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70)
1.
후일담이 있다.
수천 년 만에 자신들의 신을 영접하게 된(말 그대로 눈앞에서 영접하였다) 종족들은 축제를 벌였다.
깔끔한 미팅이었다고 해야 할까?
생각보다 자기네 부모들이 괜찮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 종족들은 기뻐한 것이다.
“……아.”
우리가 같이 너른 바위에 앉아 밀림의 축제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아, 하고 흑룡주가 말했다. 뭔가를 깨달은 눈치였다.
“왜요?”
“아니….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의 얘기를 듣다 보면, 우리 말고도 탑에 오르는 헌터들이 다른 세계에 잔뜩 있다잖니. 상상하긴 어렵지만.”
“뭐, 예. 그렇죠……?”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며 하품하는 유령이 한 분 계셨다. 유령 주제에 속이 안 좋은 건지 “꺼르륵! 크흡흡” 하고 트림까지 해댔다. 참. 이게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여주면 재밌겠다 싶을 정도로 가관인데.
“응? 갑자기 왜 뒤는 돌아봐? 누구 있어?”
흑룡주가 미간을 좁히며 내가 본 허공을 따라 보았다. 물론 아나스타샤의 눈에는 텅 빈 밀림, 야자수에 뒤얽힌 넝쿨이 주르륵 내려온 밀림의 풍경만 보였을 거다.
흑룡주에겐 영감(靈感)이 없으니까. 안타깝구만.
“아뇨. 그냥 기척이 느껴져서요. 뭐 달팽이나 다람쥐 같은 거겠죠.”
“흐응.”
“계속 말씀하십쇼.”
“뭐, 그래…. 아무튼. 그렇게 온갖 세계의 강자(强者)들이 탑으로 밀려 들어오는 거잖아?”
“네.”
“그중엔 분명히 우리보다 훨씬 강한 헌터도 있을 거야. 사왕. 네 말대로 우리는 강하지만……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니까. 우리보다 지독하고, 우리보다 강하고, 우리보다 수가 많은 세력이 있을지도 몰라.”
“예.”
“그래서 말인데.”
흑룡주가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약간 어색하다? 어이없다? 엉뚱하다? 아무튼, 그런 느낌의 웃음이었다.
“그냥, 50층 안 올라가고 살면 안 될까?”
“…….”
“아. 오해하지 말렴. 내가 그러자는 얘기가 아니야. 우리가 그러겠다는 말도 아니고. 단순히, 우리 이외에 수많은 헌터들과 탑의 주민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는 거란다.”
음.
나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그러게요.”
도시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 게다가 기룡과 전쟁하기 위해 모든 종족이 집결한 참이었다. 제대로 된 찻잎은커녕, 차를 담을 잔도 구하기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지정족들은 유난히 억센 이파리들을 찾아 모았다. 그중 독성이 없는 잎을 가려내어, 서로 겹치고 매듭을 지어, 그럴싸한 메이드 바이 밀림의 잎찻잔이 완성되었다. 지정족 아이들은 수줍은 듯 히히 웃으면서 내게 찻잔을 선물했다.
-밀림은 새벽이 차다! 몸이 차가워진다.
-우고르, 속이 따뜻해져야 하루가 행복하다!
그것이 오늘 새벽에 내가 받은 공양(供養).
신으로서 이보다 더 행복한 공양을 받아본 자, 나 이외엔 없을 것이고, 부모로서 이보다 더 귀여운 봉양을 받아본 이, 역시 나 말고는 별로 없을 것이다.
행복하구나.
“그런 사람들이 많을 법해요.”
나는 세상에서 제일 사치스러운 찻잔으로 한 모금 열기를 입안에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목구멍을 넘어 뱃속까지 서서히 감쌌다.
사람의 배려란 건, 겉으로 보이는 미소나 웃음뿐만 아니라 상대의 깊은 내장까지 스밀 수 있었다.
“맞아요. 이미 저희는 아이김 제국이 호령하는 대륙을 탑에 거두고 있어요. 그곳에서 얻어낼 수 있는 마법서적은 제일 하찮은 자원에 불과하겠죠. 수백만에 달하는 인력, 무궁무진한 몬스터와 사냥감, 광석, 금, 석유…….”
“안 그래도 아이김 제국을 쫓아내자는 과격분자들이 많아.”
흑룡주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미국이 원주민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차지한 땅을 전부 빼앗아, 자원을 약탈하면, 압도적인 선진문물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새로운 세계의 패자가 되는 것 아니겠냐고.”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흑룡에서 스테이지 간 이동을 엄격히 제한시키지 않았으면 진즉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도 남았을 겁니다.”
“기꺼이 고마움을 받을게. 하지만, 나라고 영원히 과격분자들의 목소리를 억누를 수는 없어.”
