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11)
1.
첨탑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직 새벽이 땅끝에 한 발만 걸친 무렵.
대지는 어두웠고 사위는 고요했다.
“음.”
쫑긋.
나와 함께 밤을 지샌 잿빛 마녀는 귀를 세웠다. 우리는 어둠의 한복판에 있다, 말할 순 없겠으나 고요의 한가운데에는 있었다. 귀가 움직이는 소리까지 잘 들렸다.
“부르는군.”
잿빛 거미는 미간을 좁힌 채 첨탑을 바라봤다.
“예?”
“나를……. 아닌가. 널 부르고 있어, 사왕.”
“누가 말입니까?”
나는 잿빛 거미의 눈길을 좇아 탑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철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아무런 기척도, 소리도, 항복을 권유하러 들어간 우부르카든 투항을 결심한 거미들이든, 문앞에는 전무했다.
“아무도 안 보이는데요.”
“이미 문앞에 서 있어. 혼자.”
“…….”
“난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지. 아마, 나와 싸울 때 쓴 건 네가 가진 팻감의 일부에 불과할 테고.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마탑이 가진 천년을 네가 모두 보았겠니.”
“과연.”
이해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부좌를 풀었다.
“맞아요. 어떤 거미가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스킬과 [기척을 지우는] 스킬이 있다 해도 놀라울 건 없죠.”
“넌 얘기가 빠르다는 게 장점이야.”
“다녀오겠습니다. 뭐 전해드릴 말 있어요?”
“[남아줘서 고맙다. 탈주한 새끼들 생각하니 욕나오네. 그치만 걔네보단 밖에 모인 저 새끼들을 저주하자.]”
“깔끔하셔라.”
나는 첨탑으로 향했다.
마탑 제1본부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도개교가 성문과 성문 바깥을 이었다.
도개교에 올라선 나는, 유리 위에 그을음처럼 드리운 흐릿한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불렀습니까?”
내 코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진 않아도.
“…….”
투명한 자는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움직이지 말고 전음을 써.”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강하게 말고.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누군가가 우리 대화를 엿들으면 안 돼.”
“보이지도 않는 사람을 특정해서 전음 보내는 건 꽤 어려운데요.”
“어렵다는 건 불가능하진 않다는 뜻이겠지. 해줘.”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됐습니다. 댁들 장로조차 이 대화를 도청하기란 어려울 겁니다. 이제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하지만 투명한 마녀는 편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금 한참을 침묵한 끝에 말했다.
“……당신이 우부르카의 부친이야?”
“아. 괜찮네요.”
“……뭐가?”
“저보고 사왕이냐고 묻는 대신 우부르카의 부모냐고 물었잖아요. 여러분에게, 우부르카가 어떤 식으로든 꽤 중요한 존재로 각인되었다는 거죠. ‘그 새끼’라거나 ‘돼지 자식’이라거나 멸칭으로 부를 수도 있었는데 정중히 우부르카의 이름을, 게다가 저에게는 부친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부르카가 잘 설득하고 있나 보군요. 아니면, 잘 설득했든가. 다만 정식으로 항복 사절을 보내는 대신 이렇게 저와 몰래 만나려 한다는 건…. 사소한 트러블이 생겼다는 뜻이고요. 아닙니까?”
“…….”
투명한 자는 잠시 침묵했다.
“……우부르카의 이야기는 잘, 신중하게, 진지하게 들었어.”
“음.”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들었어. 그 얘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검증하느라 이렇게 늦어진 거야….”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듯이.
왜 긴장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어. 사자세계(觸子世界)에 조사대를 급파했지. 우부르카가 말해준 루트를 따라서 몽마족과 접촉했고. 사왕, 당신이 신으로서 행한 역사를 봤어.”
“왜 그렇게 무서워하세요?”
“뭐?”
“지금 떨고 있잖아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 있냐니…….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처음으로 투명한 자는 웃음을 흘렸다. 재밌다는 웃음이 아니라 어이없다는 웃음이었지만.
