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87)
1.
야심차게 준비한 흑기사의 첫 번째 공연은 대차게 망했다.
“이럴 수가…….”
성기사는 절망스러운 손짓으로 얼굴을 가렸다.
지난 1달 동안 혈화극을 너무나도 열심히 연습한 탓일까?
손짓 하나, 몸짓 하나에 연극투가 배어들어 현재 성기사의 포즈는 그 자체로 절망이라는 제목이 붙은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그것도 작가가 살아생전엔 1골드도 받아먹지 못해 쪽박차고 쓸데없이 관짝에 입성한 다음에야 불티나게 팔릴 예술-작품.
“다시 음악을 하고 싶었건만…… 그런가. 나의 과욕이었는가.”
성기사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은행잎처럼 버려진 종이 편지들.
실망했습니다, 최악이네요, 제 귀가 전생에 어떤 죄를 지어서 어제 같은 공연을 들어주어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등등, 저주와 경멸이 버무려진 악의의 샐러드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이제 은퇴하겠다. 김공자. 아니, 음악인으로서 은퇴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헌터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인생에서 은퇴하고자 한다…….”
어어.
“그래. 역시 우매한 대중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흑룡주?
“인간은 전부 쓰레기야.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기억하지 못해. 자기 과거를 제 살처럼 파먹으면서 살아가는 짐승들…. 후후. 그런 축생들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할 필요가 있을까? 김공자?”
눈빛이 위험하게 반짝거리는데.
이명이 흑룡주인 만큼 정말로 흑화해버린 것인지, 아나스타샤는 최종 보스의 오오라를 풍기며 후후 웃었다. 후후. 그것은 오직 흑막에게만 허락되는 웃음소리로 면전에서 이 사운드를 접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왕! 더 이상 당신은 저의 주인님이 아닙니다!”
이단심문관이 활짝 웃었다.
아니다.
잘 보니 이단심문관이 아니라 이단심문관의 헤어스타일을 한 금발 웰시코기, 즉 개새끼였다.
한 마리의 댕댕이가 헉헉거리며 끊임없이 내 바지에 침을 적시고 있었다.
“저는 저열한 인류를 계도시킬 사명을 갖고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멍! 비로소 우주의 신들이 저에게 끊임없이 속삭인 이유를 알겠군요. 저야말로 약속의 구세주! 걱정하지 마십시오, 멍! 당신은 특별히 전용 철창에 입실시켜 삼시세끼 고급 육포를 제공해주겠습니다! 머엉!”
뭐 이딴 개 같은.
아니 진짜로 개잖아?
“어이어이, 사왕.”
뭔가요, 랴오판.
잠깐. 대체 왜 내 반짝이를 댁이 손에 들고 있습니까?
왜 쑥스부끄러운 것처럼 볼을 붉힌 채 저의 눈치를 보는 거죠?
“이것 참. 내가 이렇게 말하기엔 민망한 일이지만 말이야….”
[반짝이는 자신이 말하겠다고 선언합니다.]반짝이가 겁나게 반짝거렸다.
내가 칼 이름 하나는 참 잘 지었지.
[반짝이는 자신과 독사가 사귀기로 했다고 말합니다.]파든?
[반짝이는 노래합니다. 이전의 마스터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 지금의 마스터가 짝을 만나 행복한 것을 보니, 자신 또한 자신의 행복을 찾고 싶어졌다고. 그 와중에 우수에 찬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거니는 이 무사를 보니, 그 곁에 자신과 같은 검 한 자루가 있어야만 하겠노라고.]“나 또한 같은 생각, 이랄까? 칼에 깃든 히로인, 이라는 장르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기도 했으니까 말이지. 이 칼이 지상 최고의 『예리함』을 자랑하는 【일본도KATANA】 가 아닌 것은 아쉽지만, 그것은 내가 견뎌내야 할 일상일 거야.”
미친.
독사는 뭔가 독사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고, 사춘기에 접어든 것처럼 반짝거리는 반짝이는 실제 연령이 최소 10000살에다 외모는… 칼이었다.
