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78)
6.
원래부터 정파(正派)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거기서 쇠를 구부려 놓으면 어째요? 아니. 아니. 오러로 다시 되돌리지 말고. 이 양반 보게?
독사는 망치를 휘둘렀다.
-댁이 지금 오러를 써서 일하면 그건 취미예요. 일이 아니라 취미. 그냥 가지고 노는 거라니까. 놀러 왔어요?
까앙!
독사는 숨을 들이쉬었다.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그의 얼굴을 벍게 밝혔다. 땀방울이 떨어져, 식지 않은 쇠 위에서 자글자글 끓었다.
-여기에 놀러 왔냐고요.
까앙!
원래부터 대장장이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쇠를 두들기니 갑자기 팔뚝에 리듬이 생기고, 망치를 휘두르는 팔짓이 춤을 추거나, 온몸이 떨림을 받아내며 속에 쌓인 울분을 절로 토해내게 된다든지—그런 신명 따위는 없었다.
-와, 씨발,
까앙!
-힘들구만! 이거!
일에 무슨 신명이랴.
-죽겠다! 시벌, 뭐가 이렇게 힘들어!
-죽겠어요? 걱정 마세요. 내가 보기엔 아직 한참 덜 죽었어. 진짜 죽을 거 같으면 막 눈밑부터 쳐지고 그런다니까. 손님은…… 아니, 그냥 아저씨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아저씨는 아직 쌩쌩해요.
-힘들다고!
-원래 일은 힘들어요.
까앙!
-그냥 겸손해지세요. 아, 존나 힘들구나. 그래도 이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직업은 아니겠지.
-별, 위로가 안 되는데.
-그럼 무슨 위로를 원하는데요? 뭐 기적적인 마법주문이 있어서 그 말만 몇 마디 들으면 막 위로가 되고 망치질이 할 만해지고 하루가 신선해지며 나날이 즐거워질 거 같습니까? 원래 위로는 별로 위로가 안 돼요. 그거라도 없으면 더 힘드니까 하는 게 위로지.
-히, 힘들다….
까앙!
-아아….
까앙!
쇳소리가 스며드는 곳이 점점 붉어졌다. 한낮의 새파란 하늘에서 핏기가 번진 저녁노을로. 상인들은 저녁 장사 보따리를 풀어, 이제 길거리엔 쇳소리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잡소리가 흘러들었다.
-됐어요. 이제.
-허억, 후으으읍! 하아아아아… 후으, 하아….
-밥 먹으러 가죠.
요정족은 언제 씻었는지 정장 차림이 말끔했다. 대충 돌아다닐 법도 하건만, 요정족의 피는 못 속이는지 바깥에 나갈 때는 여전히 멋쟁이로 활보할 생각 만만이었다. 독사는 대충 땀이나 닦고 요정족과 나섰다.
-와! 아저씨! 저기 좀 봐요!
낡은 길거리 한켠에서 춤꾼 여럿이 춤을 추고 있었다. 비록 관객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들 재미있다는 얼굴로 춤사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기 가게에 판촉으로 혈화극단을 하나 고용했나봐! 저거 돈깨나 깨지는데. 장사판 잡으려고 아주 독하게 준비를 하네요, 저기. -아아… 가수 고용해서 노래 부르는 거랑 비슷한 느낌인가…?
-저희도 가서 좀 들어보죠! 공짜인데!
공짜를 좋아하는 건 백작이나 요정족이나 똑같군.
독사는 피식 웃으면서, 지친 몸을 이끌어 춤판으로 걸어갔다.
-우! 아, 우! 아.
-구루루, 쿠우.
가게 앞에서 무대를 펼치는 배우들은 과연 영락한 소형 혈화극단 소속으로 보였다. 아주 젊거나 아주 늙은 배우밖에 없었다.
그들은 박력 넘치는 춤보다는 리듬에 몸을 맞추는, 간단한 춤을, 전쟁의 처절함을 노래하기보다 작은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배우들이 흘리는 오러를 타고, 다소 느릿느릿한 음악이 노을에 흘러들었다.
-…….
독사는 맨 앞자리에 가서 팔짱을 끼었다.