“뭘 무서워하냐고? 그야 당연히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지.”
“네?”
“꿈속에서, 당신의 휘하에 흑색 도포를 입은 정예병 일천이 있는 걸 봤어. 당신이 부탁하면 기꺼이 따라주는 지정족 전사들, 수천의 아수라(阿修羅)들을 봤어. 그리고…… 당신에게 복종한 살천성의 모습도.”
“…….”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신을?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우리를, 50층을 초토화시키고 당신만의 천년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텐데?”
투명한 자는 “진짜 미치겠네”라고 중얼거렸다.
“……조사대엔 함구령을 걸어놨어. 아직, 당신이 어느 정도 헌터인지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몰라.”
“요컨대 당신이 제1본부의 책임자군요. 저희에게 투항할 마음이 들었습니까?”
“그래.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
“뭡니까?”
“우리는 당신한테 항복하는 거야. 사왕. 오직 당신한테.”
전음으로 무척이나 뚜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투명한 음색. 아무런 주저도 망설임도 없이 결심을 고하는 목소리였다.
“반마맹(反魔盟) 같은 오합지졸한테는 절대 투항하지 않아.”
“…….”
“당신만은 종족들을 진정한 친구로 대우했어. 적어도, 그러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동료들까지 설득해서 말이야. 그래. 인정할게. 당신이라면, 우리가 당신한테 패배하는 것이라면 [의미]가 있어. 하지만 저들은 아니야!”
투명한 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내 어깨 너머를 가리키고, 바라보며, 이빨을 씹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50층에 발을 디딘 자 중에 한 명이라도 무죄한 자가 있을까보냐! 아아. 가끔 죄를 덜 저지른 자는 있었지. 그런 애들은 기꺼이 우리 마탑에 가입했어. 알겠어? 사왕, 알겠냐고. 우리는 저 개자식들이 보는 앞에선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아!”
그것은 잿빛 거미가 꺼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
나는 잠시 생각하고서 말했다.
“즉, 반마맹 사람들은 철저하게 빈 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군요.”
“그래. 어차피 얻을 자격도 없는 놈들이었어. 당신 덕에 숟가락이라도 올릴 수 있었던 거지. 그런 새끼들한테, 착각으로라도 [우리가 이겼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겠어.”
투명한 마녀의 말은 결연했다.
“그래. 우리도 잘 살진 않았지. 인정해. 하지만 그런 우리를 모욕할 수 있는 건 우부르카와 너, 그리고 너희 세계의 전사들뿐이야! 너희에겐 얼마든지 무릎을 꿇어주겠지만, 다른 놈들에겐 안 돼. 절대로 안 돼.”
“우부르카는 뭐라 하던가요?”
“[어려운 일이다]라고 말하더군. 그리고, 자기 애비와 얘기해볼 것을 권했지. 내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우부르카의 권고 때문이야.”
하긴.
그러겠지.
“……해피엔딩은 항상 어려운 법이지요.”
“뭐?”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지킨다. 그것이 원한이든, 자존심이든, 무엇이든. 세상이 이 모양인 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일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선문답? 나, 그쪽은 취향이 아닌데.”
“여러분에게 소중한 것들을 잘 알았습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니 여러분은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됩니다.”
잠시 텀이 있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말이야?”
“예. 문을 열고, 도개교를 지나, 사자세계로 건너가세요. 거기 가면 제 아이들이 잘 안내해줄 겁니다.”
“…….”
“단. 이 도개교는 걸어서 건너주세요.”
나 역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고 그냥 첨탑 안에서 사자세계로 전송하는 건 불가합니다. 저에게만 항복하겠다면, 도저히 신도들에게 무릎을 꿇지 못하겠다면, 도개교를 건너는 정도의 예의와 기개는 보여주십시오.”
“설마…… 도개교를 건너는 도중에 우릴 습격하는 자는 없겠지?”
