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41)
3.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새하얀 공간.
지평선도 산천초목도 없다. 그저 도화지가 펼쳐진 것만 같은 3차원 공간에 우리는 서 있었다.
스테이지와 스테이지 사이에 끼어 있는 정류장.
다음 공략을 준비하기 위한 [임시 거점]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도 꽤 오랜만이군.’
그리움을 느끼기엔 너무 살풍경하지만.
“그러고 보면 여긴 무슨 공간이려나….”
“궁금해?”
탓.
우리와 함께 전송해온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가볍게 땅을 디뎠다. 공녀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뇨. 그냥 신경만 쓰이는 정도예요.”
“여긴 엄마가 만생으로 만들어낸 세계 중 하나야. 와! 방금 나 이 문장 읊는 데 노이즈가 하나도 안 떴어!”
공녀는 말하다가 돌연 신기하고 신났다는 듯 제자리에서 깡총, 깡총, 뛰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쁜 일이 벌어진 듯했다.
“들어봐! Mula-Gagamia, 라거나 Gesh-ve-Nail, 이라거나, 원래는 시큐리티 레벨에 걸려서, 너희가 알아선 안 될 말들은 전부 본산세계의 왕국어로 번역되어 나오거든. 대단해!”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당신의 시큐리티 레벨에 찬사를 보냅니다.]공녀는 연신 대단해! 대단해! 를 소리쳤다.
나에게 시큐리티 레벨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태가 그만큼 예외적이라는 거다.
“본산세계의 왕국이라면…… 자수정 자작이 살아가는 세계군요.”
“응!”
공녀는 기분 좋게 대답해주었다.
“탑에선 모든 언어를 번역하지만 오직 하나, 본산세계의 언어만큼은 번역하지 않거든. 공자도 트라우마를 통해 본산세계에 가봤다고 했지? 어때? 그때 왕국어 알아들을 수 있었어?”
“어, 네. 처음부터 이해했습니다만…….”
문득, 가능성이 하나 떠올랐다.
“그때 저는 구원하 남작에 빙의해 있었습니다. 구원하 남작은 왕국어를 익히고 있었을 테니, 그분 몸에 빙의한 동안에는 별 문제없이 듣고 말하는 게 가능했겠네요.”
“흐응. 그렇구나.”
공녀는 내 말을 듣고 흐으응, 길게 비음을 냈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내 얼굴을 올려보았다.
좀 부담스러웠다.
“뭐, 뭡니까?”
“하필이면 구원하 자문사와 사왕이라…… 흐응…….”
“……저희 둘이 닮은 점이라도 있어요?”
“아니. 전혀!”
공녀는 허리를 들더니 양손을 휘휘 저었다.
“인생을 놓고 보면 공통점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어. 오히려 두 사람을 만나게 하면 3초도 안 지나서 원수가 되어버릴걸?”
“그 정도입니까….”
“응응. 그만큼이나 성격이나 스타일이 안 맞는단 거야. 그치만…… 그렇네.”
공녀가 허공에 손을 저었다.
사르르르-.
하얀 꽃잎들이 어디선가 흘러나와 공녀의 손 주변을 맴돌았다.
“무고한 아이가 있고, 그 이외의 세계가 있다고 해보자.”
신비했다.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의 세계에 흰 꽃잎들이 날개질쳤을 뿐인데, 그 공간은 문득 생명이 신성하게 노래하는 신전이 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를 살리려면, 세계를 전부 없애버려야 해. 반대로 세계를 그대로 놔두려면, 아이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어.”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의 세계를 좀 더 극단화한 겁니까?”
“응응. 넌 이미 그런 세계를 지나온 적이 있지. 그치만 그때 네가 그런 선택을 내렸던 건 네가 그 세계를 뒤집어 엎을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렇다.
만약 내게 스킬이 없었다면, 그런 선택지를 택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다.
“만약에 그런 힘이 없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그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면 말이야. 자아, 김공자. 너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겠어? 아이를 구할래? 아니면, 세계를 유지할래?”
