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05)
1.
살면서 한번도 시원한 바람을 쐬본 적 없는 것 같다.
-어이.
하지만 뜨거운 바람이라면, 한 번.
어느 날인가 느껴본 적 있다.
-이름은 많이 들었다.
열풍은 돌연 등 뒤에서 불어왔다.
-네가 잿빛 거미냐.
-…….
-발음하기 어렵구만. 그냥 회색이라고 부르마. 어때, 회색? 친근감 있고 좋네. 회색아. 그런데 여기는 왜 이렇게 갑갑하냐? 창문 없어? 환기는? 여기 사람 사는 곳이 맞냐?
‘잿빛 거미’는 한숨을 쉬며 돌아보았다.
남자는 붉고 뜨거웠다.
계절은 가을이 되어 붉게 져물었다만, 저 남자의 머리카락, 단풍잎보다는 태양을 닮았다. 그의 눈빛. 언제나 살짝 올라가 있는 입가. 하얗게 빛나는 이빨. 모든 것이 계절을 잘못 타고 태어난 양 여름처럼 자글거렸다.
민소매 도복에 ‘劍’이라 휘갈겨 써 있었다.
시야 마법을 써서 후방을 살펴보니, 도복 뒷면엔 ‘帝’.
-진성 또라이구나. 시발.
여름같이 뜨거운 남자는 머릿속까지 불볕더위로 맛이 간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땀냄새마저 뜨거웠다.
퀘퀘하게 고인 땀이 아니라 막 운동을 하며 흘린 땀.
평소 쉼없이 수련한다는 얘기가 거짓말은 아닌지, 남자의 혈도와 기공은 언제나 오러가 쌩쌩 돌아다녔으며, 노폐물이 쌓일 틈도 없어 깨끗했다. 남자의 땀방울은 갓난아이가 흘린 것보다 투명하겠지.
마치 햇사과에 맺힌 이슬처럼.
남자의 땀냄새에선 오직 온도만 느껴졌다. 열풍. 잘 찢어진 근육에 반들거리는 햇빛. 뜨거운 이슬. 태양에게 표정이 있다면 아마 미소일 거라는 듯, 적나라하게 비추는 웃음.
-왜?
그 모든 것이 죽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부럽냐?
-어떻게 이 본부의 최고층에. 오직 나만 올라올 수 있는 비밀 연구실에 아무렇지도 않게 방문했는지는 묻지 않겠어. 첫째로 나에겐 시간낭비가 될 테고, 둘째로, 너한테 자기자랑을 늘여놓을 기회만 줄 테니까.
-우리 회색이 많이 똑똑한 아이네. 우주우쭈쭈.
-그리고 싸우지도 않을게. 왜냐, 여기서 싸우면 내 소중한 연구도구들이 날아가거든. 검제. 나는 최선을 다해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는 중이야. 당신의 목숨과 내 평화를 위해 도발은 멈추어주길 부탁할게. 안 그러면 조져버린다 씨발 새끼야.
-뭐야? 생각했던 거보다 제정상이군.
검제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600년 전 어느 왕국을 멸망시킬 때 우연히 발견한 소파로, 엉덩이를 감싸는 폭신폭신거림이 환상적인 보물이었다. ‘잿빛 거미’가 연구하다 말고 세상이 전부 귀찮아지면 앉아서 쉬는, 그녀만의 명소이기도 했다.
-오? 야, 이 소파 존나 몰캉거리는데? 뭐지? 개쩐다.
참고로 지능을 가진 마법 아이템이기도 했다.
-끄아아아악?!
-용건을 지껄여라. 아가리 찢어다가 스카프로 짜기 전에.
-이미 이 소파가 아가리를 벌려서 내 멋진 엉덩이를 깨물었는데!?
-네가 전설적인 헌터란 건 알고 있어. 검제. 50층에 도착한 지 아직 보름밖에 안 지났지? 벌써부터 네가 이룩한 업적들로 저잣거리가 떠들썩하던걸.
-엉덩이! 엉덩이! 으아아아악! 내 귀욤뽕짝한 엉덩이!!
-우리 마탑에서도 진즉 주목하고 있었어.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 용무가 뭐야? 우리에게 협력해서 51층으로 넘어가는 거? 아니면, 역시 우리와 한판 붙어보는 거?
-궁둥이가 찢어진다아아아아!!
-씨발.
‘잿빛 거미’는 지팡이로 소파를 퍽 때렸다. 그제야 소파는 검제의 엉덩이를 놔주고 아가리를 다물었다.
-하, 히, 후…. 하, 히, 후…. 죽을 뻔했네.
-어쩔 건지나 말해.
