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77)
5.
까앙!
검을 휘두른다.
“후읍, 하. 으흐흐.”
검을 휘두른다.
“어이쿠! 씨발, 그러니까 치사하게 어검술로 수작 부리는 건 좀! 반칙이라니까 이놈이 벌써 컸다고 까마득한 선배 말을, 훅, 귓구녕에 들어 처먹지도 않네! 응!”
검을 휘두른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일식第一式.
아사유검飯死流劍.
구원검이 허공에서 격렬히 날뛴다. 내가 손수 조종하지 않더라도, 나의 마검들은 나와 함께 일생을 걸어오며 만생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나와 일심동체의 수족이었으므로, 나와 다를 바 없이 마천신공(魔天神功)을 펼쳤다.
“흡! 크읍!? 이, 이젠 어검술로 가출나간 검이 지 혼자서 마공까지 부려!? 야, 사왕! 너, 김공자! 이건 진짜! 진짜 개사기 노매너 플레이인 거 알지!?”
독사는 욕지거리를 푸짐하게 흘리면서도 정확히, 탓, 발걸음을 밟아가며 마검을 막았다. 마검이 날뛰며 내지르는 허초와 실초, 화려한 검로를, 차분하게 막아내며,
“됐다!”
까앙!
“나도 60일은 굶어봤다 이거야! 으하하! 우욱, 후… 웁. 우웁. 음, 으으음…. 음. 크흠, 하아. 하아…… 하아. 아. 존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쏘에 불과했지만!”
독사가 구원검을 걷어치웠다. 독사의 칼과 나의 마검이 부닥쳤을 때 분명히, 까앙! 또다시 쇳소리가 날카로이 울려 퍼졌다.
독사는 배에 흐르는 핏줄기를 대충 도복으로 닦으면서, 흐흐, 웃었다.
“하아. 후우우, 으아…. 흐흐흐….”
어디를 어떻게 봐도 적의 열세.
이미 이기어검의 경지에 이른 나를 독사가 상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다섯 자루의 검에 다섯 자락의 마천을 각기 담아 일시에 공격한다면, 독사는 3초도 버티지 못한 채 쓰러질 것이다.
“…….”
다만.
그래봐야 독사를 이긴 것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몸이 치유되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여어! 또 승부하자구!’라고 결투를 신청할 것이 뻔했다.
‘육체를 꺾는 게 아니라, 마음을 꺾는 것이니까.’
그래서 어렵다.
‘싸우고, 계속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도… 웃음을 멈추지 않는군.’
처음에는 주화입마에 빠진 거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주화입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눈동자는 광기에 물들지 않아 깨끗했고, 웃음소리에도 행복이 담겨 있었다. 아주 작은 행복이고, 신경을 기울여 듣지 않으면 바로 훅 꺼져버릴 것 같은 행복이지만…….
‘행복해 보여.’
초반의 탐색전이 끝나고나서.
독사는 즐겁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행복해할 수 있지?’
혹시 오랜 폐관수련의 결과인가.
폐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독사는 괴롭게 칼을 휘둘렀다.
칼을 휘두르고 이기려 들었는데 그 모든 과정이 지독히도 괴롭게만 느껴졌다.
실제, 나와 싸울 동안엔 주화입마에 걸려 칼부림을 치지 않았던가?
‘사람이 이렇게나 바뀔 수 있나.’
나는 칼자루를 꾸욱 쥐었다.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나는 이미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바뀔 수 있지.’
그래서 기대된다.
긴장되면서도, 독사, 당신이란 인간이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알아가는 것이 너무 기대되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입을 열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어서,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나에 대한 질투, 이단심문관에 대한 집착,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 무림맹주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 수많은 감정들을, 감정의 응어리들을 짊어지고, 랴오판.’
나는 검을 휘둘렀다.
‘당신은 무슨 수로 웃으면서 검을 잡는 겁니까!’
나의 마검 중 하나인 희생검이 우우웅, 진동했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이식第二式.
갈사비검渴死痛劍.
피가 터졌다.
