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38)
4.
김율(金律).
나는 그 울림을 가진 남자와 마주보았다.
‘잘 생겼네.’
남자는 머리카락이 길었다. 밤바람이 흔들리자, 은빛 머리카락은 아무런 무게도 없는 듯 살랑살랑 춤을 추었다. 두피에 매달린 그 자그마한 뿌리를 툭, 잘라버리면 머리카락은 당장에라도 어디론가…… 어느 이름 모를 사막에 날아 흘러들 것만 같았다.
그렇다. 은빛 머리카락은 어느 모래사막을 동경하는 것 같았다. 떠났던 곳,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곳, 떠나게 될 곳. 무수한 머리카락 낱낱이에 모래사막을 향한 동경이 은은히 돌아다녔다.
“김율 씨.”
“불러서 왔다. 그런데, 이곳은 마경(魔境)인가? 전성기의 내가 달려들어도 승부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전력들이 모여 있군.”
서슬하게 푸른 눈동자가 저택의 안뜰을 뜯어보았다. 마교의 정예들이었고, 이제는 우리 가문의 무사들인 혈귀대(血鬼隊)가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김율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상당한 전력이다.”
한때 탑 50층에서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던 카페 아르바이트생은, 진심이란 얼굴로 평가했다. 하긴 김율은 언제나 항상 진심이란 얼굴이긴 했다.
“상당한 전력이라면, 어느 정도?”
“이대로 50층에 올라간다 해도 어중이떠중이들은 감히 다가오지 못하겠지. 마탑(魔塔)에 거미줄을 치고 사는 마녀들도, 자네들과 일전을 벌여야만 비로소 50층의 주인이 누구인가 가려질 것이다.”
“거기에.”
나는 우부르카의 팔을 툭, 쳤다.
“이 아이까지 더해진다면?”
“…….”
김율은 주의 깊은 눈길로 우부르카의 전신을 살펴봤다. 울퉁불퉁한 가슴근육부터 알이 박히다 못해 그 자체가 알이 되어버린 허벅지까지. 우부르카의 기도(氣道)가 이어진 근육을 툭, 툭, 치면서 김율은 살짝 눈썹을 치켜떴다.
“굉장하군. 괴물인가?”
김율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다는 것이 내 눈에는 읽혔다. 김율의 무표정을 읽는 거로 치자면 도서관장이랑 나만한 권위자가 없을걸.
“천무지체(天武之體)의 전형이다. 한 번 칼질을 펼쳐도 기껏해야 인(人)을 가르는 것이 고작인 무인이 있으니, 이를 인무(人武)라 한다. 한 번 칼을 휘둘러서 나라의 땅을 넓히는 대무사가 있으니, 이를 지무(地武)라 한다. 하지만 천무(天武)는 차원이 다르지. 한 번 칼을 휘둘러서 하늘을 베니, 그 칼날 아래에선 몇 명이 죽고 사느냐 몇 나라가 흉망하느냐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어마어마하군. 이 저택에 모인 전력만 해도 이미 웬만한 성좌의 층엔 쳐들어가서 궤멸시킬 수 있…….”
“제 아들입니다.”
“…….”
소환 이후 처음으로 김율이 입을 꾹 다물었다.
푸른 눈동자에는 희미하지만 혼동과 혼란의 기미가 섞였다.
나는 김율을 혼란시킬 수 있는 존재라고. 어때. 굉장하지?
“아들이라면……?”
김율은 고개를 돌려 우부르카의 덩치를 보았고, 내 덩치를 보았으며, 마지막으로 라비엘을 쳐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최대한 복잡한 방정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김율의 이마에 하얀 땀방울이 맺힌 것도 같았다.
“어떻게? ……불가능한 일이다. 체격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인종적으로도 불가능해 보인다. 탑의 저주? 스킬의 영향인가? 아니, 하지만 성장속도가…….”
“양아들이에요.”
“죽고 싶은가, 사왕.”
어느새 김율의 손아귀가 내 목을 꽉 잡고 있었다. 전성기의 힘을 다 잃어버린 백귀라서, 하나도 안 아팠지만, 날 노려보는 시퍼런 안광만큼은 좀 무서웠다.
“가, 감정 표현이 상당히 다채로워지셨네요.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우부르카를 보고 감탄도 하시고, 절 보고 멍청한 짓을 보이기도 하시고…….”
“나도 사람이다. 어쩔 수 없잖은가.”
김율은 내 목을 풀어주면서 하아, 한숨을 쉬었다.
“기억을 희생하여 힘을 얻는 스킬을 잃어버렸다. 내가 버린 것들이 적힌, 이 수첩에 나의 반생이 적혀 있을 뿐이지.”
