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7)
가을비는 핏물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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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적이 흘렀다.
배후령과 나 사이에만 감도는 침묵이었다. 마왕의 보상. 99층. 나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마왕의 보상을 읽었다. 99층으로 단번에 전송시켜주겠다는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함정이다.
배후령이 내 생각을 자르려는 듯 말했다.
-무조건 함정이다. 좀비야. 절대 속지 마라.
‘알고··· 있어요. 당연히 함정이죠. 당연히···.’
나는 마음속으로 웅얼거렸다.
마왕의 보상이 함정이라는 사실은 뻔했다.
왜냐하면.
‘염병이 이런 선택지를 보고 마왕의 보상을 고르지 않았을 리 없죠.’
바로 희대의 싸이코패스, 염제 유수하라는 선례가 있기 때문에.
‘염병은 무조건 마왕의 보상을 선택했을 거예요. 다른 헌터들을 죽이는 게 뭐 어떻냐고 반응할 놈이니까요. 그런데도··· 그놈은 99층이 아니라 40층 언저리에서 놀고 있었죠. 그렇다는 얘기는···.’
나는 애써 침착하게 생각을 곱씹었다.
‘마왕의 보상은 함정입니다. 아마 염병은 처음엔 마왕의 보상을 선택했다가, 이게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회귀했을 거예요. 정확히 무슨 함정인지는 몰라도···.’
하지만.
‘···솔직히 탐나네요.’
심장이 쿵쾅거렸다.
‘99층 보스 몬스터의 스킬을 얻을 기회잖아요. 이거.’
설령 마왕의 보상이 함정에 불과하다 해도 염제와 나는 결정적으로 달랐다. 유수하와 다르게, 나는 굳이 보스 몬스터를 이길 필요가 없었다.
그냥 보스한테 가서 맞아 죽기만 해도 이득.
‘99층 보스라면 100층 보스를 제외하고 제일 강력할 텐데···.’
욕심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지.
‘99층이라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99층까지 오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1년? 5년? 10년?
어쩌면 그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몰랐다. 싸이코패스처럼 닥치고 죽여댄 염제조차 10년이 걸려서 도달한 층이 겨우 40층이었는데. 그걸.
그걸 한 번에.
-공자야.
배후령이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지 마라.
평소에는 절대로 듣지 못할 목소리였다.
배후령은 진지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봐라. 나는 검제다. 홀로 99층까지 올라갔다가 실패해본 놈이다. 그런 내가 말하는데 이건 함정이다. 역겨울 정도로 지독한 함정이지.
“······.”
-지금 네 실력으로 상위 랭커를 10위까지 다 죽이는 건 어렵다. 설사 다 죽인다 해도 문제야. 너는 절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99층의 벽을 돌파할 수 없다. 깔끔히 포기해.
나는 침묵했다.
이 탑에서 유일하게 99층까지 돌파해본 사람이라서 그럴까. 배후령의 말에는 강철과 같은 설득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99층 보스 몬스터가 그렇게 강해요?’
배후령이 인상을 찡그렸다.
-없어.
‘네?’
-99층에는 보스 몬스터 따윈 없다고. 대신 훨씬 더 악독한 게···. 쓰읍. 우라질. 갑자기 옛날 생각 떠오르네. 어쨌든 이건 함정이야!
배후령이 등을 돌려서 앉았다. 꼭 사탕을 먹지 못해서 삐진 꼬맹이같이 말이다.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아니, 도대체 99층에 뭐가 기다리길래 그래요? 사람 쫄리게. 댁이 이러는 모습 처음 보거든요? 뭐 몬스터가 아니라 마신(魔神) 같은 거라도 기다린답니까?’
-흥. 안 알려줘!
잘못 말했다.
꼬맹이 같은 게 아니라 진짜 꼬맹이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김좀비 넌 잘하고 있어.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쭉 해라. 그럼 99층은 저절로 클리어할 수 있을 거다.
“으음.”
나는 고민에 잠겼다. 허리춤에 찬 단검의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4000번이 넘게 자결할 때마다 신세를 진 단검. 유수하를 죽일 때 휘두른 단검이었다. 싸구려 단검에 불과했으나 이걸 매만지면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좋아요.’
나는 결심했다.
‘이번 회차는, 버립니다.’
배후령이 귀를 쫑긋거렸다.
-버려?
‘예. 제일 안전한 루트만 골라서 가려고요. 이득이고 보상이고 다 생깝니다. 일단 상황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만 파악하는 거죠.’
-이득이고 보상이고 다 생까다니···. 뭐야. 설마 [여신의 보상]도 안 받으려고? 왜? 그럴 필요까진 없잖냐.
