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04)
거미들은 내 미소를 보고 굳었다.
“…….”
“…….”
그동안 오래 살아온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다.
탑에선 수명을 극복할 수 있으니까.
이곳엔 백 년이 넘게 살아남은 인간도, 하무스트라처럼 아예 수만 년의 시간을 유람한 별자리도 있다. 나는 그들과 만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공포는 불변한다.
“곤란하네요.”
방긋 웃었다.
“가만히 계시면 제가 먼저 가버립니다?”
발이 말보다 빨랐다.
나는 달려나갔다. 다음 순간. 건물 잔해에 피해 숨을 죽이고 있던 거미가 “히익”, 짧게 신음을 질렀다. 그녀와 나는 서로 코앞에서 눈을 마주했다. 주근깨가 알알이 뿌려진 마녀족이었다. 안심하라고 미소를 지으며 거미의 혈도를 눌렀다.
“아…….”
“아무리 영원처럼 느껴진들 천 년이 어디 영원이랴.”
나는 흥얼거렸다.
의미?
없다.
“홍화(紅花)가 지는 데 십일. 마탑의 가을에는 천 년이 필요했을 뿐.”
다만 지금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를 이 도시에 포진한 거미들이 듣고 있다.
내 말에서 필사적으로 의미를 찾으려 들겠지.
그걸로 됐다. 저들을 조금이라도 혼란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여유를 가장하여 선문답을 읊겠다.
“아. 검은색 도포를 차려입고 올 걸 그랬네요. 천년마도가 천년마탑을 무러뜨리는 역사적 현장인데 제가 그만 패션에 신경을 못 썼습니다. 뭐, 자잘한 부분이니까요. 스승님께서도 쾌히 웃어주시겠지요.”
“퇴각해!”
지휘관급 거미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후퇴! 후퇴한다! 33대대,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저 괴물을 막아!”
“물러서라니, 대체 어디로…….”
“본부에서 집결한다! 이건 답이 없어! 장로가 나서야 해!”
객관적인 전력을 비교하면 여전히 마탑이 우위.
싸움이 시작되고 내가 쓰러트린 적이래봤자, 백 명이 좀 넘으려나.
하지만 나는 지휘관급 인사만 속속 노려 해치웠다. 적의 지휘가 붕괴된 것이다. 전적으로 통신을 전음에 의지하고 있던 거미들은 광역 통신망— ‘거미줄’이 찢어지자 내게 대항할 수단을 잃어버렸다.
[성좌들의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가 신도들에게 진격을 명령합니다!]그것은 각개격파를 의미했다.
[퀘스트 진행. ‘미궁에 거하는 눈’이 적군의 퇴로를 공개합니다.] [퀘스트 진행. ‘망자를 울리는 방울’은 지난 반란들에서 목숨을 잃은 자들의 신원을 도시 전역에 게시합니다.] [퀘스트 진행. ‘사랑과 정욕의 화신’은 자작급 이상 거미들의 신원을 폭로합니다.]캠페인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성좌들은 즉시 신도들에게 ‘적당한 보상’과 ‘적절한 동기부여’를 내려주었다.
여태까지 그들이 신도들을 독려하지 못한 것은 결코 마탑에 저항할 뜻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결국에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은 밤하늘의 별자리가 아니라 땅을 딛고 선 인간. 신도들이 앞으로 걸어나가야만 성좌도 그에 호응한다.
“하하하하! 죽여주는군!”
그리하여 도시 전역에서 반격이 시작되었다.
“한때나마 애송이로 취급한 걸 사죄하마, 사왕! 마음껏 전음을 쓰는 게 도대체 얼마만이냐! 좋아, 좋아, 좋아! 최고야! 내가 바로 너희 거미 자식들이 제4본부에 매장해버린 성좌, [자학자에 내리는 채찍]의 대사제! 사도 [광전사]다!”
저 지하동굴에서 나와 함께 반란을 결의했던 헌터가 포효했다.
