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2)
붉은 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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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가 내렸다.
불길이 드넓은 벌판을 휘몰아서 태우려 하여도 한홉의 불씨에서 타들어야 하며, 물길이 넘쳐 하늘의 밑동까지 범람코자 하여도 한점의 물방울부터 흘러야 한다.
나는 불길이었다 말할 순 없지만 한홉의 불씨는 되었고, 내가 물길이라 말하진 못할지언정 한점의 물방울은 되었을 것이다.
“음.”
비가 내렸다.
물길이 흐르는 한복판에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이 나를 향하여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싸우세. 젊은이.”
헌터 랭킹 1위.
검성.
제국 기사단장.
합류(合流).
“-아하하핫!”
비가 내렸다.
“음! 늦어서 죄송합니다!”
찰박. 비웅덩이를 밟으며 웃음소리가 다가왔다.
“조금 더 빨리 올 수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부대를 이끌고 온다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더군요!”
수면에 비친 웃음소리의 장본인은 외팔이었다. 붉은 광선이 훑고 지나가서 모든 것이 파괴되어버린 거리. 이제는 물웅덩이밖에 남지 않은 그곳에 외팔의 신관이 우뚝 섰다.
“감사합니다. 김공자 헌터.”
이단심문관이 하나 남은 손으로 자신의 모자를 고쳐 썼다.
비가 내렸다.
빗줄기로 뿌얘진 이단심문관의 뒤편에서, 무언가가 달려왔다. 무언가가 빗물을 헤치며 몰려왔다.
“이제 당신이 벌어준 시간은 저희가 이어받겠습니다.”
수천의 병사.
무너진 건물을 피해서, 움푹 파인 구덩이를 뛰어넘어서, 물웅덩이를 헤치면서, 제국의 병사들은 달려들고 있었다. 아니. 병사가 아닌 자들마저 있었다. 갑옷을 입지 않은 백성. 투구를 쓰지 않은 제국민. 맨살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그들은 몰려왔다.
“대장군 명령입니다. 여러분.”
이단심문관이 빙그레 웃었다.
수천의 병사와 수만의 백성이 함성을 질렀다.
“제국에 이빨을 드러낸 개새끼들을 도륙하십시오.”
헌터 랭킹 4위.
만신전주, 이단심문관.
제국 대장군.
가세(加勢).
“우오오오오!”
비가 내렸다.
방울이 물길 되어 흘렀다.
무서운 해일처럼 밀어닥치던 괴물의 군세는 어느덧 멈추어버렸다. 만조(滿潮)에 멎어버린 파도와 같이 괴물들은 성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역전. 전황이 기울었고, 밀물은 썰물이 되었으며, 성문이 무너진 자리에서 물길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비가 내렸다.
“아이김 제국 만세!”
비가 내렸다.
‘아.’
언제부터 빗물에 휩쓸렸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느려진 탓일까. 어느덧 나는 흘러넘치는 물길의 첫 번째 방울이 되어 달리고 있었다.
어느 변방의 소국에서 피난한 백성이 내 왼편에서 창을 휘둘렀다. 이제는 파괴된 제국의 마을에서 경작하던 농부가 내 오른편에서 곡괭이를 갈겼다. 뒤를 돌아보면, 나와 행색이 별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 헌터가 칼을 치켜들었다.
그들이 계속 뭐라고 말하였는데,
“—-.”
“——!”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빗소리 때문인가. 사람들이 지르는 함성 때문인가. 아, 괴물들이 울부짖는 비명 때문인가. 시간이 느려진 탓인가? 내가 이미 한점의 물방울이 되어 단지 저들과 함께 휩쓸리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칼을 휘두르기 때문인가.
“—–!”
앞으로.
“——.”
더 앞으로.
불길이 모든 벌판을 태우고 물길이 모든 구석에 범람할 때까지.
단지, 조금만 더 앞으로.
“-어이.”
툭.
무언가가 나를 건드렸다. 내 어깨를 만졌다. 수만 명의 목소리와 수억 방울의 빗소리를 뚫고, 그 무언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것은 외눈박이여서 안대를 끼고 있었다.
“잘 했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쓰읍! 친위대 말고도 우리 길드원들까지 챙겨서 오느라 늦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왜 천무문(天武門)이라 불리는지 지금부터 똑똑히 보여주···.”
멈칫.
“······.”
문득 그것이 말을 멈추었다. 무슨 일일까. 그것은 말을 멈추고 대신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안 듣고 있군. 몰입인가? 이놈 난놈일세. 마음에 들어.”
그것이 작게 웃었다.
