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52)
4.
“바빌론 1층으로 전송시켜줄까? 아니면….”
“아니요. 여기서 기다리고 싶네요.”
나는 고급스러운 립톤 홍차를 내려놓으면서 대답했다.
공녀는 살짝 웃었다.
“그래, 좋아. 서비스로 카메라를 한 대 달아줄게.”
공녀가 손뼉을 짝, 치자 허공에 광활한 크기의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화면에는 지정족과 귀인족들이 비쳤다. 내가 원하는 도시를 살펴볼 수도 있었고,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까지 순식간에 스크롤을 돌려서 볼 수 있었다.
“이거…… 굉장한데요?”
“응. 배속도 정할 수 있어! X10배속, x100배속, X1000배속, x10000배속도 가능하니 원하는 대로 지켜봐.”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의 흐름을 시청했다.
5.
화면 속에서 지정족 전사들이 양팔을 흔들며 포효했다.
-전원 돌격!
놀랍게도, 그들은 우부르카와 싸우고 있었다.
-우고르! 시발한 선조! 우리는 그대의 도움을 거부했었소이다!
-우하하!
우부르카는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래, 너희는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귀인족들은 신의 힘을 빌려 너희와 대적하고자 했다! 황망하여 제대로 대적도 하지 못했던 주제에, 너희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느냐!?
-그 또한 우리가 버텨내야 할 시련이었소!
-말은 잘 하는구나! 하지만 실력 없는 녀석들의 정론은 탁상의 공론에 불과하다!
우부르카는 도끼를 든 채 일갈했다.
-너희가 스스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면!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우고르, 시발놈들아!
우부르카는 웃었다.
그 웃음은 한 때 산와족의 성지 앞을 가로막을 때 떠올렸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나와 싸워, 이겨, 그 말이 허세가 아님을 증명해보아라!!
지정족 전사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바라는 바요!!
지정족들이 그렇게 ‘졸업시험’을 치르는 가운데, 패전을 당한 귀인족들 역시도 그들의 신을 대면하는 중이었다.
-미안하다.
독사는 자신이 이끌던 이들에게 고개를 수그렸다.
-신의 일은 신에게. 사람의 일은 사람에게. 신으로서 도움을 준다면 적어도 내가 신이라는 사실을 밝혔어야 했다.
-…….
-이 당연한 예의를 지키지 못한 시점에서, 신으로서도 전사로서도 실격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그렇게까지 한 주제에 결국 패하고 말다니, 정말 면목이 없어서….
독사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설픈 웃음이 그 입가에 맺혔다가 이슬이 증발하듯 스러졌다.
-미안하구나 나는 그냥……
안대가 막아내지 못한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냥…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염상유택으로부터 살아남은 귀인족들은 한줌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만신창이. 어디 한 군데쯤은 망가지거나 잘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 책임을 신에게 전가하지 않았다.
-고개를 드십시오, 신이여!
-그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귀인족들은 소리를 높여 외쳤다.
-우리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뿔은 아직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미소를 짓는 자들마저 있었다.
-우리는 수도 없이 져왔습니다!
-패배하는 것은 익숙합니다!
-가하핫! 신께서도 좀 더 익숙해지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그런 두부같은 멘탈로 우리를 돌보다간 속터져 승천하실 테니까요!
자조도, 자학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신에게 바치는 위로였으며, 최초의 우스갯소리가 남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졌으리라는 강력한 증거였다.
-너희들…
독사가 중얼거렸다. 그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귀인족들은 그들의 신에게 고개를 수그렸다.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나아질 부분이 많을 겁니다!
-이길 수 있을 겁니다!
-그럴 수 있도록 지도해주십시오.
-이끌어주십시오, 신이여!
독사는 한동안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외쳤다.
-제기랄! 당연하지! 믿고 따라와라 자식들아!
귀인족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그렇게 한켠에서, 신의 품을 떠난 지정족이 역사 상 가장 자랑스러운 영웅과 싸우는 가운데, 귀인족들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신에게 권토중래를 다짐했다.
그 대비에 가슴을 저미고 있던 순간이었다.
“이거 대박이네!”
“워메, 깜짝이야!?”
한창 화면에 몰입해 있던 내 옆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공녀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참 낯익은 목소리. 남색이 감도는 흑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머리카락만큼이나 짙은 흑색 옷을 입은 여자가 두근두근해하며 홀로그램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친구.
흑룡주였다.
6.
나는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흐, 흑룡주? 아니. 아나스타샤. 여긴 갑자기 또 어떻게……?”
“내가 불렀어!”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엣헴, 헛기침을 했다.
무진장 착한 일을 했으니까 어서 칭찬하라는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부르셨다고요?”
“응. 쟤는 이번 임무에서 탈락했거든.”
“아니, 어쩌다가요?”
내가 묻자 흑룡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파산했지 뭐니.”
“파산이라면…….”
