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59)
6.
잠시, 우리 인류가 탑에서 마지막으로 싸운 [적]에 대해 얘기해보자.
7.
이것은 내가 회귀하기 전의 이야기다.
염제(炎帝) 유수하는 자기가 받은 이명답게 뭐든지 잘 불태웠다.
-하하하! 하하!
물건을 잘 태운다는 것이 그의 능력이라면, 사람도 잘 태운다는 것이 그의 악업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세계마저 잘 태운다는 것이 그의 잔인함이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이의 불행이었다.
-이거, 신이 되는 기분도 꽤 좋은걸!
유수하는 요정족에 빙의하여 나머지 종족을 이끌었다. 그들은 발에 채이는 물건을 태웠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을 태웠다.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까지 태우려 들었다.
업화군(業火軍).
유수하는 자신을 따르는 요정족들을 그리 불렀다. 그들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오는 족족 타올랐기에, 과연 그들은 대륙에 강림한 업화가 맞았다.
-태워라!
유수하가 명령하면,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엘프들은 복창했다.
엘프들의 목소리는 사나웠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표독스러웠다.
-지고한 존재를 위하여!!
원시숭배.
-불의 신이시여, 제물을 바치나이다! 받아주소서!
인신공양.
-태우라!
-세상을 정화하라!
-우리만이 불의 신께 선택받은 자들! 유일하게 가치있는 자들이다!
선민의식.
-너희가 약한 것도, 굶주리는 것도 모두 너희들의 태생이 천하기 때문이다!
-어딜 감히 서열도 낮은 쓰레기가 신성한 불길에 발을 딛느냐!
멸시와 차별.
-놈들이 강한 것은, 서열이 높은 것은, 모두 우리로부터 가져갔기 때문이다!
-제사장, 아니, 제사장이었던 놈! 보아라! 이게 네놈이 더 이상 불의 신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증거다!
증오와 권력욕.
-그래, 잘한다. 바로 이게 사람들 사는 꼬라지지.
-사랑? 우정? 헌신? 좆까라 그래라. 그따위 공상에 의존하지 말라고!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겠냐!
-자아, 꼬마들아! 너희가 진실한 인류다! 이대로 이 대륙을 통일하는 거다! 알겠냐!
엘프들이 경례했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유수하는 세계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 불을 선도하고자, [인물 빙의] 아이템과 [강신] 아이템을, 타이밍이 올 때마다 구입했다.
-왜 머리 아프게 농사를 짓냐? 호구야?
-농사 짓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마. 농장구 만들어야지, 농장구 만들려면 농장구 만드는 기술력 세워야지, 기술력 세우려면 연구자 필요하지, 연구자 후원하려면 돈 필요하지, 돈 모으려면 시장 있어야지, 시장 있으려면 마을 있어야지, 마을 있으려면 통치자 있어야지, 이 통치자가 마을이랑 시장이랑 돈이랑 연구자랑 기술자랑 농사꾼들 다 부려먹어서, 그 다음 반년이나 1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좁쌀 만한 곡식들이 튀어 나오는데. 어.
유수하가 코웃음을 쳤다.
-너희들, 호구냐?
엘프들은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호구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호구가 아닙니다!
-우리들, [호구가 아닌 화염십자단]에서도 불의 신의 신탁을 강고하게 지지하나이다!
그들의 몸 속에는 피가 아니라 용암이 드글거리는 것만 같았다.
엘프들은 타고난 육체능력과 타고난 지적능력을 모조리, 뭔가를 살육하는 데 쏟아부었다. 태어날 태부터 오러를 느끼도록 타고난 엘프들은 막강한 살인기계였다. 그 살인기계가 뛰어난 두뇌를 가동시켜, 어떻게 해야 적들의 팔다리를 효율적으로 잘라버릴지, 어떻게 해야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염제라는 신을 모시는 광신도.
그 시대의 요정족은 그런 자들이었다.
