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15)
3.
신기한 일이 이어졌다. 자기 자신을 나의 팬이라고 소개한 소년은, 놀랍게도 헌터가 아니라 성좌라지 않는가.
“어. 성좌가 길을 잃거나 굶을 수도 있습니까?”
“당연하죠, 사왕님.”
소년이 베시시 웃었다.
“성좌도 알고 보면 천차만별이랍니다!”
우리 둘은 마침 가는 길이 비슷해서 한동안 동행하기로 했다. 한적해진 숲길을 걸으며, 풀숲에서 빼꼼 고개를 들이민 토끼와 사슴을 관중으로 삼아, 우리는 떠들었다.
“전 정말로 신도가 한 명도 없거든요…. 600년 전에 한 명이 있긴 있었는데 그걸 마지막으로 단 한 명도 신앙을 주지 않았어요. 뭐어, 결론적으로 완전 가난뱅이처럼 살고 있답니다.”
“엑. 그럼…….”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소년을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더기 옷을 걸친 소년은 어딜 어떻게 봐도 가난한 동네 꼬맹이처럼 보였다.
“최소 600살…?”
“어쩌면 그 10배일지도 모르지만요. 성좌는 시간 감각이 헌터들이랑 많이 다르거든요! 대체로 천 살까지는 나이를 세는 경우가 제법 있지만 그 이후론 다 때려치워요. 의미 없고. 보람 없고. 재미도 없고!”
무시무시하군.
“성좌라면 이명이 있으시겠네요.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으왓. 물론 이명도 진명도 있지요. 정말로 존경하는 사왕님께 이름을 말씀드리기 조오금 부끄럽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말씀드리자면! 예! 제 이름은…….”
[■■■■ ■■ ■■■■ ■■■ ■■■■■.]“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괜찮은 이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서 밝게 웃고 있는 이 소년과 정말로 잘 어울리는, 그야말로 소년을 위해 지어진 것만 같은 이름이었다.
“좋네요. 부끄러워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멋지기만 한 이름인데요.”
“그, 그런가요? 아하하. 사왕님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네요. 음! 부끄럽습니다…….”
소년은 작게 웃었다. 검지로 자기 뺨을 긁적이는 그의 모습이 퍽 순수해 보였다. 나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이 방향에 뭐가 있었더라.”
“어딘가 가시고 싶은 곳이 있는 건가요?”
“일단 도시나 마을에 들려서 보급품 좀 구하려고요. 될 수 있으면 큰 마을이면 좋겠는데….”
이 성좌 같지 않은 성좌인 소년한테 옷이라도 한 벌 사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소년이 손을 들었다.
“아!”
[■■■■ ■■ ■■■■ ■■■ ■■■■■.]“그런 곳이라면 바로 저 길을 벗어나면 있습니다!”
소년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러로 시력을 강화하여 멀리 투시해보니, 정말 소년의 말대로, 그곳에 도시가 보였다.
“어라. 정말이네.”
우리는 발길을 옮겼다. 도착해 보니, 규모가 너무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딱 내가 마음속으로 있으면 좋겠다 싶은 정착지였다.
나는 길거리의 옷가게에 들어갔다. 짤랑. 문에 달린 풍경(風磬)이 흔들렸다. 가게 안에서 책을 읽고 있던 중년의 가게 주인이 머리를 들었다.
“어서옵셔어.”
“안녕하십니까. 옷 좀 보려고요.”
나는 창문 너머를 손가락질했다.
길거리 한복판, 체구 작은 소년이 멀뚱멀뚱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아이한테 어울리는 옷을 사주고 싶은데요. 활동하기 편한 복장으로. 뭐 괜찮은 옷 없을까요?”
“아이?”
주인장이 의아해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이가 어디 있다는 겐가?”
“저기요. 거의 누더기 차림인 남자아이 있잖아요.”
“음? 미안하군. 아무도 안 보이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
[■■■■ ■■ ■■■■ ■■■ ■■■■■.]“……아아. 저 아이 말이로군.”
노인이 안경을 추스어 올렸다. 시력이 떨어져 노안이 온 것일까? 노인은 자신의 나이로 인한 실수가 살짝 무안했는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네. 그래, 여린 아이가 안 되었군. 활동성이 좋은 옷이라고 했나? 조금만 기다려주면 내가 바로 내어오겠네.”
“아.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다 장사인데 뭘.”
나는 값을 치르고 소년한테 옷을 건네주었다.
깜빡.
소년이 멀뚱멀뚱거리며 나를 올려봤다.
“저어, 사왕님. 이건……?”
“선물이에요.”
품이 넓은 하얀색 로브.
흰색이어서 때가 타기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이래 봬도 매직 아이템. 땟국물이 묻지 않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방한 마법과 방온 마법은 덤. 여차하면 노숙할 때 침낭 대신으로 쓸 수도 있거니와, 옷안에 주머니가 많아 수납 공간도 충분했다.
