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298)
3.
남자는 머리가 산발이었고 눈밑이 퀭했다. 그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반갑다. 내가 [영원한 평야의 군마]께 깃발을 받은 몸. 그분의 사도다.”
남자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사왕입니다.”
“알고 있다. 본래라면 내가 너와 만날 일은 없어. 결코 없지. 하지만 [보조작가]와 [광전사], [파파라초]가 부탁하더군.”
흑발의 남자는 주위를 둘러봤다. 깊숙한 지하 동굴. 내 부탁을 듣고 마호스의 사도를 불러준 헌터들이 멀찍이 서 있었다. 그들은 내 말을 들어준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싶은 표정으로 우리를 힐끔거렸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무언가를 청하는 일은 드물다. 나는 레어한 이벤트를 좋아한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을.”
마호스의 사도는 입끝을 올렸다.
“나야말로 너한테 감사하마. 이 대화가 끝나고나면 나는 너를 잡을 것이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마호스께서 내리신 퀘스트를 기분 좋게 달성할 수 있겠군.”
“그래서? 왜 나를 보자고 했지? 항복하려는 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4.
“뭐? 이해?”
작달막한 소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머리 양쪽으로 금발 만두가 달려 있었다. 차디찬 겨울에는 만지기만 해도 뜨끈할 것처럼 생겼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소녀는 365일 내내 분노에 차 있다는 듯 목소리에 엔진이 달렸으므로.
그녀는 [사랑과 정욕의 화신] 바비트의 사도였다.
“예. 여러분이 모시는 성좌를 깊이 알고 싶거든요.”
“너 웃긴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도 웃음거리인데, 주제에 성좌를 이해하겠다고? [보조작가]가 부탁하지만 않았으면 이런 냄새 나는 동굴엔 오지도 않았어.”
한창 말을 쏘아붙일 때 바비트의 사도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마치 모기를 쫓아내려는 것처럼 손짓하며 짜증을 부렸다.
“아! 좀. 시끄러우니까 말 걸지 마세요. 얘랑은 내가 알아서 얘기할 테니까!”
아마도 바비트가 소녀한테 계속 메세지를 보내는 모양이었다. 과연 성좌의 총애를 받는 사도라는 걸까. 일반 신도들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성좌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씨. 진짜, 바비트 님은 너 같은 애가 뭐 마음에 들어선….”
“저는 마탑을 무너트릴 것입니다.”
“…….”
“하지만 단순히 저 혼자 무너트려선 별 의미가 없어요. 여러분의 퀘스트들, 여러분이 모시는 성좌들을 모두 한꺼번에 엮어서 마탑에 부딪힐 겁니다.”
“무슨 소리…….”
“그러기 위해선 먼저, 성좌들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어요.”
나는 바비트의 사도를 똑바로 보았다. 소녀는 귀족처럼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축축한 석순에 붉은 망토를 깔아, 방석으로 대신하여, 작게 나마 자기 자신만의 영토를 구축했다.
“당신 같은 사도라면 성좌와 훨씬 더 자유롭게 얘기를 나눌 수 있겠지요. 저는 당신을 통해 성좌와 대화하고 싶습니다. 메세지보다 더 생생하게, 더 정확하게. 더 깊게요.”
“…….”
“바비트는 무엇을 좋아합니까? 어떤 퀘스트를 선호합니까?”
나는 사도에게 차를 따랐다.
와인처럼 붉은 찻물 너머로 소녀의 표정이 비추었다.
“당신에게 바비트는 어떤 성좌입니까?”
5.
“[영원한 평야의 군마]를 모시는 신도들은 일종의 군대다.”
남자가 말했다.
“군대요?”
“그래. 일반 신도는 병사다. 나 같은 사도는 장군이지. 우리는 전투의 승리와 전리품만을 생각한다. 우리에게 모든 전쟁터는 [던전]에 불과하다.”
남자가 차를 홀짝였다. 그는 눈동자가 커지더니 찻잔을 내려봤다. “……맛있군.” 남자는 눈을 깜빡거린 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나를 쳐다보았다.
“음. 어디까지 얘기했나? 그래. 우리의 퀘스트는 던전 클리어다. 마탑을 무너트려 깃발을 꼽으면, 비로소 우리 마호스 신도들의 퀘스트가 해결된다고 볼 수 있지.”
남자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여러 성좌들의 퀘스트를 긁어모아 한꺼번에 클리어하겠다고 했는가? 그건 무리다. 사왕이여. 너의 계획은 담대하고 용맹하지만 현실성이 부족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성좌들이 서로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마호스의 사도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우리는 마탑을 깨부숴야만 한다. 허나 가령 [사랑과 정욕의 화신] 바비트는 우리와 전혀 다른 퀘스트를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퀘스트겠지.”
“…….”
“바비트의 사도를 만나봐라. 그럼 내가 한 이야기를 이해할 것이다. 네 계획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6.
“……마탑의 장로를 공략해야 해.”
