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17)
1.
[축하드립니다.] [■■■■ ■■ ■■■은 당신의 성좌입니다.] [당신은 ■■■■ ■■ ■■■의 유일한 신도입니다.]꿈을 꾼 것 같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꿈을.
-…….
그 꿈은 긴 것도 같고 짧은 것도 같아서, 나의 시간은 유속이 흐트러졌다. 마치 시냇물 한복판에 서 있는데 내 허리의 오른편과 왼편에 휘감기는 냇물이 각각, 저마다 다른 속도로 흘러 지나치는 듯했다.
시간에 잡아먹히는 감각.
-음.
째깍.
하루가 지났다.
혹은, 하루가 지났다고 느껴졌다.
-이거 아무래도 엿된 거 같은데.
‘네?’
-아니야. 지금 말해봤자 소용없어. 나도 권능 아래에 지배되고 있거든. 가령 내가 지금 뭐라고 말을 씨부려봤자, 너한테 기억 왜곡이 들어갈 테고, 놀랍지만 나한테까지 왜곡이 가해지겠지.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말로 해도 쓸모없는 경우가 많다는, 인생의 아주 당연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단다. 좀비야. 네가 물리적 좀비에서 시간적 좀비로 전직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말이다.
뭔 소리여.
-이걸 어쩐다. 제법 고약한데.
배후령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단순히 기억만 왜곡할 뿐이면 대처할 수단이 존나 많은데. 이건 아마도 [세계 조작]이란 말이지. 과연 60층 너머부턴 개변태 또라이들이 넘치는군. 왜 하필 너한테 변태가 붙은 건지 한탄할 만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붙을 만해. 김좀비 이 새끼에겐 삼라만상의 변태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들러붙을 자질이 충만하거든.
‘……그러니까 정말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어쩔까.
배후령의 눈동자가 침잠했다.
나의 질문을 무시한 채, 배후령은 그만의 세계에 잠겼다.
-어떡해야 이 고약한 별새끼를 조지지?
그 순간.
“공자님?”
너무나 친숙한 목소리가 나의 귀를 부드럽게 잡아 이끌었다. 목소리가 인도하는 대로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보니,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고민이 있으신가요…?”
“아.”
초조해하는 낯빛. 불안해하는 눈빛.
소년의 모든 표정과 눈짓이, 어쩌면 존재까지,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여리고 안타까운 것을 지켜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만…….”
-야. 나에 대한 얘기 절대로 하지 말아봐. 어디 어떻게 되나 시험해보자.
“……다만, 그냥 생각이 멍해져서요.”
나는 입안이 텁텁해졌다. 이 순수한 소년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 나의 [단 하나뿐인 성좌]이자 [유일무이한 신]인 그에게 무언가를 숨겨야 한다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흐응.”
소년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공자님은, 생각이 많으시구나.”
[■■■■ ■■ ■■■■ ■■■ ■■■■■.]“생각이 많은 건 상냥한 사람의 증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년은 내 팔뚝에 머리를 기대었다. 물씬. 좋은 향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이유는 몰라도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향기…… 지금 이곳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한테서 맡아봤던, 푸르디 푸른 향기였다.
-음.
행복한 순간을 즐기고 있자니 배후령이 며칠 만에 말을 걸었다.
-이거 아무래도 엿된 거 같은데.
‘네?’
-아니야. 지금 말해봤자 소용없어. 나도 권능 아래에 지배되고 있거든. 가령 내가 지금 뭐라고 말을 씨부려봤자, 너한테 기억 왜곡이 들어갈 테고, 놀랍지만 나한테까지 왜곡이 가해지겠지.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한말 처음 듣냐?
뭔 소리여.
‘댁이 원래부터 제정상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오늘처럼 이상해진 적은 잘 없었는데요. 혹시 잿빛 거미 씨가 보고 싶어졌습니까? 검제 양반. 외로움이 불치병이래요.’
-좋아. 씨발. 아주 좋아.
배후령이 입끝을 히죽거렸다.
