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33)
1.
나는 아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촤아아아악!
검은색 소용돌이 아귀를 휘감았다. 소용돌이는 거세었다가, 아주 조금씩 줄어들었다. 아귀의 몸 크기에서 아귀의 머리 크기로…… 다시 눈 크기로.
자그마해진 소용돌이는 어느 순간 구슬처럼 뭉그러졌다.
이것. 이 자그마한 구슬이 바로 [지골룡의 상자]였다.
이곳에 아귀의 기억이 있다.
이 자그마한 상자에…… 이름 없는 도플갱어가 마을 소녀를 삼켜 성녀가 되고, 성녀는 마녀로 추락하여, 낙원을 일구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모든 것이. 모든 것이 이 자그마한 상자에 들어가 있다.
“…….”
영혼.
아마도 가장 근접한 단어를 찾자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손바닥에 올라간 아귀의 영혼을 내려보았다.
“아귀. 들리냐?”
아주 살짝, 손바닥에서 구슬이 움직였다.
“이제부터 내가 너의 기억을 먹을 것이다. 원리는 모르겠다만… 상자인 채로 내 몸 안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흑색의 물이 되어서 내 심장에 잠기는 모양이다.”
멀찍이서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옆동네. 아니면 더 옆동네. 가난한 골목을 지나쳐온 먹구름들은 조만간 이 낡은 한옥까지 당도하겠지.
“아귀야.”
칠흑색의 구슬은 영롱해 보였다.
“조금 전, 자수정 씨가 중요한 말을 해주었지.”
구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 스킬로 누군가에게 육신을 내려준다면, 그건 상대의 결정이어야한다는 것.”
흑색 구술 속에는, 아직도 끊임없이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원해서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불행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뿐만이 아니야. 불세출의 천재도, 희대의 미인도, 위대한 성인조차도, 태어나는 시점에 그 사람의 의지는 없다. 원하지 않았고 원할 수도 없었는데 태어나버리고 말았다는 부분에서 70억 인류는 모조리 불우하다.”
구슬은.
“바로 그러기에 [누구한테서 삶을 받고 싶다고 결정할 수 있다]는 이 순간은, 무척이나, 무척이나 특별하다고 생각해.”
소용돌이치는 구술은, 그저 내 얼굴을 향해 올려져 있었다.
“아귀야.”
“…….”
“내 딸아이가 되어주겠니?”
침묵.
어느덧 옆동네를 거쳐온 여름비가 한옥 거리까지 다다랐다. 한옥 거리는, 일제 당시 지어진 모습에서 다를 바 없는 배수구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비나 내리면 침수당하기 않기만을 빌 수밖에 없었다.
낡아서 오래된 길거리로 비가 쏟아졌다.
“…….”
내 손바닥 안에도 비가 내렸다. 툭! 툭, 투욱…… 두두. 빗방울은 손바닥에 튀었다가 좀 더 넓은 허공으로 튀었고, 늙은 대청마루의 나무결 사이로 고여들었다. 이런 탈영자가 있었으나, 내 손바닥에는 빗물이 조금조금 고여서, 이윽고 칠흑 구슬은 반절이 수몰되었다.
“아귀야.”
수몰된 이 작은 존재에게.
나는 부탁하는 얼굴로 말했다.
“내 딸이 되겠니.”
구슬이 앞쪽으로 헤엄을 치듯 고개를 박았다. 그것 이상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구슬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왼손을 들어 천천히, 오른손에 수몰되어 있던 구슬을 쥐었다. 그리고 역시 천천히— 아귀의 영혼을, 입안에 넣었다.
입을 닫았다.
꾹, 삼켰다.
“…….”
구슬은 검은색 액체가 되어 내 혓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면서, 검은색 액체는 수십 갈래 수백 갈래로 뻗어서 내 몸속의 내장에 침투했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꾸물거리면서 내장을 침식하던 그림자는 다음 순간, 마침내 목표물을 발견했다는 듯, 인간의 몸통에서, 오직 한 곳.
