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44)
6.
그날 밤, 나는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평소라면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마음속으로 독백하였을 질문은, 이제 내 입술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헌터. 즉 사냥꾼이던 시절에는 혼자서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았다. 배후령만이 나의 말상대가 되어주었고 상담사가 되어주었다. 그것이 헌터의 업(業)이었기에, 나는 이걸 외롭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완전한 개입이 필요하지 않겠나이까. 가주님.”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에스델이 평원을 내려다보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이제 한 명의 헌터가 아니라 한 가문의 주인이었고, 혼잣말과 독백은 더 이상 불필요했다. 시린 달빛이 내리는 가운데, 우리는 마른 공터에 둘러앉아 이야기했다.
“완전한 개입이라면?”
귀혼염마가 물었다.
에스델이 그 질의에 응답했다.
“천무문주는 [다중 빙의]를 써서 여러 영웅을 한꺼번에 굴리고 있습니다. 이 세계 사람들 입장에서 논하자면, 이는 [신]의 힘을 멋대로 써서 귀인족을 편애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불합리합니다. 그리고 불합리에는 불합리로 맞서싸울 수밖에 없나이다.”
“흐음.”
가주인 내가 정중앙에 앉았고, 자문사이자 후계자인 에스델이 오른편에 앉았다.
무사장인 우부르카가 왼편에 그 거대한 덩치를 웅크리며 앉았다. 시종장인 실비아 에바나일은 기립한 채 있었고, 가영인 김율은 내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수첩을 들여다봤다.
그 수뇌부를 사마군(四魔軍)이 둘러쌌으며, 다시금 일천 명에 이르는 마교의 교인들이 에워쌌다. 일천의 가문원이 모두 숨을 죽인 채 우리가 나누는 ‘가문회의’를 엿들었다.
심야. 달빛이 숨을 쉬었고, 달의 숨소리가 비껴나간 곳에서 우리 사왕가(死王家)는 침잠했다.
“하긴. 뭐. 당장에 우부르카 무사장 한 명만 개입해도, 귀인족 군대는 형편없이 무너지겠죠.”
실비아 에바나일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가주님께선 [인물에 빙의] 아이템을 구입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아? 그걸 몇 장만, 아니 2장만 사서 에스델 자문사와 김율 가영한테 맡기시죠. 자문사가 빠바방 빔을 날려대고 가영이 뭐 어젯밤 처마신 커피맛 향기 정도만 살짝 잊어주면, 귀인족 따윈 한방에 나가리될 겁니다아.”
“……너 나한테 불만 있냐? 말투가 왜 그래?”
“불만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저 실비아 에바나일, 하늘과 같으신 가주님께 충성심만 가득한걸요. 여름철 사료창고에 득실거리는 바퀴벌레들만큼이나 저의 충성심은 무수한 것입니다.”
완전 기분 나쁜 충성심인데.
“말투와 상관없이 시종장의 지적은 쓸모가 없다.”
김율이 나직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실비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쓸모 없다뇨? 왜요?”
“우리가 이기는 것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압승은 간단하며, 이 사실을 이미 가주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어떻게 이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지.”
김율은 달을 전구로 삼아 수첩을 스윽, 슥, 넘겼다.
갓 태어난 별 같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하지만 그런 가주의 말 역시 실은 앞뒤가 어긋난 것이다. 수단을 묻기 전에 가주는 목적을 좀 더 확실하게 설정해주길 바란다.”
나는 턱을 매만졌다.
“목적 말이지.”
“그렇다. 가주는 천무문주라는 자에게 천명했듯 ‘오직 이 전쟁의 희생자를 최소한으로 가져가길 바라는’가? 그렇다면 완전한 개입 이외의 답은 부재할 터. 그럼에도 그것을 꺼린다는 것은, 가주에게 또 다른 목적이 있어, 그 두 가지 목적을 저울에 올려 가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김율의 목소리 또한 별빛을 닮았다. 받아 마셔도 속에 부담이 가지 않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가주는 지정족을 자식들로 여기고 있다. 친자식으로 여긴다는 게 아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돌볼 때 [어떻게 해야 제일 좋은 교육이 될까]라고 고민하듯, 가주 역시 부모의 마음으로 지정족을 돌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리고 그런 이치에서, 지금까지 가주는 지정족에 개입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해왔다. 어쩔 수 없을 때. 개입하지 않으면 종족 자체가 사멸해버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럴 경우에만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하지만… 지금 이 전쟁은, 설령 귀인족이 먼저 시작했다 하더라도 지정족 역시 [바라던 바] 같군.”