-내가 뭔 말을 했는지 모르는데도 아무튼 [자신의 권능에 방해가 되는 기억이나 사건]은 무조건 지워버리는 능력을 가졌다 이거로군. 틀림없어. 오성(语星)급 성좌다.
“……?”
-아. 제발부탁인데 표정 연기 좀 부탁한다. 헌터를 안 했다면 아마도 연극 배우를 했을 우리 좀비야. 내가 뭐라 지껄여도 낯짝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자그마한 기적을 너한테 부탁하면 그건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걸까? 내가 세상에 대해 너무 과한 기대를 품어버린 걸까?
‘……뭔가 되게 기분 나쁘지만 일단 기적은 베풀어드릴게요.’
-고오맙다.
째깍.
하루가 지났다.
“드디어 혈마교(血魔敎)의 잔당도 다 물리쳤네요. 공자님!”
소년이 기뻐했다.
“설마 광마교(狂魔敎)와 백마교(白魔敎)랑 신마교(神魔敎)가 뒤쪽에서 혈마교와 연결되어 있었다니! 그리고 네 세력의 우두머리로 천마(天魔)라는 최종보스가 숨어 있었다니! 용서할 수 없네요!”
“왜냐면, 공자님께 천마란 직함은 단순한 이름 그 이상이잖아요. 공자님도 정말 용서할 수 없으시죠?”
그렇다.
나는 지금 소년과 함께 61층을 여행하고 있다.
벌써, 일주일 정도가 순식간에 흘러가버린 기분이다.
“감히 마교 비스무리한 이름을 네 군데에서나 참칭하고, 심지어 천마의 이름까지 함부로 써먹다니. 잔악무도한 개새끼들이어요!”
그동안 우리는 거짓된 마교들을 물리치고 다녔다.
혈마(血魔)를 물리쳤고, 소년을 납치한 교단을 괴멸시켰다. 소년을 구출하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가 힘을 잃어버린 성좌라는 것. 자신을 믿어주는 신도가 단 한 명조차 없어 금방이라도 소멸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
『제가 당신의 신도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소년은 엉엉 울면서 내 품에 안겼다. 자기 역시 나만의 성좌가 되겠다고. 비록 아무런 힘도 없지만 오로지 공자님만을 위한 퀘스트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그러니 자신과 단 둘이서 100층에 오르는 그 날까지 힘 내자고.
『우리는 일생을 동반키로 서로 약속하였다.』
분명히, 그랬다.
『한 명의 헌터와 한 자락의 별자리.』
이것은 우리 둘만의 이야기.
-흐.
배후령이 어째선지 즐겁게 웃었다.
-지랄났네. 이러니까 하무스트라 정도 되던 오성급 성좌가 초보자 스테이지를 담당하지. 똑같은 변태지만 갠 적어도 세상을 자기 소유물로 여기지 않거든. 사실 당연한 건데 이 당연함을 충족시키는 별자리가 없지. 생각해봐라. 얼마나 인재가 없으면 하무스트라 같은 애한테 뉴비들 안내를 맡기겠냐 이 소리야.
지방방송이 심하구만.
“자아! 공자님, 어서 출발해요!”
소년이 팔짱을 끼며 환하게 웃었다.
“이번엔 백마교도 놈들을 때려잡는 퀘스트여요! 저의 유일한 신도님!”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예, 바로 가볼까요. 저의 신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방금 너희 둘이 나눈 교류가 내 눈에는 심히 에바 튜나로 보였다고 말하면, 혹시 이것도 세계 검열에 걸리냐?
[■■■■ ■■ ■■■■ ■■■ ■■■■■.]‘응? 방금 뭐라고 말했습니까?’
-걸리네. 씨벌것. 이 새끼 유치하게 나오는 거 보소.
우리는 여행을 이어나갔다.
백마교도들은 무법한 악당이었다.
매월 초파일. 백마교는 식민지로 삼은 열두 세계에 내려가 삼백 명의 아이를 모아왔다. 인신공양으로 바칠 제물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의 목숨을 희생시켜 내공을 쌓았으며, 이렇게 쌓인 공력을 가리켜 마공(魔功)이라 일컬었다.
나는 분노하였다.