“말 그대로, 종족 포인트가 마이너스 이하로 내려가버렸어. 흡혈귀족이랑 몽마족을 하나로 합치자니 못 갚을 걸 알면서도 빚을 낼 수 밖에 없더라.”
몽마족.
체감시간으로는 실로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몽마족과 다시 만났습니까?”
“응. 그 녀석들, 제법 성장했더라고.”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기에…….”
“곧 직접 볼 수 있을 거야. 그보다 거기, 너희들! 빨리 여기 와서 앉아.”
너희들?
그 말에 주변을 둘러 보니, 흑룡주뿐만 아니라 성기사, 백작, 이단심문관까지 소환되어 있었다. 정말로 어느새 말이다.
“역시 내가 불렀어. 다들 자기가 키운 종족들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겠어?”
공녀가 다시금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작정하고 이 자리를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불러주어 고맙다. 인어족 아이들이 잘 살고 있을지 걱정되던 참이었거든.”
성기사가 소파에 다가와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한편, 백작은 소파의 등받이 위에 올라가 똬리를 틀었다.
“괜찮네. 걔네가 물류를 꽉 잡아버리지 않았나? 지정족이랑 사이도 좋으니, 괜히 욕심을 부리지 않는 바에야 해상물류 쪽으로는 꽉 잡고 살 거라네.”
음.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것이지만, 백작의 특기는[변신술]이다. 그것도 고양이 변신술.
따라서 지금 소파 등받이 위에서 또아리를 튼 건 백작이 아니라 고양이였다. 백작이 요가의 달인이 아니라 해도 충분히 가능한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뵈어서 반갑습니다! 주인님!”
이단심문관은 깡총 뛰어서 내 소파에 팔을 얹혔다.
나는 순식간에 최상위 서열 헌터들의 친목판 내지 돗자리판이 되어버린 풍경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공녀는 헌터들에게 컵라면과 립톤 아이스티를 배달했고, 헌터들은 또 그걸 좋다며 잡수었다.
“카오스로군….”
“어라, 어떻게 아셨습니까?”
“응?”
“이번에 바빌론으로 돌아가서 만신전 내부에 잠복한 이단세력들을 색출했습니다. 아하핫, 저 나름대로 신경써서 인사를 관리했다 자부했는데, 여전히 득실거리더군요! 그중 [카오스]라는 비밀조직을 지금 막 조져버리고 오는 길입니다!”
“어…….’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나는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카오스라고 말했을 뿐이라고….
“모두! 저걸 주목해봐!”
이 혼란을 잠재울 영웅은 언제나 그랬듯 흑룡주, 아나스타샤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반짝거리며 스크린을 가리켰다.
“지정족의 화하평의회에서 귀인족들이 결투를 신청했어!”
우리는 흑룡주의 열기에 떠밀려 다 함께 스크린을 보았다.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세계 속에서는 제법 시간이 흘러간 뒤였다. 정확히 몇 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부르카가 내팽개친 산봉우리가 울타리에 둘러싸인 관광지로 변할 정도였으니 못해도 반백년은 지났으리라.
그만한 시간이 흘러간 세계에서, 당대의 화하평의회장이 7명의 귀인족을 차례차례 묵사발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처발리고 있는데요, 아나스타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사왕…… 공자도 참! 그 좋은 머리 가져다가 왜 이럴 때만 멍청하니!”
-아니, 반대야. 이 새끼는 원래 멍청한데 잔머리 굴릴 때만 똑똑해지는 거야.
배후령이 옆에서 말 한 마디를 얹었지만, 다행히 그의 말은 나에게만 들리기에 그의 참람된 사실 왜곡이 여기 모인 멤버들에게 퍼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나스타샤는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
“지정족이 아닌 사람이 화하평의회에 출입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 보렴, 김공자! 저 귀인족들은 의원의 자격으로 참석한 거라고!”
“의원이요? 어, 화하평의회는 지정족들의 의회인데요. 귀인족들이….”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이 화면에 뜬 장면을 두고 토론하던 때였다.
나는 문득 주변의 반응이 요상하다는 걸 느꼈다.
“……왜 그러세요, 다?”
내가 의문을 표하자,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고양이 백작이 당황했다.
“아, 아니.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금, 흑룡주…… 와 사왕이, 서로를 이명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른 거…… 같다는 착각이 들어 그랬네만….”
“착각 아닌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랑 저 친구 먹었어요.”
“…….”
고양이가 경악하는 표정을 본 적 있는가? 적어도 나는 지금 처음 봤다. 입이 쩌억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별로 두 번이나 구경해야 할 만큼 아름다운 표정은 아니었다.
“응, 맞아. 김공자랑 난 친구야.”
여기에 흑룡주가 기름을 던졌다.
아니, 고양이를 더 놀라게 했다는 의미에서는 오이를 던졌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어. 그걸 골자로 한 우정 계약서까지 썼지.”
