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68)
2.
‘비.’
나는 칼날에 떨어진 물방울을 보았다.
‘비가 내리는군.’
물방울이 미끄러져 느릿하게 흘러가는 그 모든 모습이 내게는 순간과 순간으로 모조리 비치었다. 전신에 오러를 끌러올려 집중도를 높인 탓에, 지금 내 심장의 시속(時速), 나의 감각은 평범한 사람보다 아득히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툭!
나는 칼날에 오러를 실어서 물방울을 쳐냈다. 내 붉은색 오러는 순식간에 물방울을 감쌌다. 코팅이라고 해야 할까, 이걸. 내 오러에 의해 도금된 물방울을, 나는, 그대로 우부르카가 서 있는 방향으로 쳐냈다.
퍽!
붉어진 물방울이 우부르카의 뺨에 맞았다.
터졌다.
마치 어린애가 장난으로 물폭탄을 던진 것처럼. 우부르카의 한쪽 뺨에 붉은 물감이 묻어서 흘렀다. 능히 피할 수도 있는 나의 일격을, 우부르카는 유쾌한 장난이라며 받아주었다.
“이제 와서 아비의 오러 연공이 극의에 달았다고 과시해봤자, 별 감흥은 없다.”
우부르카가 씩 웃었다.
“칼날에 내려 묻은 물방울에 오러를 섞여내어, 그 오러가 담긴 슬픔과 원한을 스며들게 하여, 마침내 애비가 내게 던진 한 점의 물방울은 그저 씻겨 내릴 수많은 빗물 중 하나가 아니라, 뭔가 기분이 더럽고 꿀꿀하며 누군가를 도와줘야 할 것 같은. 그런 한 점의 방울이 되는구나. 굉장해. 오러의 놀라운 묘리다.”
“우부르카야.”
한 번의 작은 공방에 서로 덕감을 주고받는 가운데, 나는 완연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람들이 어색할 때 끼어들어 어떻게든 화재를 끌어내려는 김공자의 습성,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떻게든 호의를 끌어내려 하는 김공자의 버릇, 등.
나 자신을 이루는 껍질들을 하나, 하나, 버려서 온 정신을 [교인]에 맞추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칼을 든 자는 마천의 소교주다.
“너는 그것을 내가 만들었다고 보느냐?”
“뭐?”
“빗방울은 그저 뭉쳐 든 습기가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에 불과하지. 거기에 물리적인 작용 외의 이유는 없어. 그저 물이 있었고 그저 힘이 있었고 그저 중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저 빗방울이 있는 것이다.”
스승님.
마교의 교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적, 눈송이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를 나는 나의 교인에게 전해주었다.
“그런 것에 내가 인간의 원과 한을 오러로 담아내어, 물방울을 하나의 투사무기로 만들었다. 원래 없는 것에다 내 것을 섞었으니 적이 자연스럽진 못하지. 하니, 참으로 마교스럽게 오러로 농단을 부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
“하지만 아들아. 네가 잘못 보았다.”
정파에게 땅은 땅이다. 땅을 본딴다는 것은 곧 무인 스스로가 한 점의 흙으로 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교에게 땅이란? 여동생의 시체를 묻기 위해 손톱이 깨져라 파야만 하는 원수다. 하필이면 그 날 그리도 한적하여 여동생이 수령의 눈에 띄도록 만든 적이다. 자신도, 자신의 부모도, 부모의 부모조차도 온몸이 부서져라 일해왔음에도 자신들의 것이 되지 않는, 언제까지고 대지주의 장부 속에 숨어 자신들의 하잘 것 없는 삶을 조롱하며 자각하게 만드는 개자식이다.
검제.
나의 또 다른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설명을 나는 나의 자손에게 전해주었다.
“나는 나의 것을 섞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것을 섞었는가?”
“사람들.”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원망과 원한이 모여 하늘을 이루었으니, 그것을 마천(魔天)이라 한다.
“나는 마천의 소교주. 그 대행자다.”
그러니 거기에 섞이는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다. 감히 나의 것이라 말할 수 없다.
한 때 존재했던, 언젠가 존재할 누군가의 것이다. 원망이다. 한이다. 증오다.
“이것이 마천의 검이다!”
내가 검을 휘둘렀다.
수천개의 붉은 비가 일제히 수평으로 날았다. 내가 맡은 것. 보관해야 할 것. 대행해야 할 것. 그토록 귀중한 것들이 쏘아져, 우부르카를 횡으로 후려쳤다. 쾅……! 믿기지 않을 커다란 굉음, 차라리 절규라 해야 할 그 어떤 소리와 함께 우부르카는 휩쓸려 날아갔다. 그리고 밀림이 크게 흔들렸다.
3.
흠뻑 젖은 숲에서 새들은 날아오르지 못했다. 대신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거기 맺힌 물방울들이 일제히 날았다.
“과연.”
그 한가운데, 밀림 한복판에 새겨진 운석 구덩이 속에서 우부르카가 말했다.