『그것은 도저히 사왕이 용납할 수 없는 악이므로.』
째깍.
하루가 흘렀다.
『거짓된 마교도들을 참하는 데 사왕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사왕의 기준에서, 그들은 너무나도 명쾌하게 악했다. 상대의 사정을 고려해줄 필요가 없었다. 과거를 헤아려줄 필요가 없었다. 마음을 이해해줄 필요조차 없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단순히, 검을 휘두르면 되었다.』
째깍.
하루가 흘렀다.
『자기 자신을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싸움. 타인을 받아주지 않아도 좋은 싸움이란 얼마나 유쾌한가? 얼마나 즐거운가. 얼마나 행복한가. 어쩌면 사왕은, 그저 자신을 잊고 싸우는 것에 오랫동안 목말라 있었을지 모른다.』
째깍.
하루가 흘렀다.
-좋아 그쪽이 유치하게 나온다면 나도 유치해져주마.
하루가 흐를 때마다 어디선가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 망각 속으로 저물어버리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그건,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가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째깍째깍 타자기를 두들기는 소리 같기도 했다.
-너한테 기대하는 건 얼마 없단다. 좀비야.
마치 피아노 건반을 연주하듯.
-하지만 이거 하나만 해줘라.
‘아. 또 뭔데요?’
-매일 새벽마다 내가 문장을 하나씩 읊어줄게. 이 문장들만 잊지 마. 걱정하진 말고. 너의 귀여운 신을 위협하는 문장은 아니니까. 이 세계를 뒤흔드는 문장도 아닌데다, 그냥 의미 모를 문장에 불과해.
‘……요컨대 헛소리라는 거잖아요.’
-오냐. 헛소리지.
배후령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내 어깨 너머,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아, 하루에 딱 한 문장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소리다. 그 정도야 기억해줄 수 있겠지?
‘일단 말은 해보시죠.’
-지랄이 풍년이라 금년도 대박일세.
‘…….’
진짜 농도 100% 헛소리잖아?
쥐어짜면 헛즙이 쫘악쫘악 흘러내릴 거 같은데.
-기억해라.
그러나 배후령의 얼굴은 몹시 진지했다.
-잊어 먹으면 뒈진다.
‘……여기에 제 인생의 일부를 디스크 조각모음에 바칠 용량으로 쓰는 거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까?’
-네 인생을 통째로 휴지통에 처박기 전에 기억하라면 기억해, 새꺄. 하루에 한 문장이야. 오늘은 아무말도 더 안 할거니까 제발좀 들어.
‘음.’
배후령이 저렇게까지 애걸하는 건 드물었다.
어찌나 표정이 무시무시한지 살짝 분위기에 압도당할 정도.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까짓거 기억하면 되잖아요.’
째깍.
하루가 흘렀다.
하루가 흘러 새벽이 될 때마다, 적어도, 내가 새벽이라 느끼는 시간이 될 때마다, 배후령은 무심하게 문장을 한 줄씩 흘렸다.
-당상은 성군이요, 장군은 명장이니.
‘…….’
-뭔가 말하고 싶은 낯짝이란 건 알겠다만 그냥 쯤 뇌에 새겨. 제발 부탁이라는 말까지 해야지 내 말을 들어주겠냐?
‘아뇨. 거기까진 안 하셔도 돼요. 그냥, 댁이 너무 멍청해 보이네요. 안쓰러워요…….’
-그래. 마음껏 안쓰러워 해라. 어디 두고 보자.
째깍.
하루가 흘렀다.
나는 백마교도를 참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한 퀘스트였다. 자그마치 수백 년 동안 인신공양을 벌여온 마두들은 강했으며, 그들이 쌓아 올린 공력은 업보와 무관하게 견고했다. 악업. 악행. 악당. 그림처럼 삼박자를 갖춘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나는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저녁이 행복하여 성녀가 축복하네.
째깍.
그러나 지난한 싸움은 어민지 모르게 즐거웠다. 생각해보면, 전력을 다해 맞부딪친다는 것을, 나는 사랑하는 것 같았다.