“내 성좌 언니를 돌려내! 개새끼들아!”
“……검제, 검제, 노래를 부르더니 정말로 이 정도일 줄이야. 솔직히 반신반의했지만… 그래. 이번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겠네. 다들. 바비트 님의 사도로서 명령하겠어. 싸움이 특기가 아니더라도 좋아. 필생즉사로 궐기해줘.”
“멋지군.”
양 세력의 사운드가 역전되었다.
독점도시에 결계처럼 쳐져 있던 거미줄이 낱낱이 해체된 것이다.
지금까지 억눌린 목소리, 수많은 성좌의 대리자들이 도시를 장악했다. 북쪽에서. 서쪽에서. 남쪽에서. 또는 동쪽. 노천의 주점과 주점들이 늘어선 노천에서, 푸르고, 붉고, 누렇고, 하얀 오러들이 잔물결같이 울려 퍼졌다. 물결들이 겹치고 겹쳐져 도시의 상공을 뒤흔들었다.
“지하에 숨어 귓속말로 소곤거리는 것도 오늘까지인가.”
피우우우욱!
폭죽을 닮은 무언가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것은 오러를 꾹 눌러담은 일격이었다. 나처럼 지휘관을 노린 저격은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어느 누구도 노리지 않았다. 폭죽은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먹구름의 밑동을 갈랐다.
약했다. 약한 일격이었다. 살천성과 비교하면 미안해질 정도로. 하지만 언제나 검은, 칼자루를 잡은 힘이 아니라 칼날이 벤 대상에 의해 값어치가 정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평야의 군마]의 사도가 쏘아올린 폭죽은 틀림없이 귀중했다.
“가자. 기수들이여.”
갈라진 구름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사왕을, 검제의 후인을 따르라.”
온 도시에서 함성이 터졌다.
“이—, 버러지들이!”
어떤 거미는 진노했다.
“우리가 쟤 때문에 후퇴했지 니 새끼들 무서워서 도망친 줄 아냐! 어디서 벌레들이 주제도 모르고 떠들어대! 어어디를 이씹삼, 보자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아. 거기구나.
나는 검격을 날렸다.
“어매?!”
거미의 목소리가 펄쩍 뛰었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음과 함께 거미가 방방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상도덕도 모르는 새끼야! 왜 사람이 말을 할 때 때려, 말을 할 때! 어? 방금 그걸로 내 소대가 다 날아갔잖아! 어이가 없어서, 와, 씨, 진짜 검제의 후계자세요? 네? 아까부터 방실방실 웃기만 하고! 면상부터 재수없음이 철철철 흘러넘치는 게 그냥 검제네, 아오, 쌍!”
한 번 더 날렸다.
“씨벌!!”
그 비명을 끝으로 목소리는 끊어졌다.
설마 전음을 낸 것만으로 당하겠냐, 하고 방심한 지휘관은 이미 사라졌다. 당하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지휘봉을 놓지 못한 용자도 사라졌다. 당하는 건 알겠다만 욕 한바가지는 퍼붓고 죽겠다는 또라이 역시, 방금 퇴장했다.
이제 남은 배역은 한 명.
“—그래. 익숙해.”
방심해도 될 만한 힘을 가졌고, 놓치 못할 지휘봉을 쥐었으며, 마지막까지 욕설을 잊지 않는 똘끼를 가진 자뿐.
“익숙한 엿같음이야. 얼굴은 다르지만 이 재수없음은 ‘그 새끼’를 떠올리게 하는구나. 솔직히 놀라워. 방향성이 전혀 다른데도 재수가 없어.”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일격을 내질렀다. 그리고, 콰아앙! 오늘 처음으로 나의 공격이 허공에서 상쇄되었다.
“묻고 싶은데.”
저 멀리. 폭죽이 갈라놓은 구름.
한 줄기 햇빛 속에 그녀의 손가락은 뻗어 있었다.