바비트의 사도는 입을 열었다.
“우리는, 바비트 님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지극히 중시해 그거 외엔 다 필요 없다고 무시할 정도 우리에게 50층 클리어란 건 무생물에 불과한 마탑 바윗덩어리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야. 마탑의 우두머리. 모든 거미들의 어미. [장로라는 인간의 마음]을 얻는 것이 바로 클리어 조건이지.”
소녀는 단언했다.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해.”
“불가능한 이유가 있습니까?”
“마탑의 장로는 누구한테 마음을 연 적이 없거든.”
바비트의 사도가 차를 마셨다. “뭐야? 젠장, 맛있잖아.” 그녀는 괜히 화풀이를 한 다음 한숨을 쉬었다.
“우리 바비트 님의 권능은 [핑크빛 러브코메디]야.”
“…….”
“내가 작명한 거 아니니까 그딴 눈으로 쳐다보지 마. 딱밤 때린다. 아무튼, [핑크빛 러브코메디]를 펼치면 연애를 하기 쉬워져. 시험 삼아 보여줄게.”
소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눈을 감아 기도했다. 그녀의 손에서 분홍색 빛이 흘러나오더니, 반경 5미터까지 바닥을 둥그렇게 감쌌다.
그 외에 딱히 이상한 징후는 감지되지 않았다.
“자아.”
하지만 다시 눈을 뜬 소녀의 얼굴은 진지 그 자체였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끝냈어. 해.”
“네? 뭘 해요?”
“나도 몰라. 아무거나 해봐. 자리에서 일어서거나 아니면 계속 말을 하거나. 어떤 거라도 상관없어. 당신이 뭔가를 하면, 이게 어떤 권능인지 바로 깨달을 거야.”
“으음…. 그러면.”
나는 찻주전자를 들었다. 마침 소녀의 찻잔이 비어 있었다.
그녀에게 두 번째 잔을 따라주기 위해 주전자를 기울이려는 찰나.
“어?”
삐끗.
스탭이 꼬였다. 밑에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고, 발이 걸려서 넘어질 돌멩이 따위도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바닥을 잘못 밟았다.
나는 얼른 찻주전자를 안전하게 품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두 번째로 발이 꼬였다. 꼭 줄타기에 실패한 곡예사처럼 내 몸이 휘청 휘청거렸고.
“어어? 어어어?”
촤악!
나는 그만 찻주전자와 함께 넘어졌다.
넘어진 곳은, 다름 아니라 바비트의 사도가 앉아 있던 장소.
“…….”
“…….”
나는 멍하게 사도를 내려보았다. 사도 역시 빤히 나를 올려보았다. 그렇다. 나는 사도의 몸에 엎어지듯이 넘어져, 졸지에 팔굽혀펴기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어떤 물리법칙 및 역학이 작동한 걸까.
“보다시피.”
나와 달리 바비트의 사도는 일절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마치 컵을 넘어트렸더니 물이 흘렀다, 라는 현상을 본 것처럼 당연하게 굴었다.
“바비트 님의 권능이 미치는 곳에선 뭘 해도, 어떻게 발버둥쳐도, 사람들끼리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어. 그게 물질적인 거리든 심리적인 거리든.”
“아….”
그러고보면 언젠가 들어봤던 것 같다. 아마, 이단심문관이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랬지. 바비트는 세상만사를 러브코메디 이벤트로 만들어버리는 성좌였다.
“가령, 너는 지금 넘어지면서도 맨 마지막 순간까지 찻주전자에 신경을 썼지. 덕분에 나한테는 뜨거운 물이 안 튀었어. 네가 대신 온몸으로 차를 뒤집어썼고.”
뚜욱. 뚝.
내 얼굴로 붉은빛의 찻물이 흘렀다. 머리카락이 흠뻑 젖었다. 나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들은, 절묘하게도 바비트 사도의 뺨 바로 옆자리에 떨어졌다.
“이제 나는 네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인간이란 걸 알게 되었지.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알았어? 가까워질 생각도 없었는데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가까워진 거야.”
“와오.”
“그래. 그런 거야. 덧붙여서 지금 내 눈앞에는 붉은 찻물에 흠뻑 젖은 남자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네. 통계적으로 살펴볼 때 남자는 물에 젖었을 때 매력이 4배 증가해.”
세상에 그런 통계도 있었는가.
“……짜증나.”
바비트 사도는 신경질을 내며 내 몸을 밀쳐냈다. 그녀는 일어나서 망토를 털었다.
“어때? 이제 우리 성좌가 이해가 돼? 연애에 미친 사람이야. 그냥.”
“…….”
“아니, 그냥 연애에만 미쳤으면 귀엽다고 봐주지. 바비트 님은 사랑만 좋아하는 게 아니야. [증오], [후회], [집착], [독점욕]. 사람이 누군가에게 가지는 감정들, 격렬한 감정들을, 그냥 다 좋아해. 그리고 바비트 님은 이 50층에서 클리어되어야 할 인물은 마탑의 장로라고 확신하지.”
