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69)
4.
나는 아름다운 잿빛 피안에서 눈을 돌려, 우부르카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을 안다.”
“뭐?”
“그런 사람을 알아.”
탑주.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이라 느끼는 사람을, 아니, 그것을 넘어,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만들어버린 인물을 나는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니다.”
키에에에에에에에-
먼 바위산.
안개를 뚫고 높이 치솟은 바위산에 , 어느 하얀 짐승이 올라,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 짐승을 두려워하는, 작은 초록색 짐승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고르르…. 그것들은 바위 아래에 들러붙어 하얀 짐승이 있는 곳에 올라갈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사람과 다른 길을 걷기로 했으므로,”
나는 검을 모로 세웠다.
“물론 나를 탓해도 좋다. 너희가 저지르는 실수, 네가 남들한테 듣게 될 저주, 이게 다, 괜히 내가 너희를 종족으로 선택해서 세상에 내보낸 거 때문처럼 느껴질 수 있어. 괜히 태어나게 해서. 괜히 길러서. 그러니 나를 탓해도 상관없지만—.”
“…….”
“나보다 강해진 다음에 와라.”
나는 씨익 웃었다.
“나보다 더 너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와라!”
나는 성검을 휘둘렀다.
반짝이, 수호의 여신이 그 이름처럼 밝게 빛나면서, 잿빛으로 얼룩진 먹구름을 양단했다.
베어져서 생긴 빈 틈으로, 푸른 하늘이 엿보였다.
“나보다 더 너희를 사랑스럽게! 나보다 더 너희를 멋지게! 나보다 더 너희를 똑똑하게! 나보다 더 너희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오냐, 그런 놈이 와서 불평하면— 기꺼이 내 육아의 실패를 인정해주마!”
그 전까지는.
“내가 사상 최강의 애비다!”
나는 오른손을 꾹 쥐었다.
“에스델!”
“예, 가주님.”
어느새.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에스델은 내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우리 헌터들이 모여 있던 대기실과는 또 다른 곳에서 그동안 기다렸겠지. 언제 부르든 바로 나타날 수 있도록.
“주군의 자문사 에스델, 여기에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데 퍽 쪼잔해 보이지 않냐!”
“…….”
에스델이 힐끗 위를 올려보았다. 밀림의 우기를 방불케 하는 빗줄기가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델은 마치 동네 길거리에 내리는 가랑비를 쳐다보는 듯 무심했다.
“네. 잔스럽군요.”
“치워라!”
나는 웃으면서 오른손을 건넸다.
에스델 또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을 꾸욱 잡았다.
“예, 가주님. 지우겠습니다.”
맞잡은 손으로 오러가 공명했다. 단지, 붉은 오러와 검은 오러가 뒤섞여서 강해진 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심상을 품은 채 한 줄기, 한 방울, 오러를 순환시켰다. 어느 대륙에 내린 핏빛의 장대비. 그 비를 떠올리면서,
마천진법魔天陳法.
번외법番外法.
비천비우悲天悲雨.
비가 내린다.
“원시의 공포가 지독했더냐. 지정족들아.”
비가 내린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하늘이란 우중충할 뿐이어서, 그저 불길한 예감과 불온한 느낌만 너희 심장 속에서 요동쳐, 도저히 바깥으로 나오기 어려울 만큼 두러웠더냐.”
비가 내린다.
“그것들은 이제 우리가 두려워할 비가 못 된다!”
비가 내린다.
억울하게 불타죽은 마을사람의 원한, 제국에서 맞이한 무수한 죽음의 비명이, 새빨간 빗물에 담겨서, 아수라들이 펼쳐낸 [마천진법]으로 낙하한다.
뚜욱!
뭉실뭉실한 안개를 뚫고 핏물이 단번에 땅바닥까지 닿는다. 투욱! 안개가 미처 수복되기도 전에 또 다른 핏방울이 내려, 안개의 저변을 무자비하게 갉아버린다. 툭! 투두두두둑! 투두두! 툭! 두두두둑……!
“너희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공포는 더 지독하다!”
안개는 핏물의 융단폭격을 버티지 못했다. 안개가 터지고, 사그라들며, 깔아뭉개져, 빗방울들에게 갈갈이 찢어졌다.
마천진법이 파훼되어서 드러난 것은 밀림의 맨땅.
어떠한 신비도 마법도 조작하지 않은, 그저 거기 있을 뿐인 대지다.
-우리가 전력으로 펼쳐낸 진법을….
-말도 안 된다, 우거. 오러의 양으로는 압도하고 있는….
맨땅이 드러나면서 지정족들의 모습도 드러났다.