-짜식들. 손에 머리통 하나씩 들고 다니는 거 보면 호구는 아니군.
염제는 연단에 오른 채, 오른손에서 오러를 피워올렸다.
화르르륵!
그가 들고 있던 산와족의 머리가 순식간에 불타올라, 재가 되어 흩어졌다.
-농사는 필요없다! 배고프면 남의 놈들이 수확해놓은 곡식을 먹어라. 그놈들이 정성스럽게 키워둔 지네닭을 죽이고 연회를 열어라!
-마을도 필요없지. 마을에 살던 놈들 다 죽이면 그게 곧 너희만을 위한 특급 호텔 아니겠냐. 거 너희들 시종들어줄 마을사람만 몇 명 남겨두고, 한 2주일 동안 호텔에 틀어박혀서 쉬어라. 마을사람들이 꼬박꼬박 가져다주는 음식이랑 고기 챙겨먹어라. 그게 곧 낙원 아니냐? 응?
-2주 되면 거 음식 나르던 마을사람들도 마저 죽여라. 다 죽여. 어때? 가뿐해지지? 보름 동안 푹 쉬었더니 스트레스도 안 받고 다시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지? 그거야. 야그들아, 그거라고.
-다시 다음 호텔을 찾으러 가는 거다!
요정족들이 함성을 질렀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불의 신을 위하여!
-위하여!
업화군이 휘몰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공들인 일년농사는 불태워졌고, 축사에 씨받이로 아껴둔 암소는 불살라 구워졌다. 그곳에 살던 백성들이 내일, 내년, 미래를 그리며 차근차근 쌓아올린 것들이 모두 하룻밤 사이 잿더미로 주저앉았다.
남은 것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이었다. 업화군은 마을을 약탈할 때마다 일부러 대여섯 명은 살려주었는데, 꼭 다리나 팔, 허리를 아작뜨린 다음에 살려뒀다. 살아남은 주민은 망연히— 사라져버린 과거와 절딴나버린 미래, 마을 변두리에 넘치는 시체들을 보았다. 보았으며,
업화군이 떠나고 난 가로수길에는 조용히 밧줄들이 걸렸다. 살아남은 백성은 그곳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세상을 불태운 폭군, 염제.
유수하.
그러나 그는 39층을 거치며 위기에 봉착했고, 바야흐로 40층에 도착했을 때는 전례 없는 위험에 떨어졌다.
사실 위기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미 오래 전, 업화군은 수많은 종족을 멸종시켰다. 산와족을 찢어죽였다. 귀인족을 못 박아 죽였으며, 순인종을 머리 잘라 죽였고, 새기족을 불에 태워 죽였으며, 흡혈종을 가두어 죽였다.
어디서, 어느 누구가, 감히 불의 신에게 위기를 안겨주겠는가?
-우고르.
오직 하나의 종족.
수천 년 간, 대륙이 불지옥으로 떨어져 신음하던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유일하게 [멸종]을 피한 아이들.
-누군가 했더니, 미치광이 엘프 새끼들의 대빵 아니신가.
지정족(地精族).
그들의 세계는 가혹했다. 늘상 타오르는 불지옥에서, 오로지 강인한 자만이 살아남았다. 다행히 그들은 근성이 있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씨앗을 뿌렸고, 뿌린 씨앗 가운데 성한 몇몇이 전사로 자라났다.
40층에서 유수하가 마주치게 된 적이 바로 그들. 지정족이었다.
-뭐냐, 너희. 38층… 아니, 이렇게 말해도 NPC 몬스터들이니까 못 알아먹지. 어. 그래. 거 심해에 거하는 기룡인가 뭔가 하는 놈한테서 어떻게 살아남았냐?
-살아남았다.
-신기하네. 어떻게?
-우리 중에도 오러를 쓸 줄 아는 자는 수십명 있었다. 그 수십 명이 기룡에게 달라붙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많은 오러를 기룡으로부터 흡수했지.