-아니, 그냥 궁금해서 보러 온 거다. 천 년 넘게 여기서 짱박혔다며? 어떤 인간이 그런 역대급 방구석 폐인 짓거리를 하나 보러 왔지.
-그래서?
-생각보다는 정상인 거 같더라. 아오, 아파.
검제가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잿빛 거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상? 지금 누가 정상이라는 거야?
-회색이 너.
-……여러 말을 들어봤지만 나보고 정상이라는 인간은 오랜만인데.
-분노해 마땅한 것에 화를 낸다. 화를 낸 다음 자기 나름대로 책임을 진다. 어딜 봐도 평범한 어른이지.
검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잿빛 거미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마탑 지하에서 성좌 여섯 마리가 못 박혀 마력공급기 역할을 하고, 여태까지 우리가 정벌한 세계의 숫자가 수십 군데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리지?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
-눈빛만 봐도 알아. 단순히 세상에 분풀이하는 애송이인지, 아니면 자신만의 법칙을 가지고 세상에 거미줄을 치는 놈인지. 회색이 넌 후자다. 뭔가 옛날 과거에 상처를 받았겠지만 뭐 그럭저럭 극복한 경우랄까.
-……하. 만난 지 3분밖에 안 된 새끼가 현자 흉내를 내는군.
-건방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검제는 씩 웃었다.
-네가 그곳에 있기 위해 천 년이 걸렸고, 이곳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천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3분은 천 년의 결과일 뿐이지. 사람의 인생이란 결국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기다림일걸.
-…….
-그래서 내가 바로 너의 운명이냐 하면, 미안. 난 아니야. 검제는 일어섰다.
-나는 누구보다 고독하게 탑을 오를 필요가 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데?
-나보다 운이 나쁜 사람들이 세상엔 널렸지. 그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위로 향할 수 있어. 나는, 그걸 증명해주기 위해 혼자 탑을 오르기로 정했다.
-하.
잿빛 거미는 비웃었다.
-대단한 희생 정신이시네.
-그래. 대단한 일이지.
검제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
-…….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뤄야만 한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세상에 한 획의 검을 그어넣기 위해 나는 일생을 다 바친다. 그러니까, 너를 위할 시간 따위는 없어. 나는 귀신이 되어서라도 나의 사명을 이룰 거다.
‘잿빛 거미’는 기이한 감정에 휩싸였다.
눈앞의 남자가 정말로 자신한테 사죄한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자는 마치, 자신이 무엇을 사과해야 하며 그녀가 무엇에 사과를 받아야 하는지 전부 아는 듯했다.
만난 지 오 분이 되어가는 남자였다. 하지만 ‘잿빛 거미’는 자신의 마음, 어느 건조한 영토에 이미 남자의 발자국이 새겨졌음을 느꼈다. 그것이 쓸려 흔적마저 사라지려면 이 사막에 많은 바람이 불어야 할 것이었다.
-…….
-너는 다른 사람보다 긴 시간을 사는 것에 불과해. 너의 시계는 조금 커서, 초침이 시침을 만나는 데 아주 약간 더 힘이 들 뿐이지. 기다려라. 더 살아. 지금보다 좋은 날이 올 거다.
-너…….
‘잿빛 거미’는 입을 열었다.
-엄청, 짜증날 정도로 무책임한 인간이구나?
-후.
검제는 웃었다.
-난 내일 51층에 오를 거다.
-허락한 적 없어.
-걱정하지 마. 리모델링 한 번 시켜주고 값을 받을 예정이걸랑.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짜증나면, 싫으면, 나를 쫓아와라.
-…….
-나는 동료도 연인도 없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몰래 뒤따라오는 스토커 정도야 인기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숙명이지. 따라와서, 내가 100층에 오르는 광경을 똑똑히 눈에 새겨. 나를 믿어라. 회색!
검제의 미소는 해처럼 빛났다.
그리고 사막보다 뜨거웠다.
-네가 두 번째로 100층을 정복해라!
2.
성좌 [영원한 평야의 군마].
목표, 마탑의 세력을 50층에서 패퇴시켜라.
퀘스트 진척도. 양호.
성좌 [미궁에 거하는 눈].
목표, 마탑 내부의 시설과 지형을 모두 밝혀 폭로하라.
퀘스트 진척도. 시작.
성좌 [망자를 울리는 방울].
목표, 지난 150년 동안 마탑에 의해 희생된 자들의 이름을 다섯 첨탑에 새겨 추모하라.
퀘스트 진척도. 양호.
성좌 [외로운 구도자].
목표, 각 신도에게 배부된 마탑의 숙적을 한 명씩 찾아가 1대1 결투로 승리하라.
