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10)
“…….”
나는 한동안 아들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매일 오러로 칫솔질을 하는 우부르카의 송곳니는 새하얀 색이었다. 저녁 노을이 아들의 이빨 사이에 서려 있었다.
“우부르카.”
내가 말했다.
앞서 이미 침묵이 있었기에 내 목소리는 끊김없이 이어졌다.
“내가 너를 보낸다면, 너는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使者)로 가게 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지?”
우부르카는 작게 웃었다.
“안다. 아비가 아는 것, 걱정하는 것을 모두 다 안다. 그럼에도 아비가 내 청을 윤허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알지. 보내다오.”
“나 참. 너처럼 패륜막심한 효자 녀석도 따로 없을 거다….”
“우고르. 효자라는 말에 그런 수식어가 붙을 수 있나?”
“못 붙을 건 뭐냐? 상식의 틀을 깨거라, 아들아. 언어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란다.”
우리 부자의 말이 한가로이 저녁놀에 흘러가는 도중이었다.
“……잠깐. 당신들. 대체 뭔 개삽소리들을 하는 거야?”
[보조작가]가 말했다.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다가 어이가 없어진 것 같았다.
“그야 언어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게 맞아. 언어의 망령에 사로잡혀 본질을 놓치는 것은 작가로서 결단코 피해야 하는 함정이지. 그러니 만약 내 말이 문법에 어긋난다면 그건 내가 틀린 게 아니야. 문법이 나를 따라잡지 못한 거지.”
“동의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보조작가님. 마음이 맞네요.”
“근데 그건 저리 집어 던져 똥개들 먹이로 삼는다 치고. 저기에 사자를 보내겠다고? 어, 그러니까 당신의…….”
“아들이다. 우거.”
“……그래. 어쩌다가 오우거 비슷한 종족을 아들로 뒀는지는 묻지 않을게. 복잡한 가정사엔 되도록 발을 들이밀지 말자는 주의인데, 척 봐도 컴퓨터 본체 뒤 전기줄마냥 꼬여 있을 거 같으니까. 그러니 그냥 당신이 하려고 하는 일만 말해보면… 적진 한복판에 아들을 보내겠다고?”
“예.”
“위험해!”
[보조작가]는 눈썹을 팍 찡그렸다. 어떤 원리인지 안경알도 따라 찡그려졌다.“아니. 지금 상황 안보여? 저쪽, 마탑 제1본부는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있잖아. 그런 상황에 적장의 아드님이 인질로 오셨네? 그럼 쟤네들이 ‘오 여기 와서 앉으세요 차 한 잔 받으시고요 받으셨으면 그만 가시고 갈 때 계단 조심하세요’ 이럴까? 아니면 ‘사악한 죽음의 군주의 아드님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러면서 피폐 감금물 찍으려고 할까?”
하무스트라의 사도다운 그 비유야 어쨌건 반마맹의 다른 사도급 헌터들도 반대했다.
“보조작가 말이 맞아. …아니 사실 맞는지 안 맞는지 피폐 감금물이 뭔지 몰라서 잘 모르겠는데 귀찮으니까 그냥 맞다고 치자. 중요한 건 우리가 이미 기회를 줬다 이거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줬지! 그런데도 항복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건 저들이다! 사왕. 그대가 베푼 자비를 저들은 흙발로 짓밟은 것이다. 당장 공격 명령을 내려 다오. 마호스의 전사들이 앞장서서 첨탑을 쓸어버리마.”
“……거미들을 전부 멸살하는 건 과하지만. 첨탑 하나 정도야 뭐, 희생양으로 적절하지 않을까?”
[광전사], [영원한 평야의 군마]의 사도, [사랑과 정욕의 화신]의 사도. 각각 다른 말과 다른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불 보듯 뻔했다.그들은 학살을 원하고 있었다.
“…….”
그래서 곤란하단 말이지.
[어쩔 수 없어서 학살을 묵인했습니다.] [당사자들이 원하는데 허락해주지 않을 수 없었어요.]‘나를 리더로 인정해준 5대 길드장들을 배신하는 격이야.’
나는 친우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약속했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의 본거지를 지키며 일반 시민들의 삶을 위해, 안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지금 이 자리에 없지만, 사실은 배후령만큼이나 명백한 존재감을 갖고서 내 곁에 실재하는 것이다.
“…….”
어느새 주변의 지휘관들은 전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여기서 결정권을 지닌 사람은 나였으므로.
나는 슬쩍 하늘을 올려봤다.
“지금이 저녁인가.”
