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27)
4.
지옥의 시간이 멈추었다.
“……이럴 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콜로세움.
겹겹이 둘러 쌓인 퇴적암 아래, 그 한복판에서, [폐허를 추수하는 소] 무티아는 황금 밀밭 같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면서 소리쳤다.
“이럴 리가, 없다!”
무티아가 한 발 나섰다. 망치가 휘둘러 분노를 자아냈다.
폭발했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가 권능을 발현합니다.]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권능을 발현합니다.]그 폭발을, 여우님이 막아세웠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럴 리가 없지 않은 것이었다.”
“이럴 리가 없어!”
“하지만, 역시 잘 생각해 보면 이럴 리가 없지 않은 것이었던 것이었다.”
여우님이 연극조로 나레이션을 읊었다.
무티아가 이를 갈았다.
“나는 폐허를 추수하는 소다! 그것이 내 이명으로, 나의 진명은 ‘창해(治海)에 휘몰아치는 태풍의 눈’이다! 삼라만상에 무수한 시간이 흐르더라도 나만은 태풍의 눈처럼, 어느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시간 좌표인 것이다!”
“절대적 시간 좌표라니 그게 뭐야. 공자님네 세계에 아인슈타인이라고 있는데 걔한테 가서 따지면 안 될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사왕! 나는 네놈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알고 있다!”
무티아는 맹렬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권능이 사라지자 안광의 혈기도 가라앉아, 무티아의 눈은 다시금 황금빛을 되찾았다.
“나는 네놈의 과거를 안다!”
그 눈동자에서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의 냄새가 풍겼다.
“어린 아해야! 너는 아무것도 없는 종자에 불과하였다. 허름한 단칸방! 비좁은 침대! 벽에 빨랫감처럼 늘어진 우상(偶像)의 초상화들! 너에게 아무것도 없기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이던 우상들로 허공을 수놓았던 것 아닌가!”
“…….”
“너는 폐허였다! 그 무엇도 이뤄본 적 없었기에 진정토록 폐허였노라. 사왕, 아니, 사왕이라는 이름을 내려받기 전의 너는 과히 내 신도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너야말로 회귀의 소원을 빌기에 적합한 인간이었도다!”
그런가.
무티아는, 시간과 회귀의 권능을 다스리는 성좌는, 내가 4000일의 열반에 들기 이전에 어떤 인간이었는지—- 나의 역사를 전부 알고 있는 것인가.
‘하긴. 당연하지.’
나는 상대의 전지(全知)를 받아들였다.
‘내 과거를 몰랐다면 방금 전 펼쳐진 [만일]의 세계도 없었을 거니까.’
무티아는 권능을 발현하면서 나를 구석에 몰아넣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그저 늙어 버린 나를 가져왔다.
그 과정에선, 여러 가정들이 권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당신이 검성을 만나지 못했다면.』
『만일 당신이 검제를 만나지 못했다면.』
『만일 당신이 염제를 만나지 못했다면.』
검성까지는 그럴 수 있다. 단순히 나를 알기만 해도, [만일 당신이 검성을 만나지 못했다면]이라는 가설을 던져보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검제는.
특히나, 염제는.
‘내 과거 전체를 알고 있지 않는 이상에야, 가설로라도 던져볼 수 없어.’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해진 것일까.
어떻게 [폐허를 추수하는 소]는 나의 회귀한 역사를 아는 것인가.
‘하무스트라는 이야기를 다루는 성좌였자. 나라는 인간의 [이야기]를 읽어 내 회귀 사실을 알아냈었어. 하지만 무티아는 어떻게? 무티아 자신이 바로 시간과 회귀를 다루는 신이기 때문에?’
내 머릿속이 빠르게 추측을 건드리고 추론을 헤집는 가운데, 무티아는 분노한 얼굴 그대로 소리쳤다.
“하지만 만일 네놈의 인생 또한, 애당초, 다른 회귀자에 의해 망가졌던 거라면 어쩌겠는가!”
상념이 깨어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예?”
“시치미 때지 말거라. 생각해본 적 있을 것 아니더냐.”
무티아는 양 팔을 펼쳤다.
“[왜 나는 이렇게 운이 안 좋지?]”
내가 던졌던 말들.
