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51)
1.
나를 감싼 빛무리가 서서히 풀린다.
사와아아아아앙-
귀에는 어쩐지 맥빠진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은 신성하기 그지 없었다.
머리를 감싼 빛무리부터 시작하여, 목, 어깨, 팔, 이윽고 다리와 발을 감싼 빛무리도 뒤이어 비단결이 풀려나가듯 사르륵, 사방으로 퍼졌다.
‘아마 저 빛무리들도 어떤 스킬이겠지.’
그렇다면 저기에는 누구의 인생이 담겨 있을까?
나는 약간 감개무량한 기분으로 너울거리는 비단결이 스러지는 모습을 잠자코…….
“기권이라니! 말도 안돼!”
지켜볼 수 없었다.
낯익은 공녀의 얼굴이 바닥에서 뿅! 하고 튀어나온 것이다.
효과음만 맥이 빠졌을 뿐만 아니라 배경 또한 맥이 빠졌는데, 맨바닥에 구멍이 생기더니 거기서 ‘끙끙!’ 거리며 올라왔다. 귀신인가. 호러 영화계에 불황이 들이닥쳐 마침내 개그 영화로 취업한 건가. 안타깝다…….
“당시이인, 정말 무슨 생각이야? 여기서 왜 기권을 던져!?”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
스스로도 탑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탑주의 딸.
탑주를 제외하면 아마도 제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소녀는, 평소에 갖고 다니던 베개를 붕붕 휘저으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발산 했다.
“뭔가 착각이지? 응? 우리 사왕, 적당히 기권하는 척하고 또 뭔가 흉계를 세운 거지? 이 누나가 너를 다 믿고 있어요. 자! 어서 말해봐!”
“아니요.”
나는 담담히 말했다.
“정말 기권할 거예요.”
“어쩌! 서어어어어어!?”
공녀가 발광했다.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리는 것도 아니고! 뭐야! 그렇게나 지정족 아이들을 애써, 애지중지하게 키워놓고서! 이제는 진짜 지정족들이 대륙을 통일할 각이 나왔다구. 근데 왜, 어째서 기권 따위를…….”
“애들이 싫대잖아요.”
“어?”
나는 하얀 의자에 앉았다. 이 공간. 오직 하얀색이 지평선까지 펼쳐진 공간은, 의외로 편리해서 [저기에 의자가 생기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면 바로 생겨난다.
내가 의자에 앉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홍차와 찻잔들도 생겨났다.
“음.”
나는 홍차를 들어 향기를 맡았다. 정말로 세련된 복숭아 홍차였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
기사 작위를 받은 립톤 아이스 티가 3대에 걸쳐 헌신적인 봉사를 거듭한 끝에, 그 립톤 아이스 티의 3대손이 중대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마침내 정식으로 귀족 책봉을 받은 것만 같은 맛이었다.
음.
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홍차를 맛보았다.
“제 먹거리에 대한 비유는 언제쯤 고급스러워질지 모르겠네요….”
“에휴우…….”
“한숨 쉬지 마세요, 공녀님. 저야말로 한숨을 내쉬고 싶다고요.”
내 소시민적 태도를 보고 귀족으로서 위엄을 되찾은 것일까.
공녀는 이마를 짚고서 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을 보니 나를 타박하는 것은 잠시 미루어 둘 요량 같았다.
“뭐, 그 와중에 고급스러워지지 않겠어? 나도 어릴 적에 피자를 처음 먹었을 때는 3돈까스만큼의 감동을 받았지만, 나이 들어 양념치킨을 먹게 되면서는 5피자만큼의 충격을 먹었었거든.”
“공녀님 세계에도 돈까스랑 피자랑 양념치킨이 있군요.”
“응. 그래서 지금 내가 가진 맛의 기본 단위는 양념치킨이야. 어린 시절에 비하면 정말이지 사치스러운 혓바닥을 갖게 된 거지.”
그야말로 사치스러운 혓바닥이다.