50층의 하늘엔 먹구름이 잦았다. 아주 약간 비어진 틈새에서 석양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마, 조금 있으면 검어 지겠지.
긴 밤이 온다.
“여명이 터서 도시를 비출 때까지.”
나는 탑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저들에게 허락된 기한이다.”
그리고 나는 우부르카를 바라보았다.
“따라서 그것이 [너]에게 허락된 기한이다.”
하므로 그것이 [나]에게 허락된 기한이며, 그러기에 [우리]에게 허락된 기한이라고 덧붙이지는 않았다.
내가 없을 자리에서 네가 행하게 될 모든 협상의 결과를, 또는 협상 파탄의 결과를, 나 또한 짊어지게 된다는 의미라고는 더더욱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너를 보낸다면 그것은 그만큼이나 너를 신뢰하기 때문이라느니, 네가 만약 실패한다고 해도 내가 그 실패의 책임을 함께 짊어져줄 것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당연히 할 필요가 없었다.
반마맹의 사도 전원이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탑 제 1지부도 어떻게든 이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우부르카가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 걱정하는 것을 모두 다 안다고.
그럼에도 내가 자신의 청을 윤허할 수밖에 없으리란 것 또한, 이미 안다고.
그렇다. 아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아는 것들을 구구절절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다만 말했다.
“아들.”
고개를 젓고 다시 말했다.
“무사장.”
우부르카는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툭, 그 단단하며 넓기 그지없는 이마를 손등으로 두드렸다.
“네가 할 수 있고, 네가 해야 하며,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와라.”
“가주(家主)의 명을 받든다.”
사왕가의 무사장이 대답했다.
6.
“하룻밤입니다.”
나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여명이 틀 때까지. 동이 틀 때까지. 뭐든 좋아요.”
“…….”
“여러분이 이미 천년을 기다렸다는 걸 압니다.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이 얼마나 염치없는 것인지도 잘 압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깊이. 이마가 땅바닥에 맞닿을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 아니.”
사도들이 당황했다.
“잠깐, 사왕. 네가 고개를 수그릴 것까지는….”
“맞아! 네가 아니면 우리들이 언감생심 마탑을….”
소리 내어 만류하는 이들이 있었고, 머뭇 입을 다무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들끓는 숨을 차마 삭히지 못하는 이들도 당연히 있었다.
“음.”
“으음.”
하지만 그들 중 가장 격렬한 이들도 반대하진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의견을 정리한 사도들이 하나 둘 입을 열었다.
“좋아. 하룻밤 정도라면.”
“천년마탑의 천년이 조금 더 길어질 뿐이겠지. …그쯤이라면, 좋아.”
“하룻밤이 아니라 천 일의 밤, 아니, 천 년의 밤이 더 주어진다고 해도, 저 첫번째 탑 개자식들이 뒤집히는 일은 없겠지만.”
좋아.
“감사합니다.”
동의를 받았다.
나는 일어서서 우부르카를 돌아보았다.
“뭐하냐? 어서 들어가지 않고.”
“하늘이 밝아지면 내가 직접 선봉에 서서 마탑의 마지막 거미줄을 찢을 거란다. 1초라도 빨리 설득하러 가려므나.”
“존명.”
우부르카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미처 제지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우부르카는 달렸다.
그렇다. 달렸다.
장장 수백 미터를 한 번의 발걸음으로 뛰어건넌 것도 ‘달렸다’고 본다면 말이다.
콰아아앙!
첨탑의 출입문이 터졌다. 쾅! 쿠우웅! 수십 겹의 장벽, 수백 개의 마법으로 보호된 성문이 갈갈이 찢겨졌다. 당장 첩탑 꼭대기로부터 위이이이이잉- 경계 경보가 울렸다. 사실 경보가 울리기도 전부터 첨탑 안쪽에선 비명이 들렸다.
-적습! 적습! 적스으으읍!
-뭐, 뭐야!? 누구야?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우부르카! 사왕의 아들이다! 너희와 대화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도다!
-뭐 이런 씨,
-아들이라고? 사왕의? 대체 씨를 준 쪽이 어떻길래 이렇게 안 닮았냐!?
-대화를 하자는 놈이 왜 문을 때려부수고 지랄이야!
-으하하하하! 대화란 힘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다. 약한 자가 대화를 청해봤자 너희는 듣지도 않겠지. 안다. 다 안다. 그러니 일단은 내 힘을 증명해주마!
-알긴 뭘 안다는 거야?! 야, 야! 잠깐! 자, 잠깐만! 이거 진짜 장난 아닌…….