“저는 사왕입니다.”
나는 담담히 말했다.
“제가 어떤 존재인지 아셨다니, 제 이름에 걸린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도 아시겠지요. 여러분은 그 약속을 믿으셔도 좋습니다.”
투명한 자는 침묵했다.
“……좋아.”
하지만 끝내 수긍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저, 정말로 단순히, 도개교를 걸어서 건널 뿐이다. 어려울 게 어디 있는가? 제1본부에서 근무한 거미들이라면 질리도록 유리 도개교를 건너봤겠지.
어려울 건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럼 1시간 후에.”
“예. 1시간 후에 나오십시오.”
나는 작별을 고하고 돌아왔다.
“…….”
돌아오고 나니, 잿빛 거미는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약은 녀석. 잔꾀를 부리긴.”
“장로님이 총책임자인데 그래도 일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알아야죠.”
“그래서 본부장한테 거짓말을 했냐? [장로조차 이 대화를 도청하기란 어려울 겁니다]라니. 애당초 나한테까지 동시에 전음을 보낸 주제에.”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전음을 투명한 본부장만이 아니라 잿빛 거미한테도 흘렸다. 덕분에 장로는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음질 괜찮았죠?”
“오냐, 수신양호더라, 씨발놈아.”
“이제 제가 좀 달리 보이십니까?”
잿빛 거미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내가 우부르카의 과거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했을 적 보였던 눈빛이, 투명한 마녀와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지금은 조금 더 짙어져 있었다.
잿빛 거미가 한탄하듯 말했다.
“다 진짜야?”
나는 팔짱을 끼고서 가슴을 폈다.
“예. 제가 바로 사왕입니다.”
“그거 말고, 쌍놈아.”
“흑색 도포를 걸친 정예병 일천이 망설임 없이 복종하며, 무수한 지정족 전사들, 수천의 아수라(阿修羅)가 뒤를 받치고 있지요. 제 라이벌이 두 명인데, 한 명은 백색 도포를 걸친 정예병 일천과 256개의 색깔을 지배하는 싸움귀들, 그리고 잡스러운 말총머리 놈팽이를 하나 거느리고 있고, 다른 한 명은 그런 인망은 전혀 없는데 원조 검제 픽이라 그냥 무지 센 노친네고요.”
“그것도 말고, 개잡놈아.”
나는 더더욱 가슴을 폈다.
“그럼요? 불멸의 광휘를 검으로 삼았다는 것? 그에 대적하던 핏빛의 마왕을 타천시켜 사역했다는 것? 저 무시무시한 별자리 살해자, 이 50층의 [시즌 보스]로 이름을 날리던 살천성마저 제 휘하에 속해 있다는 부분 말이십니까?”
“아, 그 따위 [시시한] 것들 말고 말이야! 진짜 능청 하나는, 제기랄!”
투명한 마녀가 내가 가진 힘에 두려움을 드러냈던 것과 달리, 잿빛 거미는 그것을 [시시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강한 새끼들. 강한 새끼들을 산더미처럼 부리는 더 강한 새끼들… 천년을 살면 그런 [평범한 강자] 따윈 셀 수 없이 보게 마련이야. 당장 우리가 모든 별자리를 탑 아래 못박지 못한 이유가 뭐겠어. 저 씨발 거짓 신 새끼들이 모시는 상위 거짓 신 새끼들, 마호스를 필두로 하는 그 관음증 환자 새끼들이 50층 내려다보면서 팝콘 처먹을 수 있는 이유가 도대체 뭐겠냐고.”
잿빛 거미는 이를 갈았다.
“조금 의외인 건 네가 살천성을 거두었다는 부분이지만, 그건 살천성이 그런 시시한 강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검제가 달랐던 이유도 그런 시시한 강자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하지만 넌… 알 거 아니야. 내가 뭘 말하는지.”
음.
“정말이야?” 그래.
“진짜야?”
그렇다.