“과연. 그러했는가.”
우부르카는 대담하게 웃더니, 쿵! 두 주먹을 부딪혔다.
“하다면.”
우부르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빗물을 뒤집어써 윤곽이 점멸하는 몸으로, 하얀 거인이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번에는 우리의 세계를 보여주마.”
그 사이에도 빗물은 점점 많아졌다.
이곳은 대륙에서 가장 습한 밀림이었으므로, 비가 내리는 것이야 이 계절의 일상이었다. 여우비. 장마비. 안개비와 장대비. 가까운 강물에서 피라냐 떼가 날뛰었고, 민물에서 사는 장어들이 그런 피라냐를 날쎄게 물어 삼켰다.
밀림에 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
순식간에 밀림은 낮은 물안개에 휩싸였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물안개 아래로 강물이 흘렀고, 뽁! 이따끔 피라냐가 수면에서 뛰어올라 다시 안개의 수면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아래에서 생선의 육질이 이리지리 찢기는 소음이 들렸다.
-우,
야자수의 밑둥이 안개에 잠겼다. 밑이 가려진 나무들은 잠시 공중에 매달린 것 같았고, 땅이 아니라 하늘에 달린 무언가 같았다. 어느 신을 경배하여 조각가가 나무로 새겨놓은 신전 기둥 같다고 할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 그루의 나무들이 안개에 휩싸여 이 일대 전체를 음습한 안개의 신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안개의 밑바닥에서.
신전 기둥이 되어버린 야자수에 몸을 반쯤 가린 채.
나를 중심으로 삼아, 빈틈없이 둘러싸 포위하여,
아수라들은 우, 우, 우, 깊은 트림을 내고 있었다.
‘과연.’
나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저 먹구름이 단순히 바닷바람에 밀려 온 비구름이 아님을 깨달았다.
쿠루르르릉… 구름과 구름 사이로 번개가 오갔다. 먹구름들끼리 뒤엎치며 서로 천둥을 집어삼켰다.
‘우부르카 이 자식이 웬일로 일대일 결투를 신청 안 하고, 개떼로 덤벼드나 싶었더니만……. 마천신공(魔天神功)이 아니라 마천진법(魔天法)으로 한 판 붙어보자는 얘기였는가.’
내가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미 온 밀림에서 비를 부르는 소리가 터져오고 있었다.
-우! 우! 우! 우고르! 우고르! 우고르! 우!
-케륵케, 우! 케륵케, 우! 케륵케, 우!
-우고르!
-케륵케, 우! 케륵케, 우! 케륵케, 우!
-우고르!
지정족들이 무기를 땅바닥에 찍어가며, 주먹으로 야자수를 때려가며, 발바닥으로 바위를 쳐가며, 숲속에 잠든 소리들을 깨웠다. 광폭한 리듬이었다.
진화를 거치면서 그들은 아수라가 되었고, 그들의 오러는 한 명도 빠짐없이 붉게 타올랐다. “케륵케! 우!” 한 명의 지정족이 나무통을 치자, 오러가 나무의 속살을 사정없이 울렸다. 야자수는 한 자루의 거대한 악기가 되어 시끄러이 울부짖었다. 쿠우우웅! 쿠웅!
‘좋군.’
안개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나누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벽으로.
그리하여 안개 아래의 강물은 지옥의 피안이 되고, 안개에서 솟아나온 곳부터 지상이 되니.
하지만 땅마저 안개에 가려졌으니 이 지상에서 기댈 것이 무엇인가?
‘훌륭해.’
기울어진 야자수들.
안개를 뚫고 하늘에 게을리 늘어선 야자수들이야말로, 유일하게 피안으로부터 도피한 곳이고, 그러기에 저 나무들은 모두 신들의 은혜와 영광을 노래하는 신전 기둥들이다. 밀림에 살아가는 작은 동물들, 뱀들, 다람쥐들, 거미들은 모두 야자수로 피신하고 있었다.
마천진법魔天陳法.
번외법番外法.
회운혈무灰雲血露.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으며.
단지 비를 내려 안개를 자욱하게 뿌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정족들에 의해 지금 이 공간은, 무척이나 [낯선 무대]가 되어버렸다.
“청출어람이구나.”
나는 아수라의 마천진법이 시전되어 가는 광경을 목도하며 감탄했다.
“아름답다.”
天上.
잿빛 하늘은 낮게, 낮게, 먹구름으로 펼쳐진다. 구름의 이편에서, 쿠루룽, 벼락이 치려다가 옆구름에 집어 삼켜지고, 다시 구름의 저편에서, 우르르르, 뇌우가 내린다.
天下.
무한한 안개가 밀림을 뒤덮는다. 흐르는 강물도, 강물에 놓인 바위도, 거친 수풀도, 수풀들 아래서 지저귀던 벌레들도. 전부 다 안개에 감추어진다. 그것들은 이제 조잘조잘거리는 소리를 몰래 흘릴 뿐. 벌래, 새, 짐승의 모습은 안개 너머로 보이지 않으며, 이따금 불온한 그림자가 되어 드문드문 지나갈 뿐이다.
