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71)
“그리 확신하나? 본인이 자네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인기척을 지우고서 우릴 기습할 수 있었을 겁니다. 흑룡주는 손이 하나 정도 날아갔을 거고, 저도 몸 한 쪽이 날아갔을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완벽한 타이밍을 잡았는데… 일부러 발소리를 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셨죠?”
“흐음.”
“결국은 협박. 경고에 불과합니다. [숙청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고장을 저한테, 아니 흑룡주한테 적나라하게 내보였을 뿐.”
“…….”
“어르신과 저 사이엔 이미 강철 같은 신뢰관계가 맺어져 있으니까요.”
사방을 둘러싼 긴장감은 여전히 독한 가운데.
나는 미소를 지으며, 검성을 향해 다가갔다.
“얘! 김공자! 가지 마! 나랑 붙어 있어야지, 바보야!”
당연히 흑룡주는 기겁했다.
“내 말 모르겠어? 나랑 붙어야 순간전이를 쓰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아, 김공자! 정말! 저 또라이가!”
등 뒤에서 흑룡주가 너 미쳤냐는 투로 마구마구 화를 냈다.
재미난 점은 화를 내는 소리가 점점 더 내 등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즉, 흑룡주는 가지 말라고 화를 내면서 정작 본인은 나를 열심히 쫓아오고 있었다.
십수 년이 넘게 한 번도 서열 1위 자리를 놓쳐본 적 없는 어느 검객을 향하여.
“……어허.”
검성이 내 모습을 지켜보던 때였다.
“하하.”
노인의 주름진 입술에서 웃음이 나왔다.
“으하하! 하하! 음, 흐음……. 하하하!”
난데없이 터져 나온 웃음에 나도 흑룡주도 발을 세웠다. 우리는 고개를 돌려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가냐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흑룡주도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으하하하하하!”
노인의 웃음은 더해져만 갔다. 평생 보지 못할 걸 지금 봐버렸다는 듯, 정말 굉장한 구경거리를 목격해버렸다는 양, 검성은 체신에 어울리지 않게 배를 잡고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새하얗게 잘 정돈된 수염이 부들부들 떨었다.
“……치매에 걸렸나?”
흑룡주가 질색한 표정을 지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약제사 씨한테 연락해서 치매약 좀 만들어 달라고 할까요?”
“아. 따지고 보면 약제사도 당신 라인이지…. 어쩜 그렇게 잘 나가는 유망주만 쏙쏙 빼먹는담. 인재 알 박기에 대한 과징금 제도를 창설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니깐.”
“뭔가요 그 이상한 제도는….”
흑룡주와 내가 이런 잡담을 나누는 데에서 알 수 있듯, 검성의 웃음소리는 정말 길게도 이어졌다.
마침내 검성이 웃음을 멈추었다.
“뭐가 그리 우스우셨습니까?”
“어찌 내가 웃지 않고 배기겠는가. 젊은이. 매사에 냉철하고 죽일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던, 흑룡의 주인이자 흑색의 마녀라 불린 아해가, 자네의 안위를 저리도 걱정하고 있으니 말일세.”
아.
나를 부르는 호칭이 사왕에서 젊은이로 바뀌었다.
사왕보다는 젊은이, 라고 불리는 쪽이 좋다. 훨씬 더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아버지한테 손주 취급받는 기분이랄까? 뭔가 기분 좋은 느낌이 검성의 [젊은이]라는 울림에 있었다.
“본인은…… 나는, 행여라도 자네가 바뀌지 않을까 염려했다네.”
그 검성이 말하고 있었다.
“자네는 이제 명실상부 이 탑의 최고위층에 속했네. 5대 길드장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말이다.”
“…….”
“젊은이. 나는 자네가 길드장들과 어울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아해들한테 [안 좋은 영향]을 받아버리는 것 아닌지 염려했었네.”
“뭐?”
흑룡주가 발끈했다.
“안 좋은 영향? 당신, 우리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해?”
“기분 상했나?”
“그럼 좋겠어? 당신은 뭐가 그리 잘났다고!”
흑룡주가 이빨을 드러냈다. 검성의 목덜미를 씹어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다같이 대숙청을 벌였으면서 혼자만 잘난 척, 고결한 척! 자경단장직을 내려놨으면 조용한 암자에 짱박혀서 여생을 보낼 것이지, 또 살인귀로 의심받는 헌터를 죽이고 다니지 않나! 미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응? 우리가 하는 건 뭐 악의 숙청이고, 니가 죽이고 다니는 건 다크 히어로의 처단이야? 박쥐 가면이라도 하나 장만하시지 그래? 아니, 박쥐 가면 쓴 히어로도 사람은 안 죽이거든?”
흑룡주가 검성에게 묵은 감정이 얼마나 쌓인 것인지 절절하게 느껴졌다.
