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75)
1.
원래부터 정파(正派)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2.
-…….
폐관수련 61일 차.
독사는 멍하게 입을 벌렸다.
-이게 아닌데…….
동굴천장에서 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수십 일 정도 굶어서 수련했다고, 사왕이 농담으로 웃으면서 한 말을 들었다. 예전에.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현재 60일 내내 단식수련을 이어갔지만, 날이 지나갈수록 비어가는 것은 배만이 아니라 뇌였다.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래. 이건 아닐 거야…. 애초에 사왕 그 놈이 진지하게 단식수련을 하는 모습이 안 떠올라…. 이런 수련방법으론 놈을 이기기는커녕, 그냥, 시간 낭비 인생 낭비 뇌수 낭비 같다.
경축.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그 날 독사는 60일 동안 이어간 단식수련을 폐하고, 귀인족 마을로 내려가 진탕 처먹었다. 족발. 튀김. 면요리. 독사가 전래한 요리 메뉴들로 귀인족의 밥상은 풍요로웠다. 대충 5일에 걸쳐 수십일 분의 식사를 끝마친 독사는, 마치 요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한 다이어트 희망자처럼 동굴에 앉아 절망했다.
-어떡해야 그 놈을 이길 수 있는 거냐고!
60일을 허공에 날렸다.
풀 죽을 이야기지만, 다행인가 불행인가 독사에겐 시간이 많이 남았다.
아주 많이 남았다.
-…….
아무리 짧아도 60년.
60년.
겨우.
-어떡해야…… 제길, 어떻게 해야…….
60일의 단식수련이 그에게 남긴 것은 혼잣말 버릇이었다.
독사는 끙끙거리면서 동굴벽을 바라보았고, 거기에 기연과 같이 절대적인 무공의 글귀가 새겨지는 장면을 상상했지만, 그런 망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독사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
아마도.
마교(魔敎)에 몸을 담아야 할 사람은 김공자가 아니라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그래. 첫수부터 잘못 꼬인 거야, 이게.
머릿속에 김공자의 심히 밝은 미소를 떠올리며 독사는 피식거렸다.
-아무리 봐도 갠 정파가 어울리잖아. 나는 아니지…. 조금 더 좋은 세상이라느니, 뭐 거기까진 백보 양보해서 받아들인다 해도, 뭐 탑의 인간들을 구해준다느니, 완전 내 생리에 안 맞거든. 난 그냥 협(快)이 좋을 뿐이지….
독사는 돌멩이를 집어서 동굴벽에 날렸다.
툭.
툭.
툭.
-맞아.
나흘.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무물(無物)의 시간이 바깥에서는 나흘이라 불려지는 시침의 속도로 흘렀다. 동굴 속에선 시간을 헤아릴 길이 없어, 오직 벽에 움푹 패인 자국들— 독사가 던진 돌멩이의 흔적들만, 그 멍자국들만이 세월을 알렸다.
-난 원래부터 정파에 어울리지 않는 몸이었어.
툭.
-천마가 아니라 남궁운 할아범 밑에 들어간 것도, 딱히 할아범의 무공에 감명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좀 배움의 시간을 가지려고…. 그리고 김공자가 하는 일에 어울려줘서, 두 분 노인네 가시는 길 편안해지시라는 기분으로….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툭.
-좀 대충이긴 했지. 그 놈에 비하면.
툭.
-…….
툭.
-대충 살았지.
툭.
-와, 진짜 혹시 나 인생을 대충 산 건가?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결정적인 부분을 하나도 안 해놓고 여기까지 흘러와 버린 거 아냐? 씨발. 대충 살고도 헌터 서열 6위 찍고 천무문주 될 정도로 세상이 만만했었나? 나 혹시 천재야? 대충 살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어. 탑이 무너졌겠다 그냥.
툭.
-그래. 탑을 무너트릴 정도는 되었겠지.
툭.
-서열 6위라고 해봤자 그 업적이 어디 새겨질 정도겠냐.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언급될 정도겠냐. 기껏해야 3년, 아무리 애써봤자 6년.
6년이 지나면 내 이름이나 이명 따윈 다 헛것이지.
툭.
-천무문주라 해봐야 탑에서나 잘 나가는 문파. 거 어디 제대로 된 무림세계 한복판에 떨어졌어봐. 그대로 중소문파만 되어도 다행이야. 그냥 애들 괜히 거리에 나가서 칼질하지 말라고, 싸울 거면 그 여력으로 자기나 단련하라고, 그러라고 모은 곳이니….
툭.
-대충 살았구만.
툭.
-씨발. 죽어라. 다 나가 뒈져.
툭.
-…….
툭.
폐관수련 260일차.