“…….”
“김공자. 당신은 영웅이야.”
흑룡주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친구가 절친한 친우에게, 정말 절실한 조언을 건넬 때의 표정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영웅이야]라는 말도 칭찬이 아니라, 어떤 경고의 서두라는 사실을 느꼈다.
“지금까지 당신이 영웅으로 대접받은 이유는, 정말로 통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흑룡, 만신전, 상련, 천무문, 자경단 ……. 탑티어 길드들에서 당신한테 부길드장 자리를 주긴 했지. 하지만 당신은 단 한 번도 부길드장의 직함을 걸고 권력을 부리지 않았어. 정치판에 뛰어들지도 않았고. 내 말이 뭔지 알겠니?”
“제가 탑을 통치하기 시작하면, 영웅의 가면도 벗겨지겠군요.”
“정확히 말하면 가면이 두 쪽이 나버리겠지. 남은 반쪽의 가면을 쥐고 당신을 열렬히 추종하는 세력과 남은 반쪽의 가면을 짓밟고 으스러뜨려서, 당신에게 죽창을 드는 세력. 두 파로 갈릴 거야.”
과연.
바깥 세상에서 내전을 경험해본 덕분인가.
흑룡주의 말투에는 무거운 확신과 강한 직감이 서려 있었다.
“만일 두 세력이 비등비등하다면 내전(內戰)이 발발해버려. 당신을 따르는 길드들과 당신이 마음에 안 드는 길드들. 그렇게 나뉘어서, 누가 우리 탑의 패권을 쥘 거냐며 싸우겠지만…….”
“이번엔 아니겠네요.”
“응. 이번에 내전은 벌어지지 않아.”
이유는 간단하다.
“탑을 정상에서 다스리는 다섯 길드. 흑룡, 만신전, 상련, 자경단, 천무문, 모두가 당신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전례 없는 신뢰관계로 다져져 있다.
반면 반대편은 어떤가?
내 가면을 빼앗아서 부서트리고 싶은 과격분자들은 단순히, 그저 세력이 약하다.
지나치게 약하다.
전쟁이 안 된다.
따라서.
“[숙청]을 할 생각이야.”
“숙청이라면…….”
“응. 불순분자, 과격분자들을 모조리 배제하겠어.”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2.
어디선가 모닥불 속 장작이 숯으로 변해 허물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대신 난 라비엘의 세계에서, 이단심문관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수도 없이 반복되던 [죽었습니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나스타샤.”
나는 흑룡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숙청 때문에 한 번, 길드장들 사이가 모조리 깨졌었잖아요.”
오래 전.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던 대숙청 이래, 5대 길드의 관계는 파탄으로 접어들었다.
검성은 자경단장으로부터 내려왔다. 성기사는 자경단장 자리에 오르는 대신 부단장 자리에 머물렀다. 흑룡주는 어둠 속에 숨었으며, 독사는, 이단심문관은….
반신안으로 보았던 비 오는 거리의 풍경. 탑주가 보여주었던 또 다른 세계를 떠올리면서 내가 꺼낸 그 말에, 그러나 흑룡주는 침묵하지 않았다.
곧바로 받아쳤다.
“응. 그랬지. 하지만 김공자, 당신이 나타났고, 덕분에 우리들은 다시금 좋은 사이가 되었어. 거기에는 정말이지 고마운 마음 뿐이야.”
흑룡주는 한 호흡 쉬고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5대 길드가 정국을 꽉 쥐고 있던 게 아니었어. 그래서 썩은 사과를 추려내고 없애는 게 힘들었고. 바로 그것 때문에 불필요한 잡음이 그토록 많았던 거야. 그러나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지금은 상황이 달라. 5대 길드들 사이는 어느 때보다 양호하고, 나는 긴 시간 탑 내 유력한 헌터들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왔어. 대충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도. 무슨 일을 해왔는지도. 개중 과격분자만 골라내어 처리하면 돼. 신속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흑룡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도,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거야.”
그 말에 나는 어떤 골목을 떠올렸다.
거기서 죽은 어떤 이름 없는 헌터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어떤 사냥터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죽어 지금 내 그림자 속에 있는 어떤 이름 없는 헌터를 떠올렸다.
“…….”
나는 팔짱을 끼었다.
생각하고서, 말했다.
“그 다음에는요?”
“…….”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고 있어요. 아나스타샤가 말한 [과격분자]도 시간이 흐를 수록 늘어나겠죠. 그들은 어떻게 할 건가요?”
흑룡주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 다음에 말했다.
“역시 처리할 거야.”
“…….”