“야, 내 이름은 랴오판이다. 어차피 안 들리겠지만 상관없어. ···아까 알현실에서 네놈이 내 목숨을 살려줬지. 천무문주씩이나 되어서 은혜를 묵혀버려서야 쓰겠냐? 넌 정면만 보고 달려라. 왼쪽은 내가 맡아주마. 어마어마한 특혜라고, 이거.”
그것이 검을 들었다.
“내 오른쪽에 선 놈이 죽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거든.”
비가 내렸다.
“가라. 신성(新星).”
나는 검을 휘둘렀다.
“지켜주마.”
물길이 점점 더 거세졌다.
거세게 흘렀다.
“늦어서 미안하다! 제국의 황제를 찾느라 바빴다. 결국 찾긴 찾았다만, 이미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더군.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서 군세를 끌어모으기란 어려울 듯싶다. 면목이 없군.”
“괜찮다네. 여기서 더 군세를 끌어모을 필요는 없을 것일세. 그보다 성기사 아가씨, 자네도 합류해서 싸우게나.”
“물론이다. 음? 김공자 헌터는 왜···.”
“지금 방해하지 마라.”
비가 내렸다.
“저놈. 황금 같은 시간을 만끽하고 있으니까.”
비가 내렸다.
-가여운 것들아.
-시간이 주어진다 하여 그것이 너희의 시간일 성싶더냐.
-너희를 돌봐주는 여신의 힘마저 쇠하였다. 이제 제국에 신은 없노라. 너희가 무엇에 기대겠느냐? 너희 스스로를 오롯이 증명하겠느냐. 그렇다면 좋다.
비웃음이 빗물을 타고 흘렀다.
-보여라.
붉은빛.
하지만,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아주 많았다.
“야, 마녀! 얼른 거울 띄워!”
“알고 있어. 한 번은 놓쳤지만, 두 번까지 봐줄 순 없지.”
“영감탱이! 마녀가 광선을 흐트러트리면 댁이랑 내가 베어버리자고!”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네.”
“슬슬 옵니다, 여러분!”
비가 내렸다.
“-흐트러지렴.”
여섯 줄기의 빛이 번쩍였다. 거울의 빛이었다. 붉은 광선이 거울에 부딪쳐서 미끄러졌다. 파챠앙! 첫 번째 거울이 깨졌고, 두 번째 거울이 깨졌으며, 세 번째 거울이 깨졌다. 그러나 네 번째 거울은 깨지지 않고 온전히 붉은 광선을 흘렸다.
“검성! 독사!”
무언가가 외쳤다.
“흡.”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있었고.
“이랴아아아아!”
숨을 토하는 소리가 있었다.
하늘이 갈라졌다.
들어오고 나가는 두 숨결 사이에서 하늘은 갈라졌다. 붉은 광선마저 쪼개어졌다. 마치 거대한 바다가 양쪽으로 열리는 듯하였다.
드넓게 열린 물길.
다섯 개의 목소리가 각양각색으로 조잘거렸다.
“봐라! 봐! 난 아직 훅 가려면 멀었어!”
“체면도 없이 촐랑거리는구먼.”
“지금이 기회야!”
그중 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단번에 마왕 앞으로 전이시켜줄게. 다들 나한테 붙어!”
“서두르십시오! 마왕이 다시 몬스터를 소환하면 본말전도입니다!”
다섯 개의 목소리가 차례차례 겹쳐졌다.
한군데로 모였다.
그리고.
“김공자!”
누군가가 손을 뻗어왔다.
그 사람의 얼굴에는 빗물이 흐르고 있었다.
“잡아!”
“······.”
“시간이 없으니까, 어서!”
순간.
영원과 같았던 시간이 풀어졌다.
주변의 사람들이 보였다.
주위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전부 한번에 기억이 흘러들었다.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제국의 군대와 백성은 이제 확연하게 몬스터를 밀어내고 있었다. 무너진 성문에서 끊임없이 헌터들이 쏟아졌다. 후속주자들. 드디어 12층 스테이지의 상황을 깨달은 헌터들이 전장에 뛰어든 것이다.
“김공자 헌터!”
무수한 인간들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최전선에 있었다.
마왕의 붉은 일격이 쇄도하면서 몬스터들까지 갈아버린 탓에, 여기부터 마왕이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텅 비었다. 곧 있으면 몬스터들이 몰려오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어서!”
그곳에서 헌터들이 한 군데에 모여 있었다.
어찌 보면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이단심문관은 독사한테 업혔다. 독사는 사납게 인상을 찡그리고 검성의 팔뚝을 잡았다. 검성은 더욱더 인상을 구긴 채 성기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성기사는 무덤덤하게 마녀의 왼손을 잡았다.
‘···이거 사진으로 찍어다가 인터넷에 올리면 대박이겠는데?’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무시무시한 절경이었다.