‘과연 왕국의 귀족… 아니, 과연 탑의 기둥이라 해야 할까.’
공녀 같은 구름 위의 삶을 살아온 인물로서는,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몇 개 주는지를 세고 다녀야 했던 나 같은 인생이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겠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공녀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말했다.
“그치만, 역시 가장 맛있는 것은 엄마가 직접 끓여준 된장찌개였어.”
“된장찌개도 있군요.”
“응. 그것만은 몇 양념치킨을 동원하다고 해도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맛이었어. 말 그대로 추억의 맛이었지. 그래서 지금도 종종 끓여 달라고 부탁하고는 해.”
“이해합니다. 저도 원장님이 부쳐 주셨던 계란 후라이에 참기름과 간장을 넣어 비벼 먹었던 밥이 종종 떠오르거든요. 사실 31층에 도전하기 전에 몇 차례 부탁드려 얻어먹었습니다.”
만약 가문원들이 자리에 있었다면, 에스델이 ‘탑주 씩이나 되는 존재가 된장찌개를 끓입니까’ 같은 것을 묻고, 실비아가 ‘공녀 씨 댁 진짜 귀족 맞아요…?’ 하면서 따져 대고, 김율이 ‘계란밥 같은 건 혼자서 만들어 먹어라, 가주.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내 친구 그만 부려먹어라.’ 라면서 혼을 냈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자리에 가문원들이 아니라 나와 공녀만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은유적 장치라고 할 수 있겠지.
-미친 새끼….
[반짝이가 깊이 침묵하여 검제에게 동조합니다.]언제나처럼 이 둘은 있다만 신경쓰지 말자.
좌우간 그렇게, 서로 다른 경제 계급을 갖고서 살아가던 공녀와 내가 극적인 합의를 이루었을 때였다.
‘어라.’
순간, 머리가 살짝 어지러워졌다.
독사를 상대할 때 발동했던 반신안(半神眼).
문득 그것이, 지금도 아무런 예고 없이 내 눈앞에서 깜빡거린 것이다.
나는 미처 거부할 틈도 없이 백일몽에 빨려 들어갔다.
2.
-아가.
마치 트라우마에서 누군가의 과거를 훔쳐보는 듯한 감각.
-소인의 딸아이…….
그곳은 어두운 지하였다.
아직 탑주가 되지 않았을 무렵의 자수정 자작이,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얼굴로 누군가를 보살피고 있었다.
자그마한 아이였다.
지금보다 훨씬 작았지만 나는 그것이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임을 알아보았다.
-소인이 사랑하는 딸.
이라고 만생의 주인이자 탑의 여신이 될 인물은 아이에게 뺨을 부비었고,
-응. 집에 가자. 가서 자자, 엄마.
이라고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이자 이 스테이지의 총관리자가 아직 되지 못한 소녀는 뺨을 부비었다.
“…….”
나는 멍하게 백일몽을 바라보았다.
어미와 딸이 서로 뺨을 부비는 그 자리는, 하나의 성역(聖域)이었다. 그리하여 감히 누구도 가까이 다가서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딸아이를 내려다보는 탑주의 눈에는 자애만이, 지켜만 봐도 어쩐지 눈물이 날 듯한 자애가 그곳에 있었다.
저것이 아마도 신의 민낯 중 하나이겠지.
신과 신의 딸은 서로 손을 잡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뿐이었다.
반신안이 보여주는 백일몽 속에서는 그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왜 [집에 가자]고 말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단지 두 사람의 모습이 어두운 지하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계단을 올라간 순간.
“…….”
툭,
백일몽도 끊어졌다.
3.
나는 눈을 깜빡였다.
꿈이 끊어진 그곳에선 현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지만, 나도 제법 요리를 잘 한다구?”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신나서 떠들었다.