“왠지 이런 옷이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아서요. 괜히 멋진 옷보다. 한번 입어볼래요?”
“…….”
머뭇, 거리면서 소년은 옷을 입었다.
“오. 괜찮네요.”
천생 순수해 보이는 소년의 분위기와 흰 로브가 잘 어울렸다. 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면서 소년을 앞뒤로 둘러보았다.
“어라, 그런데 좀 큰가?”
다 좋았지만 소년의 체형에 비해 로브가 너무 펑퍼짐했다. 거의 사이즈가 1.5배는 차이나는 것 같았다.
“이상하네. 분명히 딱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응. 아니요.”
[■■■■ ■■ ■■■■ ■■■ ■■■■■.]“이 정도 사이즈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소녀가 옷소매 너머로 손을 꺼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옷소매에 손이 파묻혔는데, 다시 보니 살짝 손목 라인을 웃돌 뿐. 체형이 과하게 안 맞는다는 느낌은 없었다.
“다행이군요.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나는 소녀에게 방긋 웃어주었다.
“그럼 잠깐이었지만 동행해서 즐거웠습니다.”
“…….”
“다음부터는 숲에서 길 잃지 않게 조심하세요. 언제나 저 같은 놈이 숲속에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가 작별 인사를 고하고 등을 돌리려는 순간.
“사, 사왕님! 잠시만요!”
소녀가 내 옷소매를 잡았다.
“네?”
“그게…….”
소녀는 우물쭈물거렸다. 입술은 열렸지만 혀가 방향성을 잃은 채 입안을 멤돌았다. 한 번, 소녀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이빨을 꾹 물었다.
소녀의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사라락 교차하는 것이, 언뜻, 엿보였다.
“그러니까…….”
[■■■■ ■■ ■■■■ ■■■ ■■■■■.]그러니까 무슨 일인 걸까.
마치 나의 도움을 구하는 듯한 눈길에 내가 반문하려자,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불쑥 끼어들었다.
“—-여기 있었군.”
그건 소녀의 목소리도 나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너를 찾아 한참을 돌아다녔다.”
“……!”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획 고개를 돌렸다. 성검의 칼자루를 잡으면서. 목소리가 들린 곳은 정확히 나로부터 열두 걸음 떨어져 있었으며, 나는 [상대방이 열두 걸음 안쪽까지 들어올 때까지] 전혀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료했다.
상대가 어마어마한 고수라는 것.
– 좀비야.
‘예.’
배후령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경고했다. 그가 뭘 경고하려는 건지 충분히 알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60층에서 만난 헌터 중에 제일, 압도적으로 강합니다. 저 녀석.’
묵색(墨色)의 도포를 입은 남자였다.
“어디로 도망쳤나 싶었더니 기껏해야 마을에 숨어 있었다니. 숲에 나무를 숨기려던 작정인지 모르겠다만, 그 생각을 한 것이 너뿐만은 아니었다.”
남자는 삿갓을 쓰고 있었다. 삿갓은 모두 올이 나가서 구멍이 숭숭 뚫렸다. 눈비를 막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자의 얼굴마저 삿갓 너머로 훤히 드러났다.
삿갓에 뚫린 구멍으로 남자의 눈동자가 내 쪽을 흘껏, 보았다.
“이상한 놈이랑 붙어다니는군.”
“…….”
“따라와라. 너도 저잣거리에 피가 흐르는 걸 보고 싶진 않겠지.”
꾸욱.
옷소매가 좀 더 강하게 잡아 당겨졌다.
소녀는,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내게 메달려 있었다.
“……음.”
슬쩍 발걸음을 옮겨 소녀를 남자의 시선으로부터 가렸다. 삿갓의 남자는 눈썹을 찡그렸다.
“뭐냐?”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왜 이 아이를 데리고 가려는 건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사람을 보고 초면부터 [누구냐]가 아니라 [뭐냐]고 묻는 시점에서 이미 당신의 인성이 보이네요.”
“재밌는 얘기를 하는군.”
삿갓의 남자가 비웃었다.
“사람의 인성을 볼 줄은 알지만 실력을 볼 줄 모르는 놈이기도 하고. 보통 그런 인간이 가장 먼저 죽지. 용케도 60층까지 올라왔어.”
“아마 제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겠죠?”
“목이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면, 인정해주마.”
챠아앙!
이후, 찰나 동안에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남자가 검을 뽑아 휘둘렀다. 검은색의 오러가 출렁거리며 우리 둘 사이를 단숨에 갈랐다. 하지만, 열두 걸음이 여섯 걸음에 줄어 들었을 무렵 나의 검격이 남자의 일격을 가로막았다.
“…….”
