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18)
2.
나에게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은 없다.
만일 있다면, 매일 햇빛에 널어서 싱그러운 향기가 감돌던 베갯잇. 보육원의 2층 침대. 아주 어릴 때, 누워 있는 내 귀를 원장님이 면봉으로 파주셨던 바로 그곳일 것이다.
이제는 돌아가지 못할 고향.
[당신은 죽었습니다.]깜빡. 깜빡.
고장난 전등이 하얀 숨을 끔뻑거리듯,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현재 당신의 헌터 랭크는 S급입니다.] [강화된 페널티로 인하여, 스킬 발동 순서를 선택하게 됩니다.]연두색과 노란색이 체크무늬로 바래가던 2층 침대의 침대보가 김공자의 고향이라면, 이곳 역시 하나의 고향이겠지.
사왕(死王)의 고향.
어두운 근원.
[1. 당신을 죽인 적의 스킬을 먼저 습득하겠습니까?] [2.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먼저 구현하겠습니까?]좀 개그를 얹자면 사왕의 근본이려나.
후훗.
근본 있는 남자. 데스킹 김공자….
-예에. 현실도피는 잘 들었고요.
배후령이 말했다.
-야, 할 말 많지만 일단은 1번 골라라. 지금 트라우마부터 보면 큰일난다.
“제기랄…….”
-응. 너 지금 쪽팔려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도 잘 알겠는데 우선 1번을 골라주지 않으렴? 네가 헌터 랭크 B급일 때도 트라우마가 지랄 맞았다면서. 근데 이제는 아예 S급이네? 엿 됐네? 자아, 골라라. 1번.
“으갸아아아……!”
-골라!
골랐다.
[1번을 선택했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스킬 조건이 달성됩니다.] [성좌 ■■■■ ■■ ■■■의 스킬을 무작위로 카피합니다.]사르륵.
금색으로 반짝이는 반딧불이 떠돌아다녔다.
[스킬 카드를 형성합니다.] [스킬 카드를 선택해주십시오.]그리고, 그 뿐이었다.
나는 머리를 쥐어 잡은 채 카드들이 형성되길 기다렸다. 3초. 6초.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두운 허공에서 뛰어노는 반딧불은 하나에 불과했다.
즉.
“……한 장?”
오직 하나의 능력.
날 농락한 성좌는 스킬을 1개만 지니고 있었다.
“이래서야 카드를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네요. 그냥 무조건 저걸 골라야 하니까. 어라? 그러고 보면 선택지만 늘어난 게 아니라, 제 모습도 좀 바뀌지 않았어요?”
나는 어둠 속에서 손을 폈다가 오므렸다. 실체가 느껴졌다. 의식 속에서 가상의 손을 움직인다거나 꿈속을 유영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진짜, 내 육신이 움직이는 감각이었다.
-그러게?
배후령도 턱을 매만졌다.
-옛날엔 목소리만 들리거나 웬 유령처럼 흐릿했는데, 지금은 완전 몸을 가지고 있구만. 주변은 여전히 어두컴컴하지만.
“이것도 헌터 랭크가 올라가서 그런 걸까요?”
-글쎄다. 내가 아무리 초천재라도 네 스킬을 너보다 잘 알겠냐.
배후령은 어디 보자, 고 중얼거리며 황금빛 카드의 뒷면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카드 뒷면에 적혀 있는 스킬 설명을 읽었다.
+
[우주홍황(字舌供荒)] (1/3)랭크: EX
효과: 세계를 실시간으로 조작합니다. 스킬 시전자의 상상에 따라 세계가 변경됩니다. 만일 시전자가 바다에 있길 원한다면, 그곳에 바다가 생깁니다. ‘거기에는 원래 바다가 있었다’며 세계는 시초(始初)부터 바뀌겠지요.
이는 본래 허락될 수 없는 권능으로써, ■■■■ ■■ ■■■이 탑과 맺은 계약 아래 한정적으로만 허락됩니다.
해당 스킬의 제한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 상상력이 부족하면 세계 변경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다를 만들기 위해서는 바다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상상하는 것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큽니다.
※단, 스킬 보유자가 혼자서 세계 변경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보유자는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만 스킬을 쓸 수 있습니다. 당신 혼자의 상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와 함께 상상을 이루려 할 때에만 [우주홍황]은 유효합니다. 동반자를 신중하게 선택하십시오.
※단, 해당 스킬은 3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스킬은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한 번 시전이 끝날 때마다 사용 가능 횟수가 줄어듭니다. 세 번째로 시전한 [우주홍황]이 완전히 종료될 때, 해당 스킬은 파괴됩니다.