마탑의 잿빛 거미와 일전을 벌일 때 문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즐거움이 솟아오른 까닭도 그 때문 아닐까?
-좌판을 펼쳐보세, 한세상 즐겨보세.
째깍.
소년과 함께하는 여행은 날이 더해질수록 즐거워졌다. 세상에는 아직 이다지도 명명백백한 악들이 넘쳤다. 피해가 가해를 낳지 않았고, 가해가 피해를 시늉하지 않았다. 칼로 두부를 썰듯 말끔하게 썰어도 무방한 악인들이었다.
-테러야 물럿거라 죽음아 멀리가라.
째깍.
여전히, 배후령은 의미 모를 헛소리를 뱉었다.
하루가 흘렀다.
-어화둥둥 김공자 라랄라 개새끼야.
‘…….’
나는 이제 저러려니 내버려두었다.
내가 나인 것처럼 배후령도 언제까지나 배후령이겠지.
무슨 소리냐면, 사람은 바꿔쓸 수 있어도 검제는 바꿔쓸 수 없거든.
-공자야.
바야흐로 7일째.
-나 믿냐?
오늘도 소년과 함께 거짓된 마교도를 털고 있었다. 혈마, 신마, 백마를 이어 마지막 광마가 남았다. 적의 전초기지를 박살낸 뒤 우리는 즐거운 발걸음으로 광마교의 아지트로 향했다.
“으흥흐응~.”
실제로 소년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 또한 뿌듯해졌다. 마음이라는 도화지가 행복이라는 색채로 물들어지는 기분이라 할까.
배후령은 말하자면, 형형색색의 도화지에 난데없이 뿌려지는 잿가루와 같았다.
‘아뇨. 안 믿는데요.’
-나는 너를 믿는다.
뭐지?
소름이 쫙 돋는데.
‘미쳤습니까?’
-하지만 너만 믿는 게 아니야. 나는 마르쿠스 할아범도 믿어.
‘…….’
-네가 99층에 오르지 못하면 언젠가 할아범이 대신 오를 거야. 대신, 이라는 말도 웃기지. 할범은 네 대신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는 너도 알 거라고 믿는다.
배후령의 목소리가 허공에 스며들었다.
-까놓고 말해서, 너 실패해도 돼.
‘…….’
-믿음이란 건 서로가 최선을 다해줄 거라는 생각이야. 그리고 최선이란 건, 상대방이 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정하는 수밖에 없지. 그래서 서로 신뢰하는 관계란 건 각자가 각자의 최선을 결정하며, 그 결정을 서로 받아들이는 사이를 뜻한다. 그뿐이고. 그뿐이지.
‘그거 알아요? 지금 저, 굉장히 무섭거든요?’
진심이다.
차라리 이 양반이 24시간 내내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다 해도 지금처럼 오금이 저리진 않을 거다.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런 밑밥을 까는 겁니까?’
-내 말을 한 번만 들어봐라.
‘듣고 있잖아요.’
-아니.
배후령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들어.
-일주일 동안 내가 씨불인 헛소리들 기억하냐?
‘기억하죠.’
-너 기억력 씹망이잖아. 진짜 다 기억해?
‘댁이 그렇게 기억해놓으라 엄포를 놨는데 그럼 생깔까요? 그리고 저 기억력 좋습니다. 댁의 기억력이 변태적일 뿐이지 저도 어디 가서 꿇리진 않는다고요.’
-다행이네.
배후령이 턱끝을 까닥였다.
-그럼 읊어봐.
‘소리내서요?’
-아니. 머릿속으로.
‘…….’
좋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응? 공자님?”
갑자기 내가 걸음을 멈춘 탓일까.
앞서 걸어가던 소년이 따라 멈추어, 나를 뒤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신님.”
나는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조용히 의식에 집중했다.
‘배후령이 말한 헛소리들이라.’
이미지는 검은색 도화지에 하얀 글씨를 새겨넣는 것.
의식의 산물을 외부에 드러내는 일이 업(業)인 오러 유저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벽돌을 쌓듯 한줄한줄, 지난 7일의 마디들을 이어붙였다.