“내가 만든 요리에 아이템 등급을 매기면 EX급이야. EX급 이외에 다른 등급일 리가 없지. 아무튼 엄마의 손맛을 그대로 이어받았거든. 그 손맛으로 내가 만약, 된장찌개가 아니라 양념치킨을 만든다면… 그것이 추억의 맛으로 자리잡는다면 말야. 사왕, 그건 이미 맛의 대혁명이야. 공녀님 요리하신다! 라는 제목의 소설을 200편쯤 되는 소설을 뽑아낼 만한 장대한 여정이 되겠지….”
공녀는 내가 백일몽을 꾸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자랑했다.
그런 공녀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곤혹에 빠져 있었다.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맛의 대혁명 계획에 전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방금 내게 보인 [현상]에 대해 고민한 것이다.
‘이것도 탑주가 지닌 트라우마의 단편인가.’
자수정에겐 일생이 모조리 트라우마나 다름없다.
자기 자신의 트라우마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트라우마를 수집했고, 심지어 [만일 다른 일이 벌어졌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무수한 평행세계를 만들었다. 그 평행세계마다 자수정은 누군가를 구했거나, 죽었거나, 고문당했거나, 참살당했다.
‘그 모든 기억이 지금 내게 잠재적으로 숨어 있다.’
아무래도, 독사를 상대하며 떠올렸던 추측은 올바른 모양이다.
‘지금도.’
자료량이 막대하여 맨정신으로 의식할 순 없지만,
이렇게 이따금, 꿈을 꾸듯,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곤란한걸.’
어쩌면 수십 년 뒤에 벌어질 미래의 풍경이 보일지 모르고,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세계에서 벌어진 수백 년 전의 사건도 보일지 모른다.
아니. 혹은 유수하가 자수정과 함께하던 [그 세계]처럼 만약의 세계가 보일지도 모른다.
이걸 백일몽(白旧夢)이라 부르지 않고 뭐라 부를까.
‘왜 그때 날 죽어라 말리려 들었는지 알겠구만.’
마음속으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탑주의 트라우마를 보겠다고 선언했을 때, 탑주는 무던히도 나를 말렸다. 다른 선물이나 보상을 제시하며 제발 자신의 트라우마만은 보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제발 부탁드려요.
-그대가 찢어질 거예요.
탑주는 그렇게 말하며 애원했다.
이제 조금은, 그 경고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나는 립톤 아이스티의 울트라 진화 버전을 한 모금 마시고 공녀를 바라보았다.
“공녀.”
“응? 왜, 언제 맛 좀 보여달라고? 미안하지만 사왕. 그러자면 당신이 먼저 날 납득시킬 수 있는 요리를 해올 필요가 있어. 말하자면 나는 요리만화의 끝판왕 격인 존재인 거야. 당신이 최선의 요리를 만들어왔을 때, 나는 그걸 뛰어넘는 요리를 가볍게 만들어내어 세계관을 크게 확장시키는—”
“아뇨, 공녀는…… 어머니를 정말 좋아하는군요.”
공녀가 멈칫했다.
잠시 후, 그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응. 나는 엄마를 사랑해.”
일말의 유예도 없는 미소였다.
“신의 딸로 태어나신 거잖아요. 뭔가, 부담스럽다거나 그런 감정을 느껴보신 적 없어요? 왜. 보통 클리세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싶었다]라거나.”
“아하하. 뭐야, 그게.”
공녀가 찻잔을 매만지며 웃었다.
“뭐, 좋아. 원래는 당신이 기권을 던진 걸 추궁하려 했지만. 일단 사왕의 입재담에 어울려줄게.”
“실제로 어떤가요? 신님의 딸로 산다는 건.”
“으으으음. 엄마의 아이라는 건, 굉장히 행복하지!”
공녀가 방실거렸다.
“하지만 사왕이 한 질문 중에는 오류가 하나 있어.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조금 더 행복했을 텐데] 같은 질문 있잖아. 그거 나 한테는…… 아니, 우리 엄마 자식들에겐 하나도 통용이 안 돼.”
“네?”