지르르르… 크르, …키이키이…끼…끄르르르르…그르…삐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
그림자들이 내는 불협화음.
“…….”
내 시야는 오직 먹구름으로 펼쳐진 하늘과 먹안개로 덮쳐진 지상이라.
반쯤 낮아진 하늘과 반쯤 높아진 지상 사이에, 야자나무 가로수들, 허리를 굽힌 채 힘겨이 어디엔가 매달려 있다.
“하하.”
나는 가볍게 검을 들어 안개를 툭, 툭, 헤집어보았다. 안개의 짙음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짙은 회색이 몰려와 안개의 강을 이루었다.
‘평범한 안개가 아니야. 오러로 만들었군.’
조금 더 헤집어보니, 이제 안개를 붉은 핏빛을 띄기 시작했다. 지정족들이 흘려대는 오러의 색깔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 일대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안개라니…. 기룡(氣龍)을 특식으로 먹은 값을 하는군.”
내 칼에 베인 안개에서 핏빛이 모락모락 흘러내렸다. 그것은 잿빛 안개에 실개천처럼 흘렀고, 흐르는 자리마다 더 붉어져서, 이윽고 지상을 뒤덮은 안개는 전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나는 이계(異界)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여기가 내 피안(被岸)인가.”
“아니. 애비여.”
찰랑.
안개에 가려진 강물을 밟으며, 그리하여 물소리보다는 어느 종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흘리며, 우부르카는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여기는 우리의 원점이다.”
“원점?”
“우고르. 태초에 눈을 뜨고 가녀린 눈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 비친 세상이란 겨우 이런 것이었다.”
우부르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은 푸르지 않았다. 푸른 하늘을 올려볼 이유가 없었으니. 우리가 하늘에 관심을 가지게 되려면 먼저 비가 내려야 했고, 비가 내리는 하늘은 언제나 잿빛이었다. 고로, 우리에게 하늘이란 항시 먹구름이 끼어 소화불량 상태의 벼락을 꺼르륵 트림해대는, 기이한 덩어리들에 불과했다.”
“땅은? 땅이란 두려운 것이다. 어느 짐승이 우리를 해칠지 모른다. 아주 작아 보이는 벌레라도 우리 아이를 독살하기엔 충분히 강하다. 크고 작은 악마들이 떠돌아다니는 곳… 멀리서 알 수 없는 짐승이 울부짖고, 밤까지 돌아오겠다던 어른이 어째서인지 돌아오지 않는다. 왜?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짐승은 왜 울부짖으며 어른은 왜 돌아오지 않는지 모른다. 세상은, 모르는 것뿐이어서. 짙디 짙은 안개로 휩싸여 있었다.”
“…….”
“그저 가끔.”
우부르카는 태초의 세계를.
위아래로 잿빛이 무한하게 이어진, 회색의 세상을 둘러보았다.
“저 야자수처럼 매달릴 무언가가 있어, 매달릴 곳을 찾아 떠나기만 할 뿐이지. 나를 살려주고 내 가족에 집이 되어준 것이라면 곧 신 (神)이다. 우리는 매달릴 신령들을 찾아, 지옥과 피안 사이를 헤쳐 지나가던 방랑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너희를 여기서 키우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할 줄 아는 말도 물, 하늘, 흙, 그거밖에 없었으니…….”
“우거. 우리에게 비치는 세계가 이러한데, 어찌 많은 단어가 필요하겠는가.”
비가 내린다.
먹구름을 불러들인 것은 아수라의 오러라 하더라도, 구름에서 내리는 빗물들은 순해 보였다. 비였다. 나는 아가리를 에, 벌려 빗물을 몇 모금 마셨다. 시원했다. 오래된 오러보다 훨씬 깔끔한 정기가 내 온몸을 젖셨다.
“여기에 거하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우부르카는 말했다.
“애비여. 애비는 우리를 사랑한다. 그 사랑을 의심하는 자는, 우리 지정족 가운데 없다. 하지만 힘겹지 않았는가?”
“힘겹다니 뭐가? 그야 지금 이 집단 패륜을 앞두고서 힘들기야 하다만….”
“애비가 우리를 이 원시림에서 끌고나온 이후,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발전이 있었다. 정복이 있었다. 패배가 있었고, 모든 종족이 노예로 잡히기도 했지. 설마 죽은 자가 없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
“…….”
“고문당해 죽은 자, 실수로 죽은 자, 운이 나빠 죽은 자, 산와족에 저항하다 창에 찔려 죽은 자, 검투사의 옷을 입고 한낱 관객의 유희 거리가 되어 조롱당하다 죽은 자, 탈출하다 죽은 자, 탈출하지 못해 죽은 자…….”
정적이 흘렀다.
“이 모든 것을, 애비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끼는 것 아닌가?”
긴 정적이 흘렀다.
2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