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43)
3.
양군이 물러나자 평원이 트였고, 트인 평원으로 달빛이 넉넉하게 흘렀다. 평원 정중앙에 박힌 산봉우리만이 달빛을 가로막았다.
별들마저 숨을 죽인 심야.
우리는 산봉우리가 드리운 그늘 아래를 걸었다.
“저쪽으로 가면 독사가 있는 거냐?”
내 질문에 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확실해?”
“틀림이 없다.”
김율은 수첩을 내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색 머리카락에 어두운 별빛이 흘러내렸다. 베테랑 형사와 같은 관록이 그의 눈꺼풀에서 감돈다고 평한다면, 과연 자신의 가문원을 너무 편애하는 걸까.
“막사의 위치는 전부 파악해뒀다. 귀인족들 나름대로 숨겨보겠다며 심처에 7영웅의 숙소를 마련했다만, 우리 같은 영체(影體)들이 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주여. 나를 믿고, 그대가 내게 부하로 붙여준 위령대(慰靈隊) 대원들을 믿어라.”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율은 우리 가문에서 가영(家影), 즉 정보부장의 역할. 그런 김율의 아래에는 마교 시절부터 강호의 정보를 주름잡았던 위령대가 배속되어 있다.
장담하건대 이 세상의 어느 첩보부대가 오더라도 우리 가문을 당해낼 순 없으리라.
“간다.”
우리는 달빛을 피해 귀인족들의 막사에 들어갔다.
막사의 길은 미로처럼 복잡해서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길변에는 텐트가 쳐 있었고, 텐트 사이로는 귀인족들이 전투에 지쳐 피로를 풀어내려는 양 푸푸후… 우, 푸푸부브으으… 후우, 콧소리를 흘렸다.
막사와 코골이의 미로를 넘어, 마침내, 조금 호화로워 보이는 막사를 발견했다.
-냐하하하하!
-건배! 여기도 술 따라라!
그 목소리는 분명히 오늘 전장에서 들은 것.
붉은색 휘장이 날리면서 막사 안쪽에서 떠드는 목소리와 주향(酒聲)을 실어 날랐다.
‘저기로군.’
확실했다. 여기가 바로 귀인 7영웅이 머무르는 막사, 적군의 본거지였다.
내가 눈빛으로 물어보자 김율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답했다.
‘오케이.’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지.
“다녀올게.”
나는 독사의 막사에 발을 디뎠다.
4.
귀인 7영웅이 머무르는 막사는 호화스러웠다.
붉은 비단이 막사를 수놓았고, 바닥엔 역시 붉게 염색한 양털이 레드카펫처럼 놓였다. 푹신푹신한 베개들도 이곳저곳에 많아서, 귀인 7영웅은 제각기 마음에 든 베개를 골라서 꾹 껴안거나 푹 머리를 뉘였다.
그리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부어라!”
“마시는 것이다!”
“하아… 정말이지 너희는 술 마시는 걸 너무 좋아하는구만. 지나친 음주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주지의 사실, 이겠지?”
“후후. 부상 때문에 자기는 술을 못 마시니까 그렇게 볼멘 소리를 하다니. 볼썽 사납다구, 묵빛 검사 군?”
“아아, 이미 한 차례 볼썽 사나운 모습을 보여버렸으니 말이야. 무얼, 그것을 위한 나, 니까 딱히 불평은 하지 않겠어.”
그렇게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귀인 7영웅은 떠들어댔다.
“…….”
단.
전부 독사였다.
“댁 진짜 지금 뭐하는겨……?”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니, 귀인 7영웅, 그러니까 7독사가 백설공주에게 해고당한 일곱 난쟁이마냥 자지러졌다.
“뭐, 뭐냐!?”
“적인 것이다!”
“전원—칠망성진을, 펼친다!”
“어이어이, 기다리라고… 하여간 너희들은 머리에 혈기가 넘친다니까.”
당황하는 독사, 경계심을 내비치는 독사, 즉각 대응에 나서는 독사,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중재에 나서는 독사 등, 각양각색의 독사가 대출혈서비스를 개시한 지금, 나는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아, 좀 조용히들 하십쇼!”
“음.”
결국 내가 일갈하자, 독사 일동이 일제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붉은 머리를 가진 검희가 대표로 말했다.
“뭐야, 사왕이냐…. 이 야밤에 갑자기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긴요. 전쟁이 왜 벌어진 건지 물어보러 왔지요.”
“전쟁의 이유?”
“네. 싸움 끝나면 대답해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싸움을 끝냈습니다. 이제 대답해주십쇼.”
일곱 독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중 한 명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답했다.
“씁. 뭐, 패권 전쟁이다.”
“패권 전쟁이요?”
“그래. 니가 이끄는 지정족이랑 내가 이끄는 귀인족. 척 보기에도 속성이 겹치잖냐?”