심장을 향하여 치달았다.
수십수백 갈래의 그림자가심장을 조였다. 하자, 심장에 끄을음이 끼었다. 심장의 기능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다만, 그늘이 끼었고, 그 그늘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기억을 그리고 있었다.
“지골룡의 두개골.”
[스킬을 발동합니다.]촤아아악!
여태껏 내 심장을 옭매고 있던 그늘들이 삽시간에 풀려났다. 그리고 식도로, 입안으로, 혀로, 수백수천 갈래의 흑빛 잔영들이 쇄도하여, 마침내 몸 밖으로 탈출했다.
“………!”
나왔을 때, 그것은 기껏해야 구슬 수준에 불과했다.
비 내리는 대청 마루로 구슬이 통, 통, 통, 흘렀다. 그리고 통, 통, 통, 튕길 때마다 구슬은 기하급수적으로 거대해졌다.
마침내 구슬은 마루를 전부 차지해버릴 만큼 거대해졌으며—
“…….”
바로 그 순간, 거대한 구슬이 깨어졌다.
-냐옹!
냐옹이가 울부짖었다. 냐아! 냐아아아! 냐옹! 강아지 몸을 가진 고양이가 길게 우는 속에서 비가 내렸고, 빗속에서 구슬의 외곽은 스르르르 녹아내려 그림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림자를 딛고 섰다.
“…….”
에스델.
시골 처녀가 입었을 법한 편한 복장. 그날 농장을 둘러보며 쓸 만한 채소가 있다 싶으면 뽑았을, 그걸 위한 작은 바구니.
논두렁 한 가운데에 있어야 할 소녀가 그림자의 알을 깨고 태어났다.
“아…….”
황망히 주위를 둘러보는 아귀를 보면서, 나는 언젠가 보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아아.
그렇구나.
탑에 들어오는 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 돈. 신분증명서. 심지어 옷, 양말까지. 마치 방금 태어났다는 듯 온통 알몸으로만 입탑(入塔)이 된다. 그들은 기나긴 터널을 지나서, 바빌론이라는 광장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명을,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은 새로 태어났습니다]라는 은유이자 장치였고.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은 소인의 새로운 아이들이에요]라는.
탑주의 말이었다.
“아귀야.”
마치.
“어떤 이름을 갖고 싶으냐?”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
가을비의 마왕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답할 게 없어서 침묵한 것이 아니라, 이미 대답이 준비되어 있건만, 감히 그 대답을 자신이 입 밖에 내어도 좋을지…… 그런 호사가, 이런 기적이, 자신 따위한테 허락되어도 좋을지 몰라서 입을 다무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에스…… 델…….”
그녀가 울었다.
“에스델… 제 이름은, ……에스델……에스텔로, 해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가장 먼저 죽인 인간의 이름을, 새로이 태어난 자신의 이름으로 삼는 이유를 나는 짐작했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그녀는 결정한 것이다.
“그래.”
그 마음을 짐작하였기에, 나는 그녀에게 이름을 주었다.
“에스델.”
“네. 네에… 주군.”
“이제는 주군이 아니라 너의 아비이기도 하다.”
모두의 어머니로 존재하고자 하는 어떤 여신의 아바타 앞에서, 나는 내가 빚어낸 생명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을 테지만. 언제나 가장 눈앞에 있는 사람부터 소중하게 대하거라. 너에겐 [성좌] 시절의 힘이 돌아왔을 테니, 칼로 이루지 못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허나 너에게는 아직 너무나 많은 게 필요하구나.”
“네에, 네… 흑. 네…….”
“당분간은 플라네타리움 카페에서 알바생을 하렴. 사람을 만나고, 손님을 대접하고, 돈계산을 하고, 쪼들려보고, 직장 동료들이랑 대화하고, 대화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책임을 져. 사람이 무엇인지 그곳에서 배우려므나.”