지정족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안개를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가리고, 보이지 않는 칼과 도끼를 써서 나를 공격해올 계획이었겠지. 작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해버린 것이다.
나는 가슴을 드러내고 말했다.
“우리가 사는 곳, 이 탑은…… 50층부터 온갖 세계에서 밀려들어온 고수들로 가득하다. 설마 너희, 모든 부모가 우리 같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
“우리는 너희와 대화해서 서로 이해했다.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너희가 나랑 싸우는 것도, 뭐 마음에 안 들어서 싸우는 게 아니라 단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지.”
에스델의 가을비는 어느덧 모든 안개를 녹여버렸다.
마지막 밀림에 모여든 종족들이,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50층에 모여든 이들은 다를 거다.”
나는 말했다.
“공녀라는 존재가 말했다. 탑의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30층부터는 대체로 비슷하다고.”
“…….”
“너희를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너희를 아이들로 보듬으려면, 무엇보다도 우리 헌터들이 먼저 이 모든 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NPC라거나. 던전이라거나. 그딴 식이 아니라, 너희 전원을 눈앞에 살아있는 생명으로 봐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마음을 준비한 탑이 과연 몇 채나 될까?
우리 탑조차, 흑룡주가 서열 2위를 지켰을 때조차, 회귀하기 전에는 탑을 일종의 [게임]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중 얼마나 많은 자들이 자신들이 키운 종족을 전멸시키고 40층을 클리어했을까?”
나는 이전의 탑에서 스러졌던 14인의 아수라들을 떠올렸고, 지금 내 앞에 모인 수십만의 아수라들을 또한 바라보았다.
“그런 탑이 한 채라면 그것만으로도 수천만이다. •열 채라면 수억. 백 채라면 수십억.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시체에, 그런 자들이 서 있겠지.”
어느덧.
내 곁에는 사왕가의 가신들이 모여 있었다.
김율은 내가 선물한 머리끈으로 장발을 묶은 채, 조용히 밀림을 내려보았다. 실비아 에바나일은 양손을 앞에 모은 뒤, 수백만의 인간들이 올려보는 시선에 아랑곳않고, 얌전히 시립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자들.”
우리 모두 에스델의 가을비에 젖어 있었다.
“비명도 못 지르고 숨이 끊어진 목숨들.”
-…….
지정족들의 어깨에서 김이 흐르기 시작했다. 살결이 심장의 온도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나의 아이들은, 마교를 배우고 혈화극으로 춤춘 나의 보물들은, 내가 뭘 말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놈들이 승자(勝者)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곳.”
과거의 염제.
“그런 놈들을 영웅이라고 떠받드는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곳.”
과거의 나.
“그런 곳이 바로 저기.”
나는 손을 들어 붉은 하늘을 가리켰다.
“50층 이후의 세계다.”
거기가 지옥이 아니라면 어디가 지옥이겠는가.
[퀘스트 진행.] [흡혈종의 투표가 시작합니다.]그때.
흑룡주가 아무런 기척을 남기지 않고 툭, 착지했다.
그녀는 바로 내 옆에 서서 무표정하게 핏물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사왕의 말이 맞아.”
“아나스타샤.”
“우리 인간들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애당초 사냥터에 출몰하는 늑대들도 몬스터라 불리고, 아이김 제국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독심술로 읽어보면 [NPC]라는 표시가 뜬다고 해. 뭐, 아이김 제국은 이미 멸망한 세계를 한 번 더 구현해서 되돌려 놓은 거라 그럴 지도 모르지만.”
흑룡주가 입술을 기울였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어도 사람을 죽이는 게 인간이야. 죽여도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야말로 자유학살권을 끊어준 거나 다름없지. 사왕이 말한 대로 50층 이후의 세계가 모든 탑들의 난투장이라면…… 학살자가 아닌 사람을 찾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울걸.”
흑룡주는 고개를 돌렸다.
우거진 야자수 나뭇가지에 박쥐들이 매달려 있었다.
“미안. 너희가 대륙을 제패하는 데 사사건건 방해했지. 어미인 주제에.”
-…….
“하지만 이 세상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어. 너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상상하는 것보다 많아. 너희가 이기지 못할 괴물도 물론.”
-…….
“너희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다른 종족들을 지켜봤을 거야. 지정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를 먼저 배신하지 않겠지. 새기족도. 귀인족도. 심지어, 이제는 산와족과 요정족도. 얘들아. 너희가 할 일은, 이 비좁은 대륙에서 패권을 쫓아 순둥이 종족들이랑 다투는 게 아니란다.”
흑룡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단결해서, 너희의 세계를 위협하게 될 적들을 치렴.”
퍼드득.
박쥐들이 날개를 펄럭였다.