웬만한 사람이 들으면 기가 질리다 못해 새파래질 비난의 폭풍이었지만, 검성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아랑곳않고, 묵묵히 듣다가, 그저 한마디를 툭 던졌다.
“흑룡주는 인간적인 사람이다.”
아나스타샤가 멈칫했다.
“……뭐?”
“탑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흑룡주를 냉철한 군주로 알고 있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정적을 독살해버리는 여인. 거리 곳곳에 간자를 뿌려두어, 탑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조리 듣게 되는 철혈의 통치자. 앞길을 막아선다면 그것이 누구든 냉정히 끊어버리는 여제.”
“…….”
흑룡주가 주먹을 꾹 쥐었다. 그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는데, 지금 노인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이러는 건가 아니면 다른 흉계가 있는 건가 아직 알 수가 없어서, 차마 대처하지 못하겠단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여인을 보게나.”
검성이 칼자루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빈 손으로 흑룡주를 가리켰다.
“그저 한없이 인간적인 사람이다.”
“…….”
“무의미한 희생을 줄이면 기뻐한다. 어쩔 수 없는 희생에는 눈물을 흘린다. 부패와 무능에 분노하고, 노력과 분투를 찬사하며, 성과를 이루어낸 영웅을 존중한다.”
이때까지 검성은 크게 웃었지만.
지금 한 순간만큼은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달을 닮은 눈동자가 흑룡주와 나를 스쳤다.
“수많은 사람을 암살하고 숙청한 권력자임에도 말이다.”
“…….”
“젊은이. 흑룡주는 인간적인 사람이라네. 그래서 나는 젊은이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네.”
노인은 나를 상대로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내게 건네는 말의 어조는 확고했고, 흰 눈썹은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보통, 사람은 한꺼풀만 벗으면 다 인간적이게 된다고 말하지만. 이 노인의 생각은 정반대일세.”
“…….”
“어떤 사람이든 한꺼풀만 가면을 쓰면, 다 인간적으로 보일 뿐이네.”
나는 묵묵히 침묵했다.
우리가 서 있는 너른 바위 저편에선 여전히 축제 소리가 들려왔다. 두그르르, 두그! 두르! 어디서 만들었는지 북까지 준비해와서 지정족이 신명나게 북을 두들겼다. 요정족이 공짜로 베풀어준 술을 마시며, 모든 종족이 취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흑룡주도, 이단심문관도, 백작도, 독사도.
그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혔을 것이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노인조차, 나를 만나 달라지기 전까진 그러했다.
“…….”
라비엘도.
만일 내가 어떤 이유로 인해 완전한 죽음을 맞이해버린다면. 사라져버린다면. 결코, 다시는 영원히 나를 되찾을 수 없게 된다면.
그녀가 나를 완성하고 있듯 나 역시 그녀를 완성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이 사라지면, 그곳에 남게 되는 건 무언가가 부서진 잔해.
완전히 얼어붙은 심장.
사람이 망가지는 데엔 결코 많은 이유가 필요치 않다.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검성의 오래된 눈동자를 직시했다.
“제가 살아 있으면 괜찮습니다.”
“…….”
“아나스타샤는 언제나 쉬운 길을 고르려 하지요. 어쩔 수 없다면서. 하지만, 제가 곁에 있어준다면, 아나스타샤는 한 번 더 고민할 거예요. 제가 부탁까지 하면 두 번 더 고민할 거고요. 제가 절대로 싫다고 말하면, 설령 한숨을 쉴지언정, 자기 생각을 물려줄 겁니다. [아아, 또 어려운 길을 가려는구나]라고.”
“…….”
“다른 멤버들도 같아요.”
나는 축제를 내려다보았다.
산와족들의 촉수 수십개가 그물망을 만들어서 이단심문관을 행가레에 태웠다. “아하핫! 하핫! 굉장합니다! 이거 굉장한 놀이기구로군요!” 하고 이단심문관이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요정족과 티타임을 가지는 백작의 모습, 새기족과 함께 헤엄을 치는 성기사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였다.
“이단심문관은 걸핏하면 [음! 죽여서 후환을 없애지요!] 같은 식으로 말하겠죠. 제일 편하고 제일 간단하며 제일 확실한 방법밖에 모르는 아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한 번 더 생각해달라고 말하면…… 다시 생각할 겁니다. 그 아이.”
“…….”
“어떤 사람이든 한꺼풀 가면을 덧씌우면 인간적인 인간으로 위장된다 말씀하셨죠. 어르신. 그렇다면 기꺼이 제가 우리 멤버들의 가면이 되렵니다.”
터벅.
나는 검성의 바로 코앞까지 걸어갔다.
누군가가 검을 빼든다면 둘 중 한 명의 목숨은 반드시 끊어질 거리.