흠.
나는 팔짱을 끼었다.
“아이를 구합니다.”
“즉답이네. 어째서?”
“그야, 그래야만 유지되는 세계라면 어차피 제대로 된 세계는 아닐 테니까요. 그러니 살려야죠.”
“아하하.”
공녀는 작게 웃었다. 재밌다는 듯, 알았다는 듯 이지(理智)가 섞인 웃음이었다.
“맞아. 맞아. 그런 세계에는 별로 가치가 없지. 당신이 빙의했던 사람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더라구.”
“……구원하 남작 말입니까?”
“응.”
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우리 엄마를 엄청 사랑하니까. 아니, 사랑이라기보다는 숭배에 가까우려나? 뭐, 신을 독점하고 싶은 사제의 마음이라고 표현해둘게.”
“…….”
“당신도 조심하는 게 좋아. 사왕.”
공녀는 내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면, 1000명에 가까운 가문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막 가문을 만든 시기니까. 좋겠지. 믿음이 흘러넘치겠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언제든지 으싸으싸 할 것 같지.”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저들은 너를 보고 뭉친 집단이야.”
나를 보고 뭉친 집단.
“네가 아니면, 네가 없어지면,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집단이라고.”
“알고 있지?”
공녀는 슬그머니 다가와 뒤에서 내 어깨를 짚고는 소곤거렸다.
“무자비하게 백성을 도륙시킨 에스델을, 마교의 교인들은 용납해줄 수 없어. 성좌를 죽이고 다니던 살천성은, 네 아들인 우부르카를 허용할 수 없어. 저들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아온 자들. 본디 섞일 수 없는 자들이지.”
그녀의 속삭임은 뱀의 쉭쉭거림을 닮았다.
“하물며, 저들이 끝이 아니지?”
“…….”
“너조차 적절한 시기를 헤아리기 위해 미루어 둔 자들이 있었지? 앞으로 만나게 될 자들 중에 네가 품으려는 자들이 있겠지?”
그렇다.
“네 가문이 커져갈 수록, 사왕아. 그런 불협화음은 점점 커져갈 거야.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네가 없어지거나 조금이라도 위태로워진 순간-.”
공녀가 양 손을 모았다가 펼쳤다.
파아아아-.
공녀의 입안에서 장난스러운 폭발음이, 숨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공녀는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탑을 오른다? 약자들을 도와준다? 모두가 저마다의 상처를 짊어질 수 있게 하여, 어느 누구의 희생도 강요되지 않는 세상을 만든다? 좋은 이야기지만. 사왕아. 여기서 네가 죽거나, 아니면, 정말로 큰 상처를 입어버리면……. 저 아이들에게 [그딴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만단다.”
“다들 세계 따윈 엿이나 먹으라며 널 위해 발버둥칠 거야. 저울이 망가져버려서, 세계 같은 것들은 절대로 너와 동일한 무게를 넘볼 수 없겠지.”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깊이 경고합니다.]“죽지 마렴. 사왕.”
“…….”
“아프지도 말고. 납치당하지도 말고. 고문당하지도 말고. 뭐 좀 어떻게 해보겠다고 희생하지도 말고. 네가 흘리는 피만큼, 피의 무게 만큼, 저 아이들의 심장에서 네가 차지하는 부분은 그만큼 빨갛게 염색될 테니까.”
신의 딸은 어찌 보면 경박한 눈웃음으로, 어찌 보면 경건한 목소리로, 새하얀 세상의 모조된 신전에서, 내게 예언을 내렸다.
“행복해지렴.”
“…….”
“네가 행복해야만 다른 가문원들도 행복해. 최대한, 열심히. 단순히 감정적으로 행복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왜 우리가 이 짓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서, 이걸 해내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 벌어질지 또한 명백히 알아서, 그런 식으로. 그렇게 행복해져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흐음. 이번에도 즉답이네. 알고서 대답하는 거 맞니?”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면 그걸로 저도 행복해져요.”
나는 힘주어 말했다.