나는 생각해보았다.
둘 다 근육이 좀 많은 종족이고, 싸움을 무지 좋아하는 종족이긴 한데.
“그동안이야 예술의 부흥이다, 신대륙 발견이다 뭐다해서 각이 안 나왔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사자 두 마리가 같은 평원 안에서 살수는 없잖냐? 그래서 귀인족의 왕이 지정족의 평의회장한테 자웅을 가리자! 하는 친서를 보냈다 이거지.”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사자 두 마리는 무슨…. 성지 전쟁 때 완전 떡바르지 않았어요?”
“마! 삼세판도 모르냐?”
“모르겠는데요… 모르고 싶고요. 아니,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전쟁이 벌어졌다 이겁니까?”
“실제로 서로 죽고 죽이는 이유로는 영 깨는 게 사실이다만, 뭐 어쩌냐. 서로 동의해서 벌어진 일인데.”
말하면서 검희는 쓰슥, 슥, 칼을 숫돌에 갈았다. 칼날과 숫돌이 스칠 때마다 옷자락이 펄럭이며 그윽한 장미향을 풍겼다.
단, 독사였다.
“그렇다. 동의해서 벌어진 일을 뭐 어쩌겠는가. 생사결(生死訣)의 집단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늘씬한 키를 가진 여성이 검희의 말을 받아 어깨를 으쓱했다. 날카로운 눈매가 밤의 공기를 떨게 했다.
단, 독사였다.
“요컨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은 양 종족의 자존심을 건 ‘결투 전쟁’인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을 보기 좋지 않다 하여 뜯어 말릴 권리는 없는 것이다!”
양갈래 머리를 한 소녀가 사과를 아구아구 씹으면서 말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호쾌한 식사 풍경이 갭을 낳아 무척이나 귀여웠다.
단, 독사였다… 그만하자.
“…그래요. 상황은 알겠습니다. 그럼 일곱 명한테 동시에 빙의한 이유는 뭡니까? 산만해 죽겠는데.”
“흠. 간단한 이유다.”
이번에는 샤프한 청년이 대답했다.
막사에 들어온 이래 주욱, 청년은 그저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그늘에 가려진 각도까지 완벽해 보였다.
“한 사람에 빙의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에게 빙의하는 편이 훨씬 강력하다. 권력을 쥐기도 편하지. 우리 7영웅은 곧 귀인족의 수뇌부다. 그로써 원하는 방식으로 귀인족 전체를 끌어갈 수 있지.”
그 담담한 말에 다른 7영웅이 차례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즉, 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한 종족을 이끄는 신으로서 마땅한 판단, 이랄까?”
“아아, 그것을 위한 7영웅이니까 말이야.”
새삼 굉장한 풍경이었지만, 나는 더 딴지 걸지 않았다.
한숨을 짓고서 말했다.
“그래서, 계속 전쟁에 참여할 생각입니까? 일곱 명이서?”
“그래. 뭐 문제라도 있냐?”
나는 아랫입술을 사려 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문제는 둘째 치고 제안은 있습니다.”
“제안? 어떤?”
“이 전쟁에서 항복해 주십시오.”
그런 내 말에, 지금까진 장난스레 히히덕거리던 독사 일동의 입가에서 미소가 걷혔다.
그와 동시에, 찢어 발기는 듯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5.
일곱 독사가 따로따로 자신의 캐릭터를 어필해가며 행동할 적에는 우스꽝스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캐릭터에 철저할 수록 우스꽝스러움은 더해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캐릭터를 버리고 무표정해진 지금, 각기 다른 모습을 갖춘 일곱 명이 하나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는 것은 더 이상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괴기스러웠다.
“항복하라고? 어째서?”
나는 그런 독사 일동에게 말했다.
“두 종족이 왜 싸우는지 알았습니다. 우리에게 그걸 말릴 권한이 없다는 것도 알았고요.”
“엉. 그런데?”
“그리고 그런 이상, 당신이 말한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이겨야 피해가 적어진다’는 게 뭘 뜻하는 건지도 알겠습니다.”
어차피 벌어진 싸움이고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독사의 말마따나 한 쪽이 압승을 거두는 게 피해가 적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논리를 이어가자면, 어느 한 쪽이 아예 항복해 버리는 게 가장 피해가 적은 길이겠지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우. 개소리 좀 할 줄 아는 놈인가?”
일곱 독사가 동시에 퉷, 침을 뱉었다.
“이건 어떠냐, 사왕? 우리 종족이 아니라 니들이 항복을 하는 거다. 그러면 어이쿠 이게 뭣이냐? 결론은 정반대인데 결과는 똑같네? 그럼 그렇게 하는 게 괜찮지 않을까?”
“천무문주.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도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이다, 이 새끼야. 아니면 내가 지금 장난까는 것처럼 보이냐?”