김율이 고개를 들어 실비아를 보았고, 뒤이어 내 얼굴을 보았다.
“이것은 자원을 둘러싼 전쟁이 아니라 전사들의 집단 결투이다. 여기에 개입해도 좋을지를 가주는 의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라비엘의 조상은 정확하게 내 마음의 한 켠을 짚고 있었다.
“과연.”
검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맞는 말이구만. 각 잡고 싸우는데 끼어들면 완전 개빡돌지. 쟤네도 그렇지 않겠수?”
“……무사부관의 불손한 말은 넘긴다고 쳐도.”
에스델이 턱을 짚었다.
“전사의 긍지 외에도, 우리가 대거 개입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교육인가 하는 것이 또한 문제가 되겠군요. [여차하면 언제든지 신이 개입해준다]. 그런 인상을 지정족들에게 심어줘도 좋은가 말이지요.”
음.
나는 시선을 돌려 우부르카를 쳐다봤다.
“무사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우고르.”
우부르카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즉답했다.
“가주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이다.”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강하다. 귀인족도, 지정족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이 전쟁을 갈무리할 수 있겠지.”
나는 턱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탑주가 아니지.”
이 전쟁이 양자의 합의에 의한 것이라면.
그 합의가 결과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다다른 것이라면.
“먼저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한테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사리에 맞아.”
논의를 주고받던 가신들이 입을 싹 다물었다.
그리고 내 명령을 기다리는 양 조용히 날 바라보았다.
“무사장.”
“우고르.”
“너는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육신을 허락 받은 몸이다. 전설로 추앙될 정도의 위인이니, 지정족들에게 가서 말을 붙여볼 수 있을 거야. 가라. 가서 물어라. 작금의 화하평의회 의장에게— 우리의 도움을 바라는지, 바라지 않는지, 물어보고 와라.”
“우고르.”
우부르카가 씩 웃으면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주. 기다려라. 바로 지금 시대의 애송이한테 물어보고 오겠다.”
쿠웅.
우부르카가 엉덩이를 일으키니 주변이 흔들렸다. 물론 김율은 물론이거나와 에스델, 실비아조차 이 정도 흔들림에 자세가 무너질 위인은 아니었다.
“크하하!”
우부르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음을 터트리며 쿠웅, 쿠웅, 평원을 가로질렀다.
그가 나아가는 방향의 종착지엔 지정족 막사가 옹기종기 펼쳐져 있었다.
부우우우! 부우우우!
경계경보가 발령된 듯 멀리 막사에서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하긴 산채만 한 전사가 난데없이 쳐들어온 건데, 지정족들 입장에서도 살 떨릴 법하다.
얼마 안 가서 지정족 막사 안쪽에선 이리저리 난리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괜찮겠습니까?”
에스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멀리 지정족 막사를 바라보았다.
“왜?”
“우부르카 무사장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저어됩니다만, 아무래도 다혈질이 아닌가 싶어서. 지금처럼 세력 대 세력의 외교사절로 보내기에 적합한지 다소 걱정되옵니다.”
“네 동생이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 무식쟁이로 비치긴 쉬워도, 생각보다 마음이 깊은 아이다.”
움찔.
[네 동생]이라는 말을 듣고 에스델이 잠깐 머뭇거렸다.익숙하지 않은 말, 아니, 익숙해지기 어려운 말을 들어버린 느낌으로, 에스델이 어물거렸다.
“동생이라니…….”
“너는 내 장녀이고 우부르카는 내 차남이다. 그러니 당연히 누나이고 동생이지. 공식적인 자리에서야 무사장, 자문사, 하고 문답한다지만 사적인 자리에선 얼른 익숙해져야 할 거야.”