이 중에 누가 더 개새끼인 것인지 나의 두뇌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다.
혹시 두 사람은 모두 개새끼가 아니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천하의 개새끼인 걸까?
혹시 천하가 개새끼이고 나 홀로 개새끼가 아닌 것은 아닐까?
최소한, 아직도 내 바짓자락에 뺨을 부비면서 “멍! 멍!” 열렬히 꼬리치고 있는 웰시코기 이단심문관이 개새끼인 것만은 참으로 분명한 사실 아닐까?
내 인생은 망했는가?
-에라이 시발.
고개를 돌렸다.
배후령이 감자탕 뼛국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야! 내가 아무리 뒈져서 볼꼴 못볼꼴 다 구경해야 하는 처지라지만 쌍, 왜 네가 꾸는 개꿈까지 내가 들어와서 같이 봐야 하냐? 어? 제발 일어나라, 좀비 새끼야! 존나 일어나라고! 눈깔을 떠!
왜요.
난 보는 재미가 있구만.
내가 개꿈 꾸는 거 싫으면 댁이 뭔가 썸띵을 주시던가.
-이런 악마 같은 새끼가……. 야, 잠깐. 내가 미안. 미안했다. 좀비야. 아니, 공자야. 공자님.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네 개꿈에 날 등장시키지 말아줘! 그만! 난 그딴 춤 안 춰! 씨발, 그만해! 그만하라고!!
자아.
오늘도 배후령의 상쾌한 비명으로 하루를 시작해볼까.
2.
-진짜 너 50층에 올라가고 봐라. 아오 그냥, 어 아주 그냥, 아무런 조언도 안 하고 너 망하는 꼬라지만 구경해주마! 네가 어쩌다 살천성을 발랐다고 기고만장해졌나 본데 말야. 그건 네가 운이 좋아서 성공한 거고, 50층은 존나 살벌한 곳이라고. 어? 나중에 가서 울고불며 내 바짓가랑이 물고 늘어져도 절대 충고 한마디도 안 해줄 테다.
“에이. 다 큰 어른이 삐지긴.”
-네가 한번 네 개 꿈을 돌아봐! 가끔도 아니고 맨날 저딴 꿈을 꿔대는데!
나는 배후령의 불평을 귓등으로 흘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오. 일어났는가, 김공자.”
지하실에는 성기사가 앉아 있었다.
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성기사였지만, 건틀릿만은 벗어두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예. 굿모닝입니다, 파트리시아.”
“마침 잘 됐군.”
성기사가 싱글 웃으면서 폰을 들었다.
“안 그래도 네가 내려오는 걸 기다렸다. 봐라. 대박이다.”
“뭐길래 그래요?”
“뭐겠는가. 혈화극이다, 혈화극. 우리가 저번에 한 공연의 반응들이 슬슬 나오고 있다.”
“아….”
문득 오늘 겪은 꿈이 기억났다.
공연이 망했다며 이제 은퇴하겠다던 성기사의 환상이 떠오르자, 괜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어때요? 반응 괜찮아요?”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슥슥. 성기사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대문짝만한 제목들이 스쳐 지나갔다.
“괜찮다마다! 아주 인터넷이 난리가 났다!”
성기사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우리의 새로운 무대에 바깥세상 사람들은 경악하고 있어. 믿겨지는가? 내로라하는 연출가들이 내 이메일에 쉴 새 없이 연락을 보내는 중이다.”
“헤에.”
다행이네.
아무래도 오늘 밤에 꾼 꿈은 정말로 개꿈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내심 안도하며 차례차례 기사 제목들을 읽었다.
『혈화극: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무용 장르.』
『무용수, 연출자, 연주자가 분리되지 않는다!』
『독일의 거장 ‘이것은 무용계의 재즈.’』
『매 공연마다 천차만별 달라지는 오러의 향연.』
『탑은 이제 예술에서 구세계(舊世界)를 뛰어넘으려 하는가?』
그야말로 열화와 같은 호응.