‘괜찮아요.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니까요.’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
나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알현실에 있는 헌터들이 내 쪽을 돌아봤다.
“지금 저한테는 11층 스테이지 보상이 떠 있습니다.”
“그래? 잘됐네.”
마녀가 먼저 반응했다. 아직 [여신의 보상]과 [마왕의 보상]을 보지 못한 탓일까. 마녀는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했다.
“언제까지 퀘스트를 기다려야 하나 따분해하던 참이거든. 당신이 먼저 보상을 선택하면 우리도 순위대로 선택하게 될 거야. 느긋하게 선택하렴.”
“예. 이미 제 마음은 정해졌어요.”
최상위 랭커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는 선언하였다.
“저는 아무런 보상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알현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새 트럼프 카드를 꺼내서 놀고 있던 이단심문관과 독사도 내 쪽을 쳐다봤다. 3초. 2초. 1초. 잠깐 정적이 흐른 다음에 마침내 마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이미 때는 늦었다.
[스테이지 보상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특별 클래스를 선택할 수 없게 됩니다.] [보상을 포기할 경우, 13층 이후의 역할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괜찮습니까?]나는 확고한 의지로 대답했다.
“예. 저 헌터 김공자는 어떠한 보상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파앗!
눈앞에 떠 있던 선택창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서 신성한 목소리와 음울한 목소리가 차례차례 울렸다.
헌터들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이었다.
“김공자?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흐음.”
그 때 검성이 미간을 좁혔다. 노련한 눈매가 허공을 훑었다. 11층 스테이지를 공략한 순위로 따지자면 각각 내가 1위, 검성이 2위였다. 이제 나 다음으로 검성이 [여신의 보상]과 [마왕의 보상]을 읽은 것이다.
“···과연. 이해했다네. 가장 안전한 선택지를 고른 것이구먼.”
검성이 나를 쳐다봤다.
“그렇지만 구태여 보상을 포기할 필요까지 있겠는가? 젊은이. 내 노파심에 불과하겠네만, 너무 안전을 추구하다가 자칫 주저앉게 되는 거 아닌지 걱정되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으으음. 후회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노인은 침음을 흘렸다. 우리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다른 헌터들은 어리둥절하게 지켜봤다.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낯빛이었다.
“···아니.”
검성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예 보상을 포기한다는 건 너무 얌전한 처세술일세. 미안하네, 젊은이. 본인은 여신의 보상을 선택하겠네. 그리고 [아이김 제국의 기사단장]을 고르도록 하지.”
끼이이익!
검성이 결정을 내린 순간이었다. 알현실의 대문이 열렸다. 한 무리의 기사들이 척척 걸어서 들어왔다. 화려한 은빛 갑옷. 기사단은 노인의 앞에 당도하여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가장 드높은 검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호오.”
검성이 흥미롭다는 듯 기사들을 내려봤다.
“이런 식으로 역할이 정해지는 거로군.”
“음? 아하? 과연?”
검성 다음엔 이단심문관이었다. 스테이지 공략 순위로는 3위. 이단심문관은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아아!” 하고 탄식했다. 비로소 작금의 사태를 다 파악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군요. 저도 이해했습니다! 아핫. 마피아 게임과 비슷하네요.”
물론 나와 검성, 이단심문관을 제외하고 다른 헌터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마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당신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단심문관이 양손을 펼쳤다. 사각. 사각.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글자들이 파이기 시작했다. 이단심문관이 손끝에 오러를 실어서 대리석에 문자를 새긴 것이다.
“다들 구경하시지요!”
헌터들이 몰려와서 바닥을 내려봤다.
+
[수호의 여신]
설명: 아이김 제국을 수호하는 여신이 당신의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여신은 당신에게 제국의 중요 직책을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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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들이 웅성거렸다.
“뭐?”
“99층? 실화냐···?”
여신의 보상을 읽을 때까진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마왕의 보상에 이르자 길드장들은 안색이 바뀌었다. 눈에 띄게 동요한 것이다.
특히 마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건···.”
“옙! 마피아 게임과 유사합니다! 편의상 여신의 보상을 선택한 사람들을 [용사]라 부르고, 마왕의 보상을 선택해버린 사람을 [배신자]라 부르도록 할까요.”
이단심문관이 방긋 웃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마피아보다 [배신자]가 훨씬 더 불리합니다! [용사]는 9명이나 되는 반면에 [배신자]는 고작해야 1명. 게다가 저희한테는 자경단 부단장이 있으니까요!”
이단심문관이 성기사를 가리켰다.
성기사는 무덤덤한 얼굴로 대리석 바닥을 내려보고 있었다.