“네…….”
숨을 참으며 울먹거리는 그녀의 이름을 나는 불렀다.
“에스델.”
내가 말했다.
“많은 걸 배우렴.”
2.
비가 내리던 날, 그것은 눈을 떴다.
그것에는 이름이 없었다. 형체가 없었다. 차라리 그림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비가 내리던 날에 어느 그림자가 눈을 떴고, 눈을 뜨자 마자 자신에게 처음으로 비춘 생물을 보았다.
-개굴.
이 생물이 무엇인지 그것은 몰랐다. 모르는 게 많았다. 다만 소리… 빗소리. 사방에서 개굴거리는 소리가 자욱하게 들려왔다. 빗물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지금처럼.
이름 없는 괴물에서 에스델이 되었을 때, 그것에겐 평범한 인간의 삶이 허락되었다. 에스델이 성녀라 불리게 되었을 때, 그녀에겐 명예롭고 신성한 앞날이 비추는 것 같았다. 성녀가 마녀로 추락했을 때, 그녀는 마왕이 되었으며, 하나의 세상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언제 어느 순간에도 [나는 태어났다]라는 걸 느끼지 못했다.
그저, 삶이란 주어지는 것이었고, 주어진 대로 살았다. 성녀가 된 것 또한 자신이 성스러워서가 아니라, 죽은 아이를 대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 주변에서 자신을 천사이니 성녀이니…… 아니다. 그저 살았을 뿐이다.
살고 싶었을 뿐이다.
– 에스델.
지금 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 많은 걸 배우렴.
에스델은 태어났다.
“…….”
에스델은 거대한 칠흑의 검을 쥐었다. 그녀가 태어난 구슬에서 함께 굴러 내린 검이었다. 일찍이 마왕이라 불리던 시절 그녀를 무패이자 최강으로 만들어준 붉은 검.
에스델은 붉은 검을 들었다. 작은 신체에 비해, 그 검은 지나치게 거대했다. 그러나 에스델에게 이 검은 영혼이나 다름없었다.
영혼을 끌어당기기란 너무나도 쉬워서, 에스델은 간단히 대검을 높이 들었다.
“가여운 생이여.”
에스델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마치 자신만의 기도를 읊조리듯.
“나 자신을 이곳에 증명하는 것도 힘껏이니.”
붉은 검이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 하늘을 우러러 고고성(呱呱聲)을 흘린다.”
그리고.
휘둘러진 검이 울부짖음을 토했다.
대검이 토해낸 붉은 광선이 세상을 갈랐다.
떨어지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갈렸고, 먹구름이 흩어지며, 그 너머에 가려져 있던 노을이 산산이 쪼개졌다.
“…….”
노을의 찬란한 빛깔을 그대로 비치면서, 빗방울, 빗방울들이 후드드드 내렸다. 방울 하나하나가 황금을 간직한 양하여, 낡은 한옥은, 별안간 금빛으로 뒤덮였다.
[가을비의 마왕이 현현합니다.]자수정은 멍하게 마당 한복판에서 황금의 소나기를 보았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라비엘도, 우부르카도, 이 신비한 빗줄기를 조용히 올려보았다.
“아름다워요…….”
자수정이 김공자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공자 씨는, 아름다운 걸 무척 많이 가지고 계시는군요.”
“…….”
김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김공자가 말했다.
“이 날은 에스델이 태어나는 날입니다.”
3.
그리고 이 날은 에스델이 태어나는 날만이 아니었다.
한옥의 낡은 마당에, 수많은 교인들이 부복했다. 자리가 부족하여 동료 교인의 어깨 위에 부복한 자도 많았다.
499명.
한 사람을 제외한 마교(魔敎)는, 옛 주인을 잃고서도 여전히 마음을 잃지는 않았다.
“혈마(血魔).”
