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58)
4.
[심해에 거하는 기룡이 잠에 빠져듭니다.]거대한 거북이가 천천히 밀림에 머리를 처박았다.
쿠웅!
거구가 쓰러트린 야자수 나무들 사이로 모래먼지가 휘날렸다.
[심해에 거하는 기룡이 숙면에 빠집니다.]기룡의 등허리가 완만히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편안하게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숨소리가 어찌나 거대한지, 푸우우우우우…… 하고 기룡의 코로 날숨과 들숨이 오갈 때마다 밀림의 수풀들은 광풍에 휘감긴 듯 파르르르 떨었다.
-흐음.
용의 콧바람에 떨어대는 야자수 아래에서, 날개를 흔드는 자가 있었다.
-우리 종족에서 제일 꿈을 잘 만지고, 잘 이끌며, 잘 인도하는 몽마들로만 정예부대를 뽑았다. 걱정할 필요 따위는 없다.
흡혈종의 간부.
간부는 말하는 동안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자세는 어색했으며, 그가 발음하는 언어도 꼭 번역기를 돌린 것처럼 어수선하고 어수룩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했다.
이 흡혈귀는 일종의 연결창구. 지금은 몽마족한테 완전히 빙의당하여 기억과 마음, 심지어 몸까지 완전히 장악당한 것이다.
“우거.”
그 앞에서 우부르카는 대략 난감하단 표정을 지었다.
“거 실례요만 성함이…?”
-[우리]에겐 이름이 없다.
잘생긴 흡혈귀가 무표정한 얼굴로 툭 말했다.
-우리는 우리다.
“[애비는 또라이다]만큼이나 별 쓸모가 없는 명제군.”
-우리에겐 너가 없고 나가 없다. 그저 꿈이다. 꿈에서는 누구든 너가 될 수 있고 누구든 나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다.
우부르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 뭐, 대충 쪽수 많다는 소리로 알아듣겠소. 괜찮지?”
-…….
“말이 없는 걸 보면 괜찮은 모양이구만. 우고르. 그래서 말인데 몽마족 양반, 아니 양반들. 저 기룡을 잠재운 게 얼마 정도까지 가겠나?”
우부르카는 손을 들어 괴수를 가리켰다.
기룡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다. 하나의 섬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 무지막지한 섬이, 대략 20분마다 한 번씩 푸스으으으으으, 날숨을 쉬었고 다시 20분 뒤에 푸부르으으으으으으, 들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들썩거리는 산.
-지금이다! 얼른 공사를 끝마쳐라, 라임!
그런 산허리 위로 끙차끙차 기어가는 달팽이들이 있었다.
-용이 깨어나기 전에 모든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
-지지대로 온몸을 둘러! 최대한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오러 연성을 할 수 있게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라이무. 이놈의 몸이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 그걸 다 고려해서 공사해라!
-오늘 하루 안에 끝낸다!
그들은 이번 작전에서 공사를 맡은 산와족들이었다.
물경 사천 명에 이르는 산와족들이 괴수의 몸을 타고 올랐다. 땅에 붙박혀 걸어다녀야 하는 대부분의 종족과 달리, 산와족들은 끈적끈적한 점액질을 흘리며 잘도 벽을 탔다.
지금도 마찬가지. 살짝 들썩거리는 산허리 정도야 산와족들에겐 가벼운 피크닉 코스에 불과했다. 그들은 네다섯 개의 촉수로 연장과 각목을 휘어쥔 채 공사판을 벌였다. 멀리서 보면, 꼭 거인 걸리버의 몸에 기어오른 소인(小人)들 같았다.
“저 꼬맹이들이 공사하다 다치면 안 되잖나.”
우부르카가 말했다.
“지금 대륙 각지에서 수십만 명이 몰려오고 있다. 어쩌면 백만이 넘을지도 모른다. 걔들이 다 달라붙어서 오러를 빨아들여야 이게 될까 말까 한데, 저 용가리가 깨버리면 말짱 도로묵이다.”
-7일.
흡혈종에 빙의한 몽마족은 말했다.
우부르카는 한량 같은 얼굴을 지우고, 곧바로 진지한 표정이 되어 흡혈종을 돌아봤다.
“7일? 7일 동안 잠재울 수 있다고? 우고르. 그건 대단한…….”
-우리 몽마족의 수를 너희 식대로 분류하면 물경 80만 명에 이른다. 80만 명에 이르는 몽마들이, 바다를 흉내내고, 파도의 시원한 결을 환상으로 보여주며, 저 기룡이 원했던 것, 불순불자를 잡아 찢어죽이고 병들어 죽이는 환상을, 꿈의 연속을 보여주고 있다. 80만 명이.
“…….”