퀘스트 진척도. 양호.
그리고.
성좌 [사랑과 정욕의 화신].
목표, 마탑의 수장. 통칭 장로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뒤흔들어서 무너트릴 것.
퀘스트 진척도.
“이,”
현재진행중.
“개새끼야아아아아아!”
마력의 폭풍이 몰아닥쳤다.
“와아. 이거 진짜 차원이 다른…….”
“네놈이 살아서 돌아올 줄 알았다! 환생이냐! 빙의냐! 왜, 죽지 않고 돌아왔냐!”
나는 급히 오러를 끌어올려 마천신공을 펼쳤다. 그림자를 수백 갈래로 잘게 찢어, 동시다발적으로 장로를 공격했다. 콰아아앙! 허공에서 수백 번의 폭발이 터졌다.
-좀비야.
폭발이 일으킨 먼지 뒤에서 장로는 멀쩡했다. 멀쩡히 격노한 채,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까닥일 때마다 십수 개의 마법이 펼쳐졌다. 내 공격은 모조리 요격당한 것이다.
-미안한데 지금 내 말 좀 옮겨서 말해주면 안 되겠냐.
‘상관없는데요. 말씀하시죠.’
-너 딱히 150년 전이랑 비교해서 전혀 강해진 거 같지 않다?
나는 피식 웃었다.
“어이, 회색.”
“죽어!”
“너 딱히 150년 전이랑 비교해서 강해진 거 같지 않은데? 좀, 뭐랄까. 쫌 그렇다.”
“죽여버린다! 네놈만은 내가 죽여버리겠어! 영혼을 갈갈이 찢어서 삼라만상에 흩뿌리고 그 위에 똥을 싸갈겨주마!”
살벌하군.
“남겨진 인간의 마음을, 뻔히 아는 주제에! 검제!”
마탑의 장로가 펼치는 마법은 과연 화려했다.
찰나마다 서른여섯 갈래의 마법이 쏘아져 나를 노렸다. 서른여섯 개가 각각 다른 방향, 다른 속도를 지녀, 이쪽의 흐름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어떤 규칙성도 없는 공격. 그야말로 융단폭격이었다.
팟!
전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내 뺨에서 피가 흘렀다.
“멋대로 사람의 마음을 휘저어놓고, 멋대로 살다가, 멋대로 죽었겠다! 혼자서 100층을 제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는 개뿔! 개새끼야! 혼자서 뒈졌을 뿐이잖냐!”
-크하하하.
“그딴 남자한테 단 한 번이라도 기회를 허락했던 게 내 일생 유일한 오점이다!
-아니아니. 99층이 의외로 꽤 빡세더라고. 어쩔 수 없었다니까?
“재가 되어라!”
촤악.
칼날과 같은 마력이 내 종아리를 스쳤다. 다행히 신경이 잘리진 않았지만,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너 같은 새끼들이 항상 그러지. 자기는 다를 거라고, 이번엔 달라질 거라며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한다! 결과는 실패야! 검제, 네가 그 놈들과 다를 바가 뭐냐! 말만 그럴싸했던 개자식 아니냐!”
솔직히 위험했다.
살천성을 뛰어넘었다 자부하는 나이건만, 지금, 잿빛 거미에겐 밀리고 있었다. 대마법사를 처음 상대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방의 분노가 폭주하여 마법의 위력이 극대화된 걸까.
“수많고! 수많은! 개새끼 주제에!”
강하다.
마천신공 제일식 아사유검(餓死流劍)을 펼쳐도,
“감히, 이 나를, 수많고 수많은 감상에 젖게 했겠다!”
간단히 파훼당했다.
그녀는 배고픔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아는 듯했다.
“뭐가 특별하다는 거냐! 쓰레기!”
갈사비검(渴死痛劍)과 익사만검(洞死滿劍)을 동시에 펼쳐도.
“도대체 뭐가 혼자서 탑을 정복해서, 자신보다 불행한 인간들에게 보여주겠다는 거야! 검제, 네가 뭘 보여줬는데!”
장로는 목이 마르다는 것이 무엇이며 숨이 막힌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서, 금세 나의 공세를 간파하고 비틀어 꺾었다.
“알고 있냐! 네가 뒈지고 난 다음 검제교란 게 만들어졌다. 하! 웃기는 걸작 아니냐? 종교라고. 종교! 넌 인간이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가 보여주려 했지만 결과는 신의 위대함이다! 사람은, 사람들은, 자신보다 위대한 인간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 신이 된 다음에나 인정하지! 검제! 결국 너는 이 세상에 또 하나의 타인을 만들었을 뿐이야!”