성기사의 입가엔 흐뭇함이 넘쳐흘렀다.
“우리들에 대한 특집기사까지 떴다. 정말, 재즈를 할 때는 관심 한 점 가져주지 않은 주제에 이제 와서 난리를 치다니. 시원섭섭하군….”
그때였다.
-크아아아아악!
지하실 저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성기사는 힐끗 눈을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쳐다봤고, 나 역시 그녀를 뒤쫓아 바라보았다. 그곳엔 철창으로 된 감옥문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명은 곧 끊어졌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려 다시 폰질 삼매경에 빠졌다.
“야아아. 예상은 했지만 반응이 좀 굉장하네요. 뭐 포스트? 무슨 타임즈? 이거 되게 유명한 신문들 아니에요?”
“유명한 정도가 아니다. 김공자. 세간에 너무 관심 없이 사는 거 아닌가? 아나스타샤는 물론이고 나도 어젯밤엔 인터넷 반응들을 확인하느라 밤을 새웠다.”
“전 그게 얼마나 허망한 짓인지 깨달았거든요…. 조심하세요. 다른 사람들 반응 보는 것도 일종의 중독이에요, 중독.”
“으으음.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자경단의 부단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예술가로서 관심을 받게 되니 도저히 참기 어렵군. 봐라. 이 코멘트 하나하나, 평론 한줄한줄이 마약인 것이다….”
“이제부터 익숙해지셔야죠. 명감독 명연출가님. 앞으론 이게 일상이 되실 텐데.”
“하하. 우리 흑기사 길드장님께서 아부 솜씨가 일취월장….”
또다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아아아!
우리는 신경 쓰지 않고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다만 이번엔 비명 소리가 좀 끈질겼다. 아까처럼 금방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진 것이다.
-사, 살려줘! 제발 살려주십쇼!
-이제 그만! 아아아악! 그만, 제발! 더는 거기에…….
-불겠습니다! 네? 전부, 전부 털어놓을 테니까요! 혼자 두지 말아주세요!
-너희 내가 누구인지 알아!? 어! 두고 봐, 여기 나가기만 하면….
우리는 생까고 놀았다.
5분 정도 흐르자 비명이 잦아들었다. 그동안 우리는 인터넷에 서식하는 익명의 언론인들, 평론가들로부터 게걸스럽게 에고를 받아먹었다.
우리의 자아가 포만감을 느끼다 못해 배 터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러니까 성기사도 나도 이 자그마한 스마트폰에 자의식을 떠 맡기는 짓이 꽤 병신 같다는 걸 슬슬 자각할 즈음에, 철컹.
지하실 쇠창살에서 문이 열렸다.
“좋은 아침…….”
문에서 나온 사람은 흑룡주였다.
“…응? 뭐야. 김공자도 있었어?”
“넵. 굿모닝입니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성과 좀 있어요?”
“글쎄…. 그냥저냥일까. 이미 나올 정보는 다 나왔다는 느낌.”
흑룡주는 하품을 때리며 흐느적흐느적 걸어갔다. 지하실 구석에 탕비실처럼 작은 팬트리 선반이 놓여 있었다. 흑룡주의 손이 허우적 거리며 커피 필터를 더듬거렸다.
“아, 그냥 앉으세요. 제가 타드릴게요.”
“응…. 고마워.”
흑룡주는 척 봐도 피곤해 보였다. 눈 밑에 다크써클이 찐하게 낀 것이 정말로 밤을 꼬박 새워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나한테 의자를 양보받고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유부남이 좋아. 몸에 배려랑 매너가 배어 있다니까.”
“그건 편견이 섞인 말이에요. 아나스타샤. 유부남이라고 다 그런 게 아니라 저라서 이런 배려가 가능한 겁니다.”
“윽. 뭐야? 재수 없어….”
“가령 저는 아나스타샤의 커피 취향이 헤이즐넛 라떼라는 사실을 알고 있죠. 뜨겁게 해서 샷 하나 추가하면 더 좋아한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헤이즐넛 라떼를 타드릴 거예요. 자. 어서 감동하십쇼.”