-저 기룡이 지닌 행복을 충족시켜주고, 불행을 위로해주고, 불행이 태어난 장소로 유도하여 트라우마를 극복하도록 응원하며, 자기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면 그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지, 80만 명의 몽마가 달라붙어 일하고 있다만.
흡혈종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7일까지는 저 괴물이 코골이도 없이 숙면에 취하도록 해주지. 남은 7일 동안, 너희가 얼마나 저 괴물의 오러를 흡수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이번 작전의 관건이다. 되도록이면 괴수가 인형처럼 쪼그라질 정도로 오러를 팍팍 흡수해주었으면 좋겠군.
이거로 할 말은 끝났다는 듯 흡혈종이 날개를 퍼득였다
그때, 우부르카는 팔을 뻗어 흡혈종의 다리를 잡았다. 퍼더덕, 퍼덕, 날개짓은 여전히 이어졌으나 흡혈종은 하늘로 날아갈 수 없었다.
-무엇인가?
흡혈종은— 몽마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미안하다만. 우거. 아직 너한테 물어볼 말이 남아서.”
-물어봐라.
“내가 알기로 말이야. 그러니까 수백 년 전에, 너희 그 몽환세계인지 뭔지 좀 지랄맞은 꿈속 세계에 우리 애비가 다녀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냥 너희는 이기적인 새끼들 아니었나?”
-…….
“꿈속 세계를 넓힐 수만 있다면 바깥에서 살아가는 인어족이든 지정족이든 뭐든, 죽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매. 그저 영원히 꿈 속에서 살아가며 무한한 연극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매. 그런데 왜,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어서, 이리 우리 종족들의 운명이 걸린 대사건에 협력을 해주실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는군, 화하평의회 의장이여.
“안타깝지만 나는 나의 선의를 믿을 뿐이다.”
-반은 맞는 말이지만 반은 틀린 말이로군.
“음?”
우부르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사상 제일 거대한 지정족을 내려다보며, 몽마족은 슬쩍 입꼬리를 들었다.
-너는 너의 선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네 아비의 선의도 믿을 테니.
“…….”
-나중에 네 아비한테 전해라. 다음에 우리의 세계에 방문할 때는 [저번]처럼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겠노라고. 자칭 이 대륙을 만들었다던 조물주마저 잠재운 우리다. 너희가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애비라고 다르겠는가!
몽마족은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리고 우부르카의 손아귀에서 힘이 적어지자, 미련 없이 발을 빼고 하늘로 날아갔다.
퍼드드드득!
한 명의 몽마족이 날아가자 수백, 수천 명의 흡혈귀가 그를 뒤따라 날았다. 밀림의 어두운 숲 그늘에서 얘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수한 흡혈종이 날개를 펄럭였고, 그들의 날개는 야자수의 나뭇잎과 더불어 하늘을 가렸다.
그리고 곧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거.”
우부르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종족을 불문하고 사람을 잡아대고 다니는군. 우리 애비는. 참 죄 많은 인간이다.
깡! 깡!
밀림의 한복판에서 산와족들이 연장을 휘두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5.
“놀랍군요! 굉장합니다!”
우리는 탈락자 대기실에서 자초지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산와족들은 정말로 하루 만에 공사를 끝냈다. 각목들과 나무 계단들이 기하학적인 조화를 이루어, 누구든 간단히 괴수의 몸에 올라갈 수 있었다. 이단심문관은 눈을 반짝거리면서 홀로그램 속의 건축작품을 찬사했다.
“제가 가르친 건축학적 지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제국이 멸망하고 수백 년 동안 타향살이를 했는데 말입니다. 아하핫! 자식들이 저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는 건 생각보다 유쾌한 일이군요!”
“이럴 때만 자식 취급입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사왕. 저는 언제나 산와족을 저의 아이들이라 여겼습니다! 아끼면서 돌보았다 자신합니다.”
그래. 아이들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면서 ‘얘들아, 올해엔 귀인족 노예를 선물로 사왔단다! 부숴지지 않게 조심히 학대하렴!’이라고 말하는 아주 다정한 부모의 초상이 떠오르는구나.
“……정말로 장관이긴 하네.”
흑룡주가 소파 옆에서 중얼거렸다.
“지정족이랑 산와족, 귀인족은 이미 거의 전부 도착했어. 다른 종족도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고. ……아무런 피해도 없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게, 정말 가능할지도 몰라.”
홀로그램 너머로는 전 대륙에서 종족들이 모여드는 광경이 비추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오러 능력자였다. 전사들이 앞장서서 칼을 휘두르자, 야만하게 우거진 밀림의 나무들도 수수깡처럼 날아갔다. 나무가 베인 자리는 길이 되었다. 마치 미세하게 퍼진 수백의 혈관들처럼, 밀림 곳곳으로 대로와 골목길이 났으며, 그곳으로 종족들은 거침없이 걸어왔다.