“우리는 전부 엄마한테서만 태어날 수 있는 아이들이거든.”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공녀는 홍차를 홀짝이며, 찻잔 너머로 나를 가늘게 쳐다봤다.
“한번에 이해하긴 어렵지? 그럼 이렇게 상상해봐.”
찻잔 곁에는 각설탕이 담긴 유리 항아리가 있었다.
공녀는 그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톡, 가장 위에 있는 각설탕을 집어 올렸다.
“태어나면, 무조건 사람을 학살해버리는 어떤 [특별한] 인간이 있는 거야.”
들어올려진 각설탕은 천천히 항아리 바깥으로 나왔다.
“어느 세계에서 태어나도 이 인간은 똑같아.”
찻잔 위로 옮겨진 각설탕이, 툭,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불사지르고, 나라를 망가트리고, 대륙을 무너트려.”
홍차에 빠진 각설탕은 몽골거리며 녹았다.
“어느 세계. 어느 가정. 어느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도, 이건 변치 않아. 이 사람은 정말로, 정말로 그런 의미에서 [특별한] 존재인 거야.”
그것은 내가 한 때 유수하에게 품었던 소망.
유수하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존재이기를, 태어난 순간부터, 아니, 가능하다면 태어나기 전부터 잘못된 존재이기를 바라며 상상했던 그 어떤 악마적 존재들이었다.
“아무도 이 사람을 개심시킬 수 없어. 누구도 이 사람에게 사랑을 이해시킬 수 없어. 누구도 이 사람에게, [왜 세상은 차라리 없어지는 편보다 지금처럼 있는 편이 나은지] 납득시킬 수도 없고, 설득시킬 수도 없어.”
공녀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테이블에 찻잔이 내려갈 쯤에, 나는 이미 결론을 예상해버렸고, 나 자신이 추측한 결론에 오한이 들었다.
등이 차가워졌다.
“그게…….”
“삼라만상을 통틀어서 그런 [특별한] 이들이 모두 24명 있다나 봐.”
공녀는 빙그레 웃었다.
“우리 엄마의 자식도 마침 24명이야.”
“음, 그 중에서 나는 장녀. 사왕도 가본 우리 왕국에선 백수정(白水晶)이라고 불려. 정말. 동생들이 너무 말썽꾸러기들이라서 힘들다니까!”
나는 침묵했다.
부지불식 간에, 이 탑의 주인이 언제나 읊은 좌우명을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잘못 태어난 인간은 없다]….”
“맞아!”
짝. 공녀는 작게 손뼉을 쳤다.
“우리 엄마 좀 바보 같지? 아무튼, 엄마는 그렇게 잘못 태어나게 될 아이들만 불러들여서, 자신의 아이로 만들었어.”
“그리고 엄마는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알려주었지.”
공녀가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지만.”
“한계……?”
“우리는 이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아. 하지만 오직 엄마를 사랑할 뿐이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랑 저울이 많이 달라서, 저울의 양쪽에 세계 전체와 엄마를 각각 매달았을 때, 너무 간단히 엄마가 무게를 지니게 돼. 음. 세계는 거의 깃털보다도 못하지.”
그렇구나.
즉.
내가 아비로서 지정족들과 맺은 관계와 정반대로.
“응.”
눈앞의 공녀, 신의 따님은.
“가령 내가 지금 당장이라도 탑을, 탑들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은, 그냥, 엄마가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야.”
완벽히 자신의 부모한테 종속되어 있다.
나와 전혀 다른 부모-자식의 관계에 놓인 공녀가 화사히 웃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엄마의 부탁을, 뭐 가끔은 장난 삼아 어기긴 해도…. 정말로 엄마가 슬퍼할 일을 저지르진 않아. 또라이가 몇 명 있긴 한데, 걔네는 탑에 들어오지 못하니 걱정 말구.”
“…….”
“그래서 뭐였더라…. 아. 맞아. 기권! 왜 기권한 거야, 사왕! 지정족이 대륙을 재패하기 겨우 두 걸음밖에 안 남았는데! 거기서 기권해 버리면 말이 안 되잖아, 말이!”