동사(凍死)도, 독사(毒死)도, 병사(病死)도, 장사(杖死)도, 소사(燒死)도. 심지어 자결(自決)마저.
마천의 첫 번째 하늘부터 아홉 번째 하늘에 이르기까지, 장로는 모든 하늘을 밟았고, 돌파하여, 끝끝내 나의 코앞으로 들려들었다.
“다시 한번 물어주겠어!”
그녀 역시 실핏줄이 터지긴 했다. 내가 뽑아낸 검로에 상처를 입어, 팔뚝, 허벅지에서 피가 튀었다. 하지만 어느 상처도 치명적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새로운 상처를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살아온 것인가.
장로는 정면까지 당도했다.
창처럼 버려진 마력이, 내 칼날과 교차했다.
“내가 너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뭐냐!”
“…….”
두근.
심장이 욱씬거렸다.
‘……반신안(半神眼).’
탑주를 만나 그녀의 트라우마를, 삼라만상에서 일어나는 비명을 목도한 이래, 내게 생겨난 여섯 번째 감각. 그것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세운 것이다.
내가 맞서 싸우는 사람의 과거나 미래가 얼핏 비추는 현상.
이 기이한 현상엔 일정한 법칙이 없다. 마치 데자뷰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따금 상대방의 심장을 관통하는 풍경이 나의 심장 역시 관통한다.
「나를 쫓아와라.」
배후령이 나에게 건넨 목소리가 아니라.
검제가 장로에게 건넸던 목소리가 일순, 환청처럼 울렸다.
「기다려라. 더 살아.」
「내가 100층에 오르는 광경을 똑똑히 눈에 새겨.」
「나는 귀신이 되어서라도 나의 사명을 이룰 거다.」
「나를 믿어라!」
그 목소리에 겹쳐진 장로의 감정 역시 전해졌다. 대낮에 부유하는 일장춘몽과 같이, 검제의 말대로, 장로는 그를 몰래 뒤따라 갔었다.
검제가 99층에 올랐을 때 장로는 90층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
일주일.
「…….」
여섯 달.
「…….」
삼 년.
「……그래.」
바야흐로 육 년이 흘렀을 때, 장로는 조용히 일어났다.
등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병신 새끼.」
환각은 거기서 깨졌다.
“병신 새끼야!”
쨍그랑,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환청이었을까.
하지만 내 눈앞에 잠깐이라도 펼쳐졌던 광경은 정말로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무수한 유리조각들을 제치며, 장로가 달려들었다.
꽈악!
그녀의 손가락이 뻗어나와 내 목을 붙잡았다.
“내가 왜 여섯 번째 첩탑을 다시 세우지 않았는 줄 아냐! 왜 백 년이 넘도록 한가하게 폐허를 내버려뒀을까! 바로 너의 유해를 못에 박아, 봉인해서, 여섯 번째 탑의 제물로 만들기 위해서야!”
“…….”
“패배의 대가를 치러라! 검제! 다른 인간들과 하등 다를 바 없이, 별자리들과 다를 바 없이, 너 또한 실패자에 불과하단 걸 만고에 알리겠다! 다시는 헛된 희망을 품는 인간들이 생겨나지 않게!”
손가락이 내 목을 파고들었다.
배후령은 아무 말 없이 다만 지켜보고 있었다.
장로의 등 너머에서.
장로는 검제에게 소리치고 있었지만 정작 그는 뒤편에 있었다. 나는 목을 좀먹는 고통에 한쪽 눈을 찡그리면서도 끝까지, 배후령을 쳐다보았다.
-…….
배후령은 담담했다.
무표정했다.
어떠한 후회도 회한도, 일말의 자책마저 없는 눈빛을 보고, 아아. 나는 어딘지 모르게 깨달았다. 어쩐지 아주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던 것을 오늘 이 순간에 와서야 확인한 기분이었다.
“……아니야.”
나는 중얼거렸다.
“뭐?”
“검제는…… 당신의 라이벌은, 실패한 게 아닙니다.”
나는 왼손을 들었다.
꾸욱.
내 목을 쥔 장로의 손목을 잡았다.
“장로. 검제는 실패한 적 없습니다.”
“이제 와서 무슨…….”
“말했잖아요. 귀신이 되어서라도 사명을 이룰 거라고.”
나는 장로의 눈동자를 내려보았다.
“검제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죽었을 뿐입니다.”
“…….”
“그는 아직도 99층을 오르고 있어요. 다만, 인간이 아니라 원령으로. 1층부터…… 처음부터 다시.”
나는 말했다.
“그렇지요?”
“…….”
장로가 침묵하는 가운데.
그래, 하고.
-네 말이 맞다.
배후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도 99층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다. 공자야.
30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