“제가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한, 싸움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한, 제 행복이 멈출 날은 없을 것입니다.”
“흐음.”
공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빙글, 돌아와 내 양손을 맞잡았다.
“우리 엄마를 잘 부탁해.”
우리 두 손이 맞잡힌 틈새에서 빛이 환히 번졌다.
그것과 동시에, 나는 멈칫했다.
공녀의 손에서는 어떤 떨림이 전해오고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롭게 미소를 짓던 공녀와는, 무척 어울리지 않는 긴장감이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공녀의 얼굴을 보았다.
“……공녀?”
“부디. 제발.”
신의 딸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우리 엄마를 구해줘…….”
…….
“불행한 삶은 너무 많아. 엄마를 탓하는 삶이, 그래서 엄마가 책임져야 할 삶이, 고통이 너무 많아….”
“공녀님.”
“이미 많은데, 너무 많은데도, 1초가 흐를 때마다 그 전보다 더 많아지고 있어.”
그럴 것이다.
나는 임무 도중 거쳐왔던 세계를 생각했다.
아이김 제국의 세계에서, 마왕의 습격으로 허무하게 죽어버린 필부 중 과연 몇 명이 탑주였을지를 생각했다. 스승님이 몸 담았던 무림에서, 이름 없이 굶어 죽었던 강시 중 과연 몇 명이 탑주였을지를 생각했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의 세계에서는 또 몇 명이.
이단심문관이 만들어낸 달팽이 제국에서, 차별당하고 학대당해 죽었던 이들 중에는 또한 과연 몇 명이 탑주였을까.
내가 살아가던 지구에서는 과연 몇 명이.
“제발.”
고통받는 신의 딸은, 그러한 신을 어미로 두었기에 흐느꼈다.
“제발 부탁해.”
그리고.
그 순간, 스테이지 진입을 알리는 목소리가 이 공간에 울렸다.
[36층 스테이지가 개방되었습니다.] [탑에 오르는 자들이여.] [그대들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나는 작은 공녀의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오케이.”
각오를 다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해줄게.”
아직은 까마득한 탑 100층.
하지만 거기에 오르면, 분명,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길 것이다.
“힘들겠지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신님이 삼라만상의 세계들을 구한다면.
우리는 그 신님을 구한다.
간단하고, 명확하며, 더없이 선하다.
“우리는 강하니까.”
[ 당신은 36층으로 강제 전송됩니다!]나는 여전히 울고 있는 공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눈앞을 바라보았다. 무한한 도화지 저편에서 빛이 쓸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빛의 조용한 폭발이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해일은 나를, 김율과 실비아 에비나일을 간단히 집어삼켰고, 자그마치 1000명에 이르는 가문원도 한번에 쓸려 나갔다.
마지막 순간, 나는 홀로 남겨질 공녀를 위해 웃어주었다.
4.
그리고 우리는 평야 위에 떠 있었다.
유령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여러 명, 그것도 1천 명의 가문원과 함께 유령 놀이를 하자니 과연 색달랐다.
‘누가 보면 세상이 종말하는 줄 알겠군.’
나는 주위를 살펴 보았다.
곧, 우리만큼이나 거대한 집단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넓은 평야의 양쪽.
서로 다른 깃발을 짊어진 군사가 싸우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죽여라!
-밀리지 마라! 죽여! 죽여라!
한 쪽은 귀인족(鬼人族)의 군세.
서열 6위의 헌터 독사가 이끄는 종족.
귀인족은 다른 종족보다 거대했으며 머리에는 두 뿔이 돋아났다. 그들은 헐거운 갑옷을 입은 채, 자기 몸통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다른 한 쪽은 지정족(地精族)의 군세.
내가 이끄는 종족.
오랜만에 보는 얘네들도 뿔이 돋아나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귀인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크와아아아아!
-뿔쟁이들! 자웅을 가리자!
-궁수대! 화살 발사!
-방심하지 마라! 적의 시체를 방패로 삼아서 화살을 버텨라!
처절한 전쟁터.