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마도 방금, 공녀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탑을 무너뜨리겠다]라고 말하던 순간 공녀의 눈빛은…… 아니. 말을 말자. 악귀를 표현해봤자 이득을 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얌전히 고독에 봉인되어 있는 저주를 굳이 입으로 풀어낼 필요가 없다.공녀는 스테이지를 관리하는 자. 나는 스테이지를 올라가는 자.
우리 둘 사이의 관계는, 일단 이거로 충분할 것이다.
“말씀드린 것처럼, 아이들이 싫어했으니까요.”
“아이들? 지정족들이 싫어했다? 그게 네가 기권한 이유야?”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지정족한테 너희를 도와줄 수 있다고 권유했어요. 다름 아니라 전쟁에서요. 사람이 죽고 죽는 전쟁판인데, 누구인들 도움을 받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지정족들은 [이것은 우리의 일이다]라면서 딱 잘라서 거부했어요.”
“흐음.”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도, 실수들도…… 죽음들까지도, 이 아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만한 실력도 가지고 있고요.”
나는 우부르카한테 [조상님은 얌전히 꺼지시라]는 식으로 응수했다던 이 시대의 평의회의장을 떠올리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다 컸어요.”
“…….”
“이제 제가 저 아이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제가 간섭하지 않아서 더 큰 피해가 생길 수는 있어요. 그건 슬프고 분한 일이지만…… 지정족 아이들이 먼저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상, 저는 어디까지나 저 아이들을 지켜볼 겁니다.”
운과 실력이 따라주어서, 나는 지정족을 대륙 최고의 종족으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건 전부 너희를 길러준 내 덕분]이라거나 [너희는 나를 신으로 알아 모셔야 한다]거나,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진 않고 듣고 싶지도 않다.
‘여기까지.’
저 세계의 바깥에서 아이들을 인도해준 임무는 여기서 종결된다.
지정족들은 제 발로 대지 위에 섰다.
그들은 눈 앞의 적을 쓰러뜨리는 데에 자신의 팔 힘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목적지로 향하는 데에 신의 어깨를 빌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했다.
그렇다면, 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물러나 그들을 지켜보는 것뿐이리라.
“그치만그치만!? 그래도 막 걱정되거나 궁금하지 않아!?”
공녀는 베개를 파닥거렸다.
“가령 앞으로 남은 계층들 중에서 어떤 재앙들이 닥쳐올 것인가!? 지정족에게 남은 1개의 진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뤄진 보상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답변드리자면, 남은 계층들의 정체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당연하다.
회귀하기 전에, 나는 유수하가 40층까지 클리어했던 것을 본 적이 있으니까.
‘특히 37층부터는 이른바 [월드 퀘스트]지.’
더 이상 국소적인 임무가 아닌 만큼, 그 내용은 내가 알던 것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보상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는 탑의 동료들에게 계층 클리어의 보상이 밝혀지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40층이 클리어되는 순간 밝혀질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진화를 거친 지정족들과 만나지 못할까 하는 염려는 하지 않습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저 사왕은 36층에서 기권하겠습니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여.”
“…….”
“그리고 곧 다시 등정을 시작하여, 앞서 약속했던 것처럼 당신의 어머니를 구해드릴 겁니다.”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
“제가 저 아이들을 독립시키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긴.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공녀는 한숨을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빤히. 하염없이. 어느새 홍차의 향기는 모두 가라앉았고, 홍차의 온도도 전부 증발해버렸다. 서로가 심장 소리를 감춘 채 바라보기를 수십 분, 천천히, 공녀는 입술을 열었다.
“그래.”
공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 고블린들이 먼저 독립해버리는구나.”
그 조용한 한탄과 더불어 탑의 목소리가 알려왔다.
[스테이지 기권.] [사왕은 36층 스테이지를 기권합니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사왕의 기권을 인정합니다!]자아.
아이들아.
이제는 너희의 시대다.
25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