일곱 쌍의 눈빛이 예리한 검극처럼 나를 겨누었다.
나는.
“저는 최대한 피해를 줄이고 싶을 뿐입니다.”
“엉. 그러시면 사왕 니가 항복하라고. 언더스탠?”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한숨을 짓고, 솔직한 태도로 털어놓았다.
“제가 이끄는 아이들… 지정족은 별 해괴한 정치 체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로 뜻을 모으기는 쉬우면서도 어려워요. 그리고 지금 이 경우에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활활 타오르던 독사의 태도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아이들을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있는 아이들 중에 가장 강한 아이에게 빙의해야합니다. 그 아이가 제 빙의에 동의해야하고요. 그 다음에는 귀인족에게 항복한다는 의제를 상정하고, 그 의제에 반대하는 애들을 죄다 때려 눕혀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무조건 항복’이라는 의제에는, 전쟁에 참여한 지정족 전사 거의 전원이 반대 의사를 표명할 것이다.
내 빙의에 응해주는 이가 그 모든 이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 만큼 강하기까지 할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천무문주. 당신은 좀 더 쉽게 귀인족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나는 일곱 독사를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당신은 방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인족 전체가 자신들의 의지를 따라 움직인다’고. 제가 지정족을 설득하는 것보다, 당신이 귀인족을 설득하는 것이 빠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
“부탁이에요, 천무문주. 한 번만 좀 들어주십쇼. 그 대가는 섭섭하지 않게 치르겠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이끄는 종족이 더 죽어 나가는 건 바라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애들은,”
툭 하고, 독사가 내 말을 끊었다.
“너무 많이 졌다.”
일곱 쌍의 눈동자에 떠있던 살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의지는 그만큼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단심문관, 그 놈의 달팽이들한테 졌다.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뿔이 부러뜨려져서는 채찍을 맞아가며 노예 노릇을 했지.”
내가 회귀하기 전에, 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그 다음에는 어떠냐. 그 울분을 씻기 위해 모여든 성지 연합군. 귀인족은 그 선봉에 섰다. 하지만 갑자기 툭 튀어나온 니네 종족한테, 그래. 니 말마따나 완전 떡발려 버렸지.”
탑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구한 자는 연금성주다.
탑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자는 만신전주다.
“귀인족들은 절치부심했다. 다른 종족들이 예술의 부흥이니 뭐니 하면서 흥청망청할 때에도 조용히 숨어 힘을 길렀지.”
탑에서 가장 두려운 자는 흑룡주이며, 탑에서 가장 고결한 자는 성기사이다.
“그런데 그게 또 역효과를 냈다. 결국은 신대륙 발견에도 혼자 뒤처져버린 거다.”
하지만, 같은 길드원들로부터—자기 사람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자는 천무문주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애들은 너무, 너무 많이 져왔어. 지기만 해왔다고.”
그리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런데, 그런 애들한테 또 한 번 항복하라 말하라고?”
“…….”
“못한다. 그건 진짜로 못할 일이야.”
나는 그런 독사의 말을 이해했다. 내 제안은 확실히 가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결국은 또 지게 될 겁니다.”
“그 우부르카인지 하는 커다란 놈 때문에 말이지? 니가 끌어들였던.”
“압도적으로 이겨야 피해가 적은 상황이니까요. 당신 일곱 명이 전선에서 날뛰면서 우리 애들을 학살하는 것보다는, 우부르카가 산을 뽑아 던져 대는 게 당신 애들도 우리 애들도 훨씬 적게 죽겠지요.”
나는 독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일곱 독사는 동시에 코웃음을 쳤다.
“사왕아. 너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당신이 빙의했던 귀인족 영웅조차 접근도 못했습니다. 일곱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그랬지. 근데 말이야. 아무렴 내가 아무 대책도 안 해놨겠냐?”
귀인족의 7영웅, 일곱 독사는 삐딱한 미소를 떤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 대책이란 게 뭔데요?”
“어허. 어디서 스포를 들으려고…. 그 새하얀 근육돼지를 1등급 돼지고기로 만들 수 있을 만한 비장의 카드… 라고만 말해두마.”
“…허세를 부려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천무문주.”
“왜. 쫄려? 그럼 뒈지시던가.”
과연.
이 말을 듣는 입장이 되니 나한테 이 말을 들은 양반들이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다.
열 받네.
“결국, 항복할 수는 없다 이거군요.”
“앙. 너희가 항복할 수 없는 것처럼, 이쪽도 항복을 ‘할 수가’ 없다.”
“전장에서 보게 되겠네요.”
“그렇게 되겠지.”
나와 일곱 독사는 서로 시선을 마주친 채 동시에 말했다.
“내일.”
“내일.”
교섭 결렬이다.
24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