하루종일 일한 사람들의 피를 받아 마셨는지 노을은 유독 새빨겠다. 거리의 지붕, 기둥, 흙길, 돌바닥의 틈새와 틈새에 빨간 노을이 물들었다.
-우우, 우우, 우우, 구르르.
-투, 투, 부르르르, 투, 투.
이것도.
이것 역시 꽤 좋았다.
-…….
이상한 일이었다.
독사는 멋진 혈화극을 몇 차례나 관람했다. 당대 화하평의회에 속한 전사들이 펼치는 군무(軍舞)도 많이 봤다. 모두 처절하면서도 웅장했으며, 애달프며 아름다웠다. 눈물을 흘린 적 또한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심장에서 [자기 자신]이 쉭, 쉬익, 혀를 날름거렸다.
그토록 화려한 혈화극들 앞에서는 계속 침묵했던 심장의 뱀이.
-아, 춤춘다.
독사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이었다. 자신 말고도 혈화극을 지켜보던 관객들이, 손님들이, 흥겨운 듯 어깨를 흔들거나, 파트너의 손을 잡고 춤을 권유했다.
-적주요! 싸요!
가게에선 요정족 점원이 나와 적주(赤酒)를 팔았다. 적주는 구루 전통의 곡주로 맥주와 비슷했다.
-시원하게 물길에 담아둔 적주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점원들은 시냇물을 요리조리 헤엄치는 장어처럼 잘도 손님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잘 보니, 이 가게는 간단한 음식과 적주를 주로 파는 곳이었다. 적주를 팔고 적주를 사는 소리가 왁자지껄 어우러지면서, 배우들이 내는 음악도 한층 가열차졌다.
-저도요! 여기도요! 적주 두 잔요!
대장장이가 탓, 탓, 제자리뛰기를 하며 손을 뻗었다.
-예에 ! 적주 두 잔 들어갑니다! 감사합니다!
-으히히.
대장장이가 웃으면서 독사의 손에 적주 한 잔을 쥐여주었다.
-이게 또 힘들게 일하고 난 다음의 맛이지. 운 좋은 줄 아세요, 아저씨. 공짜로 혈화극도 듣고 말이야.
-…….
-마셔요. 마셔. 오늘 아저씨 일하는 모습은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래를 보고 투자해주겠습니다. 원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어? 안 그래?
-…….
독사는 왠지 모르게 싱숭맹숭한 감정을 느끼면서 적주를 들이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벌컥벌컥 흘러든 적주는…… 시원했다.
한 모금 마시니, 바로 청량한 밀의 향내가 목구멍에서 파아 솟구쳤다. 입안을 시원하게 매운 밀향은 단번에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코끝이 벌렁거렸다.
-크흐! 으아!
-어때요? 죽여주죠. 제가 여기 술집을 자주 오는데 적주맛이 그냥 끝내줘요. 좋은 적주 빚는 가게야 구루에 넘치고 넘치지만, 제가 볼 때 가성비는 여기가 짱입니다. 오외 아저씨! 술 좀 마실 줄 아는데!
-여기, 어. 여기 맥주 한 잔 더!
-맥주? 웬 맥주 타령이에요? 맥주 마시려면 딴 곳 가야 돼요. 아무튼, 거기 점원! 여기 적주 한 잔 더요!
세상이 알록달록해졌다.
노을진 하늘은 빨갛게 색칠된 팔레트 풍경화 같았고, 그 아래서 종알종알 떠들거나 술잔을 들거나 춤을 추는 손님들은 다 천사 같았다. 근처에서 흘러드는 춤소리와 음악소리는, 바로 [자신]의 심장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지?
몸이 간지러웠다.
-원래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음. 이 정도는 아닌데… 진짜 뭐지?
-뭐가요?
-몰라.
-아. 이 아저씨 취했군. 마시는 자세를 보니까 주당이다 싶어서 막 시켰는데. 어휴. 고작 적주 두 잔 마시고 뻗어요? 자아, 자아. 아저씨. 정신 차려봐요. 일해서 지쳤나 봐. 그날 일이 힘들었으면 원래 술빨이 더 받기도 해요.
-안 뻗었어…. 그냥 막 좋아서…….
둥, 둥, 음악이 틀렀다.