“……어라? 재수 없는 천사…?”
흑룡주가 커피를 홀짝였다. “제길, 존맛탱이잖아…” 하고 원통스럽게 중얼거린 뒤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네가 한 예상이 맞았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배신자들이 있었군요.”
“……응. 흑룡이랑 만신전에 사교집단이 있더라.”
아나스타샤는 품속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었다.
“정식 명칭은 세탑학회(洗塔學會).”
“…….”
“바벨탑이 신의 기적이고, 인류는 이 기적에 호응해서 탑을 깨끗하게 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품은 비밀결사야.”
“정화란 건?”
“테러를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더구나. 뭐, 미친 애들이지. 간부급 2명에 일반 길드원이 11명. 인원이 많다고 보긴 어렵지만…. 만약 지금 눈치채지 못했다면 나중에 규모가 더 커졌겠지.”
그래.
나는 아나스타샤에게 수첩을 넘겨받아 팔락, 팔락, 훑어보았다.
『탑은 일찍이 무너진 바벨탑의 재림으로 신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하늘에 닿는 기회를 허락해주심이며….』
『이미 더럽혀진 바깥세상을 버리고 탑 안에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라 명하셨으니, 신심을 다하여 이곳을 복되게 할지어다.』 『작금에 탑을 지배하는 자들은 망령된 무리로 이 거짓된 지배자들을 몰아 없애는 것이야말로….』
광신의 속삭임들.
마치 낙서처럼 휘갈겨진 글귀들은, 수첩의 주인이 몇 번이나 소중하게 읽었는지, 문장 끄트머리마다 지문이 뭉개져 있었다.
“그렇군요.”
나는 침음을 삼켰다.
탑주(塔主)가 내게 보여준 세상에선 이 비밀결사 때문에 흑룡주가 사망했다. 이단심문관 또한.
어쩌면 이 시기부터 활동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비밀리에 정보를 캐보았는데….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정답이란 걸까.
5대 길드가 권력을 쥐고 있는 현 체제에 불만을 품은 인사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사교와 광신이 결합하여 악성 종양처럼 길드 내부에도 잠복하고 있었다.
-싫어! 이젠 싫어! 거, 거기로 보내지 마! 날 혼자 두지 말아줘!
그리고 광신도들은 이제 지하의 감옥에 갇혀 비명을 질렀다.
흑룡주가 작게 진절머리를 쳤다.
“몽마족들이 심문을 도와줘서 편했지 뭐니. 피를 보지 않아도 되니까…. 예전 같았으면 벌써 모가지 한두 개는 날아갔어.”
“얼마나 무서운 꿈을 꾸게 하길래 저런데요?”
“딱히? 그냥 아무것도 없는 하얀 지평선에다 떨어트린 다음, 꿈속 시간으로 30일 정도 혼자 내버려 뒀을 뿐이야.”
뭐야. 지옥인가.
옆을 보니 성기사도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우리 멤버들 가운데 사람 괴롭히는 재주가 일천한 사람이 없다지만 그 중에서도 흑룡주는 독보적이었다.
“아무튼 네 덕분에 집안을 정리했어. 고마워.”
아나스타샤는 무덤덤하게 커피잔을 내려 놓았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묻고 싶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안 물어볼게. 중요한 건 우리가 만에 하나의 위험요소를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는 거지.”
“정확해요.”
“좋아. 우리의 리더 씨.”
철문 너머에서 재차 비명이 들려왔다.
흑룡주는 손깍지를 껴서 턱을 올린 채, 흐응, 하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배신자와 이단자는 처리했어. 세상 사람들은 혈화극 공연에 눈이 팔려 아무도 눈치를 못 했지. 이렇게 완벽하게 뒤처리를 해놓고, 과연 우리의 리더께서는 뭘 하시려는 속셈일까?”
탁.
나는 수첩을 덮었다.
“당연히 하나밖에 없지요.”
그리고 말했다.
“내일. 50층에 오르겠습니다.”
28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