남자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쉬이익! 나를 기준으로 남동쪽, 등 뒤, 서쪽, 전부 세 방향에서 표창이 날아왔다.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일행을 끌고와 잠복시켜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세 명의 적의를 눈치 채고 있었으며, 채앵! 세 개의 표창이 스무 걸음 안까지 파고들기도 전에 요격했다.
“허.”
남자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평범하게 길거리를 걸어가던 행인, 마침 내 근처에 있던 행인 중 한 명이 돌연,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달려들었다. 그 역시 남자의 일행이었다. 나는 오른손을 오러로 강화하여 단검을 꽉 잡았다. 손을 꺾어, “커헉?!” 팔을 어깨째로 부스러트려, 뒤쪽으로 날려버렸다.
그것이 찰나 동안에 벌어진 일의 전말이었다.
“……제법이군.”
“히이이익!”
그제야, 마치 잠깐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 듯, 길거리에서 비명이 울렸다. 사람들은 뒤늦게 싸움을 알아차리고 얼른 몸을 피했다.
오직 나와 소녀.
삿갓의 남자와 그 일행들만 대로에 남았다.
“건방진 소리를 할 정도의 실력은 갖추었다 이건가.”
“뭐. 건방진 사람을 혼내줄 정도의 실력은 가졌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반항한 것이겠지?”
“글쎄요. 으음. 잘 모르겠는데.”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마도, 아무런 힘도 없는 성좌를 끌고 가려는 쓰레기 개차반들…?”
“…….”
삿갓의 남자는 표정이 점점 더 볼 만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보는 재미가 적었다. 남자의 생명은 얼굴이다. 조금 더 재밌게 해주지.
“아. 삿갓 하나 살 돈이 없어서 계속 쓰고 다닐 만큼 돈이 없는 조직이란 것도 알겠네요. 제가 후원해드릴까요? 이래 봬도 돈이 썩어 넘쳐 흐를 정도로 있거든요. 여러분 같은 거지들도 네 명까진 구제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섯 명은 곤란하고. 여러분끼리 제비뽑기 해서 한 명만 떨어트려주시죠.”
“좋다. 결정했다.”
삿갓의 남자가 장도(長刀)를 고쳐 잡았다.
“혀를 잘라 개먹이로 던져주마.”
귀기가 서린 칼날.
평범한 방법으로 오러를 연마한 자가 아니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 사왕님…….”
등 뒤에서 소녀의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도움을 구해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폐가 되고 있는 것인지. 두 개의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소녀에게 나는 가볍게 한쪽 눈을 감아주었다.
“괜찮아요.”
“…….”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는 사이, 삿갓의 남자는 자세를 취하였다.
“본좌는 혈마신교(血魔神敎)의 교주. 혈마(血魔)다.”
“……응?”
나는 눈을 깜빡였다.
“혈마?”
“그렇다.”
“혈마교? 그러니까, 마교라고? 앞에 혈 자 붙은 마교?”
“실로 그러하다.”
삿갓의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내 반응에 만족한 것 같았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물론, 네놈 스스로 혓바닥을 잘라 사죄한다면 용서해주지. 일생을 혀 없는 몸으로 살아가며 너의 오만을 참회하여라. 본좌는 자기 자신을 질책할 줄 아는 자에겐 너그럽…….”
“뭐야. 완전 개사이비 종교 단체잖아?”
“…….”
우뚝.
삿갓의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 그딴 사이비 이단 교주가 본좌 본좌 거리면서 돌아다니냐? 혈마? 신교? 마교면 마교고 천마면 천마지, 혈마는 어디서 기어나온 잡종이야?”
“뭐…….”
“야. 너희 누구 허락 받고 단체 이름에다 마교를 갖다 붙이냐? 이제 보니 거지가 아니네. 내가 말을 잘못했네. 야, 개방(用常)도 너희 보다는 근본이 넘치겠다. 알아? 개방이 너희한테 이건 웬 족보도 없는 잡놈들이냐며 시비를 털어도 관아에선 개방 편을 들어줘요.”
“…….”
“그리고 혈마는 인마. 내가 데리고 다니는 사마군 중에 한 명이 혈마야. 교주는커녕 교주 아래의 아래나 쓰는 명호라고. 씁. 어디서 건방지게 본좌 본좌 거려? 혼날래? 쳐맞을래요?”
“네 놈…….”
“하여간 무림풍 세계에서 올라온 놈들일수록 오히려 예절을 몰라요. 제발 레벨에 맞게 노세요, 레벨에 맞게. 자아. 이제부터 견적 들어갑니다. 잘 들으세요. 일단 간판에서 마(魔)를 빼. 신(神)도 빼라. 내가 딱 혈교까진 인정해주마.”
“죽인다.”
남자의 면상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반드시 죽여주마!”
아니.
왜 사이비 이단교주가 화를 내?
방귀 뀐 놈이 성을 내네.
31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