“말도 안 됩니다, 아버지!”
마침내 에스델이 공식적인 호칭을 깨고 나를 아버지라 불렀다.
물론, 잔뜩 등을 수그려서 남들이 보지 못하게 막은 다음, 내 귓가에 소곤거린 것이지만.
“저렇게 커다란 아이를 제가 무슨 수로 동생 취급해줄 수 있겠나이까! 애, 애당초 남매라니. 제가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관계입니다!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괜찮아.”
나는 에스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번 스테이지가 끝나면 우리 가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오게 될 거다.”
그 사람들 중에는 나의 두 시작점 역시 포함될 것이다.
탑 안의 시작점, 유수하.
탑 밖의 시작점, 원장님.
나는, 지금은 그 중 탑 밖의 시작점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원장 선생님은 대단한 분이야. [가족이 아닌 아이들을 ㅠ가족으로 만드는 일]을 평생 해오신 분이지. 뭐가 어려운지, 무엇이 고민인지, 어려운 고민이 생길 때마다 원장선생님한테 상담을 받으면 잘 풀릴 거야.”
“불안하니?”
“예…… 불안해요.”
에스델이 고개를 푹 숙였다.
“대륙을 멸망시키고 인세를 지옥으로 불태우는 것은, 어려웠지만, 불안하진 않았어요. 불안 같은 것은 없었는데…… 제, 제가 정말로 다른 사람한테 가족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지는 불안하옵니다. 아니, 가족이란 애당초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지만.
“괜찮아.”
나는 에스델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우리는 분명히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거다.”
“하지만, 아버지. 제가 맏누이로서 뭔가 실수를 해버리면…….”
“그때는 그때 가서 다 함께 논의하자. 지금처럼. 가신원들을 모두 불러들여서, 다 같이 앉아서, 뭐가 문제이고 뭐가 해결책일지 곰곰이 생각해보자꾸나.”
“…….”
“이 미숙한 아비를 믿어줄 수 있겠니?”
에스델은 조금 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지렁이 지어가는 소리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네. 믿고 있나이다. 아버님.”
서늘한 달빛 아래.
이제 막 부녀가 된 우리 둘은, 서로 몸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7.
에스델의 염려는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우부르카가 돌아와서 우리에게 전해준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다.
우부르카가 지정족 막사에 출현하자 당연히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그들 입장에선 죽은 줄로 알았던 전설 속 장군이 [아닌데? 사실은 살아 있었는데?] 하고 튀어나온 격이었다.
지정족 군대는 폭발했다.
지정족들이 혼비백산하는 가운데, 오직 한 명. 당대의 화하평의회 의장만은 어엿하게 의관을 정제한 채 우부르카를 맞아들였다고 한다.
-그대는 누구시오?
“본인은 화하평의회 212대 의장, 우부르카다.”
-나는 화하평의회 627대 의장, 케르솜보크요.
“별로 강해 보이진 않는데…….”
-이 땅의 누구인들 그대와 겨누면 갓난애기 아니겠소?
우부르카는 씩 웃었다.
“도와달라면 도와주마. 나는 신도 아니고 신령도 아니다. 그저 무의 극의를 꿰뚫고자 수련하던 끝 남들보다 좀 더 강해진 것뿐. 나는 여전히 지정족이며, 화하평의회의 전 의장이니, 너희가 원군을 바란다면 마땅히 손을 뻗어 도와줘야지 않겠느냐.”
그 말에 지정족들이 수군거렸다.
-우부르카! 저 시발한 선조가 우릴 돕는다고?
-산봉우리를 찢어다가 전쟁터 한복판에 쑤셔 박은 저 힘이 우릴 돕는다니!
-우거! 받아들이자! 주제도 모르는 저 뿔쟁이 놈들을 혼내주자!
-뿔쟁이들 혼내주는 건 일도 아니다! 저 시발 선조가 우릴 돕는다면 대륙을, 모든 항구와 모든 물길을 사로잡아, 이 땅에 지정족의 통일국가를 만드는 것도 손쉬운 일이다!
