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88)
3.
비 내리는 아침.
나는 우비로 얼굴을 가리고 광장에 나왔다.
광장에 설치된 홀로그램 전광판으로부터, 문득,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부디 신중히 투표해주세요.
다름 아니라 내 목소리였다.
자그마치 두 달 전에 녹화된 영상이 틀어진 것이다.
‘으힉.’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왜 목소리가 맨날 저따구야? 젠장. 소름 돋네….’
나는 얼른 도망쳤다.
광장을 나가면서 슬쩍 보니, 홀로그램 영상에선 나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진지한지 정면을 똑바로 본 채 또박또박 고하는 내 모습이.
-여러분. 이번 투표는 단순히 저희를, 5대 길드를 신임해줄 것인지 말 것인지 묻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50층에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더 이상 공략을 포기하고 이곳에 머무를 것인가? 즉, 우리 탑 전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투표입니다.
-50층부터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겁니다.
그다음엔 바빌론 광장의 풍경이 비추었다.
홀로그램 속 광장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막 투표를 끝낸 탑의 주민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사왕! 사왕! 사왕….
-예. 지금 두 달 전의 영상을 함께 보셨습니다.
영상 한편으로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보시다시피 2달 전에 실시된 투표는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었는데요. 사실상 5대 길드를 신임할 것인지, 현재의 체제를 그대로 용인할 것인지, 단판승부나 다름없는 투표였습니다. 교수님. 예상외로 찬성표가 반대표를 완전히 제쳤었지요?
-예에. 아무래도 사왕. 그러니까 에, 저희 서열 2위의 헌터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잖아요? 부부가 인기도 좋고요.
-아주 좋죠!
-예에에. 그러니까 이게 일종의 인기투표다….
-인기투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죠. 예. 투표 때 보여준 사왕의 모습, 그리고 그 이반시아 공작이 따박따박 반박한 거. 쓰읍, 그런 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나….
-그런데 교수님. 50층부터는 저희 말고도 다른 세계의 헌터들이 합류한다지 않습니까? 다른 세계. 이세계(異世界). 그거에 대해선 어떻게…….
광장에서 멀어질수록 뉴스 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나의 부끄러움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우비의 후드를 고쳐 썼다.
‘……벌써 두 달이 지났나.’
투표가 거행된 지 어언 60일째.
‘시간 한번 빠르네.’
그동안 나는 탑의 내부를 정리하는 데 힘썼다.
세탑학회, 즉 만신전과 흑룡에 잠복한 광신도들을 처리한 것도 내부정리의 일환이었다.
‘이제 방심하다 뒤통수를 당할 일은 없어.’
준비는 만전.
만에 하나라도 우리 탑이 내부로 분열될 가능성은 적겠지.
나는 구름의 냄새가 고인 물웅덩이를 밟으며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어서 와, 사왕.”
살풍경한 할렘가 한복판에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두 달이면 금방인걸.”
“여기서 저를 기다리신 겁니까?”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거리였다. 오랫동안 방치된 지붕들은 비를 막지 못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파이프로 물이 흘렀다. [공녀]는 쭈그려 앉은 채, 물살이 콸콸 쏟아져 내리는 빗물받이에 검지를 지그시 대고 있었다.
“으응. 어차피 나를 찾으려고 나선 거잖아? 사왕이 가는 길을 미리 예상해서 여기로 마중 나온 거야. 비도 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
“과연.”
나는 공녀의 뒤에 다가섰다.
이 금발의 [기둥]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전히 빗물받이에 손을 대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공녀가 검지를 스윽 움직이자, 흘러내리는 물살이 손가락의 궤적에 따라 양 갈래로 갈라졌다.
“나를 찾은 이유는 뭐, 50층을 개방해달라고 부탁하려는 거지?”
“예.”
“좋아. 난 언제든 부탁을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괜찮을까? 사왕은 지금 혼자잖아. 모처럼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이 많이 생겼는데 다 함께 전송되는 편이 좋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50층이 열리면 다른 세계들이 개방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다른 세계들에서 ‘역으로’ 저희를 침공할 수도 있게 되죠.”
