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34)
3.
백귀(白鬼)는 유형지다.
제국을 핏물로 물들어버린 죄인. 지존을 끝까지 호종하지 못한 죄인. 그들은 [백귀환생]이라는 이름의 유형지에 쇠사슬이 걸렸으며, 그 쇠사슬의 대가는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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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死者)는 생전의 능력을 계승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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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생전의 전성기를 끌어들이지 못하고 다만 추억할 뿐이니. 일찍이 제국을 멸한 대마왕은 작은 아귀로 졸아들었으며, 일찍이 천하를 호령한 마교는 성질 좀 괴팍한 무뢰배들로 전락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달라졌다.
“크하하핫! 이 얼마만의 마천신공인가!”
교인들이 쥔 칼에서 무공이 소용돌이쳤다.
언젠가 한 번 잃었던 육신이 돌아왔으며, 언젠가 한 번 버렸던 무공이 되돌아왔다.
전성기.
마천이 무림을 호령하던 바로 그 시절의 전성기로 돌아오자, 교인들은 흥분에 넘쳤다.
“제기랄, 이럴 날이 올 줄이야…….”
“비무다! 비무를 열자!”
“이미 죽은 목숨을 한 번 구해준 것만으로도 감읍하고 또 감읍했는데, 소교주께서 이제 소인들의 무공까지 돌려주셨으니, 차마 각골난망하다 말하기에도 부끄럽소!”
“소교주 천세! 천세! 천천세!”
“오늘은 마교 공식 잔칫날로 삼아야 하는 거 아녀?”
“당장 비무를 벌이고 싶다만 여기 마당이 좀 좁쌀만하구만. 소교주! 여기 어딥니까? 원래 소환되었을 때부터 묻고 싶었는데 소교주가 하도 엄격 진지한 얼굴 짓고 있길래 이제야 물어봅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온 천하에서 도망쳐온 농노, 탈영병, 노예, 거지 아니랄까봐 일단 떠들기 시작하니까 돗자리 시장판이나 다름없다.
“일단은 너희 후속대가 기다리니 자리를 비워라. 너희가 지골룡의 상자를 받는 동안 나머지 오백의 병력은 아직도 얌전히 그림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오든지, 담벼락 위로 올라가든지, 자리를 마련해라.”
“예! 소교주!”
교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리고 정말 기술도 좋게 요리조리 담장 위에 올라가거나, 담장 위에 올라간 동료의 어깨 위로 올라가거나, 벽과 일심동체가 되어 숨어버리거나, 굴토끼처럼 대청마루 아래로 사사삭 들어갔다.
불과 30초도 지나지 않아 한옥저택의 마당은 깨끗해졌다.
“굉장히 숙달된 솜씨네요.”
그 광경을 본 자수정은 감탄했다.
“…….”
우부르카는 대청 마루에 앉아 묵묵히 마당을 바라보았다.
교인들이 풍기던 살기와 예기, 무엇보다 무공의 수위. 그것들에 견주어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는 것이리라.
전사로서 흥분되기 시작했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도 그 팔근육이 꿈틀, 꿈틀, 술렁거렸다.
“준비해라. 조만간 붙게 될 거다.”
나는 우부르카의 팔을 툭 쳤다.
“그리고 네 앞에 다가설 강자는 저들뿐만이 아니야.”
나는 마당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스킬이 진행됩니다!]차례를 기다리던 백귀들이 소환되었다.
마교의 총원은 1000명. 앞서 499명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새로운 육신을 내렸으니, 이번에도 500명의 기억을 칠흑 구슬에 담아 내 심장으로 넣었다.
이로써 불사(不死)의 마교군단이 완편되었다.
“다음.”
다음에 소환된 자는, 가을비의 마왕이나 천하를 호령한 마교에 비해서는 다소 초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금사매.”
“…….”
마당에 선 시녀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태생이 귀한 집안답게 그 금발은 언제나 손질을 받아 단정했다.
한때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며 제국을 주름진 여걸.
실비아 에바나일 남작 영애.
“……이반시아의 태양과 달을 뵈옵니다.”
꾸벅.