독사가 면벽하는 동굴의 맞은편은, 그가 던진 돌멩이들로 초토화되었다. 마치 폭탄이 폭발한 듯 이곳저곳이 움푹 패여 있었고, 곰보가 수두룩하게 터져 있었다. 오직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아니, 생각을 배설하기 위해 던진 돌들이 암석을 깎았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쩌다 여기로 왔는지.
여기 오다가, 놓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놓치지 않고 잡고 있었던 것들은 또 무엇이었는지.
그 무엇들은, 무엇이긴 했는지.
-…….
260일.
독사가 자신의 생을 갈무리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시침을 날실로, 분침을 씨실로 삼아 시간의 거름을 만들었다. 이 거름망에 온갖 쓰잘데기없는 것들, 잡념, 잡상, 스트레스, 생각 부스러기와 감정 부스러기, 인생에 끼어든 지방과 군살을 탈탈 털어냈다. 잘 털어지지 않을 땐 돌멩이를 던져, 산산이 부서트렸다.
-…….
털어내고 나니 덩그러니 화두(話頭)가 남았다.
-김공자를 이긴다.
단순히 칼로?
아니.
그가 이어받은 마천을. 민초의 비명이 어린 칼을.
김공자는 자기 자신을 소교주라 낮추어 말하며 스승님을 언제나 밝은 눈동자로—어쩌면 심히 반짝반짝거리는 눈동자로—말하지만, 독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 주변 사람들도 모르고 어쩌면 김공자 본인조차도 모를 사실 하나를, 독사는 알고 있었다.
-김공자를 이긴다는 것은 단순히 마천신공을 꺾는 걸 뜻하지 않는다.
일찍이.
이름 모를 초대 천마(天魔)는 세상을 주유하다 마천신공을 만들었다. 천하에 무던히도 흐르는 죽음과 비명, 신음을 들은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 저 모양 저 꼴이거늘, 사람이 만든 칼로 사람이 휘두르는 칼이 어찌 유별나겠는가? 세상과 동떨어진 칼을 고고하다 칭송한들 그 칼이 벨 수 있는 것은 역시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서 동떨어진 허상, 헛것, 허물뿐이라.
실물(實物)을 베지 않으면 칼은 칼이 아니라 장식이다.
세상을 베고자 한다면 먼저 검에 세상을 담아야 할 것이니. 작금에 세상은 다만 비명과 신음, 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마천의 검은 응당 비명을 지르고 신음을 흘리며 피를 토할 것이다.
-…….
김공자는.
그 마천을 지정족 전체에 퍼트려버렸다.
전염시켰다.
-……무서운 놈.
김공자가 창안한 마천진법(魔天陳法)은 단순히 마천신공을 업그레이드한 것이 아니다. 김공자 본인이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둥,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천을 펼치면 얼마나 멋지겠냐는 둥, 단순무식한 동기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절대 아니다.
-천마 한 사람에게 모인 짐을 수십만 민초한테 나눠주다니….
독사의 눈이 어둡게 침잠했다.
천마는 고고하였으나 혼자였다. 교인들은 천마를 단순히 교주로 섬길 뿐만 아니라 일종의 신으로, 살아있는 신화로 받들어 모셨다. 천마의 말이 곧 법이었고 천마의 행보가 곧 역사였다.
마천신공을 온전히 펼쳐내는 자는 천마뿐이기에.
반면에 진법은 다르다.
마천신공에 어느 정도 익숙한 자라면 누구나 진법에 참가할 수 있다. 모든 백성의 비명을 담을 필요도 없다. 한 사람의 비명, 한 사람의 역할에 충실하여, 배우가 된 것처럼 대오에 섞여들어 그 한 사람만을 연기하면 된다.
-하…….
김공자는 거기서 제1악단의 지휘자에 지나지 않는다.
김공자 없이도 마천진법은 펼쳐지고, 진법에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느나에 따라, 그 사람들이 누구에 몰입하여 울부짖느냐에 따라, 매번 달라지고 매번 새로워진다. 우부르카는 제2악단의 지휘자일 것이고, 세임슬람도 제3악단의 지휘자가 될 수 있다.
나눈 것이다.
짐도, 사명도, 역할도, 지위도, 그리하여 권력도.
-차라리 그 놈이 천마를 빼닮기만 했다면 이기기 쉬웠을 건데….
이 세상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다.
내가 제일 큰 상처를 입고, 제일 뼈저리게 아픈 사람 또한 아니다.
내가 마천의 우두머리인 까닭은 그저 잘 표현하기 때문일 뿐.
말 그대로, 나는 소교주(小敎主)에 불과하다.
-어떡할까.
천천히.
독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떡해야 그 놈을 이길 수 있을까…. 응?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동굴을 나섰다.
더는 동굴에 자신을 억지로 가둬놓을 필요가 없었다.
