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31)
3.
사람이 눈을 떴을 때 볼 수 있는 광경 중에 제일 호사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고색창연한 하늘이라 말하겠고, 또 누군가는 [모르는 천장]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질문에 관해 명답을 내놓을 수 있다.
“공자여.”
그건 라비엘이다.
“정신이 드는가?”
라비엘이 여린 손가락을 들어 내 이마를 만졌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 첫마디 손가락뼈와 중간마디 손가락뼈가 오돌토돌하게, 리드미컬한 감각을 남기면서 나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라비엘…….”
“음.”
“저,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왈칵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일어선 곳은 첩탑세계. 그중에서도 외전(外傳). 김율과 자수정이 같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살아가는 곳이 바로 여기다. 우리 일행은 당분간 자수정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막, 꿈을 꾸기로 했는데…… 신이요. 탑주(塔主)요. 이 인간이, 미친 그냥 일생 전체가 다 트라우마인 사람인 거예요…….”
우부르카도 자수정(이쪽 세계)도 여기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라비엘한테 달라붙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지금 내 마음에는 청백합의 부드러운 향기가 필요했다.
“어허, 일생이 트라우마라? 어찌 그것이 가능한가?”
“그 사람은 머릿속으로 언제나 항상 다른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되새겨요. 심지어 그 사람들한테 이입을 해서요. [만일 저 전쟁터에 내가 있었다면 나 역시 아무 말도 못하고 기병한테 찍혀 죽었을 것]이라느니. 그런 식으로…….”
“한낱 망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망상이라면 정말 좋겠는데요……. 이 미친년이, 진짜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시간을 이동하는 스킬을 얻어버리질 않나, 자기한테 벌어지는 모든 일을 기억하지 않나, 세계의 인과를 모조리 파악해버려서, 그걸 가지고…….”
“음. 음.”
라비엘은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우리 부인이 참으로 끔찍한 것을 봤나 보구나. 이러는 경우가 드물거늘. 괜찮다. 우리는 아무런 일 없이 안전했다. 조금 더 내게 기대어도 좋다.”
“라비엘……!”
“아니, 아예 길게 휴가를 내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겠구나.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말했다지 않는가. 지금 이 도시는 외부와 시간이 철저히 격리되어 있노라고. 일주일, 한 달, 원할 때까지 쉬어라. 공자여. 내 그대와 달래는 시간이라면 나 역시 기쁠 것이다.”
결국에 눈물이 나왔다.
어쩜 내 아내는 이리도 강할까?
“애비가 질질 짜는 모습은 첨 본다. 우고르…….”
“그런가요?”
“우거. 왜 처음 보는가 싶었는데 저걸 두 번 보면 도저히 애비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까지 잘도 참아온 거다. 나는 먼저 가서 자겠다…….”
“아. 이부자리 펴드릴게요, 우부르카 씨.”
“고맙다 집주인…….”
우부르카가 쿵쾅쿵, 자수정(이쪽세계)이 따박따박, 서로의 질량 차리를 발소리로 드러내며 거실로 나갔다.
이제 대청마루에는 나와 라비엘밖에 남지 않았다.
“라비엘…….”
“말을 해보거라, 공자여.”
사람이 적어져 한산해지자 라비엘은 좀 더 편하게 나를 껴안았다. 살며시. 내 이마에 키스를 해준 다음, 라비엘은 무릎을 벌려 툭툭 쳤다.
“우리 공자가 눈물을 흘릴 정도라면 필히 끔찍할 터. 허나, 방금 들은 말들만 가지고는 머릿속으로 뚜렷한 인상이 안 잡히는구나. 조금 더 풀어서 얘기해보아라.”
“……네.”
포옥.
나는 라비엘의 무릎에 머리를 뉘였다. 혹시 머리가 무거울까 싶어서, 모가지에 오러를 팍 줘서 라비엘한테 가는 무게를 줄였다. 당연했다. 난 이발소에서 머리 감겨질 때도 디자이너들 무겁지 말라며 모가지에 힘을 준다고!
“쿡.”
머리 위에서 라비엘이 키득거렸다.
“공자여.”
“네.”
“배려는 귀엽다. 그러나 고맙지는 않군. 그대의 얄상한 대가리가 무게를 가져봤자 얼마나 무겁겠는가. 나는 그대가 지닌 무게를 온전히 차지하고 싶다. 허니, 목에서 힘을 빼라.”
“하으…….”
“음. 잘했다, 잘했어. 목에서 힘을 풀어야 만사가 잘 풀리는 것이지.”
여름.