금사매는, 라비엘과 내가 나란히 앉은 대청마루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치맛자락을 잡은 손끝에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입술을 열었다.
“당신과는 이야기를 별로 안 나누었지.”
“……당신이라뇨. 전 부인의 아랫것에 불과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우니 말을 낮추세요.”
“그래. 너랑은 이야기를 얼마 나누지 못했어.”
나는 편하게 말했다. 라비엘은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다만 오른팔을 들어 내 먼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여태까지 이곳은 어느 초라한 마을의 낡은 한옥이었다. 쓸데없이 마당이 넓기만 한 저택 말이다.
하지만 라비엘이 내 어깨를 잡은 순간, 우리가 앉은 대청마루는 우리 두 사람의 작위를 증명하는 공좌(公座)가 되었으며, 금사매가 무릎을 꿇은 마당은 바로 알현실이 된 양 엄숙해졌다.
“나는 너와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어.”
“…….”
금사매가 졸여진 숨을 흘렸다.
이곳에는 휘황한 가문 깃발이 없었고, 갑옷이 반짝거리는 기사들도 없었다. 하지만 [이반시아 공작가]라는 것은 비단커튼이나 대리석 계단 따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라비엘이 있고, 김공자가 있다면, 그곳이 곧 이반시아였다.
매앰, 맴, 맴, 매애애…….
이계(異界)에서 이국(異國)의 벌레가 울었다.
울음소리가 다 그치기 전에, 금사매는 자기가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하여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하문하시지요….”
“너는 회귀자였잖아.”
“예에.”
“성좌의 힘을 빌려 회귀했다는 건 알겠다. 라비엘에게 책정될 예정이었던 황후의 자리를 꾀했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 왜?”
“…….”
‘왜 하필 황후를 노렸나? 제국에서 제일가는 권력을 쥐어보고 싶었나? 왜 라비엘의 자리를 빼앗는 것에 새로운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지?”
금사매 시녀, 아니 실비아 에바나일은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백귀의 군주이므로 토설하라 명령하면 실비아로선 침묵을 지킬 수단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명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아.”
그리고 더 이상 [남작 영애]라고 불리지 않더라도, 한때 제국의 귀족이었던 실비아 에바나일은 스스로 입술을 열었다.
“잘 몰라?”
“응, 뭐, 잃어버린 과거잖아요.”
실비아는 소리없이 입술 끝을 올렸다.
“황태자의 연인. 미래의 황후. 가문의 승천. 제 발아래에 놓였던 수많은 초대편지들과 제게 아부 한마디 하기 위해 달려든 어중이떠중이들……. 다 과거 아닙니까? 잃어버리고 나니, 뭐랄까, 내가 왜 그것들을 그렇게 악바리처럼 긁어모았더라……? 좀, 잘 모르겠어요.”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고?”
“아하하. 뭔가 대단한 반론처럼 들리네요. 과연 이반시아공작가의 달이신 분. 인간의 심리 따위는 얼마든지 꿰뚫어볼 수 있다? 에이. 꿰뚫어보실 만한 뭣도 없습니다. 하지만 부인께서 잘난 척하고 싶으신 거라면 저, 실비아 에바나일! 충성을 다해서 어울리겠습니다.”
“너의 집사가 죽었으니까.”
“…….”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사라졌지.”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의 집사.라비엘이 파멸하고 실비아가 타락하자, 견디지 못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기도한 자. 그자의 소원은 어느 [방구석 도서관장]에게 닿았다.
-신이시여.
-저희를 도와주소서.
하무스트라는 기꺼이 집사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아직 금사매 영애가 황후에 오르기 전으로, 아직 라비엘이 파멸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렸다. 되돌린 시간선에서 라비엘은 심장에 칼을 박아 도금되었다.
대가로, 집사는 존재를 잃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저어, 는.”
실비아는 머리를 숙인 채 이빨을 악물었다.
“저는, 이반시아공작 영애님과 친해지고 싶었어요. 아름다워서… 그리고 유능해서, 똑똑해서. 저런 분이 이 세상에…… 우리들 사이에 있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라비엘은 ‘흐음’ 하고, 미간을 좁혔다.