“우오! 우오오오!?”
마검이 허공을 종획무진하며 독사에게 달려들었다. 쾌검(快劍). 하늘에서 내려찍는 독수리처럼 마검은 아래로, 좌로, 우로, 쉴 새 없이 독사를 찔렀다. 독사는 허둥지둥거리며 찌르기들을 막아갔다.
“죽어! 야, 이거 죽는다! 사왕! 진짜 죽어! 씨, 후으으윽!? 이런! 개, 아아아악! 쌍! 방금 팔뚝 스쳤다! 팔뚝 스친 거 봤냐. 진짜로 스쳤다. 좀만 더 깊이 들어갔으면 나 외눈에서 외팔이로 전직할 뻔했다!”
까앙!
쇳소리가 울렸다.
거세게 휘몰아치던 갈사비검(渴死瘡劍)을 독사는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팔뚝에 스친 상처가 제법 깊어 핏줄이 주르륵, 흘러나왔지만. 그거 이외에도 잔상처가 잔뜩 늘어 벌써 도복이 엉망진창으로 헤졌지만.
“크흐으으…. 시발. 죽겠네.”
독사는 턱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씩 웃었다.
“존나 빡세다. 야.”
“…….”
“네가 한꺼번에 마천신공 펼치면서 들어오면 진짜 나 훅 가겠는데? 엉? 왜 안 오냐. 아아, 참. 너는 말을 못 하지. 말 한마디 없이 나를 패배시킬 생각이니까. 어휴, 하여간 새끼. 존나 진지하구만. 사람이 말하는 재미도 없으면 어떡하냐, 어떡해. 어차피 언젠가는 말하게 되어 있어.”
후우.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독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우리 두 사람의 결투를 관전하는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야! 이단심문관!”
“음?”
이단심문관이 달팽이껍질을 품에 안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천무문주.”
“나 네 면상 보는 거 사실 수십 년 만이거든?”
“앗, 네! 일부러 세상에 남아서 수련하기로 했다는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아하핫.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저와 똑같군요!”
“오랜만에 보는 건데 반갑단 소리도 없냐?”
“예, 반갑습니다!”
“사실 어제 보고 재회하든 100년 만에 재회하든 딱히 상관없지?”
“예! 둘 다 똑같이 반갑습니다!”
“그래.”
후우.
독사는 다시 한 번 호흡을 정돈했다.
“너는 그런 녀석이지…….”
“아하핫.”
독사는 칼을 쥐었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물었다.
“이단심문관.”
“네!”
“너는 지금 행복하냐?”
“예! 그렇습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이단심문관이 답했다. 옆에선 흑룡주가 얘네들 뭔 헛소리 하는 거니, 같은 표정으로 질색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지방파 방송엔 신경 쓰지 않았다.
“과거에 좀 괴로웠을 거 아니냐.”
“음.”
이단심문관이 턱을 짚었다.
“괴로움이 신체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예. 아마도 과거에 저는 상당히 괴로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괴로울 거잖냐.”
“현재 제가 하는 노동의 강도와 업무의 정도를 고려하면 괴로워하는 게 정상이긴 하겠군요!”
“그런데도 즐겁냐?”
이단심문관이 활짝 웃었다.
“예!”
“…….”
“매우 어렵지만 이 일도 재미있는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천무문주! 당신에게 에스프레소를 권하는 것도 꽤 재밌는 일입니다!”
잠시 침묵이 고였다.
독사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괴로운데도 행복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그래, 물론이지. 물론일 거다. 넌 비록 이상한 괴물이지만…… 그래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이니까. 그래. 아프면 아픈 거다. 괴로우면 괴롭고. 웃으면 웃는 거지.”
독사가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거칠어진 호흡은 이미 차분히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마교 소교주 김공자.”
“…….”
“세상에 너희가 물리쳐야 할 강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너희가 도와야 할 약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독사는 나를 사왕도 아니고, 단순히 김공자도 아니며, 구태여 [마교의 소교주 김공자]라 불렀다.
