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22)
1.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째깍.
어디선가 초침이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
“그럼 공자님. 이번에는 어디로 향할까요?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제법 많아요. 광마교의 본거지에 곧바로 쳐들어갈 수도 있고! 잠깐 도시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에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천히.
이 세계를 음미하듯이.
-테러야 물럿거라 죽음아 멀리가라.
음미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우선은 하나.
배후령이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우주에서 제일 시답잖은 시구를 읊고 있었다. 귀찮고 지겹다는 투가 역력했다.
나는 배후령과 눈을 마주쳤다.
-…….
눈빛이 교차하자마자 배후령은 입술을 다물었다. 대신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래.
배후령은 피식 웃었다. 어느덧 귀찮음은 납득으로, 지겨움은 이해로 변했다. 어쩔 수 없는 놈을 바라보듯 배후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 거렸다.
-잘 돌아왔다.
‘예.’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배후령도 나도.
설령 ■■■■ ■■ ■■■의 트라우마를 엿보고 하루를 회귀했다 한들, 나는 여전히 [우주홍황]의 영향 아래 놓였다. 성좌는 내게 권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 ■■ ■■■한테 방해가 되는 말들은 자동으로 걸러질 터. 예전과 다름없이 기억이 삭제되고 왜곡될 것이다.
‘되도록 말을 아끼는 편이 좋다.’
가능하다면 생각조차.
나는 ■■■■ ■■ ■■■에게 어떠한 적의도 품지 않은 채 다만,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좌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만일 도시로 간다면, 으음, 그렇네요! 지금까지 공자님은 수많은 마두를 토벌했죠. 그동안 사이비 마교들한테 시달리던 도시 주민들이 아마 상당히 반기지 않을까요?”
성좌의 어깨 너머.
“그들은 연약하고 비겁할지라도 공자님의 은혜를 잊진 않을 거예요!”
째깍.
벽시계 하나가 초침을 돌리고 있었다.
“…….”
그제야 이 세계의 진정한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는 울창한 숲 따윈 없었다.
열두 명의 거악(巨惡)도 없었다.
세상의 음지 양면을 지배하는 혈마, 신마, 백마, 광마가 없었으며 그들을 따르는 사이비 신도들 역시 없었다. 광대한 비밀을 품은 교단의 본거지들이 없었고, 도시가 없었고, 마을이 없었고, 거리가 없어서, 어느 작은 옷가게 또한 없었다.
째깍.
그저 벽시계 하나뿐.
“어라. 공자님이 어떤 선택을 고를지 고민하는 동안, 얼마 전에 부숴트린 백마교단의 본거지 쪽에서 노인이 한 명 다가와요. 노인은 당신을 알아보는 낯빛이에요. 아니, 정확히 공자님을 쫓아온 것 같네요!”
남루한 골방.
4평 남짓한 공간.
나무로 된 바닥 타일은 틈새마다 먼지가 끼었다. 허름했다. 방바닥은 락스가 아니라 먼지로 코팅된 양 뿌옇게 윤이 났다. 창문이 있었지만, 창밖은 없어서, 밤낮 없는 백열(白熱)만이 방을 비추었다.
어렴풋한 빛 속에서 먼지 알갱이가 흩날렸다.
꽃잎을 대신하기엔 너무 작고, 너무 흐릿한 먼지들은, 이 골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 떨어져 사라졌다.
벽시계, 나무 바닥, 창문, 책장, 그리고 먼지.
“…….”
그것이 60층 스테이지.
이 세계의 전부였다.
“노인이 말하여요. [아이고, 사왕이십니까?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백마교단에 붙잡혀서 여태껏 노역을 하던, 평범한 헌터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좌는 얼굴이 없었다.
머리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저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 장소에, 마치 어린애가 장난으로 슥삭슥삭 크레파스 먹칠을 해놓은 것처럼, 검은색이 일그러져 있었다.
■.
혹은 ■.
그것은 바깥이 없는 창문이거나 바깥을 가둔 창살이었다.
“[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사왕이시여. 정말로 면목이 없는 말씀입니디만, 혹시라도 여유가 되면 저희의 노역촌에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감사의 인사도 드릴 겸…. 모쪼록 한번 자리에 모시고 싶습니다.]”
째깍.
흑색 먹칠로 칠해진 성좌의 얼굴에서 남은 것은 오직 입가뿐.
작은 입술이 옴싹달싹 움직이며, 때로는 미소를 지었고, 때로는 꾹 다물려, 노인의 말투를 열심히도 흉내 냈다.
“[부디 저희를 찾아와주십시오!]”
비록 눈도 코도 없었지만.
행복해 보였다.
성좌는 지금, 행복해 하고 있었다.