-호오. 그러면…….
-그렇다.
쿠웅.
열네 명의 지정족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우리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지정족이다.
-…….
-모든 동족들이 죽었음에도 우리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
유수하는 하, 짧게 비웃음을 터트렸다.
-열네 마리밖에 안 남은 주제에 꼴에 종족이라고! 내 참 어이가 없네. 오냐, 땅거지 새끼들아. 내가 오늘 네놈들을 백만 동포의 곁으로 편하게 모셔주마!
그러나.
그 날 유수하가 퀘스트를 토벌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유수하는, 자신이 [이번 적들]을 상대하기엔 지나치게 준비가 부족했다는 걸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자신의 업화군을 끌고 휘몰아치면, 간단히 승리했겠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유수하는 39층에서 엘프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모든 엘프들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빌어먹을.
유수하에겐 동료가 없었다. 성녀와의 열애설이 돌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무책임한 언론들이 뿌린 가십이었을 것이다.
부하라 할 만한 요정족들도, 이제는 등을 돌렸다.
혈혈단신이라는 말은 유수하를 위해 있었다.
-거 존나 비겁하게 쪽수로 싸워대네. 오냐! 씨발놈들. 내가 준비 단단히 하고 다시 돌아오마! 알겠냐!
[40층 스테이지에서 후퇴합니다.] [퀘스트 달성에 실패합니다!] [다음 기회에 재도전해주십시오.]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쾌도난마로 탑을 공략해온 염제의 행보는 여기서 잠시 멈추었다.
딱히 40층 보스에 패배한 건 아니었다. 후퇴했을 뿐. 이걸 염제의 [실패]라고 조롱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11층에서 39층까지, 모든 스테이지를 격파해낸 전설이 바로 염제 유수하였으니까.
-뉴스 속보입니다.
40층에서 좌절한 사람은 비단 유수하만이 아니었다.
-탑 40층 공략에 나선 흑룡 길드.
-이번에야말로 최상급 길드의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자신했지요?
-안타깝지만 또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유수하의 명성에 가려졌을 뿐이지, 사실상 탑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어잡은 그녀가 이번에야말로 길드의 명예를 되찾겠다며 나섰다. 흑룡의 정예들을 모조리 끌고 공격했다.
[40층 스테이지에서 후퇴합니다.] [퀘스트 달성에 실패합니다!] [다음 기회에 재도전해주십시오.]그녀 또한 실패했다.
‘고작 열네 명밖에 남지 않은 지정족’을 이기지 못해 퇴각한 것이다.
흑룡주는 14명의 적들 가운데 6명을 사살했고 4명을 상처입혔다. 그것이 흑룡주가 쥐어짜낸 전력의 한계였다.
결국.
-헌터 랭킹 1위!
-염제가 이번에도 보스를 단독으로 토벌했습니다!
흑룡주가 상처 입혀 놓은 사냥감들에 막타를 친 장본인은, 복수의 타이밍만 노리고 있던 유수하였다.
제아무리 한 번 후퇴했다고는 하나 염제는 염제. 부동의 서열 1위를 지키던 헌터였다. 6구의 시체, 4명의 부상자, 4명의 전사로는 도저히 유수하를 감당할 수 없었다.
-시발!
-거 존나 애먹였네, 거지 새끼들!
유수하는 욕을 쏟아내며 지정족의 머리를 불태웠다.
그로써 이 대륙에 남은 최후의 지정족들이 죽었으며, 한 종족이 멸망했다.
-넌…….
지정족이 입을 열었다. 그가 마지막 남은 지정족이었다. 그는 유수하의 손아귀에 머리가 붙잡혀, 온몸이 태워지는 속에서 무표정하게 읇조렸다.
-저주받을 것이다.
-앙?