그가 상대하는 것이 비단 탑의 헌터뿐만이 아니며, 내 일신의 무위도 아니고, 내가 짊어진 마교의 무게와 마천의 넓이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고한 것이다.
“너희 마교는 민초의 비명을 교리로 삼았다. 비명이 복수가 되고, 복수는 혈겁이 되어 천하를 붉게 염하였다. 피에 굶주린 복수귀들아! 천지가 다 붉어졌거늘 아직도 너희는 약자인 양 행세하는구나.”
“…….”
나는 멈칫했다.
그것은 990번째 비무에서 벌어진 선전포고.
무림맹주 남궁운이 마교의 천마인 스승님께 고한 바와 같았다.
“너희는 하염없이 울면서 천마의 옷자락을 잡는다. 자신들을 대신해달라, 대신 살풀이를 해달라 애원한다. 옷소매를 붙잡아 늘어지는 동안 너희는 약한 민초이고 슬픈 백성이라는 말이렷다.”
독사의 외눈이 좌중을 훑었다.
이단심문관, 흑룡주뿐만 아니라 만약의 사태에 나를 지키기 위해 나타난 에스델, 사마군, 교인들도 숲의 이파리에 숨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독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독사의 외눈은 형형히 밝았다.
“너희도 마땅히 발이 있고 손이 있거늘 언제까지 과거의 삿된 망령에 안주할 것인가. 화엄이 말하기를 한 그루의 나무조차 열매를 맺으려거든 꽃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너희는 어떠한가? 너희의 아픔으로 장사하는 화원(花圍)의 꽃장수로다.”
그런가.
과연, 그런가.
‘이건.’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다.
침묵을 고수하며 상대를 꺾겠다는 나의 다짐, 나의 맹세, 나의 고집을 뒤로 무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저 미친 천무문주는 이 자리를 단순히 [사왕과 독사]의 결투장을 넘어서서 [마교와 정파]의 싸움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이다.
김공자는 몰라도 마천은 침묵할 수 없다.
언제라도.
“하.”
나는 웃음을 흘렸다.
“천무문주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을 지녔는지 의문이군요.”
마침내 내 입술이 풀렸음을 보고 독사는 씨익 웃었다.
“왜? 모처럼 뚫린 입 타고 태어났는데. 뚫린 대로 수시점검은 해줘야지.”
“무림맹주 남궁운이 당신을 후계자로 인정했답니까? 백도의 문도들이 당신을 정파의 대표로 선정했답니까?”
“아아. 인정. 받으면 좋지. 좋긴 한데 그거. 남궁운 할아범이 이제 좀 늙었더라고 응? 애당초 천마한테 거하게 깨졌잖냐? 아 진 사람한테 자격이고 인정이고 뭐가 있어. 다른 백도의 문도들이라 해봤자 뭐 다 눈밭 아래서 편히 주무시고들 계시고. 마저 주무시라 해야지. 예의 있게.”
“스스로 정파임을 자처하시겠다?”
“오냐.”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만한 실력을 갖추었습니까?”
“마교의 천마가 어검술로 마천신공을 펼치는데 그걸 두 번 연속 막았어. 된 거 아냐? 이 이상 무슨 실력이 더 있어야 돼? 야아. 쌍. 개파 노릇하기 참 힘들다.”
“저 천마 아닙니다.”
“응. 너 천마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널 천마라고 부르진 않는데, 난 그렇게 부르려고.”
“…….”
“마교 교인들이 죄다 너한테 충성을 맹세하고 웬 생뚱맞은 대륙에 가서까지 지정족한테 교리 전파하고, 너무 선교가 잘 되어서 종족 전체가 마두가 되어버렸는데, 씨발 너를 천마가 아니라 소교주라 부르라고? 너무 겸양 떠는 거 아냐? 나 말고 세상 사람들이 겸손해지는 모습을 보면 참 마음이 따스해지고 아련해지기도 한데, 난 원래부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람이라서 말야. 그냥 나대로 살련다. 2대 천마 김공자 씨.”
“하.”
하하.
“음.”
하하하.
아.