“[왜 나는 스킬을 하나도 터득하지 못하지?]”
많은 사람들이—던졌던 말들.
“[왜 나는 기연다운 기연을 조금도, 기회다운 기회를 한번도 얻지 못하는 것인가?]”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겠죠. 예. 많이 했습니다. 생각뿐만 아니라 원망도 많이 했고, 낮이 원망으로 물들면 밤은 술로 물들었지요.”
“너는 그저 스킬을 하나 얻었을 뿐인데 여기까지 도착하였다.”
무티아가 말했다.
“놀라운 의지로, 마르지 않는 의기로, 그치지 않는 열기로, 자신과 마주치는 모든 것에 정성을 쏟아 마침내 나 무티아의 발앞에 당도하였다. 이상하다 여긴 적 없는가? 이렇다 할 재능조차 없는 네가, 여기까지 길을 개척한 것이— 너무나도 기적과 같다는 의심은, 든 적 없느냐?”
“그건…….”
“너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덕분]이라 말하겠지.”
무티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녹아 내린 황금처럼 찬란하고, 그리고 진득했다.
“하지만 아니다!”
순간.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준비한 [최후의 계략]임을 깨달았다.
지반을 부수고, 도망치지 못하는 콜로세움을 만들어, 이백의 사도로 협공하여, 자신의 권능을 쏟아부어 나를 노화(老化)시킨 다음. 그러고도 만일 내가 꺾이지 않았더라면.
어디 이것도 버텨보라는 식으로 준비해 놓은, 마지막 일격.
-……왠지 들으면 안 될 거 같은데.
배후령이 중얼거렸다.
-무슨 비밀을 말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예감이 안 좋아. 성좌가 독을 품으면 항상 별 쓰잘데기 없는 횡액이 몰아 닥친다고.
‘아니요. 괜찮아요.’
나는 무티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듣겠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비밀을 파고들었다.
책임질 각오를 끝마친 뒤 본 것이었고, 실제로 책임을 짊어졌다고는 해도, 어찌 그것이 폭력의 일종이 아니었겠는가.
‘저와 관련된 비밀이면 더 듣고 싶어요.’
나의 비밀만이 성역(聖域)일 수는 없다.
그러기에 [회귀자의 태엽시계]를 소유한 헌터로서, 나는 당당히 물었다.
“무엇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너는 원래 성공할 수 있었다!”
무슨 뜻인가
알지 못했기에 한 번 더 물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티아. 원래 성공할 수 있었다뇨?”
“어리석은 아해야! 네가 1층에서 기연을 만나지 못하고 2층에서 기회를 잡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기연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무티아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손을 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해버리는 저주를 받은 어느 고대왕의 웃음처럼, 황금의 성좌가 터뜨리는 웃음은 기괴했으며, 또한, 피폐했다.
“너는 탑을 알 것이다! 10층까지의 탑은 세계에서 도망쳐온 이들을 받아주는 피신처요, 안락한 섬이요, 기회의 땅이다. 어찌 네가 마주칠 기연이 하나도 없었겠는가!”
“…….”
“네가 올려본 탑은 그토록 무정한 존재였는가!”
두근.
[‘폐허를 추수하는 소’가 권능을 발현합니다.]퇴적암밖에 없던 콜로세움에 쿠웅, 쿵! 신전의 기둥들이 땅밑에서 올라왔다.
온전한 기둥이 아니었다.
버려진 신전의 잔해.
비바람에 삭아, 마치 잇몸이 더러 비어버린 노인의 이빨처럼, 하얀 기둥들이 지옥 곳곳에 박혔다.
『만일 당신이 염제를 만나지 못했다면.』
신전 기둥들 사이로 스크린 막과 같은 풍경이 어렴풋, 비쳤다.
가장 처음 발현된 권능은 이미 내가 들어본 가정이었지만.
『만일 염제가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건 완전히 새로 들어본 가정.
무엇보다도 주어 자리에 내가 아니라 염제가 들어갔다.
『만일 염제가 ‘회귀자의 태엽시계’를 얻지 못했다면.』
그리고.
『만일 염제가 ‘회귀자의 태엽시계’를 통해 회귀하지 않았다면.』
눈 앞에 세계가 펼쳐졌다.
4.