내가 엉뚱한 망상에 잠겨 있을 때, 마녀가 소리쳤다.
“당신! 당장 안 잡으면 여기 혼자 두고 갈 거야!”
마녀는 내게 오른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아.’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풍경은 곧 사라진다.
검성과 내가 날카롭게 나누었던 말싸움도.
성기사의 설득에 힘입어서 검성이 겨우 칼을 물렸던 것도.
내게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던 일도.
이단심문관이 잔인하게 세 명의 헌터를 살해한 일도.
서로 싸운 것도.
싸우다 멈춘 것도.
함께 싸운 것도.
‘전부 사라진다.’
모든 것이.
흘러내려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빗물처럼.
‘저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해.’
하지만.
-뭐하냐. 파트너.
그것으로 되었다.
-이제 보스몹 잡으러 가야지, 짜식아.
설혹 기억되지 않는다 하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검이 있다.
이곳엔 1층에서 죽은 한 명의 인간이 있다. 99층에서 죽은 한 명의 유령이 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 두 사람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시 돌아가게 되면 아무런 문제도 안 풀려 있겠지.
검성은 나를 의심한 채 그대로 있을 것이며, 보상을 선택하는 시간이 다시 도래하면, 헌터들은 또 서로 의심하거나 죽여버릴 것이다.
“가지요.”
하지만 나는 조금 더 강해졌다.
무고한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상련주, 백작이 죽음을 당하여 바깥세상과 탑의 교류가 끊기도록 방관하지도 않을 것이다. 배신자가 누구인지도, 이제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확신이 있었다.
나는 조금 더 잘할 것이다.
“좋아!”
마녀가 내 손을 꽈악 잡았다.
“전이!”
다음 순간, 우리는 허공에서 뛰어내렸다. 다섯 명이 동시에 착지했다. 단숨에 전장을 가로지른 우리의 눈앞엔, 고고한 마왕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흥미롭구나.
마왕은 검었다.
마치 그림자가 인간의 모습을 갖춘 것 같았다.
-여신의 용사들인가.
얼굴이 있었으나 표정은 없었다. 팔이 있었으나 손이 없었다. 다리가 있었으나 발이 없어서, 마왕은 꼭 땅을 디디고 선 것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땅속으로 침몰하여 가라앉을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침몰하고 있었다. 마왕의 몸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피부가 혼탁한 구정물과 같아서 뚜욱, 뚜욱, 아래로 흘렀다. 다만 흘러서 사라지는 만큼 마왕의 몸속에서는 새로운 구정물이 치솟았다.
악몽의 주인.
움직이는 그림자.
영원히 흘러내리는 그늘.
-용사들이여. 너희 중에 배신자가 있음을 알고 있느냐? 필히 알고 있으리라. 알고 있는데도 필사적으로 신뢰를 기워서 조각난 넝마를 접어 붙이는구나. 넝마가 한 벌의 옷이 되어 너희를 가려줄 것 같더냐.
더 들을 필요가 있을까.
적어도 내가 보기엔 없었다.
나는, 한 자루의 검을 쥐고 달려들었다.
“김공자!?”
등 뒤에서 여기사가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기다려라! 혼자서 치고 나가면 안 된다! 모두 협력해서 합공해야만-.”
미안합니다.
다음 생에서 봅시다.
당신은 오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호오.
혼자서 달려드는 나를 바라보며 마왕이 웃음을 흘렸다.
-어리석구나.
기이한 웃음이었다. 마왕의 얼굴에는 눈과 입이 없었으므로, 웃음은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구정물같이 시꺼먼 그늘이 흘러내리고 솟구치기를 반복할 때마다 웃음소리가 터졌다.
-나를 죽이려 왔는가, 용사여.
마왕이 검을 휘둘렀다.
지금의 나는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일격이었다.
칼날이 나에게 닿아 내 목을 날려버리기 직전.
“아니.”
나는 성검을 들어서 막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불필요했으므로.
대신, 그냥 가운뎃손가락을 공손히 들어주었다.
“너한테 죽으러 왔다. 새끼야.”
너도 다음 생에 두고 보자.
짧지만, 마왕의 웃음소리가 굳어버린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고.
“—–!”
“—자, —!?”
곧,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의식이 멀어졌다.
시각이, 청각이, 통각이, 갖가지 감각이 순식간에 정전되었다.
다만 내 얼굴 위로 빗물이 떨어지는 것만은 마지막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죽음으로 인해 스킬 조건이 달성됩니다.] [몬스터 가을비의 마왕의 스킬을 무작위로 카피합니다.]자아.
[스킬 카드를 형성합니다.]2라운드 시작이다.
3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