심장이 들떴다.
-음.
독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어쩌면 잘못된 표현일지 몰랐다. [심장]이 먼저 일어났다. 혼자서 일어날 수 없는 심장을 위해 몸통과 팔다리가 마저 움직인 것이다. 독사라는 이름, 그의 머리, 정신은 맨마지막에 가서야 일어섰다.
-으하하.
-깜짝이야! 아저씨, 뭔……. 아. 춤추자고요?
-그래!
독사는 밝게 웃었다.
수련에 들어간 이후로 이토록 마음 놓고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요정족 대장장이는 피식 웃더니, 익숙한 일이라는 듯 독사가 건넨 손을 잡았다. 귀인족과 요정족은 신장차이가 무척 커서, 독사는 허리를 굽혀야만 했다. 그러나 허리를 굽힌 독사의 얼굴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귀인족이랑 추는 건 또 처음인데….
-노래 좋다! 우오오오오!
-……뭐, 됐나.
독사가 파트너를 이끌며 흥얼흥얼 춤을 추었고, 이따금 기분을 끌어올려 혈화극단을 기분 좋게 칭찬했다. 그러자 혈화극단도 더 힘을 받아 발을 굴렀다. 발이 구를 때마다 오러가 장단을 맞추었고, 박자가 터졌고, 실처럼 퍼진 오러현에 따라 음악이 연주되었다.
-휘유!
-잘 춘다! 노래 좋다!
다른 손님들도 맞장구를 쳤다. 오러를 쓸 줄 알든 말든 상관없이, 손님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발을 쿠웅, 쿠웅, 굴렀다. 손뼉을 치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쿠웅! 짝! 혈화극단의 리듬에 따라 쿠웅! 짝! 울리는 소리는 점점 더 가게 앞에서 길거리로, 길거리에서 사거리로 퍼졌다.
-적주 팔아요! 시원합니다아아!
– 휘유우우우우!
-배우들 발소리 좋고! 손맛 나고!
마을 곳곳에서 굴뚝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깥, 밖에 펼쳐져 있는 일터라는 이름의 전쟁터에서 가족들을 귀환시키는 신호였다. 일하는 사람들은 굴뚝을 보고 일터를 빠져나왔다.
일렬. 이열. 사열. 오열. 길거리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겹겹이 붐비었다. 그런 길의 변두리에, 허스름한 술집에, 낡은 혈화극단들이, 별로 차려입지 못한 손님들을 대상으로 술을 팔며 노래를 흘리고 음악하고 술을 마셨다.
춤을 추었다.
-휘유우우우우!
그곳은 일종의 야외클럽일까.
비싼 티켓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가게에서 자신 있게 파는 적주 한 잔. 그것만 있으면 이 낡은 혈화극단의 무대를 들을 수 있다. 드레스코드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작업실 복장 그대로 온 손님, 작업실 옷에 코트를 얹혀서 그럭저럭 멋을 갖춘 손님, 그냥 작업하던 모양 똑같이 웃통을 벗고 온 손님, 온갖 손님들이 모여서 어느덧 술잔을 쥔 채 흥얼거렸다.
춤을 추었다.
-아아….
독사는 대장장이의 토끼 앞발만한 손을 꾹 쥐고, 이리저리 얼굴을 움직이며, 사방의 풍경을 연달아 바라보았다.
-예쁘구나.
-뭐가요? 노래가요?
-노래? 아니야, 노래가 아니야…. 그냥…. 술 마시는 사람들이, 웃고, 웃으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다들 신나서 재밌어하는 모습이….
-우와……. 진짜 취했어요. 아저씨. 이젠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모를 지경이야.
-예쁘다.
-…….
-어쩜 이렇게 예쁘나. 세상이.
독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뱀이 흘리는 눈물이었다. 피였다.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혈관을 타고 온종일 일하느라 지친 종아리의 혈관에, 무릎 관절에, 등짝에, 어깻죽지에, 팔뚝에, 손바닥에, 눈밑에, 온몸에 흘렀다.
-일이 힘드니까.
-죽을 거 같고, 죽고 싶으니까. 다들.