자기 자신은, 이미 확고하게, 자신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쩔까…
자신의 감정. 자신의 과거. 자신의 후회. 자신의 긍지. 자신의 한숨. 모든 것이 겹쳐지고 꾸물력 매만져지고 응어리져서, 하나의 꿀꿀한 덩어리가 되었다. 이 덩어리가 심장에 백 근의 무게로 맺혔다.
이 검은색 덩어리가 곧 자신이었다.
-흐음.
마을에 나와 술집에서 술을 마셔도, 귀인족 아이들과 담소를 나눠도, 홀로 거리를 돌아다녀도, 산 위에 올라가도, 심장에 맺힌 검은색 덩어리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아, 이곳에 [자기 자신]이 있음을 언제나 느꼈다.
심장에 자리잡은 독사가 기이하게 혀를 날름거렸다.
-어떻게 김공자를 이길까.
282일.
독사는 폐관에서 출두했다.
3.
까아아아앙!
칼과 검이 부딪친다.
“크윽……!”
날카로운 쇳소리.
그러나 독사에겐 쇠를 두들겨서 연마한 칼 한 자루밖에 없다. 나는 아니다. 그늘에서 출몰한 그림자 칼이 네 자루나 더 있다.
“제기랄! 이, 치사한 새끼!”
오직 나의 이기어검으로만 날아다니며, 그늘색을 머금어 불온한 흑색으로 진동하는 검. 내가 마천의 소교주라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이것들은 마검(魔劍)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겠지.
한 자루의 성검과 네 자루의 마검.
나는 그것을 방패처럼 두르며 돌진한다.
“아무리! 내가, 만만찮은 적수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독사는 급해졌다.
“아니잖아! 시발! 이기어검에, 뭔, 아니, 진짜 이기어검은 맞냐!? 진짜 검을 날려보내는 게 어검술이잖아!”
-정확히 말하면 김좀비 이놈한테만 허락되는 어검술이군.
결투가 시작하고 내내 입을 다물었던 배후령이 말했다. 배후령은 약간 거리를 두고 우리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배후령의 대답이 독사한테 들리기란 불가능했다.
-[수호의 여신]이 품은 칼들을 각각 소환시켰어. 얘네한테 오러로 몸을 만들어주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또 연료로 오러를 주는 건데 문제는 이것들이 성좌의 일부들이란 말이지. 머리가 잘 돌아가요. 즉, 에고 소드다. 알아서 잘 싸운단 말이지. 다섯 자루의 에고 소드가 오러를 흩뿌리며 날아다니면서 김좀비는 그걸 이기어검이라 부르는 광경이라. 흠. 으으음. 매우, 김공자스럽군….
“이런 또라이 같은 새끼!”
-아. 내 말이 바로 그런 뜻이야. 혼잣말을 해도 가끔은 의지가 전해지네? 세상이 좋아졌어.
두 사람이 마음대로 지껄이고 있으나 작금의 승부엔 하등 관련이 없다.
나는 검을 휘두를 뿐.
주변에서 울리는 말소리와 소음에 신경을 빼앗길 수 없다. 지금, 나는 오직 독사만을 바라보며 공세를 이어간다.
“젠장!”
독사가 후려친 검격을 [연민검]이 알아서 받아친다.
허리를 노리고 휘두른 검격은 [기원검]이 막는다.
손목을 베기 위해 달려든 검격은 [희생검]이 흘려버린다.
그리고 텅 비어버린 독사의 품속을 향해 달려가,
“빌어, 먹을!!”
벤다.
핏소리가 촤악, 울린다.
‘얕군.’
치명상이 아니다. 독사가 허겁지겁 뒷걸음질하여 피했다. 칼날에 핏방울이 몇 점 묻었지만 그뿐. 그저 칼과 검이 부딪혔을 때처럼 까아아앙, 하고 쉿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기듯 흘렀다.
“…….”
또다.
나는 이상한 감각을 느끼고 눈썹을 찌푸린다.
‘또 쇳소리가 들렸어.’
칼과 검이 부딪혔으니 쇳소리는 당연히 울려야 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검은 쇠가 아니라 그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순전히 오러로 만들어진 마검은, 아무리 독사가 휘두르는 칼과 부딪힌다 해도 쇳소리를 낼 일은 없다. 거의 무음(無音). 기껏해야 무언가가 사르륵 녹아내리는 소리나 덥썩 물어버리는 소리 정도가 울려야 할 것이다.
만일 쇳소리들이 내 검에서 울린 게 아니라면.
‘독사.’
상대방의 검에서 흘려지는 신음이겠지.
‘무슨 수련을 해왔기에 칼이 울고 있습니까.’
나는 전방에 서 있는 독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후우, 흐으읍… 하아, 후우우…… 후우….”
독사는 피를 흘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27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