“피부가 헐어 때로 변한다. 양분을 짜낸 음식물이 똥으로 변한다. 축적된 영양이 지방으로 변한다. 그렇게 생겨날 수밖에 없는 노폐물들을 처리한다…. 이상적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 해야만 하는 일들이지. 그걸 계속해서 반복 수행하는 거야. 그러지 않고서는 이상적인 조직을 유지할 수가 없으니까—”
“아나스타샤.”
나는 손을 뻗어 아나스타샤의 손등에 올렸다. 밀림의 열기가 후덥지근한데도, 내 친구의 손은 언제나 얼음을 머금은 듯 차가웠다.
“이전에 이야기했던 적이 있지요.”
과거.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의 세계를 공략했을 때의 일이다.“제게 데려오세요.”
나는 흑룡주에게, 이단심문관에게, 백작에게, 성기사에게, 독사에게, 그들의 왕이 되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들을 이끌어 나가겠노라고 천명했다. 나는 내 선언을 실수였다며 뒤로 물릴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하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과연 숙청을 당해야만 하는 사람인가. 아나스타샤는 그에 대해 조언해주고 경고해줄 수 있지만, 마지막에 가서 판단할 사람은 저예요. 제가, 그 사람의 눈을 직접 보고, 그 삶을 보고 판단할 겁니다.”
“…….”
“제가 결정합니다. 그러니 먼저 제게 데려오세요.”
“아아.”
흑룡주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함이 아니라 슬픔이 묻어나오는 숨결이었다.
“그래서? 설득이라도 할 생각이니?”
“죽인다는 선택지는 가장 마지막에 고를 겁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살인에 맛 들이면 설득이 귀찮게 느껴지죠. 하지만, 아나스타샤. 그게 올바른 감각입니다. 살인을 가장 어렵게 느끼셔야 해요.”
흑룡주는 입을 닫았다.
잠시 침묵하고, 천천히 말을 게웠다.
“당신은…… 명목상이나마 흑룡의 [부길드장]이니까. 우리 길드 내부를 돌아다녀도 뭐라 책잡긴 어렵지. 안내는 안 해줄 테니까, 네가 알아서 과격분자들 알아낸 다음 설득해보렴.”
“예.”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아나스타샤. 제 얘기를 들어줘서…….”
“실로 고마운 얘기를 해주는군. 흑룡주여.”
터벅.
우리의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가와 불현듯, 10미터 안에서 울린 발소리였다.
“——!”
내가 칼자루를 잡아서 뽑아내기까지 0.5초.
“흑룡주! 저 동의합니다!”
“[순간 전이]!”
아나스타샤가 내 옷소매를 잡고, 동의를 구해내어, 스킬을 발동시키기까지 1.5초.
“가주님. 뒤로 물러나시길.”
“이야아. 우리 집주인 양반한테 기척도 안 내고 찾아오다니, 이게 웬 예의를 개밥 처말아드신 불청객인지 모르겠구만?”
에스델을 비롯하여 사마군이 야자수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어두운 수풀에서 뛰어나오고, 바위의 그늘진 구석에서 헤어나오기까지, 2초.
“후우.”
“음.”
그리고 흑룡주와 우리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진 후방으로 전이가 완료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내 성검은 뽑혀 나와 있었다. 호위를 맡은 교인들 수백 명은 이 일대를 완벽하게 포위하기 시작했다.
3초.
불과 3초 만에,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은 불청객의 침입에 완벽하게 대처한 것이다.
“허어…….”
불청객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얼굴에 가면을 썼다. 목소리는 오러로 변조되어, 누구의 표정이고 누구의 소리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몸에는 도롱이 옷을 둘러쳐서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불청객.
다만 불청객이 사뭇 놀랐다는 것만은 분위기로 전해졌다.
“그동안 얼마나 실력이 늘었나 장난삼아 시험해보려 했다만. 이건…. 장난이 실패한 거야 본인의 부끄러움으로 갚으면 그만이긴 해도, 굉장한 걸 봐버렸군. 가히 완벽에 가까운 호위다.”
하지만 변조된 음색으로도 가리기 힘든 리듬이 있었다.
나는 저 불청객의 체형과 자세, 오러의 세기를 눈으로 어림잡았다.
그리고 얼빠진 목소리로 불청객의 이름을 불렀다.
“어. 혹시 검성님입니까…?”
“오랜만이군.”
불청객이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우리 눈에 익은 얼굴.
잘 늙어서 주름마저 멋진 노인의 미소가 보였다.
“오면서 이단심문관을 만났다. 조금 환담을 나누었지. 그런데 이단심문관은 자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흑룡주는 당신과 친구가 되었다지 않는가? 거기까지는 그래, 본인도 인생을 제법 살았으니. 이따금 우리에게 신기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검성이 작게 웃었다.
