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36)
1.
실비아가 주먹을 꾹 쥐었다.
“대처법이라니, 뭘 말하는 겁니까아?”
“지금 문제가 되는 사항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 연인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 상처를 다독여보고자 사과했지만, 한 마디 말로 상처를 치유하긴 어려운 법이다. 실제로도 그대는 지금도 완전히 상처를 치유하진 못했을 것이다.”
“뭐어, 그렇게 말하니 뭔가 제가 굉장히 쪼잔해보이지만… 그렇다면요…?”
“그렇다면 모두 세 가지 선택지가 있을 수 있겠다.”
라비엘은 손가락을 셋 펴고, 그 중 하나를 접어 보였다.
“첫째는 그대의 속이 풀릴 때까지 내가 파멸을 겪는 것이다.”
듣고 있던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라비엘은 그런 내게 살짝 곁눈질을 하고는 다시금 금사매 남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수행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나의 파멸은 나 개인뿐 아니라 내게 달려 있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그것은 제국의 안위였고, 지금은 거기에 내 연인의 행복까지 더해졌으니, 이것이 내가 도저히 그 요망을 들어줄 수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대가 그것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은, 그대의 집사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 증명한 바일 것이다.”
실비아는 고개를 수그렸다.
집사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속에 지울 수 없는 빚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라비엘의 손가락이 하나 더 접혔다.
“둘째는 그대를 물리적으로 배제하여 소멸시키는 것이다.”
“…!”
실비아가 움찔하여 고개를 들었다.
은빛의 폭군은 어둠을 사르는 붉은 눈으로 실비아를 내려다보았다.
“평상시라면 내가 주저없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
“살인은 궁극적인 무능이라고, 내 반려가 어떤 신의 말을 전해준 바 있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살인은 유능의 증거가 아니라, 단지 그 밖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택할 수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라고 라비엘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전능한 신이 아니다. 전지한 초월자가 아니다. 나는 한계성을 가진 사람이고,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며 빵과 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조금 똑똑할 뿐인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제약 속에서 내가 짊어진 것들을 지켜야만 한다. 안위를 위협하는,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들을 물리적으로 배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신의 한계를 기꺼이 긍정하는 그 목소리에는, 그러기에 표현되는 인간의 당당함이 있었다.
“그래서….”
실비아가 이를 악물었다.
“저를, 없애겠다는 겁니까아…? 아니면 너 같은 녀석에겐 육신을 허락할 수 없으니 계속해서 이 백귀의 굴레를 씌워놓겠다는 겁니까아…?”
“둘 모두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그 중 어떤 것도 택하지 않겠다.”
라비엘은 그렇게 말하고,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셋째는 그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
“…?”
“즉, 그대를 나의 첩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
“…….”
호르릅, 하고 자수정 씨가 보리차를 마셨다. 차 마시는 소리가 잘도 들렸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가 울리지 않았으며, 담벼락의 그늘로 숨어든 마교 교인들조차 숨을 죽였다.
-와오.
마침내 내 귀에 들려온 것은 배후령의 감탄이었다.
탑을 99층까지 제패한 레전드 중의 레전드는, 참으로 심오한 표정을 지은 채 안뜰을 쳐다보고 있었다.
-좀비야, 나 팝콘 좀. 아. 그냥 팝콘 말고 꼭 카라멜 팝콘으로 부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팝콘은 적당히 갈색으로 코팅된 게 제일 맛있더라고. 뭐랄까, 충치를 깨물어 먹는 느낌이라서 더 특별하달까? 아무튼 그래.
표정에 비해 대사는 별로 심오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잠깐만 좀 닥치라고 해주고 싶군.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안뜰에선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그 주인공은 실비아 에바나일. 금사매 남작 영애였다.
실비아의 입술이 우르르 떨렸다.
“무슨 헛소리입니까아!?”
어둠에 가려져 잘 안 보였지만 눈빛도 입술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첩실? 처, 첩실이라고요? 지금, 감히, 저 실비아 에바나일한테. 황태자 전하께서 황태자비로 삼겠다고 언약까지 한 저한테, 하, 한낱 첩실이 되라고……! 당신의 첩이 되라고 말한 겁니까!?”