“자아. 말이 끝납니다. 노인은 당신의 안색을 살펴봐요. 아마도 노인은 자신들의 사정을 전부 털어놓은 거 같지는 않습니다. 공자님! 이제 어쩌실…….”
촤아악!
성좌가 목소리를 높이려던 순간, 내가 앉은 의자 옆으로 빛무리가 퍼졌다. 빛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누구인지 모를 헌터였다.
헌터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여긴 어디…….”
“…….”
성좌는 입가를 찡그렸다.
꼭 놀이터에서 한창 모래성을 쌓아올리고 있는데 방해받은 어린아이 같았다.
“그래, 축하해. 넌 60층을 클리어했어.”
“……뭐?”
“뭐긴 뭐야. 여기서 더 볼일이 없다는 뜻이지.”
성좌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꺼져버려.”
[■■■■ ■■ ■■■■ ■■■ ■■■■■.]그러자, 빛무리가 다시금 헌터를 휘감았다.
헌터는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정말. 이런 식으로 중간에 흐름을 끊는 애들이 가장 짜증난다니까요.”
성좌는 한숨을 쉬었다.
“아, 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방금 벌어졌던 일은 전부 잊으실 테니까요! 헤헤. 저희 두 사람의 스토리에 방해되는 것들은 저절로 삭제 처리 되거든요!”
“…….”
그런가.
‘방금 그건…. 59층을 클리어하고 여기 올라온 사람이야.’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눈치챘다.
마탑이 우리의 손에 의해 붕괴된 이후. 더 높은 스테이지를 노리는 도전자들이 확연히 늘었다.
그중 일부는 60층까지 올라왔을 테고, 현재도 올라오는 도중이다.
아까 잠시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헌터가 바로 그 사례.
‘그리고 ■■■■ ■■ ■■■은 무조건 패스를 시키고 있어. 헌터들이 올라오자마자 스테이지 클리어를 인정해준 다음, 쫓아내는 거다.’
아마 저 헌터는 기억이 왜곡됐을 것이다.
60층에서 그럴싸한 모험을 해서 그럴듯한 퀘스트를 받아, 어엿하게 퀘스트를 성공시켰다고 스스로는 생각하겠지.
‘검제마저 60층에 대해 잘못 기억하고 있었는걸.’
다른 헌터들이 어떨지는, 말할 것조차 없으리라.
틀림없다.
지금 이 골방은 우리 둘만을 위한 성역(星域)이 되어 있다.
“뭐! 새롭게 기분 전환할까요!”
성좌가 밝게 말했다.
“대답이 없이 침묵이 길어지자 노인의 낯에 불안한 기운이 감돌아요. 그래도 명색이 60층에 머무른 지 꽤 오래된 헌터일 텐데 말이죠. 표정을 관리하는 여유 같은 건, 이미 오래 전 사라진 것 같네요. 노인은—–.”
쓰다듬.
“…….”
성좌가 멈칫했다.
성좌가 잠깐 멈춘 것을 보고 나서, 비로소, 내가 손을 뻗어 성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되는구나.”
나는 중얼거렸다.
“외형을 잃어버렸다 해도 만질 수는 있구나.”
“…….”
“다행이야.”
성좌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어? 응? ……으응?”
태엽이 고장나버린 오르골 같은 버벅거림.
지금 벌어지는 일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듯 성좌는 머리를 한 번, 두 번, 좌우로 까닥거렸다.
“응……?”
머릿속에서 소음이 지지직거렸다.
그것이 성좌의 권능이 발현되었다고 탑이 알려주는 메세지임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름도 없고 좌표도 사라져 차마 가리킬 수조차 없는 별자리에 대하여, 탑은, 지지직거리는 소음으로라도 그 존재를 알려주려 했다.
회귀하기 이전이었다면 나도 방금의 기억을 잊어버렸을 테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째선지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라비엘과 스승님의 반생을 보낸 일, 하얀 공간에서 배후령과 대화를 나눈 일, 이름 모를 헌터가 올라왔다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쫓겨난 일까지, 전부 생생하게 기억났다.
“어? 어?”
성좌는 당황했다.
“왜? ……어떻게? 이럴 리가 없는데, 음. 음!”
[■■■■ ■■ ■■■■ ■■■ ■■■■■.]소용이 없었다.
“어라?”
의미 또한 없었다.
“…….”
[■■■■ ■■ ■■■■ ■■■ ■■■■■.]아무리 성좌가권능을 발휘하여도, 스킬에 망각을 요청해도, 나의 눈빛은 변함없이 성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이자 ■로 먹칠되어 있는 성좌의 얼굴이 내 눈에 비추었다.
“…….”