독사는 심장에 눈물을 흘리면서,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파트너의 손을 이리저리 이끌었다. 가게 앞은 이미 작은 광장이 되었다. 혈화극단을 중심으로 춤을 추는 취객들이 둘러쌌다. 여기 적주! 한 잔 더! 하는 소리와 예에! 지금 갑니다! 하는 소리들조차, 소음이 아니라 음악의 일종인 양 흥겹게 들렸다.
-그러니까, 살려고 술 마시는 거야. 재밌어지려고.
-술 마시고, 춤추고, 흥이 나고, 음악이 흐르고. 다시 춤추고.
독사는 작은 몸집의 요정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품에 안아, 빙그르르 발놀림을 돌렸다. 주변에서 오오오오!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독사에겐 들리지 않았으며, 품에 안겨버린 요정족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춤추고. 일하고. 죽을 것 같고. 다시 춤추고. 재밌고. 아름답고. 일하고. 죽을 것 같고, 다시 춤추고, 재밌고, 아름답고……일하고. 또 일하고. 또 죽고 싶지만, 또 재밌어지고.
까앙!
-아. 이제 좀 알 거 같다.
독사는 행복한 듯 흥얼거렸다.
-인간은 다 필사적으로 일해. 필사적으로 일하면 그야 죽고 싶어지지. 죽고 싶어서, 죽지 않을 정도로 재미를 찾는 거야. 찾을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 춤을 출 수밖에 없거든.
까앙!
-힘들어서 노래하고, 힘들어서 술 마시고, 힘들어서 같이 나와 밥을 먹고, 죽을 것 같아서 춤을 춘다. 아아, 그래. 음악을 위한 음악 따위는 없지. 당연히. 죽고 싶을 정도로 심하게 일해서, 이제 잊어버리고 싶은 하루가 있는 자에게만, 음악은 음악이야. 잊어버리고 싶은 하루가 없는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고.
-뭘 중얼중얼거리네…… 아저씨. 취하면 성격이 좀 바뀌나?
-아아.
까앙!
-행복하구만.
-…….
-망치질 두드리는 건 존나 힘들었지만, 그래. 내일부터 또 힘들어지겠지만. 야장. 지금, 행복하지 않아?
-…….
-지금은 그래도 인생이 좀 재밌지?
원래부터 정파(正派)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예.
원래부터 대장장이에 어울리지 않는 요정족이었다.
-당연히 즐겁죠. 이래서 제가 일하지 않는 시간을 제일 사랑하는걸요.
원래부터 무언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락한 가게와 시원한 적주, 바삐 돌아다니는 가게 점원, 어디서 무엇을 일하다 왔는지 모르겠지만 하루의 피곤함이 고스란히 목깃에 찌들어 있는 자들, 길거리, 삼거리, 구루, 도시에, 모든 도시에, 일하다 지쳐버린 퇴근자들이 넘쳐흘렀다.
그들이 잠시나마 가지는 사치.
한 잔의 술. 맛있는 안주. 친구와의 헛소리. 오늘 죽을 것 같았던 사기(死氣)를, 결코 사라지지 않을 이 눅진눅진한 감정을, 어떻게든 깎아내고 덜어내어, 다시 내일 일하기 위하여.
춤을.
-……다들 살아있어.
-…….
-삶이란, 죽도록 힘들지만. 한 순간 넘겼을 때는 잠시 숨을 쉴 수 있는 거야.
독사는 그 숨을 지키고 싶어졌다.
정(正)이란, 범인의 행복을 아름답다 말하는 것.
정(正)이란, 하루의 고된 노동을 어떻게든 끝마친 자에게 어서 쉬라고 말하는 것.
정(正)이란, 술과 춤 그리고 노래를 사랑하되, 다만 일을 하고 끝마치고 난 자의 술과 춤 그리고 노래를 사랑하는 것.
-야장.
-……네?
-오래 살아라. 사고 조심하고….
독사는 대장장이의 어깨를 툭 쳤다.
허우적거리는 걸음으로 노래와 춤이 흐르는 광장을 벗어났다.
-끝까지 살아남자. 너도. 나도….
-…….
-우리 모두.
광장에서 벗어나자, 귀인족의 그림자는 다른 인파에 가려졌다.