점차 열이 올라 떠드는 지정족들을 향해서, 작금의 화하평의회 의장이 소리를 냈다.
-갈.
지정족 모두가 움찔했다. 잡담이 가라앉았고, 흥분이 잦아들었다.
작금의 의장, 케르솜보크는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 이겨서 귀인족을 쓰러뜨린다 하자. 허면 귀인족은 우리 지정족 앞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직 한 명의 위대한 성령, 우부르카의 발 아래에 짓이겨지는 것에 불과하다.
-…….
-우부르카 조상님을 앞세워서 대륙을 일통해 보자꾸나. 살펴보건대, 그것이 지정족의 나라인가? 아니면 우부르카 조상님의 나라인가?
-…….
-흰사자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걱정하시고 도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흰사자께선 언제나 당신을 [친구]라 부르기를 부탁하셨으매, 흰사자와 우리 사이에는 오직 [우정]만이 가장 아름다운 감정일 것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케르솜보크 의장은 근육이 번듯해서 보기 좋은 중년이었다.
청년 시절에 쌓아올린 근육이 그의 육신을 지탱했고, 노년으로 향하는 머리가 그의 현명함을 지탱했다. 청년과 노년의 사이에 서서, 의장은 잊혀진 신전의 이름 없는 제사장처럼 말했다.
-흰사자께서는 우리 모두가 우정을 느끼기를 바랐다. 어렵다면 돕고, 도울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면, 여럿이 돕는다. 누군가가 승리를 거두면 거기에 찬사한다. 부러움을 느끼고, 질투를 느껴서, 그걸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승자를 기쁘게 한다. 패자는 절치부심하여 언젠가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 우리는 그러한 패자의 일생 또한 아름답다고 여기며, 그러한 패자에게 한없는 우정을 느낀다.
-…….
좌중은 조용해져 있었다.
수천 명의 지정족 전사가 숨을 죽인 채 제사장의 연설을 들었다. 그 연설은 지정족들의 심장에 울리고 있었다.
누천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끊기지 않은 그들의 [백사자 교리]가 연설에 발맞추어 마음속에서 두근두근 뛰었다.
-지정족 전사들이여.
케르솜보크 의장이 까마득한 발 아래 도열한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약한가?
쿵! 쿵! 쿵!
전사들은 왼발을 들어서 땅바닥을 두들겼다.
[아니다] 라는 대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우리가 저 뿔달린 쭉정이들을 물리치는데, 감히, 우부르카 선조님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될 정도인가?
쿵! 쿵! 쿵!
-우리 지정족이 너무나도 허약해서, 다시 흰사자님을 이리로 강림시키어, 제발 우리를 이끌어달라, 위로해달라, 부탁드리는 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인가?
쿵! 쿵! 쿵!
-그렇다! 아니다!
케르솜보크 의장이 양팔을 벌렸다.
-우리에겐 선조의 도움이 필요없다! 신의 도움은 더욱더 필요없다! 우브르카여! 백사자여! 그대들의 우정을 믿기에, 우리 역시 그대들의 친구로서 답해드리겠소. 기다리시오! 보시오! 우리 지정족 전사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귀인족들을 쓰러뜨리는지, 아무런 위험도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리 하는지! 부디 지켜보고 계시옵소서!
우오오오오오!
지정족 전사들이 광분하여 창검을 흔들었다.
-우리는 흰사자께서 낳아 길러주신 전사들이다!
-흰사자께서 우리에게 우정을 느끼시건만, 무엇이 두렵겠는가!
-우리는 하나다! 하나의 동포다! 그리하여 하나 된 분의 자식이다!
-그분께 걱정을 끼쳐드릴 수는 없다! 우리 흰사자의 하얀 이마에 주름이 지지 않도록 하여라!
사기는 백배.
패배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전사들을 눈앞에 두고, 우부르카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거야, 우거. 교육이 잘 되어도 너무 잘 되어서 문제인가…….”
한바탕 군사들의 사기를 진즉시킨 뒤, 케르솜보크 의장은 돌아와서 말했다.