그곳에서 나는 검성을 똑바로 올려보았다.
“어르신도 예외가 아니십니다.”
“…….”
‘저와 만나고 나서 어르신은, 스킬에 의존해서 살인자를 죽이고 다니는 걸 멈추셨지요. 자신의 눈을 믿겠다고 말하셨어요.”
“…….”
“사람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건 가면이라거나, 허세라거나, 잘난 척 따위가 아닙니다. 어르신.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해주는 건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타인이에요.”
나는 손을 들어 품속의 물건을 잡았다.
라비엘이 선물해준 백합향 손수건.
아무도 안 보이게, 흰 손수건을 작게 잡았다.
“저는 아나스타샤에게 그런 사람이고, 아나스타샤도 저에게 그런 사람입니다.”
“…….”
“그리고 어르신께도 제가 그런 존재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침묵이 있었다.
멀리 들리는 환호와 웃음소리가 우리의 작은 귓골에 들어와 맴돌았다. 특히 이단심문관의 높은 웃음소리가. 아하핫, 아하하. 아하하…….
그 외엔 사방이 고요했다.
우리를 둘러싼 밀림의 숲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노인이 입술을 열었다.
“자네는 이미 내게 그런 존재 중 하나가 되었지.”
응.
마음이 기뻐하고 있다.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네는 [나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가르쳐주었네. 이번엔 [흑룡주 같은 인간도 변할 수 있다]는 걸 내게 보여주었군. 자네를 세 번 만날 때마다 한 번씩 내가 변하게 되니, 자네는 좋은 친구를 뛰어넘어서 좋은 선생일세.”
아니.
그건 좀 과하신 말씀이고요.
애초에 이 어르신은 뭐든 좀 과한 면이 있다. 위협도 과하고, 경고도 과하고, 감정도 과하고, 칭찬도 과하고, 아무튼 다 과하다.
정장을 입어서 외모만 깔끔해 보일 뿐이지 사실은 엄청 격정적이다.
“하지만 젊은이. 자네의 말에는 치명적인 헛점이 있다네.”
“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헛점이요?”
“음. 헛점, 혹은 약점이라 불러도 좋겠지.”
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자네가 죽어버리면 자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더 지독한 짐승들로 돌아가버린다는 것일세.”
그것은, 언젠가 공녀가 내게 해주었던 말과 같은 것이었다.
“자네와 통성명을 한 흑룡주. 이단심문관. 지금 자네와 나를 예의주시하며 언제든 달려들 수 있도록 칼을 잡고 있는, 저 수백의 무인들…. 모두, 그대의 부군만큼은 아닐지라도 실성하겠지. 세상을 물어뜯는 짐승이 될 것일세.”
“그러니.”
툭.
검성이 내 가슴을 가볍게 두들겼다.
심장이 위치한 장소였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면, 젊은이. 무엇보다 자네 자신의 목숨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하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네의 목숨만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것이 감히 이단심문관을 인간의 길로 이끌고자 결심한 자의 임무이고, 흑룡주를 친구로 끌어들인 자의 책임이며,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단 한 사람도 참살하지 못하게 만든 젊은이의 책무일세.”
“……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번 더 다짐했다.
“절대로, 떠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음. 그래. 그게 자네가 할 수 있는 약속 가운데 가장 진실된 말이겠지.”
검성은 그제야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흑룡주보다 사람을 더 믿지 못해서 말일세. 어려서부터 인간이 좀 미덥지 못하고, 때때로 경멸스러워서, 너는 왜 그리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느냐는 말을 맥칼리스터한테 듣고는 했지.”
“…….”
“젊은이가 지금 공언한 약속도…… 그리 잘 지켜질 거 같지가 않군. 아니. 오히려 반드시 어겨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네. 음. 본인 스스로 얼굴에 금칠하긴 싫지만, 이런 불길한 예감을 바로 맞추는 것이 내 특기이기도 하다.”
응?
“사왕”
“네?”
부스럭.
풀밭이 가볍게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성이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이다.
“자네의 경호원이 되고 싶네.”
“…….”
네?
“자네의 경호원이 되어, 자네의 목숨을 지키고, 자네의 주변을 둘러싼 자들의 인간성을 영원토록 지키고 싶다.”
노신사는 왼쪽 눈을 찡긋 윙크했다.
느즈막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눈짓. 소싯적에 사람들 깨나 울리고 다녔겠구나 싶은 윙크였다.
“경호원의 평균 은퇴 연령을 꽤 뛰어넘은 퇴직자 신세다만. 이 가련한 늙은이를 고용해주겠는가?”
아니, 영감님.
댁은 전직 재벌가 회장인데다 현직 서열 1위 검객이잖아요.
그런 분이 내 경호원을 왜 해!?
27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