지랄이 풍년이라 금년도 대박일세
당상은 성군이요 장군은 명장이니
저녁이 행복하여 성녀가 축복하네
좌판을 펼쳐보세 한세상 즐겨보세
테러야 물럿거라 죽음아 멀리가라
어화둥둥 김공자 라랄라 개새끼야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배후령이 [저렇게까지] 말하도록 한 이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나는 의식의 시간을 가속시켰다.
‘단순한 헛소리로 저런 낯부끄러운 대사를 할 양반이 아니다.’
무엇일까.
어떤 장난을 쳐놓은 걸까.
‘배후령이 뭐라 말했었지?’
나는 기억을 되새겼다.
왠지, 이유를 알 수 없이, 기억의 중간중간이 벌레에 좀먹힌 것처럼 파내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올릴 수 있는 목소리가 더러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엿된 거 같은데.』
기억 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단서가 되어주지 못한다.
『지금 내가 한말 처음 듣냐?』
이것도.
『좋아.』
그렇다면, 이건?
『그쪽이 유치하게 나온다면 나도 유치해져주마.』
나는 가속된 시간선상에서 잠깐 의식을 멈추었다.
“…….”
유치하게.
본래 검제는 유치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배후령이 말한 것들을 맨처음 한 글자씩만 떼어내서, 보면.
‘지’랄이 풍년이라 금년도 대박일세
‘당’상은 성군이요 장군은 명장이니
‘저’녁이 행복하여 성녀가 축복하네
‘좌’판을 펼쳐보세 한세상 즐겨보세
‘테’러야 물럿거라 죽음아 멀리가라
‘어’화둥둥 김공자 라랄라 개새끼야
“…….”
아닌데.
말이 안 되잖아.
문장 맨마지막을 떼어내서 소리 내어도…… 세니네세라야? 안 돼. 머릿속으로 조합해봐도 그럴듯한 메세지가 조립되지 않는, 아니지. 잠깐만.
잠깐만.
‘지’랄이 풍년이라 ‘금’년도 대박일세
‘당’상은 성군이요 ‘장’군은 명장이니
‘저’녁이 행복하여 ‘성’녀가 축복하네
‘좌’판을 펼쳐보세 ‘한’세상 즐겨보세
‘테’러야 물럿거라 ‘죽’음아 멀리가라
‘어’화둥둥 김공자 ‘라’랄라 개새끼야
“…….”
그러니까.
지■■ ■■■■ 금■■ ■■■■
당■■ ■■■■ 장■■ ■■■■
저■■ ■■■■ 성■■ ■■■■
좌■■ ■■■■ 한■■ ■■■■
테■■ ■■■■ 죽■■ ■■■■
어■■■ ■■■ 라■■ ■■■■
…….
그러니까.
지금.
당장.
저성.
좌한.
테죽.
어라.
…….
『지금 당장 저 성좌한테 죽어라.』
“…….”
“공자님?”
『나 믿냐?』
“괜찮으신가요? 한참 말이 없으셔요. 표정도, 무척 없으시고.”
『나는 너를 믿는다.』
“아. 혹시 마두들과 싸우면서 입은 내상 때문에…? 아무래도 연전이 과하긴 과했지요. 퀘스트를 좀 급하게 당겨버린 감이 없잖아 있어요. 조금 쉬었다가 갈까요?”
『들어.』
“…….”
나는.
“공자, 님?”
나는.
소년의 손에 단검을 쥐여주고.
“아?”
그대로 그 단검을, 내 목을 향해 끌어당겼다.
“……!”
파육음이 터졌다.
“아니, 공자님, 대체 무슨……?!”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가 저항해볼 틈도 없이, 어떤 능력이든 스킬이든 사용할 여유조차 없이, 나는 그의 몸을 오러로 고정시켰으며, 고정된 칼날의 위에 내 목숨을 얹혔다.
목숨은 비스듬히 잘려나갔다.
[당신은 죽었습니다.]칼날 너머에서 소년은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비명.
“어째서! 왜, 제길! 빌어먹——.”
고함.
[스킬이 발동합니다.]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산산히 부서졌다.
31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