하늘에는 그늘이 졌고, 대청마루에는 그림자가 졌다. 구름과 지붕에 두 번 식혀진 바람의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선선했다. 나는 마치 세상에서 숨으려는 듯 라비엘의 무릎에 꾹 머리를 대었다.
“좋구나.”
라비엘이 소리없이 웃었다.
“내 연인이 긴 여행을 떠났다가 무탈하게 돌아온다. 그건, 무척이나 좋은 일이었다. 나는 이걸 처음 알았다. 그대와 만난 날 이후로 내 삶에서 좋은 일들이 자꾸만 늘어나서 큰일이야.”
“…….”
“무엇이 그리도 슬펐는가?”
“자수정…… 탑주는, 이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들을 전부 위로할 생각이에요.”
그늘에 식혀진 여름의 저녁 공기가 흘렀다.
한옥의 허름한 마당에서는 군데군데 풀벌레가 울었다.
“당장 불에 타죽는 어린아이가 있다면, 그 어린아이에게 다른 세계의 모습을 보여줘요. [만일 탑주가 어린아이와 함께 있었다면]. 그런 세상을 만들어낸 다음, 어린아이와 행복하게 지내요.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
“무척이나 신다운 일로 들리는구나. 무슨 문제가 있느냐?”
“……행복이 아니라, 오직 복수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여름의 바람이 불었다.
“세상이 그냥 지옥에 불과한 사람. 내가 받은 고통은 모두 지옥에서 건너온 고통이어서, 해결할 수 없고, 달라질 가망조차 없다. 그러니 유일한 해결책은…….”
“[나를 이렇게 만든 자에게 나보다 더한 고통을 주겠다].”
“……예.”
나는 좀 더 라비엘의 몸에 기대었다.
“탑주는 그 사람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봐요. 스킬을 통해서. 그리고 도울 수 있을 때 돕지 않고, 막을 수 있을 때 막지 않아서, 그저 계속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에요.”
“…….”
라비엘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과연.”
라비엘은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불행해진 원인은 다름 아니라 탑주인 나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구나.”
“예.”
“허면 피해자들의 원망은 자연히 탑주한테로 쏠릴 것이다. 설혹 탑주가 신이라 한들, 아니, 신이기에 더욱더 탑주를 끌어내려 때리고, 찢어버리고, 짓밟아, 자신들의 한을 풀려 할 것이다. 어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다만 내 머리의 무게를 라비엘한테 맡긴 채, 멍하니, 표정없이, 입술을 열었다.
“그렇게 한대요.”
“…….”
“그러길 바란다고 해요. 왕국에서 희생당했다 생각하는 백성들은 모조리 자신한테로 와, 인생에서 받은 상처만큼, 도려진 고통만큼, 정확히 똑같이 탑주 자신한테 되돌려주기를 원해요.”
“그건…….”
“심지어. 탑주는 자기한테 상처를 돌려주는 사람의 일생을 전부 간파하고 있어요. 무엇이 거짓말이고 무엇이 거짓말이 아닌지 다 알아요. 평범한 동정심이 아니라, 정말로 알고 있어서, 상대방의 고통을 안아주는 거예요.”
“…….”
풀밭에서 메미가 울었다.
“그 사람 머릿속에는 항상 누가 찔려 죽고, 불타 죽고, 짓밟혀 죽는 장면들이 가득해요. 언제나. 항상. 하루 내내, 머리 한켠으로 그런 기억들을 틀어놓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직접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서 실제로 찔려 보고, 불타 보고, 짓밟혀 보기까지 해요. 비명이에요. 라비엘. 탑주의 마음에선, 비명이 들려오는 소리밖에…….”
“그래. 그것이 우리의 신이었는가.”
라비엘이 길게 탄식했다.
“[행복을 바란다면 행복을. 고통을 바란다면 고통을.] 명제가 간결할수록 인간에게 지워지는 무게는 억천금이 되길 마련인데, 탑주는 필멸하는 자들을 모두 짊어질 생각이렷다.”
“……예.”
“끔찍한 일이구나.”
라비엘은 내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붉은색 눈동자가 바로 가까이서 나를 들여다보았다.
“결국은 해결책 또한 간결하다. 공자여.”
“……맞아요.”
“행복을 바깥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찾는 자. 그 자에겐 탑주가 필요없다. 고통을 바깥에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극복하는 자. 그 자에겐 또한 탑주가 필요없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불행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그 당연한 사실은, 오직 당연할 뿐이어서 해내는 자가 너무도 적지. 이 세상에서 당연한 삶을 사는 자가 몇 명이나 있겠나. 당연한 걸 당연하다 말하고,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고,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일을 이루어지게 만든다…….”