천천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요정족 대장장이는 홀로 덩그러니 남아, 노을에 가려져 사라진 누군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
탓,
독사는 달리고 있었다.
-뭐 차려입고 얌전히 음악을 듣겠다는 심정으로 혈화극에 놀러 다녔으니, 그동안 암만 좋은 연극을 봐도 와닿는 게 없었던 거지. 아아. 당연한 거다.
달렸다.
한나절 동안 봉인해둔 오러를 풀어 젖히자, 온몸에서 피가 들끓었다.
시야가 환해졌다.
탓, 하고 땅을 뛰면 어느 순간 이미 독사의 발바닥은 마을 지붕을 밟고 있었다.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어어- 어어어이-’ 하고 독사를 손가락질했다. 그 손가락이 미처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독사의 신형은 빠르게 타앗, 탓! 지붕들을 밟으며 사라졌다.
독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원래 힘들고, 죽을 것처럼 일하고 있어야. 죽을 것 같아서야, 비로소 음악이 들려오고 춤이 추어지는 거다. 잊어버리기 위해서. 견디기 위해서. 행복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남으려고 행복해지는 거다. 살아남으려고…….
까앙!
-살아남으려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독사가 내딛는 발걸음에 오러가 울릴 때마다, 독사가 가로짓는 허공에서 오러가 터질 때마다, 쇳소리가 울렸다.
까앙!
출두 410일.
독사는 어느 산와족 농가에 식객으로 들어가, 2년 동안 농부 가족과 함께 숙식하며 땅을 일구었다. 단단히 굳어버린 땅바닥을 쟁기가 파고 들어갔다.
까앙!
출두 1503일.
독사는 어느 요정족의 은행에 입사하여 돈과 관련된 일을 했다. 언제나 출신을 감추고 살았기에, 그가 귀인족의 신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업무 상사는 독사의 뒤통수를 잘 갈구었다.
까앙!
출두 2874일.
독사는 어느 귀인족의 광산에 들어가 곡괭이를 휘둘렀다. 산와족이 노예들을 부릴 때에 비해 광산업의 사정은 많이 개선되었다.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막장의 일.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독사는 물 젖은 수건을 들이마시며, 힘겹게, 곡괭이를 휘둘렀다.
까앙!
출두 7021일.
까앙!
출두 14059일.
까앙!
출두 19856일.
까앙!
출두.
22400일.
-…….
원래부터 정파(正派)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흐음.
원래부터 고독하지만 실력은 높은 검사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 정도일까.
원래부터 주인공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후욱.
산정에 서서 독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팔의 근육, 어깨, 등, 허리, 허벅지, 종아리, 발바닥까지, 자신이 들이마신 세상이 피가 되어서 자신의 온몸을 돌았다. 그리고 천천히, 뱉었다.
-후우우우우….
산정 멀리.
심해에서 솟아나, 이쪽으로 향해 오는 한 마리의 거대한 거북 괴수가 보였다. 누가 봐도 이 세상을 멸망시킬 것처럼 무지막지했으나, 독사는 그 괴수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눈길도 한 점밖에 던져주지 않았다.
그의 화두(話頭)는 인간이었으므로.
-어서 오라고. 김공자.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귀인족의 탈을 벗어던지고, 자기 자신의 몸을 지닌 채, 자신의 팔로,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서린 목소리로 말하며, 허공에 정권을 찔러 뻗었다.
-여기, 정파가 있다.
까앙!
쉿소리가 울렸다.
-싸움은 일이고.
까앙!
-일은 원래 고달프고 힘든 건데.
까앙!
-너랑 싸우는 일은 진짜, 그 중에서도 톱을 달릴 정도로 힘들어 죽어 자빠질 것 같으니까.
까앙!
-이 일 끝나면 말이다.
까앙!
-음악 좋은 곳에서, 술이나 존나 처마시러 가자고!
독사는 웃었다.
오대세가가 눈밭에 파묻혔으며 구파일방이 눈바람에 사라졌고 무림맹주마저 칼이 꺾여버린 작금. 마천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 득세하고 바라야가 노래하는 이곳에, 지금, 설원의 세계가 마지막으로 남긴 백도의 정영(正英).
천무문주(天武門主)가 웃고 있었다.
2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