“떠올려보십시오! 부단장은 [거짓말 탐지기] 스킬을 가졌습니다. 아하핫. 마피아 게임으로 치면 일종의 경찰과 같은 역할이지요. 설령 이 중에서 누군가가 마왕의 보상을 선택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누가 [배신자]인지 부단장이 금방 폭로할 수 있습니다!”
“음···. 맞는 말이다.”
성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네들이 내 말을 믿어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건 [용사]들에게 한없이 유리한 게임입니다! 김공자 헌터. 당신이 보상을 포기한 것은 좀 지나친 과잉 대처로군요!”
이단심문관은 모자를 고쳐 썼다.
“모처럼 11층을 1위로 돌파했는데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는다니. 음! 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판단입니다. 당신의 결단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저는 [아이김 제국의 대장군]을 선택하지요!”
끼이익.
알현실의 대문이 재차 열렸다. 장군 NPC들이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입장했다. 장군들은 이단심문관 앞에 멈추어 서서 힘차게 경례했다.
“제국의 가장 드높은 깃발에 충성을!”
“아아, 훌륭하군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장군 NPC들은 이단심문관 뒤에 도열했다.
이것이 결정타였다.
“쯧. 머리 쓰는 이야기는 딱 질색이야. 아무튼 보상을 고르는 편이 이득이라 이거지? 그럼 난 [친위대장]을 고르겠어.”
독사도.
“그럼 나는 [외무장관]을 선택하겠다. 제일 무난해 보이는군.”
성기사도.
“···[재상]은 내가 맡을게. 제발 부탁이니까, 절대 마왕의 보상을 선택하지 마. 아무도 고르지 않으면 이 보상은 저절로 소멸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이야. 다들 명심해줘.”
마녀도.
“걱정하지 마시게. 흐음. 뭐, 본인은 당연히 [재무장관]이구마.”
백작도.
나머지 헌터 전원이 보상을 택한 것이다.
어느덧 알현실은 NPC로 가득 찼다. 웅성웅성. 기사단장을 고른 검성 뒤로는 기사단이 늘어섰고, 재상을 고른 마녀 뒤에는 문관들이 줄지어 섰다.
-와아.
넓은 알현실에서 오직 한 곳.
내 뒤쪽만 아무도 없어서 휑했다.
-진짜 너 혼자만 보상을 안 받았네. 괜찮겠냐, 좀비야? 아무리 이번 회차를 버리네 마네 해도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아니요.’
확신이 있었다.
어쩌면 사냥꾼으로서 가진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게 정답이에요.’
언제 사냥감한테 달려들어 물어뜯어야 하는가.
언제 먹잇감을 포기하고 순순히 물러서야 하는가.
나는-.
지금이야말로 물러서야 할 때라고 직감했다.
[상위 공략자 모두 선택을 완료했습니다.] [김공자, 검성, 이단심문관, 독사, 성기사, 마녀, 백작···.]알현실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헌터들은 자신이 호명될 때마다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사람들이 내 쪽을 돌아봤다. 이 중에서 보상을 포기했다고 밝힌 사람은 나뿐. 목소리는 내가 아무런 혜택을 누리지 않았음을 증언해준 거나 다름없었다.
헌터들은 잠시간 ‘정말로 보상을 안 받다니’ 하는 표정을 지었으며.
곧, 얼굴이 굳어졌다.
[마왕의 보상을 받은 자, 1명.]헌터들이 서로 쳐다보았다.
[총 10명.] [상위 공략자 모두 선택을 완료했습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침묵이 흘렀다.
[보상 포기자, 1명.] [여신의 보상을 받은 자, 8명.] [마왕의 보상을 받은 자, 1명.] [상위 공략자 모두 선택을 완료했습니다.]긴 침묵이었다.
[그대들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2.
빠드득.
제일 처음으로 적막을 깨트린 것은 누군가가 이빨을 씹은 소리였다.
“어리석긴···!”
흑룡의 길드장. 랭킹 2위의 헌터. 마녀였다.
“내가 말했잖아! 절대로 마왕의 보상을 고르지 마라고. 그런데도··· 멍청하게!”
마녀한테서는 살기가 흘렀다. 얼굴도 평소처럼 무표정하지 않았다. 증오. 경멸. 분노. 인상이 찡그려지다 못해 일그러진 얼굴로, 마녀는 좌중을 노려보았다.
“하긴. 어리석은 자에게는 말이 안 통하지. 좋아! 이 자리에서 흑룡의 주인으로서 선언할게. 감히, 누가, 우리를 배신했는지 아직 모르지만, 그 작자한테는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물해주겠어.”
“으음. 놀랍군요.”
이단심문관이 턱을 쓰다듬었다.