-네놈은 신이 아니라 악마다. 네놈이 신을 사칭하여 요정들이 악마의 길에 들었다. 네놈이 세상을 불태웠고 멸망시켰다. 모든 것이 너의 업이다.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너 같은 악마가 아니라 정녕 신이 존재한다면…….
-뭐래, 몬스터 새끼가.
-반드시 너에게 복수가 이루어지리.
화르륵.
지정족의 머리가 뇌끝까지 불탔다. 그다음에야, 지정족의 말은 사라졌다. 이미 목청이 불타고 혓바닥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뼈가 녹았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지정족은 오직 오러를 써서 유언을 남긴 것이었다.
-새끼.
유수하는 양손에 묻은 잿가루를 탁, 툭, 털어냈다.
-뭣도 아닌 놈들이 복수 운운해요. 꼭.
그렇게 유수하는 탑 40층을 공략했다.
언론사에선 유수하와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인터넷에선 유수하를 찬양하는 사람과 비아냥거리는 사람으로 나뉘어, 어느 쪽이든 유수하 이름 석 자가 자신들 인생에서 몹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헌터들은 무능한 흑룡주를 비웃었고, 나 같은 놈은 유수하를 동경했다.
그런 시대.
그런 날이었다.
-대화? 아, 대화. 좋지. 신사적이고.
-하지만 대화의 룰은 내가 정한다.
바로 그날 밤에, 성녀(聖女)가 죽었다.
-하지만 형씨는 내가 염제라는 걸 알잖아. 성녀가 나한테 죽었다는 것도 봤고.
-그럼 뒈져주셔야지.
한 명의 F급 헌터도 죽었다.
즉.
40층이야말로 우리 인류가 정상적으로 정복해본, 가장 높은 스테이지.
내가 살천성을 만나기 위해 잠깐 50층을 다녀왔다지만 그건 버그를 이용한 꼼수. 공식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짓이다. 회귀하기 전에도, 회귀한 다음에도, 내 모든 인생을 통틀어도 인류가 밟아본 마지막 경지는 40층까지다.
그 40층에서 염제를 한 번 물리쳤으며, 흑룡주를 한 번 퇴각시킨 존재.
바로 그러기에 내가 다른 동료들의 비웃음을 들어가며, 굳이 ‘고블린’을 내 종족으로 선택하게끔 만든 존재.
오직 열네 명만으로도 내 머릿속에 깊은 각인을 심어준 존재.
[지정족이 진화를 맞이합니다!]그 존재가 바로 지금, 나의 시간에 들어오고 있었다.
8.
변화는 어느 자그마한 홉고블린 꼬마에서 시작했다.
-우거?
꼬마 지정족은 왼쪽에 어머니, 오른쪽에 아버지를 두고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꼬물꼬물. 자그마한 몸집답게 쬐끄마한 발가락이 꼬물락거렸다.
아기의 어미와 아비는 자기들 오러를 쌓기보다 어린 자식에게 오러를 몰아주길 원했다. 그들은 화하평의회에서 말석을 차지한 전사로, 두 사람이 합심하여 펼친 오러 연성법은 꽤나 뛰어났다.
바로 그 때문에 꼬맹이는 ‘제일 먼저’ 진화하는 영광을 누렸다.
-아이야?
-이건…….
꼬마아이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어미와 아비는 깜짝 놀랐으나, 곧, 그들은 이러한 변화가 아이한테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우고르?
화아아아악!
기룡의 등껍질에 터를 잡고 앉은 지정족도, 어떤 묘기를 부렸는지 몰라도 기룡의 무릎 꼭대기에 올라가서 가부좌를 튼 지정족도, 계단을 올라가기 귀찮아 그냥 기룡의 발톱 위에 나앉은 지정족도, 약간씩 시차를 두고 차례대로 빛났다.
-뭐, 뭐냐? 갑자기 왜 내 몸이 …….
-불길하다! 불길한 일이다, 우거!
지정족이 허둥지둥거리며 가부좌를 풀려던 순간.