“사왕, 너는….”
투명한 마녀가 내 힘에 더 주목하는 바람에 충분히 실감하지 못했던 부분을, 멀찍이서 엿들었음에도 잿빛 거미는 정확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녀는 신음하며 물었다.
“30층에서, 40층에서… 신으로 군림하지 않은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믿을 수 없어!”
잿빛 거미가 와락 소리쳤다.
“네가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아니, 그런 인간이 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어! 지금까진 누구도….”
“예.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지요.”
나는 거미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믿으실 수가 있어요. 저를 거짓말쟁이라 생각하시고, 첫 번째 마탑이 확인했다 말한 내용을 착각한 거라 여기시고, 그렇게 전부 다 일소에 부쳐버리고, 잊고 넘어가시는 것도 분명 거미 님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입니다.”
“…….”
“아니면, 전혀 다른 선택지를 택하실 수도 있지요.”
잿빛 거미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동시에 뒷걸음질을 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게 다가오려는 것도 멀어지려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멈추어 섰다.
나는 기다렸다.
잿빛 거미는 마탑을, 마탑을 둘러싼 군세들을, 점점 더 밝아오는 여명을 번갈아 보다가, 절벽에 몰린 짐승의 단말마처럼 중얼거렸다.
“……몽마족인지 뭔지가, 네 공략 과정을 쟤네한테 꿈으로 보여주었다고 했지.”
“예.”
“……나한테도 보여줘. 그걸 보고, 그 다음에… 아니. 아무튼 일단, 그걸 나한테도 보여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네요.”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2.
새벽이 더디게 하늘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새벽이 기어오르는 소리는, 반마맹의 막사와 가건물에서 신도들이 기지개를 펴는 소리였고, 사도들이 몸단장을 하는 소리였으며, 어느 꼬마가 우는 소리, 어느 가축이 우는 소리였다.
“……그래.”
그리고 천 년을 살아온 어느 마법사가 그래, 라고 내는 소리였다.
“…….”
잿빛 거미의 눈동자는 흐릿했다.
방금 몽마족의 도움으로 긴 꿈을 꾸고 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작은 중얼거림.
“……나는,”
조금 시간이 흘러, 얼굴을 감싼 채 잿빛 거미는 말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본래 내 자매를 지키자는 생각 따윈 없었어. 그저, 내 어미한테 씨를 뿌린 작자를 찾아 죽이고, 그 작자의 마을을 불태우고, 마을의 영지를 작살내고, 영지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나라의 대륙을 불태우자……. 어느 순간부터인지 주변에 자매들이 있었지.”
그 말들은 그녀의 혀가 튕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벌어진 입술에서 스스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책임감 따윈 없었어. 하지만 책임은 있었지. 책임이 있는 곳에서 책임감을 짊어지지 않는 새끼가, 생각해보니, 내 아비 같은 작자더군. 우리의 신족들이었고. 그놈들처럼 되진 말자며 동족의 군주가 되었지. 마탑을 세웠다.”
약속된 아침.
첨탑의 철문이 끼이익, 열렸다.
“내 인생엔 무엇이 되자는 게 없었어. 그것처럼 되지는 말자. 그놈을 닮지는 말자. 그 새끼들만은 죽이자. …돌이켜 보면 나는 시종일관, 그것으로만 살아온 사람이야.”
반마맹의 신도들이 웅성거렸다.
웅성거림은 각양각색이었다. ‘정말로 항복하는 건가!’, ‘제길’, ‘어디 얼마나 뻔뻔한 얼굴로 나오는지 봐보자!’, ‘끝이다! 우리의 승리다!’ 각자 자신의 감정을 토하면서, 수천수만 명의 인간들이 포위망을 이룬 채 첨탑을 지켜보았다.
“처음이었어. 검제가.”
철문의 열린 틈새에서, 수백 명의 거미들이 걸어나왔다.
“녀석처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든 건, 천 년 만에 처음이었지.”