어려운 일이야.
라비엘은 저녁 하늘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녀에게 [어려웠던] 인생의 시점을 떠올리는 걸지 모른다.
“탑주의 말버릇이 [여러분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라고 했는가. 공자여.”
“예. [여러분은 아무도 잘못 태어나지 않았어요]라고, 탑주는 말했습니다.”
“슬픈 이야기다.”
라비엘은 능숙하게 음료수캔을 따서, 입술에 물었다.
한 모금의 갈증을 가라앉히고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달리 말하면, 그건.”
소인이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미안해요.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잘못 태어났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
“공자여.”
“예.”
“탑주는 강한가?”
나는 할렘가의 폐허에서 올려다본 은하수를 떠올렸다.
무수히 날개질치는 하얀 나비들을. 나비로 이루어진 별빛을.
“예. 무척, 강합니다.”
“이길 수 있겠는가?”
“이기겠습니다.”
라비엘은 내 눈동자를 똑바로 내려보았다.
“나는 내 남자에게 그보다 더 확실한 대답을 요구한다.”
“…….”
“나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함께 죽을지도 모를 사람과 일생을 언약한 것도 아니다. 나는 사랑할 사람을 사랑했고, 함께 죽을 사람이어서 약속했다. 공자여. 그대가 이반시아의 달이라면 조금 더 많이 말해야 할 것이다.”
“예, 라비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깁니다.”
“이기거라.”
라비엘의 손바닥이 내 뺨을 쥐었다.
“내가 그대를 일생의 반려로 선택한 이유는, 그대가 이기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탑주가 삼라만상의 불행을 비료로 삼아 승리할 적에, 공자여, 그대는 다만 행복으로 승리하여라.”
라비엘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대 곁에 있는 자를 모두 행복하게 하라. 그대와 함께해서 행복하다 느끼게 만들어라. 그대와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행복할 줄 아는 자가 되도록, 훈육하고 조련하라. 그리하여 이 탑을 모조리 행복한 자들로 채워라.”
“역시 어렵겠지만…….”
나는 미소를 지었다.
“까짓거 천천히 해보죠. 뭐.”
“그래야 내가 사랑에 빠진 남자다. 하지만…….”
라비엘은 미소를 지었다.
“제일 먼저로는,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야겠구나.”
우리는 입술을 맞추었다.
“집주인이랑 우부르카가 엿들을 텐데….”
“집주인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더군. 이미 확인했다.”
“우부르카는요? 쟤, 저를 진짜 애비로 생각하는 아이에요.”
“과연. 애비가 꼴사납게 신음을 흘린다거나 비명을 지르면, 과연 아이의 순수한 마음에 긁힌 상처가 날지도 모르겠구나.”
라비엘이 키득거렸다.
“허니, 신음을 일절 내지 말아야겠다.”
음.
“라비엘……?”
“왜 그러느냐. 내 사랑이여.”
“얇은 수건을 가지고 뭐 하시려는 겁니까……?”
“그대가 조용히 신음을 흘리지 않을 수 있도록, 내 배려해주려는 참이다.”
“그거 사실 우부르카한테 하는 배려 아니죠? 예? 그냥 라비엘이 즐기고 싶어서 하는 거 맞죠?”
“쉿.”
라비엘이 장난스럽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라비엘의 붉은 눈동자가 루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이가 잔다. 조용히 하여라.”
이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얌전히 아내님의 오랏줄을 받을 수밖에.
사랑합니다, 라비엘.
영원히 사랑해요.
4.
다음날. 아침.
“후아아아…… 아아암?”
거실로 나오는데 우부르카와 딱 마주쳤다.
나는 하품을 하면서 우부르카한테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 아들.”
“근데 왜 표정이 꼭 돌소금 씹어먹은 산와족 같냐? 잠자리 불편했어? 아, 너 덩치가 너무 커서 바닥에서만 잘 수 있던가. 그건 어쩔 수 없지, 뭐.”
우부르카가 부들부들 떨었다.
“애, 애비는…….”
“애비는 파렴치한 패배자다아아아아!”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절망합니다!]우렁찬 사자후를 토해내며 우부르카가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쿵, 쾅, 쿵, 쿵, 어찌나 발소리가 과격한지 낡은 한옥이 망가질까 걱정되었다. 나는 한옥 바닥의 안전을 확인하고 혀를 쯧쯧 찼다.
“쟤 왜 저래? 꼬마도 아니고.”
사춘기여서 저러나?
애 키우는 것도 참 힘들구만.
23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