“배신자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게임입니다. 그런데도 마왕의 보상을 선택했다···. 흑룡주의 말대로 지극히 어리석은 선택이군요! 아핫. 물론, 어리석다는 점에서 한없이 인간적이기도 합니다!”
“아···. 씨벌.”
독사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아아, 알겠다. 알겠다고. 이 분위기. 이 공기. 탑 초반부를 공략했을 때 그 느낌이야···. 등이랑 목이 존나게 쎄해. 이거 오늘 안에 몇 명 죽겠다.”
“그러게 말일세. 5대 길드가 10대 길드였던 시절이랑 비슷한 느낌인걸.”
백작이 부채를 지폈다. 나긋나긋한 말투. 그러나 부채 너머로 쏘아보는 눈초리는 들짐승처럼 차가웠다.
“그 시절엔 참 많이도 죽었지. 많이도 죽였고. 안 그래?”
“입 닥쳐! 전부 조용히 해. 옛날이야기 따위에 젖어들 때가 아니야.”
마녀는 표정이 비틀어져 있었다.
“성기사!”
“음.”
“당장 [거짓말 탐지기]로 전원을 심문해줘. 한 명도 빠짐 없이! 만일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성기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거나 회피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사람을 죽여버리겠어!”
그것이 빈 말이 아님을 누구나 알았다. 마녀는 살기를 흘렸으며, 살기는 오러를 타고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랐다. 새까만 색채. 묵색의 오러. 이 세상의 모든 빛을 저주하는 색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성기사가 조용히 턱을 끄덕였다.
“우선, 나는 배신자가 아니라는 걸 밝히고 시작하지.”
그리고 성기사는 발걸음을 돌렸다.
제일 먼저 그녀가 다가선 인물은··· 다름 아니라 나였다.
성기사가 내 앞에 우뚝 섰다.
“헌터 김공자.”
“예.”
“자네는 보상을 포기했으니 용의 선상에 없다. 검사할 필요조차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물어보마. 혹시, 마왕의 보상을 선택했는가?”
“아니요.”
알현실이 적막했다.
모든 헌터가 우리를 지켜보았다.
몇 초의 침묵이 흐르고, 성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이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성기사는 쉬지 않고 다음 상대를 향하여 걸어갔다.
뚜벅.
알현실 바닥엔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성기사가 바닥을 밟을 때마다 유독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우리는 눈길로 그녀의 발걸음을 좇았다.
“검성이여.”
“말하게나.”
“그대가 마왕의 보상을 택하였는가.”
검성이 팔짱을 끼었다.
“내 모든 명예를 걸고. 절대로 아닐세.”
“진실이다.”
뚜벅.
“이단심문관.”
“예! 뭐든 물어보십시오!”
“마왕의 보상을 선택한 사람이 자네인가.”
“죄송합니다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이단심문관의 웃음이 흘렀다. 웃음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튕겼고, 기사들과 장군들이 차려입은 갑옷에 미끄러졌다.
“저는 아닙니다! 아직 흑룡주한테 죽고 싶지는 않군요!”
“진실이다.”
뚜벅.
“독사. 네가 마왕의 보상을 택했는가.”
“씨발. 난 아니야!”
“···진실이다.”
뚜벅.
“백작이여. 그대가 마왕의 보상을 선택했는가?”
“···나도 아니구먼.”
“진실이다.”
뚜벅.
공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내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한 명. 다시 한 명. 또다시 한 명의 진실이 선언될수록, 알현실에는 한숨이 아니라 침묵이 넘쳐흘렀다.
조금씩 더 올라오는 수면처럼.
어느새 침묵은 우리의 턱밑까지 차올랐다.
“······.”
“······.”
성기사가 마녀와 마주 보았다.
이미 마녀를 제외한 헌터들은 질문을 받았다. 이것이 마지막 심문. 탑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길드를 거느렸으며, 검성 다음으로 손꼽히는 헌터를 향해서, 성기사는 깊이 심호흡을 삼켰다.
그녀가 말했다.
“흑룡주여.”
“···그래.”
“당신이 마왕의 보상을 선택했는가.”
정적이 있었다.
“아니야···. 내가 아니야.”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성기사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진실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완전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아니.
우리가 침묵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잠깐만··· 그럼, 뭐야?”
독사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누구라는 소리야?”
검성이 마녀를 바라보았다. 마녀가 이단심문관을 바라보았다. 이단심문관이 백작을 바라보았고, 백작이 독사를 바라보았다. 독사는 성기사에게 매달리듯 눈길을 던졌고, 성기사는 침묵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모두를 바라보았다.
“왜 다 아니라는 건데···?”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씨발! 누가 배신한 거냐고!”
아무도.
2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