거미들은 백기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 ‘뭐야?’ 그러자 각양각색으로 흐르던 군중의 수군거림이 조금씩, 한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백기가 없는데.’ 거미들은 보폭이 당당했고 또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
똑바로. 정면을 노려보며 철문을 걸어나왔다.
‘진짜, 뭐야?’
마치 자신들은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가벼웠거든.”
그렇게 말하는 잿빛 거미의 목소리 또한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아무것도 증오하지 않는 것 같았어. 시늉이 아니었지. 그 정도를 알아볼 안목은 나한테도 있거든. 그렇다고, 딱히 선한 것도 아니야.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서 안달이 난 부류가 아니었다고. 그냥…… 가벼웠어. 바람처럼.”
분노도. 경멸도. 악의도.
내가 꿈을 보여주기 전까지만 해도, 진득하게 차 있던 증오마저도.
“그 사람처럼 사는 게 가능한가 싶었지.”
반마맹의 사람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어라!’ ‘사죄해라!’ 지난 네 곳의 본부가 투항하는 모습을 너무 얌전히 봐줬다고 느꼈는지 신도들은 거리낌 없이 소리쳤다. ‘꿇어라!’ 너희의 인생이 통째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꿇어라!’ 그저 몇 부분만 잘못된 게 아니라 너희의 존재 그 자체가 전부 잘못됐다는 것을, ‘꿇어라!’ 신도들은 이번 기회에 기필코 증명하려 들었다.
“내심 생각했지.”
“꿇어라!”
“가능하지 않다고. 불가능하다고. 저런 삶은, 나에게는 물론이요 다른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고.”
“꿇어라!”
“그러니까 검제는 그저 유일한 예외에 불과하다고.”
“꿇어라!”
“하지만, 그렇구나.”
“꿇어라!”
“꼭 그렇지도 않았다는 거구나.”
“꿇어라!”
제1본부의 거미들이 도개교를 밟기 시작했다. 터벅. 유리처럼 투명한 도개교는, 수백 명의 발걸음에도 위태로이 흔들리지 않았다.
잿빛 거미와 나는 그런 도개교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검제와 다르더라도. 아예 정반대더라도. 그래서 무겁더라도. 너무도 무겁더라도.”
“…….”
“나와도 다른 삶이, 또한 가능했다는 것이로구나.”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 1본부 거미들은 당당하게 유리 다리를 건넜다.
당당함이 가까워질수록 신도들이 토해내는 분노는 더욱더 뜨거워졌다. ‘꿇어라! 꿇지 못해?!’ ‘저것들이!’ 어디서 가져온 건지 썩은 과일이나 오물 따위를 던지려 드는 사람도 있었다.
“안 하셔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고마워. 그럴 수도 있겠지.”
잿빛 거미는 얼굴을 감싼 손을 내렸다.
“검제를 특별한 예외라고 생각하며 백 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어. 널 비슷한 예외라고 생각하며 천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거야.”
“…….”
“나는 틀리지 않았고.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고. 나는. 나는. …… 그치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울면서 웃고 있었다.
“그건 과연 너무 쪽팔리지 않겠니.”
그리고.
잿빛 마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
도개교를 건너던 1본부 거미들이 멈칫했다.
아니. 조마조마한 얼굴로 투항식을 지켜보던 2본부, 3본부, 4본부, 5본부의 거미들도. 그들을 둘러싸서 광분하고 야유하던 반마맹 신도들도. 축제 아닌 축제에 끼어들어 우우 소리치던 일반 헌터들도.
“미안합니다.”
잿빛 마녀는 신도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무릎 꿇기를 거부한 수백 명의 거미를 대신하여 가장 큰 거미, 모든 마녀족의 군주, 신에게조차 무릎을 꿇지 않은 신살자(神殺者)는, 몸에 붕대를 감은 채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조용히.
“저의 천 년이 틀렸습니다.”
도시가 침묵했다.
31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