김율은 품에서 수첩을 꺼내어 내려보았다. 많은 감정이 담긴 시선이 수첩의 낡은 가죽을 훑었다.
“버릴 것은 이미 다 버렸고, 더 버리는 것도 불가능하니, 앞으로는 얻을 것밖에 없더군. 사왕. 네가 내게 약속한 대로 말이다. 나는 삶을 살고 있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고, 느꼈더라도 금세 버려졌을 것들이 지금의 내 마음에는 천천히 가라앉아 쌓이고 있다. 쌓이는 것이 많아질 수록 내 마음의 수면도 서서히 넘치겠지. 그때가 온다면, 나 역시 남들처럼 웃고 울고 화내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율이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반장을 데려와 재회시키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가슴에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는 기계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왕. 모든 것이 너의 덕분이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멋지네요. 김율 씨는 멋진 분입니다. 그런데, 아쉽진 않으세요?”
김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쉽다? 무엇이 말인가, 사왕.”
“김율 씨한테 소중한 사람이 생겼잖아요. 김율 씨의 반장. 조금 미덥지 못하긴 해도 김율 씨를 좋아해주는 하무스트라. 설령 기억을 버리는 스킬이 돌아오더라도, 이제는 주저없이 버릴 수 없지요?”
“…….”
김율은 무표정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을 버릴 수 없다.”
“…….”
“내 죽음을 위해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 내 삶에 매혹되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고 나서까지 누릴 수 있는 호사란 호사는, 전부 누리는 셈이다. 나는 이 행운을 놓칠 수 없다.”
김율은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런가.”
그리고 천천히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나는 지금 행복한 것이군. 사왕.”
“…….”
“네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김율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당혹스러움, 놀라움, 고마움…… 뿐만이 아니었다. 새파란 바다와 같은 눈동자에선 정말로 많은 감정이 흔들렸다.
“그것이 너의 바람인가?”
거기에는, 알 수 없는 염려조차 섞여 있었다.
“너는 네가 마주치는 사람들을 모두 행복하게 만들 심산인가? 나 자신이 말하건대, 나를 이렇게 만들기란 결코 쉽지 않다.”
“으아. 정말 어려웠죠.”
“나는 기억을 잃었다. 잃은 기억의 파편을 되찾게 하기 위해 너는 [트라우마 세계]를 만들었다. 나는 불행했다. 내가 단지 불행하지만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너는 반장을 데려왔다. ……가성비가 안 맞는다. 한 명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일조차 이다지 어려운데, 사왕. 도대체 무엇을 꿈꾸는 것인가?”
나는 하하,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보기 좋잖아요.”
“뭐?”
“여러분이 웃는 거 보면 되게 좋다고요.”
“…….”
우리가 불행해지면 대신 불행을 짊어지는 신님도 있고 말이지.
곤란한 일이다.
기왕 태어났다면, 바라는 거 다 이루고 웃을 만큼 웃는 게 최고다.
어렵지만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율 씨.”
“말해라.”
“당신에겐 이제 지켜야 할 것들이 생겼습니다.”
원장 선생님, 하무스트라, 그리고 제법 마음에 든 카페 플라네타리움까지.
“하지만 당신에겐 그것들을 지킬 힘이 없어요.”
“…….”
“지금이야 대도서관에 지어놓은 카페에서 평화롭게 책장의 냄새와 ㅜ커피의 향기를 즐길 수 있지요. 헌터들도 거기 올라가서 깽판을 치진 못합니다. 제가 안전을 보장했고, 흑룡, 만신전, 천무문, 상련, 자경단이 공동으로 투자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달리 말하면 지금 김율 씨의 행복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한테 달린 거예요.”
나는 김율의 어깨를 잡았다.
한때는 이 몸에 닿을 수조차 없어 목숨을 바쳐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쉬워서, 김율은 나한테서 도망칠 수도, 내 손길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
김율 자신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엔 파장이 일었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그 파장을 들여다보았다.
“두렵지 않으세요?”
“…….”
“원장 선생님께선 약하세요. 나이가 드셨어요. 어떤 미친 헌터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그놈은 나중에 저희한테 최대한 잔혹하게 복수를 당하겠지만, 그럼에도 원장 선생님께선 속수무책으로 당하실 수밖에 없어요.”
내 손이 짚은 김율의 어깨에서 잔물결이 떨었다.
“하무스트라는 이제 성좌가 아니에요. 그냥, 나약한 꼬맹이죠.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꼬마아이. 그 아이는 권능을 잃었습니다. 어떤 미친놈이 달려들면, 역시, 죽습니다.”
“……무엇을.”
김율이 입술을 열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내게.”