“처음 만난 순간이라.”
“예에. 제 1회차 때 있었던 첫 만남 말이에요. 저는 어린 친구들과 데뷔탕트를 하게 된 것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죠. 그때 공작님이, 당시 은백합 영애님이 먼 발치에서 보였어요.”
실비아는 말했다.
이미 몇 번이나 되돌려본 비디오 테이프를 다시 틀어놓은 사람처럼, 실비아는 과거의 풍경을 정확히 읊었다.
“어린 제 눈에 비친 은백합 영애님은, 뭐, 진짜 천사였거든요. 은발이라니! 심지어 붉은색 눈동자…… 가장 아름다운 루비를 캐낸다고 해도 영애님의 눈동자를 본 사람들은 그게 무슨 쓰레기냐면서 코웃음을 치겠죠. 그러니까 저는…….”
나는 이해했다.
“동경했다는 거구나.”
내가 어떤 헌터를 동경했던 것처럼.
잠시간 침묵이 있고 나서, 실비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예! 그래요!”
실비아는 메이드 헤드드레스를 쥐고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동경에 빠졌습니다! 됐습니까아!?”
실비아는 씩씩거리며 침묵에 잠긴 라비엘을 노려보았다. 처음에 차린 예의는 어디 개집에다 쓰로임했는지, 작법이고 나발이고 그냥 깡패처럼 서 있었다.
자수정, 우리의 무표정한 집주인이 쟁반을 든 채 다가갔다.
“차게 식힌 보리차예요. 드실래요?”
“예에! 당신이 누군진 모르지만 고맙습니다! 훕, 꿀꺽꿀꺽, 꿀꺽……, 뭐예요, 이거! 존나 맛있잖아요!? 쌍!”
실비아는 보리차를 노려보다가 별안간 추욱, 어깨를 늘어트렸다.
인생이 허망해진 표정이었다.
“뭐. 그렇게 동경에 빠진 사람들이 저 혼자만도 아니었고. 저희는 자체적으로 [은방울]이라는 사교회를 만들었어요. 회원제였고, 회원의 추천을 받은 영애만이 가입할 수 있었죠. 심사도 엄청 엄격해서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사교회가 아니었답니다.”
“은방울…?”
“[은백합 영애를 위한 방울들]이요. 딸랑이들 말이에요. 그것도 못 알아듣습니까? 멍청이예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배후령과 반짝이가 그 침묵을 깼다.
– 좀비야. 너는 그래도 처박혀 살 적에 불방울이니 뭐니 하는 건 안 만들었지?
[ 그 시절의 용사님께서는 그런 걸 함께 만들만한 사교력이 없지 않았을지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 아……. 미안하다 좀비야. 내가 나도 모르게 아픈 구석을 건드렸구나….
나는 잠자코 금사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해서. 제가 창립인사이기도 해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활동했답니다.”
라비엘은 턱을 짚은 채 고개를 수그렸다.
“……당사자인 본인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다만?”
“저희 사교회의 철칙이 절대 비밀주의였으니까요. 저스트 루킹, 돈 터치.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비밀아지트로 돌아와 은백합 영애님에 관해서 수다를 떨거나 시를 쓰거나 소설을 발표하는 것이 비밀결사 [은방울]의 가공할 만한 목적이었죠.”
“내가 무슨 오리너구리 같은 포지션이다만….”
라비엘이 입술을 삐죽였다. 확실히 갓 태어난 오리너구리 같았다.
“뭐, 여느 때처럼 꺄아까아 거리고 있었는데요. 그러다가 제가 말이죠. 그냥 심심풀이로 종이에다 은백합 영애님의 본명…… 라비엘 이반시아를 쓰고, 그 아래에다 제 이름을 써봤답니다. 아. 이건 보여줘야지 설명이 되는데.”
실비아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근처에 마당을 쓸기 위한 빗자루를 발견하고, 터벅터벅 가서 가져왔다.
“자아. 보세요.”
실비아는 빗자루를 거꾸로 잡고 쓰윽, 쓰윽, 땅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
라비엘 이반시아
실비아 에바나일
+
“대충 이런 형태로 종이에 글자를 적어봤단 말이에요. 어릴 때.”