나는 그 중에서 제일 건장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예, 소교주!”
“너는 천마님을 따라 호종하며 온갖 잡일을 다 도맡아서 처리했다. 처리해야 할 악인이 있으면 처리했고, 교인들을 위해 집을 지어야 한다면 지었다. 너는 악을 처단할 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했으니, 비서 중에서도 비서요, 일꾼 중에서도 일꾼이라 할 만하다.”
“감사합니다! 소교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혼염마(鬼魂炎魔).”
“예에이.”
“너는 천마님이 뜻을 세우면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전략과 지략으로 봉공했다. 설령 너희의 천하가 설원에 파묻혀 모든 전략과 지략이 눈밭 아래 얼어버렸다 한들, 천마님께서 마지막 뜻을 세우실 수 있었던 데에는, 너희의 헌신이 있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월영마군(月影魔君).”
“사마군 일위, 휘하 시영대, 월영마군. 소교주님의 부름에 답합니다.”
“너희는 천하에 간자를 심어두어 누구보다 일찍 세계에 설원이 도래했음을 알았다. 너희는 동분서주하여 무림맹 마지막 정예를 안내 하였고, 마천의 마지막 전사들을 소집시켰으니, 너희가 없었다면 마지막 남은 한 포기의 강호에서 자웅을 가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마.”
“말씀하시구려! 소교주!”
“너희는 강하다. 최후의 일전에서 우리는 무림맹을 상대로 승리했다. 강하지 않았더라면 제아무리 일전이 아름다웠다 한들, 제아무리 이야기에 영원히 전해질 만한 미담이었다 한들, 도대체 무슨 소용이겠느냐. 이기고 봐야지.”
“크하하하! 맞는 말씀이어서 내 소교주의 가슴을 꽈악 안아드리고 싶구려!”
“너희들.”
나는 등을 돌려서 499명의 교인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이 있어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다. 아니, 우리가 있었기에 스승님께서 승리하실 수 있었다.”
교인들의 눈에 조용한 불이 타올랐다.
“스승님께서는 단지 무림맹에 승리를 거두신 것인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스승님께서는 단지 무림맹주 남궁운에게 승리를 거두신 것인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존께서는 무엇을 상대로 승리하신 것인가!”
에스델이 갈라놓은 저녁의 하늘 위로, 언젠가 멸망한 눈의 백성들이 외쳤다.
“세계!”
그렇다.
“천마께서는 세계를 이기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혹 영원한 눈이 내려 지상을 감싼다 한들. 설령 만민이 설원에 파묻혀 동사한다 한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님께서는 단 한 번도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단 한 번도 검을 의심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스승님께선 설원을 벤 것이다.”
“마도천하(魔道天下)!”
“민초독존(民草獨存)!”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세계가 많고도 많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갈라진 노을밖에 없었지만, 내 손은 그 너머의 탑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이곳에 자리한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스승님께서 베지 못한 세계가 아직도, 아직도, 입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넘쳐나는 것이다!”
교인들의 살기가 정점에 달했다.
“우리는 마천의 유훈을 이을 것인가!”
“바라야!”
“베어넘겨야 할 세계가 많고도 많다면,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는가!”
“바라야!”
“그렇다면 살아라!”
“아가바라야!”
“우리의 마음이 촛불이니.”
“세상을 태우리라!”
그리하여 나는 499명의 상자를 심장에 녹였다.
다시 되살아난 교인들은, 여전히 살기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토해내는 것이 살기만은 아니었다.
“마도천하.”
내 중얼거림에, 499명의 교인들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민초독존!”
그들의 칼에는 거무튀튀한 내공이 서려 있었다.
“우리는 탑을 재패한다!”
[백귀환생]에 묶여 있던 백귀들이 풀려났다.그들은 내 심장에서 재탄생하여, 전성기의 힘을 간직한 채 돌아왔다.
이곳에 최강의 군단이 탄생했다.
23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