양군을 합쳐 약 2만 명이 죽고 죽이는 싸움터가 그 안에 펼쳐져 있었다.
‘음.’
순간적으로 마음이 울렁였다.
‘저 중 다시 몇 명의 삶이 다시없이 억울한 것이어서, 그 중의 몇 명이 다시…….’
그리 생각하면 아연해질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고, 그 모든 것들을 직시하면서, 나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그 결과.
나는 [그것]을 보게 되었다.
“냐하하하하-!!”
귀인족 군대의 최전선. 거기에는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귀인족 여검사가 있었다.
손에는 쌍검을 든 채, 도포자락 비슷한 것을 입고서 전장을 뛰어다니는 발랄하기까지 한 그 모습은 실로 만인의 주목을 끌어 모을 만 했다.
실제로도 그 여검사는 주목을 받고 있었다.
-우오오! 검희 님이다!
-믿고 있었다구 젠장…!
귀인족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그렇게 환호하는 귀인족들이 투박한 얼굴을 가진 데에 비해서 얘는, 뭐라고 할까… 그림체가 달랐다.
음.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말이지….
“애비여.”
우부르카가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응.”
“저거 말인데, 혹시….”
“음….”
나는 시선을 피했다.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자고 결정한 게 바로 조금 전이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눈을 돌리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옆에서 김율이 무정하게도 중얼거렸다.
“저건 [빙의체]로군.”
“말하지 마….”
“나 자신이 지금 ‘플레이어’로서 유령과 다름 없는 상태이기 때문인가? 전장에서 날뛰는 저 여인의 몸에 빙의한 중년 남자의 영상이 비쳐 보이는데—”
“으아아! 말하지 말라고!”
그렇다!
전장을 뛰노는 귀인족 여검사의 등 뒤에는 독사가 비쳐 있었다!
즉, 독사였다!
“가주님.”
실비아가 내 소매를 당겼다.
“왜….”
“그… 하나가 아닌데요….”
“하나가 아니라니….”
“저기, 저~쪽에. 아니 외면하지 마시구요. 저 쪽 보세요. 네. 쪼기요.”
실비아가 내 고개를 잡고 돌려 강제로 그 방향을 보도록 만들었다.
그 곳 역시 귀인족 군대의 최전선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이런, 어쩔 수 없군. 내가 나서야겠어.”
장갑을 고쳐 끼면서, 다른 귀인족들과는 달리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귀인족 소년이 역시나 쌍검을 그 손에 든 채로 걸어 나왔다.
“…….”
그리고 그 뒤에는 역시 독사의 잔영이 비쳐 있었다.
즉, 얘도 독사였다.
“아하하! 그러게 말인 것이다. 우리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는 것이다!”
역시나 다른 귀인족들과 달리 쬐끄마한 몸으로 양갈래 머리를 한 귀인족 소녀가, 아니나다를까 쌍검을 쥔 채, 뭔가 이상한 말투를 쓰면서 걸어 나왔다.
물론 얘도 독사였다.
“후… 그러기 위한 우리들, 이겠지?”
얼굴 옆선만으로도 깔끔하게 케이크를 자를 수 있을 것처럼 샤프한 외모를 가진 귀인족 청년이, 왜인지 대낫을 든 채 무뚝뚝하게 중얼 거리면서 걸어나왔다.
당연히 독사였다.
“음.”
그렇게 사방에서 나타난, 제각기의 모습을 가진 일곱 명의 귀인족.
“이 전장은 우리들『귀인 7영웅』이 맡는다.”
즉, 일곱 명의 독사가 동시에 말했다.
나는.
+
[다중 빙의 전생]랭크: SSS
효과: 당신이 선택한 인물들에게 빙의합니다. 해당 인물이 사망할 경우, 당신은 원래 정신체로 돌아갑니다.
비용: 비매품 (특수한 방법으로 얻은 특전입니다)
※ 단, 사망 후 1분 이내의 인물에게만 빙의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외칠 수밖에 없었다.
“댁 지금 거기서 뭐하는겨—!?”
2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