“흐응.”
“저를 제외한 헌터들은 모두 이곳에 남아 침공을 대비합니다. 이미 지정족…… 아수라들은 만반의 태세를 갖췄어요. 만약 어떤 세력이 멋도 모르고 저희를 초보자 취급하면서 침략해오면, 글쎄요. 산통 좀 깨질걸요?”
“신중하구나.”
공녀가 읏차, 일어섰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방어태세. 당신 혼자서 정찰병이 되어 50층에 뛰어들겠다는 거네. 어차피 일이 잘못돼도 당신은 안 죽으니까.”
“정확히 그거죠.”
“응. 알았어.”
공녀는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았다.
“지금부터 너희는 [초보자] 시절을 졸업한 거야.”
손바닥의 물기가 전해져 온 순간, 머리 위, 천공이 찢어졌다.
쿠르르르….
보랏빛 벼락이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비구름 속에서 천둥이 으르렁거렸다. 수증기를 갑옷으로 휘두른 먹구름조차 미처 천둥을 껴안진 못했다. 콰르르르! 쿠르르…! 구름이 열 갈래, 백 갈래로 찢어지더니, 보라색 우레들이 미세혈관처럼 하늘에 번졌다.
[초보자 보호 조치가 정지합니다.]내 위에서 뇌우가 쏟아졌다.
[초보자 특전이 영구히 박탈됩니다.] [사자세계(觸子世界)가 정식으로 공통 루트에 합류합니다.] [현 시간부로 사자세계는 자유로이 50층을 왕래합니다.] [현 시간부로 이세계들은 자유로이 사자세계를 왕래합니다.]사라진다.
여태껏 우리를 지켜준 무형의 성벽들이 무너진다.
‘유수하가 단 한 번도 돌파하지 못한 세계.’
내 입술에 스며든 빗물을 삼켰다.
‘살천성과 같은 헌터들이 돌아다니고… 검제가 제패했던 세계.’
천둥이 내리꽂혔다.
콰르르르륵!
그 어떤 벼락보다 소리가 거대했다. 천공부터 지평선까지, 하늘이 말 그대로 두 쪽으로 쪼개졌다. 먹구름은 물론이고 끊임없이 쏟아지던 빗줄기마저 양갈래로 갈라졌다. 쿠르르르…! 한 번 벌어진 틈새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마치 계란 껍질처럼.
[모두에게 알립니다.]하늘이 탈피(脫皮)하고 있었다.
[금일부로 50층이 개방됩니다.]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알립니다.] [금일부로, 50층이 개방됩니다.]마침내 다 벌어진 하늘의 저편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탑.
하나의 거탑이 세계수처럼 솟아 있었다.
“이제 언제든 고개를 들면 저 탑이 보일 거야!”
공녀는 나와 함께 비를 맞으며 하늘을 올려봤다.
“인형들이 잠든 저택에서도. 아이김 제국에서도. 눈에 파묻힌 설원의 강호에서도, 도서관의 창밖에서도, 지정족들이 태어난 구루에서도…. 너희가 함께하기로 한 세상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
“바이바이. 사왕. 꼭 살아남아.”
공녀가 물에 젖은 채 웃었다.
“100층에서 기다릴게!”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예”, 라고 대답하려던 순간.
[50층에 입장합니다.]새하얀 빛이 내 눈앞을 감쌌다.
4.
나는 일전에 50층을 들린 적 있다.
일종의 꼼수, 비공식 치트를 쓴 거였지만.
그래도 스테이지에 입장한 순간만은 주변이 조용했던 거로 기억한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가 당신의 출현을 감지합니다!]이번엔 그러하지 않았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당신에게서 살천성의 기척을 느낍니다.] [‘외로운 구도자’가 새로운 세계의 주민을 환영합니다.] [‘수면에 비친 연꽃’은 당신이 지닌 검을 관찰하고 있습니다.]내가 아직 눈을 뜨기도 전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을 때, 경고음들이 격렬하게 날아들었다.