“재밌네요.”
사뿐히.
나는 미소를 지었다.
“…….”
그 미소를 보고 왜인지 독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옅어졌다.
뭐.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우상검]을 쥐었다.
“지난번이랑 똑같이 저에 대한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면 간단히 베어넘길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아니, 질투심은 여전한가? 천무문주의 감정은 별로 달라진 거 같지 않습니다. 절 보는 눈에서 느껴져요.”
“…….”
“하지만, 그렇군요.”
나는 살짝 손짓했다.
허공에서 나를 호위하듯이 멤돌고 있던 마검 중 한 자루가, 우웅, 반응했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삼식第三式.
익사만검潮死滿劍.
기습.
“……!!”
독사는 곧바로 땅을 굴렀다. 퍼억! 독사가 서 있던 자리에 [기원검]이 박혔다. 기원검은 곧바로 고개를 치켜들어, 흙알을 흩뿌리며, 독사의 주위를 맴돌며 틈이 보일 때마다 짓이겨 쳐들어갔다.
“이, 씨발!”
독사는 재빨리 스텝을 밟으며 공격을 회피했다. 그러나, 촤아악! 미처 피하지 못한 검로가 그의 발목에 한 번 걸렸다. 발목에서 피가 솟음쳤다. 역시 치명적인 부상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데미지가 들어간 상처였다.
“진짜,”
까앙!
“마두답게 수단을 안 가리는구만!”
독사는 오러를 전신에 끌어올려 마검을 받아쳤다. 마검은 휙, 날아가듯이 허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내 주변으로 복귀하여 빙그르르 돌아가며 나를 호위했다.
“빌어먹을! 발, 아프다고!”
“…….”
또 쇳소리가 들렸다.
특이한 소리도 아니거니와, 오러로 흉내 내려면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는 소음이긴 하되, 나는 독사가 저리 행복하게 웃는 것과 쇳소리 사이에 모종의 연관관계가 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우리 둘의 대결을 마교와 정파의 싸움으로 끌어올린 까닭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아니.
아마도.
‘꺾을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나도. 소교주라는 이름도. 마천도.
내가 독사와 천무문주, 랴오판, 세 명으로 이루어진 상대를 전부 깨버리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처럼, 상대방 역시 나의 모든 것을 꺾어버리고자 칼을 들어올린 것이다.
‘좋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멎지 않는다.
‘좋아.’
이럴 때 스승님이 뭐라고 말했더라.
무림맹주의 선전포고를 듣고 스승님께서 지으신 얼굴, 떠올리신 미소, 뱉으신 숨결, 자아내신 한 마디의 말이, 이제는 전부 이해되었다.
그래서 말하였다.
“호(好).”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비무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잠시 우상검을 칼집에 돌려놓고, 지그시 양주먹을 모아, 포권을 취했다. 독사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도 곧 자세를 다잡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포권을 취했다.
까닭을 알 수 없지만 내 입가에선 미소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즐거웠다.
“부디 991번째 비무가 선학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면 좋겠네요.”
정마대전.
어느 설원의 세상은 멸망했지만 마교를 이은 자와 정파를 이으려는 자가 있어, 세계가 눈으로 멸한 다음에도 이곳에서 991번째 싸움이 벌어진다.
나는 그것을 행복이라 여기기로 했다.
단지.
“문주. 저는 강한 사람을 멋지다고 생각하고, 약한 사람을 응원하고, 지옥에 떨어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고, 아직 여긴 지옥이 아니라며 버티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지만요.”
“오냐.”
“책임지지 못할 말을 꺼내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나는 활짝 웃었다.
“그 사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좀 더 싫어하고요.”
“…….”
“시시하면 베어버릴 겁니다. 랴오판.”
“…….”
독사가 침을 삼켰다.
그리고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오냐. 김공자.”
일순간.
나는 네 자루의 마검을 흩뿌리고 한 자루의 성검을 휘두르며, 일보(一步), 내디뎠다.
고요한 숲속.
까앙!
문득, 쇳소리가 울렸다.
27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