– 좀비야. 너는 그래도 처박혀 살 적에….
– 그렇겠지. 그래.
나는 역시 신경쓰지 않고서 실비아만을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빗자루를 요리조리 돌리면서 말했다.
“처음엔 그냥 할 짓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낙서해본 거였어요. 그런데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떠올랐죠. 만약 은백합 영애님과 저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라비엘이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실비아는 성난 고슴도치처럼 그런 라비엘을 빗자루로 겨누었다.
“아, 이해하세요. 좀. 사춘기였다고요. 어쨌든, 만일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정식 결혼은 못할 테니 사생아가 되는 거잖아요. 가문의 이름을 물려줄 순 없는데, 그렇다고 아예 관계가 없는 이름을 지어주면 안 되니까. 비밀리에 [라비엘 이반시아]와 [실비아 에바나일]을 조합해보자, 그런 발상이 떠오르는 건 이제 뭐 거의 필연일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 아웃스탠드한 아이디어를 언더스탠드했나요?”
“실비아 씨.”
자수정이 정중하게 한 손을 들었다.
“아웃스탠드가 아니라 아웃스탠딩으로 써야 옳아요.”
“가르쳐줘서 고맙네요! 젠장!”
하아, 소리를 내면서 앞머리를 쓸어넘긴 실비아 에바나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음, 이게…… 아무튼 그렇게 되는데… 참. 이게 이 세계 언어로도 제대로 통하려나? 왕국어로는 똑같이 됐는데. 아, 몰라. 아무튼 해보지 뭐.”
나는 역시 가만히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땅바닥에 열심히 글자들을 적어나갔다.
+
ㄹㅏ ㅂㅣ ㅇㅔㄹ ㅇㅣㅂㅏㄴㅅㅣ ㅇㅏ
ㅅㅣ ㄹㅂ ㅣㅇㅏ ㅇㅔㅂㅏㄴㅏㅇㅣ ㄹ
+
“잘 보세요. 여러분. 여기가 죽여주는 부분이거든요? 제가, 어린 시절의 저 금사매 영애가, 그냥 두 사람의 이름을 조합해서 애 이름 이나 지어보자 싶다가, 문득 엄청난 걸 깨달았다 이 말씀이에요!”
시녀복을 입은 실비아가 다시금 빗자루를 움직였다.
“지금 알파벳 별로 글자를 나눴죠? 그런데 이걸 다시 자음이랑 모음으로 나누면-.”
+
ㄹㅂㄹㅂㄴㅅ ㅏㅣㅇㅔㅇㅣㅏㅣㅇㅏ
ㅅㄹㅂㅂㄴㄹ ㅣㅣㅇㅏㅇㅔㅏㅏㅣ
+
거기까지 그리고, 실비아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실비아의 얼굴은 붉게 흥분되어 있었다.
“보셨지요? 봤죠! 아시겠어요, 이 운명의 페이트를!?”
“실비아 씨.”
자수정이 정중하게 한 손을 들었다.
“이 경우에는 페이트보다 데스티니가 더 옳아요.”
“고맙지만 댁은 이제 좀 셧업해주시고!! 젠장! 아 그러니까들, 집중해서 왓칭 좀 하시라구요!”
자수정이 시무룩하니 고개를 수그리는 가운데, 실비아의 빗자루가 슥슥슥 달렸다.
+
ㄹㄹㅂㅂㄴㅅ ㅇㅇ아ㅏㅏㅣㅣㅣㅔ
ㄹㄹㅂㅂㄴㅅ ㅇㅇ아ㅏㅏㅣㅣㅣㅔ
+
아.
“…….”
과연 저렇게 적어놓으니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 나열된 글씨들을 쳐다봤다.
“이름을 이루는 글씨들이…… 전부 똑같네?”
“예에!!”
덩그렁!
실비아는 빗자루를 팽개치고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은백합 영애님이랑! 저는! 이름이 똑같았던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오래 전에 녹슬어서 잔해밖에 남지 않은 소녀의 순수성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23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