“그 개같은 싸가지는 어디서 배워왔냐?”
손가락의 뒤편.
아직 그늘에 잠긴 무표정이 지상을 내려보았다.
그녀가 쓴 모자의 챙은 길고도 넓어 햇살이 파고들 틈새가 없었다.
“혹시 싸가지를 제거해주는 전문 병원이 따로 있는 거라면 알려주거라. 내가 보기엔 거기가 만악의 근원이야. 밟아도 밟아도 바퀴벌레 새끼들이 계속 기어나오는 걸 보면, 어디선가 벌레를 양성하는 아카데미가 있는 거겠지.”
장로長老.
마녀족, Niglus-Kukulu의 해방자.
다섯 종족을 멸한 자. 버림받은 회색의 주인. 신살자(神殺者). 여섯 별자리에 못을 박은 마녀. 가장 위대한 지주(細株). 모든 거미의 주인. 그야말로, 세는 것이 무의미해질 만큼 수많은 이명을 거느린 헌터. 이미 죽어버린 검제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살천성과 더불어, 성좌들조차 외경을 품는 인간.
“…….”
나는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아무리 많은 이명을 지녔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배후령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놨다.
“처음 뵙겠습니다. ‘잿빛 거미’ 님.”
정해둔 대로 불렀다.
“저는 사왕이라고 합니다.”
“…….”
하, 짧은 비웃음이 흘렀다.
“죽음의 왕? 저승의 두목이네. 그럼 지옥에 떨어져서 왕 노릇이나 할 것이지. 아가야. 왜 엄한 데 기어나와서 깽판이니?”
“아. 살아 있어도 지옥이라서 딱히 저승까지 갈 필요는 없던데요.”
“보아하니 한마디도 안 질 새끼네.”
“제가 세끼라면 잿빛 거미 님은 두끼라도 되신단 말씀입니까?”
“뭐……. ……뭐?”
순간적으로 장로의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나는 성검을 흔들며 미소 지었다.
“조크. 조크. 알쌀한 분위기를 풀어줄 만한 부장님 개그.”
“…….”
장로는 입술을 뻐끔거렸다가, 경멸하는 눈초리로 나를 내려봤고, 뒤이어서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제법 버라이어티한 표정 변화였다. 그녀는 한손으로 지팡이를 쥔 채 남은 한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진성 또라이구나. 시발….”
난 왜 만나는 사람마다 마치 삼라만상 우주에서 나를 제일 적합하게 표현할 낱말이 또라이라는 듯 깨닫는 표정을 짓는 건지 그게 참 의문이고 이게 참 미스터리하고 요오 미스터리 우리의 프렌드 꺼삐딴 리.
“이해해주십시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검제의 전인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을 따라하려다 보니 메소드 연기로 또라이인 척하고 있거든요. 평소엔 이 정도까진 아닙니다.”
“넌 절대로 그 새끼의 후인이 아니야.”
으음?
“네 검술을 봤어. 오러 운용은 능숙하더라. 하지만 검제 새끼와 달라. 독기가 느껴지거든. 그래, 너는 마음에 독을 품었어.”
내게 말을 건네는 듯하면서도 장로의 시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하.’
과연.
지금 성좌들은 퀘스트를 내걸어 신도들을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그 퀘스트는 내가 [검제의 후계자]라는 전제 아래 성립됐다. 만일 나와 검제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면, 당장 [사랑과 정욕의 화신]부터 퀘스트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장로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다.
‘똑똑하시네.’
그야말로 요점을 찍는 공격.
장로는 쯔쯧, 혀를 찼다.
“검을 쓰는 놈들은 그걸 정파이니 사파이니 나눠서 부르던가? 관심 없는 내가 봐도 알겠어. 사왕. 이 철없는 꼬마 아이야. 너는 사도(邪道)를 걷는 아해란다. 검에 담긴 뜻 자체가 완전히 정반대되는데 어떻게 네가 검제의 후인이겠냐. 퍽이나.”