“그렇다.”
“개소리! 개소리개소리개소리! 무슨 그 따위 개소리를, 마—말이나 된다고, 도대체가 당신,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음. 확실히 개소리지.”
라비엘이 긍정했다.
덕분에 떨어졌던 내 심장이 낑낑대면서 척추를 잡고 기어올라왔다.
“이것이 개소리인 이유는 다시 두 가지다.”
라비엘이 다시금 손가락을 둘 펴면서 말했다.
“하나. 이것은 내가 나 혼자 즉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체면. 지위. 눈총. 그런 물리적인 여건들은 모두 정리할 수 있지만, 공자와 나 사이에 먼저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이 합의가 선행되지 않았다는 것, 내가 이 해법을 개소리로 여기는 첫 번째 이유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척추를 타고 기어올라온 심장이 제 자리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은 가운데, 실비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게 아니지요! 제 의견을 듣는다는 건 어디로 갔습니까! 그거야말로 선행되어야 할 조건—”
“둘.”
라비엘은 손가락을 마저 접었다.
“그대는 정말로 나를 사랑했던 것인가?”
소리치던 실비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다만 우상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는가?”
“가질 수 없는 것, 갖지 못한다고 지레짐작한 것에 대한 소유욕은 아니었는가.”
긴 정적이 흘렀다.
“나는,”
툭.
라비엘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수정이 쟁반을 들고 찻잔을 수거하여, 표표히 대청마루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김공자를 사랑한다.”
“김공자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이런 사랑이 가능하리라 생각지 못했고, 지금껏 살아오고 죽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불가능했을 것이지만, 한 번의 기적이 내게 허락되어, 나는 그를 만났다.”
라비엘은.
그저 사실을 말하듯 담담히 읊조렸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의 숨소리, 그가 새벽에 나가서 사라지고 없는 침대의 빈자리… 온기…. 나는 내 사랑이 흘리고 간 흔적들마다 행복을 느낀다. 나는 그를 이해하며, 그는 나를 이해한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라비엘이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런 사랑]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랑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
“…….”
“그대는 나를 그렇게 사랑했는가.”
실비아는 고개를 수그렸다.
그것은 대답할 수도 없고,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지금 이 자리에서 그저 피하고 싶어하는 몸짓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그대도 내내 알고 있겠지. 그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그대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
그런 것이다.
내가 라비엘을 사랑하고, 라비엘이 나를 사랑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우연과 핏물이 필요로 했는가? 우리가 강하게 사랑하는 이유는 다만 쉽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은 어렵다.
라비엘과 나이기에 이룰 수 있는 사랑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라고 실비아는 말했다.
수그린 고개와 흘러내린 앞머리 안쪽으로 어둠이 고였다.
“그럼, 뭡니까… 결국, 어쩌자는 겁니까아.”
악문 채 떨리는 치아가, 잇몸으로부터 밀려나온 핏방울이 배어 붉어지기 시작했다.
“파멸해주지도 않겠다, 없애지도 않겠다, 사랑해주지도 않겠다… 어쩌자고요. 스스로 불완전하다고 인정한 사과만 툭 던져 놓고는, 아, 뭘 어쩌라고요… 어쩌자고요….”
“그것을, 나는 그대에게 맡기고자 한다.”
그리고 라비엘은 여기서 나를 돌아보았다.
“공자.”
음.
“예, 라비엘.”
“지골룡의 상자라는 스킬을 이용하여 실비아에게 육신을 주면, 실비아는 백귀이던 때보다 훨씬 자유로워지는가.”
나는 그 질문의 의도를 이해했으며, 그러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유로워집니다.”
“그 자유는 살아 생전 누리던 것에 값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바라는 것을 추구할 수 있을 만큼?”
“바라는 것을 추구할 수 있을 만큼.”
라비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바라는 것을 추구하라. 실비아 에바나일.”