언젠가 들어본 이명들. 들어본 적 없는 이명들이 메시지를 발하며, 나의 공식적인 스테이지 입장에 반응하였다.
‘환영인사가 거창하구만!’
그러자 오늘 아침 개꿈을 꾼 이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배후령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당연히 거창할 수밖에 없지. 모르긴 몰라도 김좀비 너, 아마 거의 모든 성좌들한테 요주의 인물로 뽑혔을걸.
‘네? 왜요? 여기서 한바탕 난리를 치긴 했지만 그 일은 회귀해서 [없었던 일]이 됐잖아요. 쟤들 입장에선 저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일 텐데.’
-직접 보는 거야 물론 처음이지. 짜식아. 네가 지금까지 무슨 짓거리들을 저질렀는지 함 떠올려봐.
서서히 시야에서 하얀 빛무리가 묽어졌다.
‘제가 뭘 했길래요?’
-일단 마호스의 사도를 쳐 죽였지. 죽이기만 했으면 모를까, 아예 네 스킬로 목숨을 거두어서 수하로 만들었잖아. 얘가 심지어 살천성을 잡았어요. 너 성좌들 사이에서 살천성이 얼마나 유명한지 알기나 하냐? 또라이 중에서도 상또라이 취급받았어. 넌 그 또라이를 잡은 거야.
‘엑. 제가 김율을 거둔 게 벌써 성좌들한테 알려졌다고요?’
시력이 돌아오면서 점점 눈앞이 맑아졌다.
‘그건 말도 안 되죠. 제가 거둔 건 어디까지나 김율이잖아요. 아직 살천성의 [인형들]은 멀쩡히 움직이고 다닐 건데….’
-오냐. 전부 알진 못하겠지. 하지만 눈치 빠른 새끼들이 있거든. 최소한 한두 명은 살천성을 계속 관찰하고 있었을 테고, 너한테 잡아 먹힌 걸 알아냈을 거다. 뭔 소린지 알겠어? 조심하라고, 짜샤.
툭.
시각보다 먼저 회복된 건 촉각이었다.
전송이 완료되고 내 발끝이 땅바닥에 닿았다.
-넌 [가을비의 마왕]을 잡았어. 그거뿐이냐? [수호의 여신]을 전부 모아다 복속시켰지. [만상의 대도서관장]은 너 때문에 아예 평범한 꼬맹이가 됐고. 이게 네가 저지른 짓들이다. 50층도 올라오지 못한 초보자가!
배후령이 나직하게 웃었다.
-원랜 성좌들한테 친절하게 안내를 받아서 꾸역꾸역 퀘스트 보상을 먹어야 정상인데, 넌 그냥 퀘스트들을 깨부수고 다녔잖아! 게다가, 이건 뭐 아무도 모르겠지만, 넌 탑주까지 만났지. 어? 내가 봐도 이상하다니까.
마침내 주변의 풍광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상황이 참 묘하단 말이지. 자아, 좀비야. 별새끼들이 널 직접 보는 게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너 같으면 이런 미친 신입한테 관심이 없겠냐? 있겠냐?
음.
‘좀 있을 거 같네요.’
-존나 관심이 넘쳐흐르겠지.
‘뭐 어때요? 저 관심받는 거 좋아합니다. 돈 워리. 비 해피. 오케이?’
-미안하지만 그 관심이 그 관심이 아니란다. 아가야.
그리고.
-성좌는 일종의 게임마스터야. GM. 퀘스트를 만들어서 주는 존재지. 그런 놈들한테 관심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느껴봐라.
내가 전송된 곳은 황야 한복판.
기껏해야 이상한 몬스터들이나 돌아다녀야 할 그곳은, 어째선지 수십 명의 인파로 득실득실거렸다.
그 사람들이 우연히 몬스터 사냥을 나온 헌터들이고, 나 또한 우연히 이곳으로 전송되어, 우리가 마주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우연이라 믿고 싶었지만, 한눈에 봐도 그런 거 같진 않았다.
“—-왔다! 저놈이다!”
