한 기억에는 하나의 몸만. 육체가 파괴되어야 비로소 다음 육체를 만들 수 있어요.”
“…….”
“뭐 하시나요? 공자 씨. 계속 말씀해보시라니까요.”
“……육체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기억을 쌓고, 이 경험을 다시 상자에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허락한다면 말입니다.”
“유명한 이탈리아 배공관 아저씨들이 나오는 게임을 생각해보세요.”
자수정 자작이 키득거렸다.
웃음소리가 아까보다 더 가까워졌다.
“게임을 하다 죽어도 다시 돌아오지요? 죽어도 죽지 않아요. 목숨은 [코인]이에요. 기억을 담아둔 지골룡의 상자는 말하자면 [세이브 포인트]고요. 목숨을 잃어 죽어봤자, 그냥 세이브 포인트로 되돌아올 뿐이에요. 물론 죽은 목숨은 저장되지 않겠지만……. 제대로 살아서 돌아와야만 다시 세이브 포인트에서 저장할 수 있으니까요.”
“…….”
“이것 때문에.”
자수정 자작이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 스킬에 담긴 이야기를.
“인생에 세이브 포인트가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회귀를 바라는 사람들만큼이나 수두룩하겠지요. 지골룡(地骨龍).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은, 사막을 건너서, 대하를 헤엄쳐서,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밀림을 지나, 어떻게든 지골룡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었어요.”
고작 [스킬]이라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이야기.
“그 과정에서 많은 이가 죽었지만.”
“…….”
“178명은 지골룡의 둥지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리고 178명의 인간들은 [세이브 포인트]를 가지게 되었다.
죽음을 염려할 일 없이, 영원한 종료를 두려워할 이유 없이, 자신들의 목숨을 [코인]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최악의 군사 집단이 만들어졌지요.”
178명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세상을 종횡무진했다.
“그들은 살아 생전 어디에 속했었는지 표시하기 위해 등에다 깃발을 꽃고 다녔어요. 하여, 만기병(鳴旗兵)이라 불리었지요.”
이미 저물어버린 깃발을 휘날리는 병사들.
“1000년 전 최강의 궁수라 칭송받은 반석위사. 산와족 최강의 암살부대 나선문(!燥線門)을 지휘한 17대 나선문주. 왕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린 다음 유유히 도망친 대도(大盜). 600년 전, 왕국의 강줄기를 절반이나 점령하여 수십 척의 군함을 거느린 대하적(大河賊). 1300년 전, 왕국 제일의 마법사가 될 것이라 기대받았던 유망주.”
기나긴 왕국 역사에서.
저마다 한 시대를 주름진 걸물들.
마치 무림의 마지막 시대를 재패한 내 스승님처럼.
“그들이 [죽지 않는 군대]를 이루었어요.”
그런 전사가 178명이나 모인 것이다.
“사막 너머에서 수십 개의 깃발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부대를 보노라면, 모든 인간이 겁에 질려 쓰러지고, 아이들은 울고, 군사들은 사기를 잃고 패주했다고 해요.”
“…….”
“그렇듯 만기병은 인간으로 이루어진 자연재해나 다름없었지요.”
나는 여전히 거울-미로에 시야가 갇힌 채 입술을 열었다.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들.”
자수정 자작이 쿡쿡 웃었다.
“소인의 사병들이 되었어요.”
“소인을 개새끼로 보는 왕국의 귀족들이 왜 소인한테 가문전을 선포하진 않는 건지, 곧바로 이해되는 대목이지요. 쳐발릴 거니까요.”
그리고.
[선택 완료.]내 손에 잡힌 카드가 환히 녹아내렸다.
[스킬을 복사합니다.]그것과 동시에, 거울의 미로도 풀렸다.
보라색 거울은 더 이상 비출 카드를 잃어버렸다.
거울은 다시 눈동자가 되었고, 내가 바라보는 것은 자수정의 눈동자가 되었으며, 깨닫고 보면, 나는 자수정과 마주보고 있었다.
“사왕.”
코앞에서.
“당신이 가지게 된 것은 그만큼이나 막강해요. 수많은 죽음을 머금었고, 수많은 상처를 남겼지요. 공자씨는 그 카드로 무엇을 하실 작정인가요?”
숨결이 닿는 거리.
독사가 사람의 목을 물어뜯기에 가장 좋은 거리였다.
“소인은 궁금하네요. 무척.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그래봐야, 소인한테 이미 패배당해서 전리품으로 전락해버린 용제와 군대의 스킬.”
뱀을 죽인 자를 선조로 둔 귀족은 눈으로 웃고 있었다.
“그걸로, 어떻게 소인을 이기겠다는 것인가요?”
나 역시 미소를 지었다.
“질질 짤 준비나 하십시오. 탑주.”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최강의 카드를 뽑았다.
2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