신도들이 침묵하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멈추어 서서, 혹은 전투를 이어나가면서, 장로와 내가 하늘을 사이에 둔 채 주고받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랑과 정욕의 화신’이 난처한 표정을 짓습니다.]또한 성좌들도.
“검제는 뒈졌어.”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상공을 수놓았다. 장로가 웃을 때면 그녀가 탄 빗자루의 꼬리가 살짝 흔들거렸다. 성좌들의 술렁거림을 비웃 듯이.
“설사 그놈이 비급을 남겨 후인을 길렀다 치자. 그래. 어디엔가 그놈의 제자가 있을지 몰라! 하지만 적어도 사왕, 너는 제자가 아니야.”
조금 더 기다려볼까.
“검제의 뜻을 이어받았으니 전인이시다? 검제 그 새끼의 뜻이 뭔데? 우리 마탑에 반항하는 게 검제의 뜻일까보냐. 하. 그렇게 치면 너희 수천 수만이 전부 검제의 후인이겠지!”
“…….”
조금만 더.
“버러지 같은 것들. 성좌들이란 언제나 그 모양이지. 아아, 신을 자칭하는 놈들 중에 제대로 된 새끼가 없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안 되는 걸 뻔히 아는데도 어떻게든 캠페인을 진행하려고, 아무것도 아닌 꼬마를 데려다가 검제의 재래니 도래니 난리 발광…….”
“안녕.”
그래.
“병딱들아.”
지금이다.
“가끔은 환기도 하고 살아야지 너희처럼 맨날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사람이 못 써요.”
멈칫.
“자, 기분이다. 내가 오늘 공짜로 리모델링 시켜주마.”
“…….”
“원래 이다음엔 [껄껄] 웃어야 하는데. 제가 암만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라지만 그렇게 웃지는 못하겠네요. 인간이 최소한 지녀야 할 품격이 있잖아요?”
시선.
시선이 느껴진다.
장로는 나를 보고 있었다. 정말로 눈이 마주친다면, 오직 서로 탐색하는 일만이 중요해진다면, 시선을 마주치는 동안에는 시간이 멈춰버린다. 그리고 그 이외의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로는 우리를 무너뜨리는 작업에 열중했다. 연설. 도발. 계책. 우리의 가장 약한 지점을 찾아내어 집요하게 물어 뜯을 채비를 갖췄다. 후퇴하는 거미들을 위해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주고, 신도들로 하여금 성좌를 의심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전쟁의 승리를 거두고자 했다.
그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어이.”
상대가 수없이 가진 이름들 가운데.
나는 오직 검제만이 입에 담았던 별명을 말하였다.
“회색아.”
“…….”
“아직도 그 따위로 살고 있냐?”
검제의 표정, 검제의 말투, 검제의 미소를 보여주면서.
“넌 어떻게 된 게 백 년이든 천 년이든 변하질 않냐.”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도 병이야. 병. 기본적으로 세상에 싸움을 걸고 있는 거지. 내가 변하면 세상한테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니까? 앞으로 이 병을 회색병이라 불러주마. 영광으로 알아.”
“너.”
너, 라고 장로는 말했다.
“너—-.”
“껄껄.”
“…….”
“이라고 할까.”
나는 미소를 지었다.
“조크예요. 조크.”
“…….”
“어때요. 이번에는 좀 웃겼죠?”
그리고, 보았다.
도시 위에 드리운 구름이 소용돌이칠 정도로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첨탑으로 퇴각하던 거미들마저 움찔하여 뒤를 돌아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다섯 채의 첨탑들이 진동하여 도시 전체에 지진을 일으키는 광경을.
수많은 것을 보았지만.
“오케이.”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눈빛이 보고 싶었습니다.”
성검을 들어올린 순간.
하늘에 몰아치는 마력이 나를 일제히, 덮쳤다.
30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