※스킬을 쓸 때마다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현재, [우주홍황]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1회’ 남았습니다.
+
나는 입을 벌렸다.
처음에는 스킬의 무지막지한 위력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다음엔….
“제한조건이 뭐 이리 많아!?”
여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수두룩한 제한들에 경악했다.
“하나, 둘, 셋…. 제한조건이 네 개? 네 개요? 세상에. 똑같은 EX급 스킬인 [회귀자의 태엽시계]도 제한조건이 달랑 한 개인데. 지금까지 제한이 두 개 이상인 스킬을 본 적이 없는데 이건 무슨…….”
-흐음.
배후령이 중얼거렸다. 나와 달리 배후령은 오히려 납득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최상위 성좌라 해도 이렇게 무시무시할 수 있나 싶었다만. 과연. 원래부터 자기가 가지고 있던 권능에 페널티를 덕지덕지 붙여서 효과를 극대화시켰군. 역시 내 감은 틀린 적이 없어. 변태들 가지고 노는 변태. 변태 마스터여.
“변태 마스터….”
-기억하냐?
배후령이 불쑥 물었다.
“예?”
-성좌 이름 말이야. 반쯤 세뇌당해서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지만 아무튼 며칠이나마 네 전담 성좌가 된 애잖아. 걔가 권능을 쓸 때마다 메세지로 이름이 들렸을 텐데, 별자리 이름, 기억하냐고.
“…….”
나는 미간을 좁혔다.
골똘히.
“……아니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것도 [우주홍황]의 영향일까요? 자기 이름이 밝혀지기 싫다는 소원, 상상 때문에, 저희의 기억이.”
-그럴 수도 있지. 다른 해석도 가능하고.
배후령은 툭, 손가락을 튕겼다.
황금색 카드가 손가락에 튕겨 둥실둥실 떠다녔다.
-빼앗긴 거야. 이름을.
“빼앗겨요?”
-페널티.
페널티.
-지금 이 공간에는 성좌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아. 자유로워진 상태다. 그런데 스킬 카드의 설명문에까지 이명이 안 적히고…. 그냥 ■■■■ ■■ ■■■이라 퉁쳤단 말이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아예 이름이 삭제되었다는 말인가요?”
-백중구십구.
배후령은 팔짱을 끼고 천천히 머리를 기울였다.
-여기 적힌 바에 따르면 [우주홍황]은 딱 3번만 쓸 수 있는 스킬이야. 그리고 이미 2번은 썼어. 김좀비. 네가 아마도 마지막으로 [우주홍황]의 대상으로 선정된, 최후의 3번째 동반자일 거다.
“…….”
그 말을 듣자 내 기억에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신의 신도가 되어달라 부탁할 적에 성좌는 알려줬던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제가 수천 년을 기다려온 사람.』
『당신이, 저의 세 번째 신도예요.』
『저를 믿어주실래요?』
세 번째 신도.
성좌는 분명히, 그리 말했었다.
-따라서.
내가 과거의 기억에서 단초들을 긁어모으는 와중에, 배후령은 배후령 나름대로 추측을 이어나갔다. 딱! 배후령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 정체불명의 성좌는 이미 2번 [우주홍황]을 썼어. 그리고 2번의 페널티를 받았다. 그중 하나가 아마도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야.
“이름을 잃는다… 그게 그렇게 큰 페널티입니까?”
-살천성이 왜 그렇게 강했겠냐? 너는 살천성 이름 되찾아주려고 왜 그리 개지랄을 떨었고?
나는 턱을 짚었다.
배후령이 볼을 긁적였다.
-이름은 중요해. 그걸 잃는다는 건 거대한 페널티고.
“으음.”
-사람한테도 그러한데, 성좌한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페널티지.
배후령이 말했다.
-이름은 좌표거든. 이름이 없으면 대상이 없고, 대상이 없으면 방향이 없으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성좌한테 신앙심이 모이기란 거의 불가능해. 이름을 잃는단 건 ‘신앙심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없어. 마호스나 바비트처럼 거물 성좌가 되기란 애당초 불가능해진다.
그것이 하나의 페널티.
“그럼…… 또다른 페널티는 뭐였을까요?”
-이름이랑 비슷한 뭔가. 존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배후령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내가 생각하기엔 아마도, 외형(外形)일 거다.
외형. 외모. 외관.
자기 자신을 바깥에 드러내는 물리적 총체.
-짐작가는 부분 없냐?
“…….”
있다.