-지원 요청! 지원 요청! 지금 아군이 초토화되고 있……!
쿠웅.
누군가가 지른 비명을 끝으로 첨탑의 철문은 다시 닫혔다. 혹시 돌파 당할 경우를 대비해서 예비용 문까지 준비해둔 모양이었다.
준비성이 철저하군.
우주의 어느 누가 우부르카란 존재를 준비하겠느냐마는.
“…….”
“…….”
이쪽 진영의 사도들은 침묵에 감싸였다.
“어…….”
[보조작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상당히 개성 있는 항복 권유 사절이네…?”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힘 없으면 대화도 안 들어주니.”
“일단 당신이 저 사람의 아버지이며 저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란 사실은 완전 납득됐어. 마음이 아주 그냥 붕어빵이네.”
“제 마음이 훨씬 잘 생겼지만요.”
“응?”
“네?”
밤이 왔다.
안 그래도 흑요석 같던 첨탑이었다. 칠흑에 암흑이 더해지자 탑은 정말로 거기에 있나 싶을 만치 고요해졌다. 그저, 조용했다.
우부르카의 첫 등장이 난장판이었던 게 마치 거짓말이란 것처럼.
어떠한 목소리도 발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시간이 흘렀다.
나는 맨땅에 가부좌를 틀고 명상했다. 너무 오러에 의존하지 말라고 약제사는 혼냈지만, 지금은 운기조식을 통해 오러를 쌓아 둘 때였다.
홀로 명상에 잠긴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일반 신도들은 열흘 전 내가 보여준 가공할 만한 무위에 겁을 먹었다. 사도들은 나를 배려해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지금 나는, 사지(死地)에 아들을 떠나보낸 아비였으니까.
“걱정 안 되냐?”
딱히 날 배려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잿빛 거미’만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목발을 짚으며 다가왔다. 으차, 으으차, 하고 내 곁에 주저앉았다.
“젠장. 한동안 이러고 살 거 생각하니까 미치겠네.”
“마력은 벌써 좀 회복된 거 아닙니까?”
“회복이야 되고 있지. 근데 네가 데려온 힐러가 다시 마법 쓰면 죽는 줄 알래잖아. 하! 내 손짓 한방이면 죽을 앤데. 나한테 그런 말을 찍찍 싸는 녀석이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잿빛 거미가 투덜거렸다.
“혹시 너희 세계 출신은 다 싸가지가 없냐? 어째 하나같이….”
“근데 왜 그럽니까?”
“응? 뭐가.”
“마법 쓰면 죽는 줄 알라고 들었다면서요. 왜 마법 쓸 준비하고 계십니까?”
잿빛 거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진중을 밝힌 삼백 개의 횃불이 흔들렸다. 하지만 잿빛 거미의 눈길은 그곳을 향해 있지 않았다.
고요하게 서있는 첫 번째 마탑을 바라볼 뿐.
“곧 쓰게 될 테니까.”
“결투에 임한 당사자로서 패배에 납득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납득해. 그치만 저 녀석들 죽는 꼴을 그냥 지켜볼 수도 없는 일이지.”
잿빛 거미는 허허롭게 말했다.
“어쩌겠느냐. 같이 죽어줄 수밖에.”
“의리가 있네요.”
나는 느릿느릿, 온몸에 오러를 순환시켰다.
“챠르무였던가요. 저랑 같이 마탑 탈주했던 걔. 그 애가 자기 상관을 하도 야무지게 칼침 박고, 2지부부터 5지부까지 리그 오브 레전드 나가도 먹힐 법한 태세전환을 보여주길래 그런 거 없구나 싶었는데.”
“리그 오브 레전드가 뭔데?”
“고전 게임 있어요. 그리고 말 돌리지 마시고.”
“누구에게나 조금은 특별한 녀석들은 있는 것 아니겠니.”
잿빛 거미의 목소리는 여전히 허허로웠다.
그리고는 흘끗, 그제야 삼백 개의 횃불을, 제 1마탑을 둘러싼 사도들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많고.”
“그러니까 얘야. 미리 사절해두마. [자기한테 누가 소중한 줄 알면 저 사람들한테는 왜 그랬어요?] 뭐 이 따위 개소리 말이야. 니가 정 도덕적 우월감에 잠기고 싶다면야 뭐 마음대로 하는데, 할 거면 저 새끼들한테도 해주라 좀.”
잿빛 거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독을 머금은 것처럼 깊고도 짙었다.