“지켜달라 부탁한다면 지켜드리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제 수하의 무사들 가운데 눈치가 정확하고 손속이 빠른 자들을 도서관에 잠입하여, 24시간, 항시 태세를 경비하도록 명하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 여러분이 죽는다 해도 저에겐 [하루를 되돌릴 능력]이 있습니다.”
“…….”
“저에게 전부 맡기셔도 괜찮아요.”
설령 그러해도 괜찮다.
나는 당신을 탓하지 않겠다.
당신이 그동안 저지른 죄들에 대해선, 그만큼, 내가 당신을 데리고 다니면서 갈무리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 그러기 싫으시다면.”
안위와 안락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선택하겠다면.
“저는 김율 씨한테 삶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천천히, 김율이 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삶이라니……?”
“저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강해졌어요. 당신이 백귀가 되면서 포기해야 했던 능력. 스킬. 그것들을 전부 되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김율이 멈칫했다.
그는 안뜰 곳곳에서 안광을 빛내고 있는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김율과 마찬가지로 무력했다. 싸움에 대한 지식과 어마어마한 근성을 가졌지만, 내공을 운용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무술을 펼치지 못했다.
“……과연.”
마침내 김율의 시선이 에스델에게 닿았다.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에스델의 신형에서 느껴지는 것은, 과거, 단신으로 아이김 제국을 멸망시킨 성좌의 위세.
자신이 건국한 제국을 무너뜨린 마왕을 보고, 김율은 내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너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점점 더 강해지는군.”
“뭐. 세상이 절 약하게 있도록 내버려두질 않더라고요.”
“……[강함]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부양하는 자가 매일 시간을 아껴가며 곡괭이를 휘두른다면, 일초와 일분이 아까워서 쉴 새 없이 팔을 휘두르면, 그 자는 충분히 강하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 시간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강함의 척도일 것이다.”
김율이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언제나 시간을 살지. 되돌릴 수 있음에도, 하루든 일년이든 되돌릴 수 있어서 어느 누구한테보다 너에게 시간의 가치란 하찮을 텐데도, 마치 결코 돌릴 수 없다는 것처럼 하루를 산다.”
나는, 이라고 김율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네가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라며 김율은 말했다.
“나 역시 너처럼 강해지고 싶다.”
“…….”
“노력하겠다. 사왕.”
나는 잠시 침묵했다.
‘모두가 노력하고 있어.’
그 사실을, 조금은 시간을 들여 음미하고 싶었다.
에스델. 언젠가 도플갱어였던 아이는 인간이 되고 싶어했다. 그것이 에스델이 가진 소망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이 되기를 노력할 것이고, 나와 부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실비아. 언젠가 철없는 귀족 영애였던 자는 라비엘을 가지고 싶었다. 그것이 실비아가 가진 욕망이다. 그래서 그녀는 라비엘을 가지도록 노력할 것이고, 라비엘이 내건 조건을 이루도록 노력할 것이다.
김율. 언젠가 기억을 버림으로써 강해졌던 남자는, 이제,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생겨버렸다. 다시는 버리고 싶지 않다. 그것이 김율이 품게 된 소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버리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좋네.’
다른 사람들도.
‘응. 좋아.’
모두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므로.
분명히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계기가 도와주기만 하면.’
그리고.
이들에게는 내가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
“당신에게 육신을 드리겠습니다. 김율 씨.”
누군가에게 계기가 되어주기 위해서 나는 강해졌다.
[지골룡의 상자가 발동합니다.] [지골룡의 상자가 완성되었습니다.]에스델과 사마군, 교인들, 실비아 에바나일이 그러했듯, 김율의 존재 역시 새까만 구슬이 되어 내 심장에 물들었다.
하얗지 못해서 슬픈 존재를 느끼며, 나는 숨결을 흘렸다.
심장만큼이나 내 숨결은 새까맣게 염이 들었고, 입술에서 빠져나가자, 마치 자욱한 안개처럼 땅바닥에 가라앉았다.
그곳에서 서서히 한 명의 육신이 형태를 갖추었다.
“…….”
살천성(殺天星).
귀신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되돌아온 남자는, 느릿하게, 자신의 오른손을 폈다가 쥐었다. 쭉 반복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오늘 읽은 책의 구절이 참으로 좋았다. 아름다웠지.”
김율이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순간.
살천성이 손을 휘둘렀고, 그곳에서 뻗어나간 오러가 밤의 공기를 갈랐다. 가르고 갈라서 달빛이 묻은 구름을 베었다. 만월을 사이에 두고, 어둑한 구름이 두 쪽으로 소리없이 흩어졌다.
흩어진 구름 사이로 하얀 달이 스며들었다.
김율은 우두커니 자신의 위에 쏟아지는 달빛을 올려보았다.