“나를 파멸시키고 싶은가? 그대는 이미 거의 성공했었지. 어디 다시 해보도록. 하지만 그러자면 나보다, 그리고 내 연인보다 강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대를 위해 희생한 집사의 마음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금사매의 호흡이 끊어졌다.
라비엘의 말은 계속하여 이어졌다.
“죽어 사라지고 싶은가? 또는 나를 죽여 없애고 싶은가. 해보아라. 그렇지만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다. 내게 가해지는 위협에 나는 내 모든 것을 갖고서 저항할 것이고, 승리할 것이다. 앞서 나를 파멸시키고 싶을 때 그래야 할 것처럼, 그대는 보다 잘해야만 할 것이다.”
“아니면 내게 사랑받고 싶은가. 또는 일찍이 내가 그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대 자신이 내가 숭배하고 동경하여 마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은가. 그 역시 그대의 노력에 달려있는 일. 그대는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이룰 수도 있겠지, 하고 라비엘은 중얼거렸다.
말하는 내내, 그녀는 금사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실비아 에바나일.”
사람의 눈동자가 사람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는 그대를 나의 적수로, 나의 반대편에 서있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존재로, 한 사람의 대등한 인간으로 인정한다.”
처음부터.
아주 처음부터, 모든 세계에 있어 필요했던 것은 다만 그것일 것이다.
“그러니 묻겠다. 실비아 에바나일.”
라비엘 이반시아가 조용하게 물었다.
“그대는 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하는가?”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2.
실비아는 멍하게 라비엘을 올려보았다.
어두워진 하늘 너머에는, 흰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을 역광으로 받는 라비엘의 얼굴은 무척이나 굳건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금사매가 입을 열었다.
가슴에 무슨 증기(蒸氣)가 그리도 많이 쌓였는지, 입을 열었는데도 말이 안 나왔다.
그저 뜨겁게 달구어진 숨소리가, 악의가, 분노가, 자괴감이, 자책감이, 원망이, 원념이, 핏덩어리가, 숨결이, 끝없이 새어 나왔다.
“저는…….”
저는, 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실비아는 실로 자기 자신을 토해내고 있었다.
“저는, 어렵습니다. 당신을, 당신들을….”
피가 날 만큼 이를 악물고.
아플 정도로 노려보면서.
“우러러보지도 않고, 깔보지도 않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스스로는 바라 마지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한다는 것이, 저는….”
무엇보다, 늘어붙은 목소리로.
“…지금도 그래요. 당신은 제게 사과했는데, 결국 저는 당신에게… 당신에게 사과할 수가 없어요. 당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저는.” 실비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말 자체가 후안무치하겠지요. 제가 당신에게 훨씬, 정말 훨씬, 비할 수 없을 만큼 심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그것이… 그것을.”
보유한 무력, 권력의 유무와 강약을 떠나, 용서하는 자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용서받는 자보다 강하다.
실비아는 그만큼 강하지 못했고, 그러기에 라비엘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실비아는 덜덜 떨다가, 심호흡을 하고서 간신히 씹어 뱉었다.
“일단은 그것을… 그것을 해보고 싶습니다아….”
실비아는 맹세했다.
“당신을… 당신들을, 용서하는 것을… 당신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얼마나 걸릴지, 제 소갈머리에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일단 이루어 보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비아는 말을 삼켰다.
그대로 삼킨 채 소화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 채 말했다.
“그것이, 제가 그런 인간이 되는 것을… 그 녀석은, 집사는 바랬을 테니까….”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훌쩍임을 따라, 흐느낌이 흘렀다.
“일단은 그런… 그런, 그 녀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을… 어렵지만, 힘들지만 저는….”
나는.
그것을 삶을 향한 의지라 부른다.
“좋다.”
삶을 나눠주는 권능을 가진 이로서, 나는 기꺼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디 살아보려므나. 금사매 남작 영애. 실비아 에바나일.”
“그대가 얻으려는 것을 얻기 위해. 그대가 증명하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라.”
내 손이 움켜쥔 황금색 카드가 빛을 발했다.
“내가 그대와 함께 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의지를 지골룡의 상자에 담았다.
[스킬을 발동합니다!]23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