왜냐하면 일단 그놈들이 나를 보자마자 손가락질했기 때문이며.
“드디어 나타났나!”
“전원 전투 준비!”
아울러 그놈들이 저마다 흉측한 칼을 한 자루씩 들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질과 칼날을 보고도 세상만사를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기란 생각보다 꽤 어려운 법이다.
참고로 나한테도 어렵다.
“아니, 이건 또 뭔…?”
나는 드디어 50층에 입성했다는 감흥에 젖어볼 틈도 없이 얼른 성검을 뽑았다. 이미 포위를 당한 상황. 스무 명이 넘는 인간들이 나를 둘러쌌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가 신도들에게 퀘스트를 내립니다.] [당신은 퀘스트의 대상으로 지목되었습니다!] [퀘스트가 공개됩니다.]그리고 허공에 어이없는 텍스트가 주르륵 떴다.
+
[사왕 토벌령]난이도: 불명
임무 목표: 사왕(死王)은 이번에 새로 등재된 사자세계의 인간입니다. 아직 공용 루트에 진입하지도 않은 시절, 감히 사왕은 ‘영원한 평야의 군마’에게 대적했습니다. 마호스의 사도를 참살한 것입니다.
전사들이여!
‘영원한 평야의 군마’는 그대, 용감한 신도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사왕을 토벌하십시오! 그가 50층에 막 도착하는 틈을 노려 기습하십시오!
부디 조심하시길.
사왕은 무시무시하고 간악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교도입니다. 휘하에 수백 명의 광신도를 거느린 악의 교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사들이여. 아직 공용 루트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때 공격한다면 그대들에게도 승산이 있습니다!
사왕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전사에겐 마호스께서 사도의 축복을 하사하실 것입니다.
※단, 당신은 해당 퀘스트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퀘스트의 [목표 대상]입니다.
+
“…….”
어이가 사라지면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뭐? 무시무시하고 간악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교도?
‘그게 누구야!?’
나 그런 놈 모르는데.
이거 뭐 오류라거나 무슨 착오가 있는 거 아닌가.
-착오는 무슨. 좀비 너 마교잖아. 모르는 놈이 보면 사교도 맞지.
아니 그래서 시방 제가 휘하에 수백 명의 광신도를 거느린 악의 교주라고요?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잖아. 소교주. 거 독사인가 뭔가 하는 놈도 말했지만 사실상 네놈이 이번 대 천마야. 천마. 영어로 말하면 데빌 오브 헤븐 아니겠냐? 캬아. 이름만 들어도 딱 나쁜놈이네.
아니.
그게 뭔 개소리야!
“방심하지 마라!”
이 황당무계한 퀘스트를 받았을 헌터, 이세계의 주민이 외쳤다.
“마호스께서 단단히 조심하라고 예언까지 내려주신 놈이다! 겉모습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 하여 속으면 안 된다! 놈은 악마 중의 악마로, 초보자라고 얕봤다가는 우리가 당한다! 발검!”
“발검!”
“모두 쳐라!”
포위망을 형성한 헌터들이 일제히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나는 오러를 끌어올려 태세를 정비하면서도, 입으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요! 저 나쁜 놈 아닙니다! 어느 쪽인가 하면 오히려 착한놈이에요! 여러분, 이 퀘스트 거짓말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상도덕도 없이 퀘스트에 구라를 쳐? 저기요, 여러분. 여러분? 퀘스트에서 말하는 것처럼 저 나쁜 새끼가 아니라니까요!?”
-야, 소용없다.
배후령이 낄낄거렸다.
-원래 퀘스트는 GM 마음이야. [가을비의 마왕]이 너한테 내려줬던 퀘스트 기억 안 나냐? 괜히 살천성이 성좌들 쳐죽이고 다닌 게 아니지.
‘아니, 그럼 여기서 뭘 어떡합니까?’
-어쩌긴 뭘 어째. 싸워야지.
배후령은 히죽 웃었다.
-조작과 왜곡이 판치는 50층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공자야!
이런 젠장.
28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