백작 고양이가 기괴한 각도로 허리를 바짝 세웠다.
“우정 계약서……? 뭔가 막 친구비 지불하고 그러는 건가……?”
“백작… 돈으로 친구를 살 수 있을 리 없잖아.”
“내 교우관계 대부분을 파괴하는 말이로군!?”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고.”
백작 고양이가 친구 잃은 슬픔에 잠기고, 다른 헌터들이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는 이 자리에서 아나스타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금 스크린을 가리켰다.
“공자 네 말대로 본래는 지정족의 전유물이어야 할 화하평의회에, 귀인족 7명이 의원 자격을 받은 거야. 그리고 귀인족들의 자존심을 걸고 결투를 신청한 거지.”
“과연.”
나는 팔짱을 끼었다.
“대규모로 전쟁을 거는 게 아니라, 화하평의회에서 결투를 벌이기로 한 것이군요.”
“응. 그런데 재밌는 점은 이제부터 시작이란다. 김공자.”
아나스타샤가 후후 웃으면서 홀로그램을 띄웠다.
어떠한 계략이나 속내가 담기지 않은, 그저 친한 친구에게 보여주는 웃음소리.
내게는 그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나 다른 헌터들에겐 아니었는지, 여전히 몇 발자국 떨어져서 생경한 눈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자, 보렴,”
아나스타샤가 띄어올린 홀로그램엔 의회 좌석이 주르륵 표시되었다.
절대다수는 지정족을 뜻하는 초록색이 잡아먹고 있었지만, 간간히, 핑크색이 보였다.
“요정족들이야.”
요정족의 신이었던 백작 고양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응. 맞아. 사왕 당신이 예에전 시대에서 혈화극을 지정족의 전유물에서 요정족을 끌어들였잖아?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쏘니아.
어두운 동굴에서 불이 되어 춤추고 싶어했던 요정의 아이.
“추측이지만, 그 아이가 혈화극에서 르네상스를 일으킨 이래, 화하평의회에도 변화가 찾아왔을 거야. 요정족일지라도 혈화극에 능숙하거나 어느 정도 강하다면, 화하평의회의 정식 의원으로 인정받게 된 거겠지.”
“……과연, 그래서 귀인족들도.”
“응. 그 이래, [화하평의회는 지정족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거야!”
아나스타샤의 지적이 옳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록색이 압도적이었던 의석에서 다른 색들이 1개, 2개, 3개, 그렇게 늘어났다.
그 중에는 파란색 의석도 있었다.
“이건……?”
“아마도 인어족이겠군.”
폴짝.
고양이 백작이 우리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내 오른쪽 어깨와 아나스타샤의 왼쪽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탄 고양이 백작은, 홀로그램 의석 현황을 내려보았다.
“인어족이요?”
“음. 지금 자네 나라, 아니 지정족의 나라는 경제와 군사가 완전히 갈라져 있지. 경제는 요정족이 독점하고 군사는 지정족이 독점하는 형태라네. 혈화극으로 대표되는 문화 산업은 양 종족이 적절하게 협력하고 있었고.”
“하지만, 자본과 상품을 만들어 강줄기에 실어 나르는 종족은 인어족이라 이거군.”
어느덧 다가온 성기사가 말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인어족은 물류 운송에 탁월한 능력을 타고났지. 연안항해는 물론이고 신대륙 발견으로 인해 원안항해까지 익숙해졌어. 지정족의 나라가 커질수록, 요정족이 다루는 상품은 많아지고, 상품이 많아질수록, 인어족의 역할은 높아지는 것이네.”
“즉……?”
“인어족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걸세. 파업이라도 하면 나라의 물류가 아작나니까 말일세. 아마 인어족에서도 오러 실력이 뛰어난 전사를 몇 명 보냈을 거고, 그들이 바로 파란색으로 표시된 화하평의회 의원들이겠지.”
나는 생각했다.
요컨대…….
“원래 지정족들이 만들어낸 화하평의회가…….”
아나스타샤가 내 말을 이어받았다.
“전투 외에는 영 젬병인 지정족들의 특성 상, 사실상 누구라도, 종족을 불문하고 가입할 수 있는 의회였고.”
마지막으로 백작이 가르릉, 손등을 핥았다.
“처음에는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가장 밀접해 있던 요정족들이 의회에 진출하기 시작. 다음으론 물류 계통에서 성장한 인어족들이 진출. 이젠 귀인족들마저 자신들을 대표할 전사들을 보내오기 시작한 거로군.”
우리는 침묵했다.
“…….”
“…….”
우리는 서로 눈을 쳐다봤다. 아타스타샤의 눈은 여전히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고양이 백작은, 그런 아타스타샤의 열기를 수긍해주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가 팔짱을 끼었다.
“세계 의회인가.”
모든 종족이 참여하는 통일 의회.
그 미래가 우리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25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