“웃기지 않니. [마탑을 규탄한다.] [마탑의 압제에 죽어간 이들을 추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고한 피해자다….] 아이고 참. 완전 미친 또라이 새끼들 아니니?”
그리고, 늘어붙는 것처럼 뜨거웠다.
“50층 와서 자기들이 당한 것만 생각하지. 바로 아래층, 또 그 아래층에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해왔는지는 안중에도 없어. 아니, 분명히 기억에도 없을 걸. 기억하고 있는 연놈들이 조금 있더라도 보나마나 [본의가 아니었다]느니, [나도 내심 반대했다] 같은 식으로 다 자기합리화 들어가 있을 거야. 쓰레기 같은 새끼들.”
잿빛 거미는 타오르는 불길보다 조용하게 말했다.
“거짓 신들 주제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잿빛 거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하여간 개새끼들…. 정의니, 대의니, 추모니 뭐니 있는대로 거창한 소리들을 지껄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기분을 합리화하고 있을 뿐이지. 하긴 사이비의 기본 원리가 바로 그거, 그 날 그 날의 상황에 따라 교리가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거였지?”
밤의 공기는 더 이상 싸늘하지 않았다.
사도들의 군세가 지펴낸 분노로 달구어지고, 잿빛 거미가 흘린 증오로 늘어붙은 이 밤은 후텁지근했다.
잿빛 거미는 악의와 경멸을 담아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사왕. 첫 번째 마탑은, 나와 같은 시기에 50층에 발 딛었던 내 자매들은 말이야. 절대로 항복할 수가 없는 거란다. 거짓 신 새끼들이 의기양양해서 가슴 쭉 펴고 있는 앞에 납작 엎드린다? …죽는 게 낫지. 안 그러겠니?”
내가 말했다.
“그래서 맞서시겠다.”
“그렇게 되지 않을까? 그 결과 아마 다 죽겠지. 아니면 더 나쁜 꼴을 당하거나.”
잿빛 거미의 목소리에서 열이 빠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금 허허롭게 말했다.
“그것이 순리라는 것 아니겠느냐. 그 새끼라면 분명히 그렇게 지껄일 텐데, 나도 좋아요 2백번 눌러주려고. 안 그러니 사왕?”
7.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배후령의 발언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응. 말하지 마렴. 그 새끼보다, 너는 왜 아들이란 놈을 사자로 보내고 앉았냐?”
“궁금하세요?”
“궁금하다기보다는 기분이 더러워서 그래. 여기 이렇게 앉아서 청승 떨고 있는 꼴을 보니까 배알이 뒤집혀서.”
잿빛 거미는 미간을 좁혔다. 화가 난 것도 같았다.
“봐라. 너도 검제 그 새끼랑 다를 게 없어. 위로, 위로, 더 위로, 를 외치지만 거기에 남겨지고 떨구어지는 사람은 다름아니라 네 곁에 있으려던 애들이거든. 아들 아니었냐? 아들이 걱정이 되면 막았어야지 왜,”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말했다.
“전 제 아들을 걱정하지 않아요.”
“…….”
“우부르카는 설득한다 말했고, 말했으니 설득할 겁니다. 어리광이 아니에요. 모르시겠지만 우부르카는 한 대륙을 무릎 꿇렸던 패자였습니다. 시대의 영걸이 해내겠다고 장담한 거예요. 한번도 저는 아들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잿빛 마녀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리 자신하지?”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잿빛 마녀는 다만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득 안 된다니까? 내가 방금 말했잖아. 뒈지거나 그보다 못하게 되는 게 낫지, 항복 안 된다고. 안 한다고. 왜냐하면,”
“왜냐하면, 같은 처지였거든요.”
잿빛 마녀가 멈칫했다.
천천히, 그녀가 눈을 떴다.
“같은 처지였다니?”
“우부르카요. 우부르카의 종족이요.”
“그게 왜….”
“그 아이들도 다른 종족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한때 저를 신으로 떠받든 적도 있었어요.”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당신과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당신이 상상하지 못한 길. 그럴 수 있겠느냐며 반문할 수 있는 그런 길을. 우부르카는 얘기해줄 것이고, 말해줄 것이며…… [다른 세상]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보여줄 것입니다.”
“…….”
“오직 같은 곳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길을 걸은 자만이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겠지요.”
나는 잿빛 거미를 보지 않았다. 300의 군세를, 그 너머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제 아들은 틀림없이 당신 부하들을 항복시킬 수 있을 겁니다.”
차츰, 여명이 트기 시작했다.
3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