짐작가는 부분이.
『저 아이한테 어울리는 옷을 사주고 싶은데요.』
『활동하기 편한 복장으로. 뭐 괜찮은 옷 없을까요?』
나는 어딘지 모를 마을에서, 그 마을조차 아마 [우주홍황]으로 인해 작성된 장소이겠으나, 어쨌든 성좌한테 옷을 한 벌 사주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옷가게 주인이 말했다.
『아이? 아이가 어디 있다는 겐가?』
『저기요. 거의 누더기 차림인 남자아이 있잖아요.』
『음? 미안하군. 아무도 안 보이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
그렇다.
주인장은 처음에 성좌를 인식하지 못했다. 혹은, 인식했다 하더라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어라, 그런데 좀 큰가?』
『이상하네. 분명히 딱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만 성좌한테 너무 큰 옷을 사주고 말았다.
분명히 성좌를 ‘소년’이라 인식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무의식적으로, ‘소년’보다 한참 큰 사이즈의 옷을 선물한 것이다.
“……그렇네요.”
비단 체형뿐만 아니다. 목소리, 성별, 말투마저,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말 그대로 오리무중.
성좌의 외관을 형성하는 것들은 모조리 안개에 감싸여 있다.
“성좌는 이름을 잃었습니다. 외형도 잃었습니다. 그것이 성좌가 가진 페널티예요. 그리고 이제 저를 세 번째 신도, 마지막 [우주홍황]의 동반자로 선택했다는 건…….”
-이름이나 외관보다 훨씬 더 지독한 페널티가 1개 남았다는 거겠지.
“예.”
아마도.
“……존재 자체가 지워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 성좌가 여태껏 살아온 흔적.
자기 자신의 기억을 포함하여, 자신을 기억하는 타인들의 기억까지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마 3번째 페널티일 것이다.
이른바 ‘존재 말살’.
이름이나 외관보다 더 심한 페널티는, 나로서는, 그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한다.
-과연.
배후령은 내 추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페널티를 짊어지면서까지 저 성좌는 너한테 [우주홍황]을 쓰고 싶었다는 거로군. 자기가 사라지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말이다.
“…….”
-도대체 왜, 라고 묻고 싶다만. 묻지 않아도 조금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
“네.”
나는 손을 뻗었다.
“어차피 트라우마를 보게 될 테니까요.”
이 허공에서 유일하게 반짝거리는 황금색 불빛을 붙잡았다.
[선택 완료.] [스킬을 복사합니다.]손가락으로 쥐자, 카드는 사라락 녹아내렸다. 그리고 황금빛의 반딧불들로 변해 가슴을 향해 흘러들었다. 한동안 내 심장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스킬로 인한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현재 당신의 헌터 랭크는 S급입니다.] [경고.] [경고.]째깍.
어디에선가 시계 바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페널티 심도는 상상(上上).] [인간도(人間道)입니다.]맹렬한 속도로, 째깍, 인지를 뛰어넘은 걸음걸이로, 째깍, 시침, 분침, 초침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이며, 째깍, 잔상만을 흩날리며 미친 듯이 돌아갔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문득 심장이 오싹했다.
랭크가 B급일 때 겪었던 살천성의 트라우마에도, 배후령은 함께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들어가긴 들어갔지만 배후령의 존재를 유지하지 못했다. 내 기억. 김율의 기억에 덧씌워져, 배후령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변해버렸다.
A급일 때도 죽은 적이 있긴 했다.
다름 아니라 어릿광대. 마탑과 전쟁을 준비하면서, 독약을 연거푸 마셔서, 졸지에 줄초상을 치른 적이 있었으나.
‘그 사람 트라우마는 별거 없었지.’
인생을 즐기면서 산 양반이었다. 김율이나 에스델과 비교할 레벨은 되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그만큼 불행할 리는 없으니까.
결국 트라우마의 농도를 결정하는 것은 나의 레벨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삶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어떠려나.’
째깍.
‘성좌의 트라우마.’
째깍.
‘심하면, 나 자신이 사라져버릴지도….’
어딘가의 시계 바늘이 멈추었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극복해내겠다.’
각오를 다진 순간.
[경고.] [스킬 대상자의 이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스킬 대상자의 진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어둑해지는 의식 속에서 탑의 목소리가 울렸다.
[경고.] [스킬 대상자의 외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재현(再現) 실패.] [구현(具現)에 필요한 자료를 대체합니다.]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소리인걸, 하는 생각을 끝으로.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구현합니다.]툭.
나의 의식은 끊어졌다.
31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