검성이 웃는 모습은 드물뿐더러, 웃을 때는 꼭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웃어서, 나는 그 미소를 멍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경단 부단장이 자네 친구가 되었다는 얘기까지 나돌더라 이 말일세! 허허.”
“…….”
“차마 부단장한테 직접 물어보기엔 면목이 없어 상련주한테 가서 물었다. 진실이냐고. 상련주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맞다고 확인해주더군. 놀라웠다. 과연 인생은 길게 살고 볼 일이다.”
나는 긴장을 풀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참. 그게 확인까지 해야 할 일이었습니까, 어르신? 저희 모르게 신원까지 가리고 돌아다니면서요?”
“물론.”
검성은 이제 자신의 몸을 가린 도롱이를 벗었다.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대사건이었다.”
풀썩.
지푸라기옷이 떨어지자 검성의 진정한 옷차림이 드러났다.
당장이라도 회사에 출근할 것 같은 정장. 완벽하게 각을 맞춘, 검은색 정장 차림이 검성의 허벅지와 팔뚝을 멋지게 감추고 있었다.
“본인이 [은퇴]를 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니 말이다.”
검은색 외투의 정중한 멋도 검성의 경지를 위장할 순 없었다. 정장은 근육의 살결에 따라 부드러운 윤곽을 이루었다. 오직 붉은색 넥타이. 직장인의 필수품만이 자유롭게 흘러내려, 꽉 쪼여서 긴장된 정장차림에 그나마 한 줄기 숨을 트였다.
서열 1위.
십 년이 넘도록 사람들이 지켜봐 온 검성(劍星)의 모습 그대로였다.
“……은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검성의 모습에 감흥을 느끼는 동안, 흑룡주는 신경 쓰이는 말에 대해 캐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신랄했다.
“드디어 뒷방 늙은이 신세에 동경을 품게 된 거야? 축하해. 안 그래도 당신은 자경단을 은퇴한 뒤로는 뒷방 늙은이였지만, 이제 진정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되겠네.”
“흐음.”
“정말. 김공자랑 같이 마왕을 추격할 때는 조금 마음이 달라진 건가 싶었는데, 그 후로는 똑같이 게을러지고…….”
“나는 나 나름대로 힘냈네만.”
“그런 태도가 짜증 난다고.”
흑룡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스테이지 대장정도 그래. 당신이 선택한 순인종은 역사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어. 본래라면 제일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을 종족인데 말이야. 신인 당신이 은거와 은둔을 명령했겠지. 아냐?”
노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또한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부정하지 않으마.”
“……왜? 당신 말대로 은퇴를 생각해서?”
“바깥세상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었든, 지금 나는 한 명의 헌터에 불과하다. 내 직업은 검사지. 검사가 검에서 은퇴하는 날이 온다면 오직 죽어서 검을 놓치는 순간뿐이다.”
“…….”
“나는 자네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감시… 아니, 감시한 것은 아니로군. 그래. 더 적당한 표현이 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주변에 긴장감이 진해졌다.
주로 흑룡주가 검성을 노려보면서 피워낸 경계심이었다.
검성은 흑룡주의 압박을 이해한다는 듯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 검성은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자네들을 시험하고 있었다.”
시험.
흑룡주가 하, 비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높으신 곳에 앉아서 내려보는 말투네. 참, 누가 누구를 시험하겠다는 건지—”
“만일.”
검성은 말했다.
“흑룡주 자네가 권한 [숙청]을 사왕이 받아들였다면, 나는 전력을 다해 사왕을 죽였을 것이다.”
“…….”
“지금 이 자리에서 말이다.”
그 순간,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에스델은 붉은 검을 빼들어 검성과 대치했다. 사마군이 에스델을 보좌하듯 대열을 갖추었다. 스르릉! 스릉! 사방에서 칼이 뽑히는 쇳 소리가 울렸다. 일천에 이르는 교인들이 저마다 밀림의 그늘에 숨어서, 야자수의 몸에 가려져, 언제라도 달려들 수 있도록 포위진을 꾸린 것이다.
그중 누구도 말 한마디 흘리지 않았다. 수천 쌍의 눈동자가 검성의 손을, 발을, 허리를, 눈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시선들에 의해 검성은 사지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검성이 오러를 피어 올리거나 살의를 품은 순간, 그 구분선에 따라 천 자루의 칼이 사지를 난도질하겠지.
“…….”
하지만 검성은 시종일관 내 눈동자만을 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검을 칼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흑룡주가 옆에서 어깨를 툭! 쳤지만. 뭐, 상관없었다.
“어르신.”
나 역시 검성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저를 절대로 해치지 않으실 거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
오래된 검사의 눈동자는 청명했다.
27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