“촐싹거리지 마라!”
기룡의 머리 꼭대기에서 사자후가 터졌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동족들을 질책합니다.]나의 멋진 패륜아였다.
우부르카는 거대한 괴수의 왼쪽 콧구멍과 오른쪽 콧구멍 사이, 즉 인중 위에 앉아 있었다. [심해에 거하는 기룡]이 숨을 내쉴 때마다 우부르카의 몸은 꼭 바이킹을 탄 것처럼 오르락내리락거렸다. 격렬도로 따지자면 제일 거친 코스였건만, 우부르카는 마치 안락의자에 기댄 듯 편안해 보였다.
“절대! 가부좌를 풀지 말고! 계속해서 오러를 운용하라!”
-하, 하지만…….
“이건 결코 불길한 징조가 아니다. 네놈들이 환골탈태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지정족들이 눈을 치켜떴다.
-환골탈태라고?
-우부르카 선조님만 겨우 도달했다던 경지 아닌가?
우부르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우고르. 어디까지나 비슷할 뿐이다만. 내가 한번 해봐서 아는데, 환골탈태랑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뭣보다 우리 동포들 모두가 한꺼번에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냐, 선조?
“모른다. 하지만 미지의 땅굴을 개척하는 것은 언제나 두근거리는 일이다!”
화르르르!
우부르카의 몸에서도 빛이 났다. 그 불길은 어느 지정족보다 거칠었다.
“동포들이여! 두려워하지 마라. 불길은 항상 우리의 편이었다. 옛 조상들이 자욱한 동굴에 파묻혀 신음했을 때조차 불은 우리를 위해 타올랐다. 이 대륙을 창조한 괴수라 한들 어찌 우리의 불을 꺼트리겠는가!”
붉은 화염이 우부르카를 휘두른 양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불꽃은 우부르카의 신체를 태우지 않았고, 하물며 세상도 태우지 않아, 단지 기룡의 머리를 조용히 휘감을 뿐이었다. 수많은 지정족이 선조의 경지에 감탄하며 우부르카를 올려다봤다.
“숨을 쉬어라! 너희 몸으로 세상의 체온을 받아들여라! 집중하는 거다! 위대한 선조들이 소금을 캐기 위해 곡괭이를 휘두르던 것을 떠올려라!”
-…….
동요가 가라앉았다.
지정족들은 다시 오러의 연성에 몰두했다.
“전원, 심상(心像)을 통일한다!”
내 가문의 무사장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가 되어 동포들이 내뿜는 불길을 이끌었다.
“이것이 환골탈태이든 뭐든 다음에 눈을 뜬 순간,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를 잊는 자에게 내일과 내일의 내일이 찾아온들 뭔 소용이냐. 그는 시간을 흘릴 뿐, 시간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기억하라. 오래 전에 절명한 선조들의 비명을 잊지 마라! 우리는 다만 [잊지 않는 존재]가 되기 위해 영원토록 불타오르는 것이다!”
불길이 더욱더 거세졌다.
기룡의 등껍질, 무릎, 발가락, 콧대와 인중에서, 각양각색의 불이 치솟았다. 수십 만의 불꽃은 수십 가지의 빛으로 흔들거렸으나 얼마 가지 않아 가장 강렬한 색깔— 가장 뚜렷한 하나의 색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적赤.
다만 붉은 불길이 푸른색을, 비취색을, 황색을, 흑색을, 백색을 먹어해치웠다. 심해에 거하는 기룡은 아예 작렬하는 불꽃에 휩싸였다. 괴수의 몸뚱어리는 거대한 촛불의 심지가 된 것처럼 타올랐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마천신공을 운용합니다.]그리고.
[지정족들이 마천신공을 운용합니다.]후두두둑-
아이들의 초록빛깔 피부가, 껍데기가, 벗겨졌다.
불에 바짝 타버린 숯껍질마냥 초록색 피부가 발갛게 툭, 툭, 떨어졌다.