사도는 미소를 지었다.
“감당이 되겠어?”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나를 비웃기보다는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을 비웃기보다는 이 상황 자체를 비웃는 듯했다.
“인간이 천 년을 넘게 살아버리면, 사왕. 더 이상 [천 년 동안 살아왔다]고 말할 수가 없어. [천 년 동안 죽어왔다]라고 말해야지. 마탑의 장로는 그만한 세월 동안 죽어온 거물이야. 애정이든, 증오든, 집착이든, 후회든, 그 사람한테서 일말의 감정이라도 뽑아낼 수 있을까?”
땡그르르.
사도는 품속에서 금화를 꺼내어 평평한 석순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망토를 끌며 내 옆을 지나쳤다.
“찻값이야. 받아둬.”
“잠깐 기다려주세요.”
나는 사도의 망토를 쥐었다.
꾸욱.
몸무게가 몸무게를 끌어 잡는 느낌이 손가락을 땡겼다.
“뭐야?”
“장로의 애정을 얻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증오]를 끌어내는 건 가능합니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바비트 님이 말하는 증오란 건 단순한 짜증의 연장이 아니야.”
사도는 툭, 내 손등을 쳐서 떨어트렸다.
“정말로 사랑의 무게에 버금가는 증오. 일생을 다 바쳐 누군가를 싫어하고, 저주하며, 그 사람에 대한 증오가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감정만 바비트 님은 인정해. 너. 천 년을 산 사람한테서 그만한 증오를 뽑아낼 자신이 있어? 너한테 누군가가 [천 년 동안 증오할 만한 가치]가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는 없어요.”
“그것 보라니…….”
“하지만, 그럼에도 끌어낼 수는 있습니다.”
나는 바비트 사도의 눈동자를 뚫어지라 보았다.
사도의 눈동자는 망토와 똑같은 적색이었다. 망토란 살가죽과 옷가지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는 사람이 기어코 한 겹을 더 두른 성벽이겠지. 눈동자도 꼭 그러해서, 사도의 붉은빛 동공에는 쌍겹의 동심원이 가라앉아 있었다.
“저는 마탑의 장로가 세상에서 제일 증오하는 사람을 스승으로 두고 있거든요.”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스승이라면 장로의 감정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아니. 장로를 미치게 만들 수 있어요.”
[‘사랑과 정욕의 화신’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저한테 여러분의 퀘스트를 맡겨주십시오. 공유해주세요. 저 혼자만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제 스승의 이름을 쓰면 얼마든지 가능해집니다.”
침묵이 흘렀다.
바비트의 사도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너, 스승이 누구인데?”
7.
“검제(劍帝).”
나는 말했다.
“…….”
시종일관 무표정을 고수하던 마호스 사도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는 찻잔을 들어올린 자세 그대로 굳었다. 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조금 옅어진 다음에야 흑발의 남자는 “하”, 짧은 비음을 흘릴 수 있었다.
“백오십 년 전에 죽어버린 자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99층까지 오른 헌터입니다. 전설이지요. 그 사람이 정말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까요? 다른 인간으로 환생을 한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구천을 떠돈다. 하다못해, 언젠가 자신의 뜻을 이을 후계자가 나타나길 바라며 기연을 남긴다….”
“…….”
“방법은 무수합니다. 저는 제가 검제의 후계자임을 증명할 수단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상상해보십시오. 제가 만일 검제의 후계자라면, 마탑 장로를 자극시키는 일이 가능합니다. 장로는 전에 없이 분노하며 저에게 감정을 드러내겠지요. [사랑과 정욕의 화신]이 제시한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장로가 저에게 보일 감정은 증오. 그것도 끝을 모를, 무저갱과 같은 증오입니다. 제게 척살령을 발동하고 마탑의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이겠지요. 그 전쟁에서 우리가 이긴다면.”
“……[영원한 평야의 군마]께서 내려주신 퀘스트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인가.”
흑발의 남자는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저에게 여러분의 퀘스트를 맡겨주세요.”
나는 말했다.
“제가 검제의 후인이라는 증거는 조금 있다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성좌들이라면 알아보겠지요. 지금 여러분이 생각해주셔야 할 것은, 저의 제안이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 냉정히 판단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에게, 사랑과 정욕의 화신에게, 미궁에 거하는 눈에게, 외로운 구도자에게, 이제는 이름을 잃어버린 신앙의 주인들에게, 그들의 대리인들에게, 한 명 한 명 만나가며 말하였다.
“저는 마탑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모든 성좌들의 퀘스트를 하나로 엮는다.
이 작전을 나는 다음과 같이 명명했다.
그랜드 캠페인(Grand campaign).
[‘미궁에 거하는 눈’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외로운 구도자’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황야에 마지막 남은 검’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망자를 울리는 방울’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땅에 검제의 후인이 돌아왔다는 걸 알리십시오.”
29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