-우리에게 조상님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백사자님도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 스스로 강해진 모습을, 조상님과 백사자님께 보여드리고자 하옵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정족의 전언이었다.
8.
“역시 가주님입니다. 종족을 잘 키우셨사옵니다.”
에스델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긋방긋 웃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 반응도 비슷했다. 우부르카는 아예 기분이 좋아져서 술통을 구해다 퍼마셨고, 김율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실비아 에바나일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코를 썰룩거렸다.
“넌 또 왜 그러냐, 시종장?”
“다들 잘난 척할 수 있어서 되게 좋겠네 싶어서요. 저처럼 약한 사람은 뭐 어디 가서 누울자리를 구할 수 있을련지 모르겠습니다아. 아뇨, 아뇨. 이건 어디까지나 약자의 하소연이니까요. 강하신 사왕 가주님과 강하신 가신 여러분들은 모쪼록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
이 애가 궁시렁궁시렁거리는 건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니까 넘어가주자. 아마 세상이 아름답게 돌아가려니까 빈또가 상해서 짜증을 부리는 거겠지.
그냥, 가볍게 이마에 땅콩을 먹였다.
“아파앗! 뭡니까, 가주!?”
“집사한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 그럼 좀 넓게 봐봐. 저기.”
내가 저기, 라고 가리킨 평원에선 어느새 새벽의 해가 오르고 있었다.
귀인족 군대도 지정족 군대도 이미 준비를 끝마쳤는지 전진하기 시작했다. 쿵, 수천의 발소리가 일시에 울렸고 다시 쿵, 반대편에서도 수천의 발소리가 울렸다. 두 선율로 나뉘어서 각자가 쿠웅, 쿠웅, 소리를 내며 평원에 전쟁가를 울려보냈다.
-냐하하하! 오늘이 돼지들 제삿상에 바치는 날이다!
귀인족 군대의 선열엔 당연히 귀인 7영웅이 보였다. 그들은 흉흉한 오러를 품어내며 귀인족들을 이끌었다.
스테이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귀인족을 담당한 플레이어, 독사.
그는 이번 전쟁에 어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길 결정했다.
반면.
“정말로 괜찮겠나이까?”
에스델이 신중한 얼굴로 물었다.
“전황에 따라 아주 조금씩 도움을 주는 것은 티가 안 날지도 모릅니다. 가주님. 아군도 적군도 모르는 방향으로 도움을 준다면…….”
“아니야.”
나는 손을 들어 에스델의 자문을 끊었다.
“지금은 저 아이들을 믿고 기다릴 때다.”
“이건 말하자면 [성인식]이다. 지정족이라는 거대한 종족이, 마침내 성인식의 의례를 극복하려 들고 있어. 멀리 지켜보면서 응원하는 것은 자유이고, 마음을 졸이면서 행운이 함께하기를 기도하는 것도 자유이지만.”
나는 말했다.
“방해해서는 안돼.”
“…….”
“우리 아이들의 힘을 믿고, 기다리자.”
“예.”
에스델은 그후로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부르카가 꺾어놓은 산봉우리에 앉아, 다만 묵묵히, 이제부터 펼쳐질 전쟁을 기다렸다.
그리고.
부우우우우우우-
어느 쪽에선가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직후에 또다른 뿔나팔이 울렸다. 뿔나팔에 뿔나팔이 이어지고, 어우러져서, 평야의 새벽은 온통 기이한 고통으로 흠뻑 젖었다.
부우우우우우…… 부우우우우우…… 부우우……
나팔소리가 잦아들 즈음.
-공격하라!
누군가가 소리쳤다.
-공격하라! 전군, 총공격하라!
-뿔쟁이 새끼들이 다시는 덤비지 못하도록 깔아뭉개라!
-전군 돌격하라아아아아!
그 고성과 함께, 지정족들이 일제히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귀인족도 이에 질세라 흉성을 지르면서 창칼을 뽑아 돌격했다.
‘믿는다.’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지정족의 군세를 지켜보았다.
‘너희는 너희의 앞길을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큼 강하단다. 나의 아이들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24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