[지정족이 진화를 겪습니다!]아니.
오러에 타올랐기에 피부가 발개진 것이 아니었다.
[지정족의 스테이터스가 변화합니다!]아이들의 피부는 정말로 붉어져 있었다.
그것은 봄의 초록을 품은 고블린의 피부가 아니었고, 여름의 향을 머금은 홉고블린의 피부도 아니었다.
[지정족이 최종진화체, 아수라(阿修羅)에 진입합니다!]누천 년.
지금까지 지정족이 지나쳐온 계절들이 붉게 익어 저 아이들의 피가 되었으며 살이 되었다.
“…….”
탈락자 대기실.
우리는 땅의 아이들이 붉은 가을을 추수하는 광경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지정족은 조금 더 거대해졌다. 송곳니는 더 날카로워졌다. 안광은 붉게 빛났다. 심상에서 타오른 오러는 그들의 몸과 혼연일체가 되어 맹렬히 타올랐다. 빨간 근육은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듯 팔뚝과 등허리, 복근, 허벅지에서 숨을 쉬었다.
“오우거……?”
흑룡주가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다.
“……아니야. 피부가 붉은빛인 오우거는 본 적 없어. 오우거처럼 몸만 큰 것도 아니고, 오러의 순도가 말도 안 되게 강해. 저건…….”
“예, 아니에요.”
우리는 홀로그램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직 저 아이들만 도달할 수 있는 위치지요.”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아이들이 피워낸, 하나의 장엄한 혈화(血火)를 바라보면서.
‘종족 스테이터스 오픈.’
스르륵.
내 눈앞에 문자가 떠올랐다.
+
[아수라(阿修羅)]멸종등급: F (위험 없음)
잠언: ‘우리는 불이다.’
정치체제: 화하평의회
설명: 지정족.
땅에서 태어나 굴을 파고, 늪을 사랑하여 진흙을 몸에 바르며,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향기를 행복으로 알아 모든 그늘과 습기를 사랑한 어느 종족은, 기나긴 시간을 견뎌, 마침내 이 세상의 불길을 심장에 받아들였습니다.
개화(開火).
그들은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오러를 피워올릴 적에, 불꽃은 여섯 갈래로 나뉘어 타오르며, 그들이 전장에 나설 적에, 그들의 팔은 마치 여섯 자루의 칼을 쥔 듯 격렬하게 몰아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꺼져가는 생명들을 안타까워 합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얼굴과 몸짓을 연기함으로써, 어둡고 그늘진 무대에 이미 사라진 삶들을 옮겨 놓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타인이 될 수 있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으며,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삼면(三面)의 얼굴을 지닌 자들로 비유됩니다.
가로되어 이르길 아수라.
인간들이 흘린 물길을 사랑하고, 자신들이 피어올린 불길을 긍지로 삼아, 아수라들은 언제까지나 지옥이 되어버린 세상을 질주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지정족을 악마라 부른다면, 다만 그들이 기꺼이 지옥에서 머물기를 선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아비가 아직 지옥에서 웃고 있습니다. 다른 어느 곳이 그들의 터전이 되어주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특성: [화하평의회], [혈화극], [마교], [마천신공], [마천진법], [악우 교리], [기록의 유산], [승부욕], [다종족문화], [대륙의 패자]
진화체: 최종 완료.
이명: 아수라는 다만 그들만의 이름으로 불릴 것입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탈락자 대기실에서 동료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내 목소리만이 나직하게 흘렀다.
사람은 본래 자신의 목소리는 잘 듣지 못한다던가.
그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귀에는 내가 기뻐하는 것도 같았으며 못내 말하지 못할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같았다.
“제 아이들입니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말을 했다.
“전부…… 모두, 자랑스러운 제 아이들이에요.”
[스테이지 클리어.] [38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당신은 스테이지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없습니다.]그건.
무척이나 행복한 말이었다.
26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