틀림없이, 지금 저 밀림에서 [모든 종족]이 맥동치고 있었다.
-이쪽이 오러 흡입 등정로입니다아.
요정족들은 가판대를 설치하여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이 모였고, 돈이 모이는 곳에 요정이 모였다.
안타깝지만 이 세계에서 요정이란 그런 종족이므로.
-오러 연성하느라 다들 피곤하시죠? 어이고, 놀랍게도 여기 피로회복제로 유명한 백삼이 한가득! 오러를 쌓으면 뭐해, 그것도 다 피로야. 진정한 고수는 오러를 쌓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는 자! 백삼국 한 사발 하고 가십쇼오!
-잠도 거르면서 가부좌 틀면 큰일납니다! 하루에 적어도 일곱 시간의 수면! 여기 안 좋은 벌레도 많고 나뭇잎도 날카롭고 아주 잠을 못 자요, 잠을. 하지만 안심하시라! 아늑한 해먹이 여러분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벌레 퇴치약 사세요! 몸에 바르면 절대 안 물립니다! 벌레 퇴치약 사세요!
…….
아니, 조금 지나치게 씩씩한 거 같은데.
너희 오러보다 돈 벌러 저기 간 거 아니냐?
우리 모두가 어이를 상실하며 백작을 쳐다보았다.
“응? 왜 나를 쳐다보는감?”
여전히 고양이로 변신한 채 백작은 한가로이 턱을 긁었다.
“원래 돈은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네. 돈이란 건 흐름이어서 시운이 왔을 때 얼른 잡아야 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본인이 참 자식들을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마음만 같아서는 상련의 부하들까지 견학시켜서 저 아이들한테 배우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일세.”
“백작…… 아니, 됐다. 너는 영원히 그대로인 너로 남아라….”
성기사가 고양이의 등을 툭툭 치며 한숨을 쉬었다. 냐옹, 하고 백작은 기분 좋은 듯 성기사의 무릎에 눌러앉았다.
탈락자 대기실이 한가로운 것과 대조적으로, 홀로그램 영상 속의 인물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00000이 지금이야!
-아아, 맡겨두라고! FFFFFF!
256명의 귀인족들이 기룡의 등껍질에 올라 일제히 가부좌를 틀었다.
-흐으으읍!
그러자 귀인족들이 각자 영롱한 오러를 피워내며 흡성대법을 시전했다.
이른바 256색 트루 컬러 귀인 전대.
독사가 남긴 유산이자 현재, 실시간으로 우리의 심장을 괴롭게 만드는 주범들이었다. 뭐냐 저 코드네임은. 정말로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겁니까, 천무문주…?
“저 256명이 전부 독사려나?”
흑룡주가 질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뇨. 저 중에 한 명만 천무문주일 겁니다. 나머지는 독사가 키운 애제자들이나 그 후예가 아닐까 싶네요.”
“그걸 어떻게 아니? 여기선 딱히 구분이 안 되는데….”
“왠지 모르게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 봬도 라이벌이 됐으니까.’
유독 회색과 보랏빛이 얽혀 일렁이는 이가 있었다. 코드네임은 아마도 회색에 해당하는 어쩌고저쩌고겠지.
그 오러를 중심으로 마치 무지개처럼 찬란한 오러들이 빛을 불태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36층에서 38층까지 내내 머무르면서, 독사는 이세계에서도 [천무문]을 세운 모양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그것보다 [클리어 불가] 판정이 뜬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가라, 얘들아.’
그리고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아주 뼛국물도 남기지 말고 빨아버려.’
무지개색 귀인 전대뿐만 아니라 지정족들도, 순인종들도, 쉼 없이 도착하는 다른 종족의 전사들과 일꾼들도, 모두가 [심해에 거하는 기룡]의 주변에 모여서 가부좌를 틀었다.
2일째, 3일째, 4일째, 5일째…….
어느덧 밀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러를 연성할 줄 모르는 이에겐 전사들이 다가가서 친절하게 인도했다. ‘지정족’의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산와족’이 만든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향해 증오를 드러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천 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
하지만 [심해에 거하는 기룡]의 도래에 맞서, 종족들은 하나로 합심하였다.
‘가라.’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 38층을 깬 건 이세계에서 도래한 신들 따위가 아니야.’
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림은 은하수처럼 환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피어올린 오러가 붉은빛, 초록빛, 푸른빛, 그들의 심상에 스며든 어느 색깔들로 불타올랐다.
밤하늘은 저 종족들이 내는 빛깔을 머금어 비단처럼 윤을 냈다.
‘너희가. 너희들이 이 퀘스트를 깨는 거다!’
그리고.
아비의 응원은 틀림없이, 아이들한테 닿았다.
[지정족이 진화를 맞이합니다!]26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