남루한 5평의 골방은 여전히 5평의 세계였고, 벽시계는 여전히 벽시계였다. [우주홍황]이 내 기억을 지우거나 방해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성좌의 머리에 얹혀진 내 손이 물러나는 일 역시 없었다.
“어, 어째서…….”
“전 지금 당신에게 적의를 느끼지 않으니까요.”
나는 말했다.
“행여라도 제가 당신을 해칠 일은 없습니다. 당신을 망쳐놓을 생각이 없고, 당신의 즐거움을 깨버릴 의사도 없어요. 무해합니다.”
“…….”
“당신은 [우주홍황]을 써서 빌고 있었을 거예요. 저와의 놀이를 방해하는 어떠한 존재나 사건도 배제해달라고. 덕분에, 지금 우리 둘의 시간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자그마한 목소리나 생각마저 없애버릴 수 있었지요.”
쓰다듬.
내 손이 얼굴을 잃어버린 머리를 더듬었다.
무언가가 박탈당하여 사라진…… 오직 흔적만 남은 경계선.
사람마다 접힌 자국이 있을 텐데 이 성좌에게선 자국마저 안 보였다.
나는 하다못해 내 손길이,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당신의 소원은 저에게 닿지 않습니다. 아니. 닿고 있기에 더욱더 저의 기억을 손상시킬 수 없어요. 제 기억을 없애버리는 편 보다 유지하는 편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그 스킬은 판단할 것입니다.”
“무슨…….”
“저는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해요.”
“…….”
성좌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제가 당신에게 희망이 되었나요?”
나는 말을 이었다.
“수천 년 동안 아무도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까. 일생을 걸어오면서, 원래 가졌던 이름을 버리고, 원래 지녔던 얼굴마저 버렸는데, 그런데도 당신에게 온전히 닿은 목소리가 없었습니까. 그렇게 살아왔습니까.”
“저는 당신에게 의미가 되고자 이곳까지 올라오진 않았어요. 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요. 당신이 제게 했던 말을 대부분 잊었어요. 저라는 인간한테 당신은 여전히 이름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노이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늘 저를 하나의 의미로 삼고자 한다면.”
만일 그렇다면.
“저도 오늘을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
“당신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겠지요.”
[스킬이 발동하고 있습니다.]“처음 계약자를 찾아서 믿음을 주었을 때. 믿음을 주는 순간에도 당신은 배신당할 걸 미리 알았을 거예요. 당신에게도 분명히 잘못이 있을 겁니다.”
[당신은 우주홍황의 대상자로 지정되어 있습니다.]“그러니까 당신은 조금 섣부른 사람.”
[스킬이 작동합니다.]“아마 자기가 일을 벌여놓고 금세 후회해버리고, 풀이 죽지만, 그런데도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계속 인간에게 도전하는 사람일 거예요.”
째깍.
성좌의 얼굴에 칠해져 있던 먹칠에, 작은 금이 갔다.
틈새가 벌어졌다.
“눈매는 살짝 날카우려나?”
[사왕이 스킬을 발휘합니다.]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눈매가, 눈썹의 끄트머리가, 벌어진 틈새에서 엿보였다.
우주홍황에 의해 나의 상상이 고스란히 이루어진 것이다.
“……..”
“머리카락은, 아마도 녹색.”
째깍.
나는 그의 눈썹을 매만졌다.
“왜냐면 질투심이 많을 거 같아서.
“…….”
째깍.
먹칠이 조금 더 깨졌다.
깨어진 껍질 속엔 에메랄드의 윤기가 숨겨져 있었다.
“……소용없어요.”
째깍.
“저는 이미 잃었어요. 이름도. 얼굴도. 아무리 공자님이…… 사왕님이 찾으려 들어도, 없는 것을 어떻게.”
“그럼 찾을 때까지 상상하겠습니다.”
째깍.
“은색 머리를 드리겠습니다. 흑발을 상상할게요. 제가 상상한 모습을 당신이 거울로 보고, 확인한 다음, 말해주세요. [예]. 아니면, [아니오].”
“…….”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눈동자도. 귀도. 코도. 전부.”
[스킬이 작동합니다.]“무수한 색깔과 무수한 형태를 하나씩 불러다가 조각해보면 언젠가, 당신이었던 것이 찾아지겠지요. 당신의 이름도. 가, 나, 다, 라, 모든 글자를 발음하면, 분명히 당신의 이름이었던 소리가 울릴 거예요.”
[스킬이 작동합니다.]“찾아요.”
째깍.
“제가 찾아드릴게요.”
검은색 허물이 한 껍질 더, 무너졌다.
눈.
성좌의 눈동자는 회색이었다.
32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