“이제는 그 구절이 기억나지 않는군.”
“…….”
“사왕. 내가 너를 무엇이라 부르면 되겠는가.”
나는 김율에게 다가갔다.
“저를 가주라 불러주십시오.”
“가주.”
“예. 저희는 언젠가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줄 거예요. 하지만, 처음부터 가족을 말해버리는 섣부름을 저는 경계합니다. 저희는 아직 서로에 대해 많이 모르고, 많이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
“우리는 분명히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나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신님과 헤어진 지 일주일.
그동안 나는 이 도시를 돌아다녔고, 이것저것을 준비했다. 오래된 길을 지나치는 도중에 문방구를 발견했다. 학교를 빼먹고 문방구 앞에서 오락기를 두들기는 초등학생을 지나쳐,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이것을 발견했다.
“별로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요.”
스윽.
나는 살천성의 뒷머리를 묶고 있는 노란색 고무줄을 풀었다.
고무줄은 무척이나 질겨, 살천성의 은빛 머리카락을 꽉 조여매고 있었다.
“언젠가 오게 될 그 날을 그리면서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잠시 뒤.
“음. 처음 묶어보는 거라서 이게, 잘 안 되네.”
“…….”
“아. 좀 된 거 같은데… 됐나? 아무튼, 뭐 이 정도면 오케이란 걸로.”
살천성의 포니테일에는 평범한 머리끈이 매였다.
나는 노란 고무줄을 가져가서,
“이건 이제 필요없을 겁니다.”
간단히 오러로 태워버렸다.
“…….”
아마도 무척 옛날에.
수백 년 전에.
레판타 아이김은 ‘김율의 기억’을 버리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기억을 지우더라도 내가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잊지 말자]라고.신서고등학교의 학생들은 김율을 괴롭히기 위해 노란 고무줄을 썼다. 고무줄로 머리를 묶으면 아프다.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괴롭힘이다.
김율이 고무줄을 쓰고 다니는 모습은 누구나 볼 수 있었고, 그래서 누구나 김율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누구나 김율이 폭력을 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낙인이었다.
레판타 아이김은 김율의 기억을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다. 버릴 수만 있다면 감사히 버리고 싶다.
그러나 증거물은.
세계가 자신을 버렸다는 그 증거만은 남기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자였는지,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떤 낙인이 찍힌 인생이었는지, 그것만은 증명해두길 원했다.
그래야 자신 또한 세상을 마음껏 저주할 수 있으므로.
“…….”
기나긴 세월 동안 살천성을 속박한, 과거의 증거물은, 지금 이곳에서 불살라졌다.
김율은 표정 없는 얼굴로, 어찌 보면 멍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뒷머리를 더듬었다. 어느 문방구에서나 파는 100원짜리 머리끈에 김율의 손가락이 닿고 있었다.
“제가 우리 가문의 대표를 맡겠습니다.”
“…….”
“김율 씨는 가문의 가영(家影)이 되어주세요. 가문의 그림자가 되어, 적들의 동태를 탐색하고 그들의 정보를 모아주십시오.”
“첩보원인가.”
“예.”
나는 담벼락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는 무사들을 가리켰다.
“사마군 중에 귀혼염마(鬼魂炎魔)라는 자가 있습니다. 마교에서 첩보를 담당한 교인이고, 그가 이끄는 위령대(慰證隊)는 강호를 휘어 잡은 첩보 전문 부대입니다. 김율 씨. 그들을 이끄십시오.”
“……나에게 적합한 직책이겠는가?”
“당신은 정보를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이 특기예요.”
나는 김율이 왼손에 들고 있는 수첩을 툭, 건드렸다.
낡은 수첩이 파르르 떨었다.
“이제 수첩에 당신이 죽여야 할 사람, 당신을 죽인 사람, 당신이 버려야 할 것들을 적지 마십시오.”
“…….”
“오직 우리 모두를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 글을 적어주세요. 그 수첩이 우리 가문의 일기(旧記)가 되어줄 겁니다. 김율 씨. 당신의 펜과 당신의 글로, 저희를 증명해주세요.”
그러면.
“그러면 저도 무척 기쁠 겁니다.”
김율이 침묵했다.
쪼개어진 구름이 흩어져 사라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희미한 달빛을 내려받으며 김율은, 죽을 시기를 놓쳐 단지 시간을 견디고 있었던 어느 한옥의 마당에, 자신이 태어나서 죽은 고향 도시의 어느 구석진 곳에, 메마른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알겠다.”
나를 향해 머리를 숙이면서.
“너의 꿈에 내 삶을 얹히겠다.”
그리고 김율은 맹세했다.
“나의 가주(家主)여.”
2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