[개표 완료.] [2번 득표율: 02.45퍼센트] [1번 득표율: 97.55퍼센트]“우리는 혈맹이란다.”
[스테이지 클리어.] [43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43층.
이미 회귀하기 전의 세계에서 도달했던 최고 층수— 40층은, 훨씬 뛰어넘었다.
염제조차 한 번 실패하고 흑룡마저 좌절한 스테이지들을.
우리는 차례차례 입성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전부가 아니었다.
[퀘스트 진행.] [몽마족의 투표가 시작합니다.]‘어?’
내가 눈을 깜빡이고 흑룡주를 쳐다봤다.
몽마족은 원래 우리가 보살피는 종족에 포함이 안 되었을 텐데.
그러자 나와 눈을 마주친 흑룡주가 작게 웃었다.
“김공자. 너 가끔 날 물로 보는구나.”
“네?”
“너 말고도 스테이지 깨려고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은 다 있어. 저번에 몽마족들 끌어들이느라 포인트 다 소진해서, 어쩔 수 없이 탈락 해버렸다고 말했잖니.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도대체 뭘 위해 탈락까지 감수했을까 생각해봤어?”
[개표 완료.] [2번 득표율: 00.00퍼센트] [1번 득표율: 100.00퍼센트]“…….”
과연 여기엔 나도 입을 살짝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의 반대도 없다니….”
“뭐어. 이런저런 계약을 성공리에 체결했다, 정도만 말해둘게.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계약상 비밀은 존중해줘야지. 안 그래?”
흑룡주는 가볍게 윙크했다.
[스테이지 클리어.] [44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하하.
정말.
“…….”
나는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우부르카.”
내 아들을 보았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너희를 선택한 것을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아.”
“…….”
“다시 돌아가도 너희를 고를 거다. 다시 태어나도 너희를 기를 거다. 내가 너희에게 최고의 아비라면, 너희는, 내게 최고의 아이들이 거든.”
“알고 있다.”
우고르, 하고 우부르카는 턱을 주억거렸다.
“알고 있다. 아비여, 다만…….”
“이 아비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 좀 무거워 보여서, 더 줄여주기 위해서, 나보다 강해져서, 나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결투를 건 것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어.”
나는 환히 웃었다.
“너희에게 내가 하나의 세계처럼 소중한 것처럼, 너도 내게 하나의 세계처럼 귀하단다. 너희는 내가 바라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내가 느끼는 대로 너희도 느껴. 하지만, 우부르카. 나 역시 너희가 바라보는 방식대로 세상을 볼 것이고, 너희가 느끼는 대로 나 또한 느낄 거야.”
“…….”
“우리는 같은 세계의 사람이다.”
우부르카의 손등을 잡았다.
“같은 인간이다.”
우부르카 너머로 도열한, 수많은 지정족들을 보았다.
“내 친우들아.”
“우리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한 자들이, 50층 너머에는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이들이, 이 모든 걸 한낱 게임으로 여기면서 패왕이 되고 군주가 되어 도락을 일삼고 있을 것이다.”
[퀘스트 진행.] [지정족의 투표가 시작합니다.]“가자.”
[개표 완료.]“마천의 이름으로. 혈화의 발과 입으로.”
[2번 득표율: 00.00퍼센트]“그들에게 우리를 보여주자.”
우부르카는 침묵했다.
그러나 불온한 침묵이 아니라, 내 말을 받아들이기 위한 침묵이었다. 우부르카의 송곳니는 언제나 날카로웠으므로 나의 말을 씹어서 소화하는 데 얼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죽어 마땅한 자를 죽일 건가, 애비여?”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마땅히 살릴 것이다.”
“그 사람이 살아야만 하는지, 어찌 살아야 좋은지, 어떻게 알아보겠는가?”
“나의 죽음으로.”
나는 품속에서 단도를 내보였다.
그리고 테이프가 감긴 단도의 손잡이를 툭, 두들겼다.
“그 사람의 삶로.”
“…….”
그런가, 라고.
우부르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단도를 두들긴 나의 손을 꽈악 쥐었다.
말없이.
“괜찮단다.”
나는 우부르카의 붉은 팔을 쓰다듬었다.
[1번 득표율: 100.00퍼센트]“우리는 어느 탑보다 강하고.”
[스테이지 클리어.]“어느 탑보다 유능하여서.”
[45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무수한 세계를,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내려보았다.
이제부터 모든 이들에게 아수라(阿修羅)라고 불리게 될, 가장 낮은 위치에 거하여 장차 하늘에 설, 천마(天魔)가 될 나의 아이들을.
그 아이들에게 손을 뻗었다.
“나와 같이 탑에 오르자.”
27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