『회귀자의 태엽시계를 얻은 염제는 회귀하여 상련 복권을 구매한다.』
기둥 틈새로 비춘 저 너머의 풍경에서, 나와 염제가 스쳐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 바람에 당신은 ‘원래 세계’에서보다 한 발 늦게 상련 복권 구매처에 가게 되고, 본래 4등이 당첨되어야 했을 복권은 꽝으로 변하게 된다.』
소소한 불운.
기둥 너머의 나는 가볍게 한숨을 짓고 사냥터로 향하고 있었다.
『빈약한 장비로 도전한 당신은 원래 세계에서보다 하루 더 오래 가는 부상을 당한다.』
그 뿐이 아니었다.
『부상을 치유한 당신이 도착했을 때 그곳의 상자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염제가 가져간 것은 아니었다.
자의로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염제가 신경쓰기에 그 상자는 너무도 하찮은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가난하고 약하던 내게는 분명 큰 도움이 되었을 장비가 거기에는 들어 있었다.
『당신은 스킬 카드를 획득하지 못한다.』
잘 돌아가던 톱니바퀴에 모래 한 알이 튀어든 것처럼, 염제라는 회귀자로 인해 내 인생은 점차 변화해갔다.
『당신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하며.』
추락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인생에 다다른다.』
이윽고 그 골방에 이를 때까지.
『하지만, 만일 염제가 ‘회귀자의 태엽시계’를 통해 회귀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그 다음에 펼쳐진 것은, 그 자그마한 불협화음이 사라진 세계였다.
전혀 다른 세상.
『당신의 노력은 제대로 보답 받는다.』
결실이 있는 세계.
『당신은 꽤 좋은 스킬을 얻게 되어 노력의 결실을 맺는다.』
그곳에서, 아마도 나는 ‘모든 몬스터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것 같았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
스킬 덕택에 탑의 사람들은 비로소 2층에서 9층까지 돌아다니던 몬스터들 중에, 대화가 가능한 지적생명체가 있으며, 그들이 인간을 피하여 지하에 거대한 문명 도시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마저 알게 된다.
『당신은 길을 개척한다.』
지금의 우리조차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
5층 지하엔, 아인종들(亞人種)이 도시를 일구어 몰래 살고 있었다.
『당신은 여러 비극을 막는다.』
유일하게 아인종들과 대화할 수 있는, 인류의 대표자로서. 사신으로서. 중재자로서.
『친구를 얻고,』
한껏 고생하여 사건을 막아낸 내 어깨를 흑룡주가 툭툭 두들겨준다. 흑룡주는 씩 웃으면서 내게, 좋은 가게를 알고 있으니 술 한잔 어떠냐고 물어본다.
『동료를 얻는다.』
비록 지금의 나에 비해 무예는 훨씬 떨어지지만.
틀림없이 보람 넘치는 삶을 살며, 주위의 인정을 받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 폐허의 신전 기둥 틈새에는 놓여 있었다.
“어린 아해야.”
무티아는 말했다.
“이것이 너의 원본(原本)이다.”
“…….”
“네가 본래 걸어야 했을 길이고, 원래 너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심장이 뛰었다.
“그것을 모두, 염제란 놈이 전부 다 가져간 것이다! 독식한 것이다! 독점한 것이다!”
“…….”
“네놈이 마땅히 가지게 될 예정의 기연은 허망하게 스쳐 지나갔고, 본래 네놈이 갖게 될 기회는 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렸다!”
…….
“그 세계선에서— [원래]의 세계에서. 원본에서. 본류(本流)에선, 네놈이 4000번의 괴로움을 감내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그저 성실하게, 본래부터 성실한 본성을 갈고 닦으며, 만족스러운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가.
“알겠느냐. 어린 아해야. 너는 운이 안 좋았던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이미, 유수하에 의해 굴절된 삶을 살고 있었던가.
“너는 다른 사람한테 운을 빼앗긴 것이다!”
우렁찬 포효가 지옥굴을 울렸다.
“돌려 보내주마.”
무티아.
“네가 마땅히 살았어야 했을 진짜 인생으로.”
확실히 이건 날카로운 독수(毒手)다.
단지.
“지금 네가 보내는 인생은 가짜다. 헛것이다. 이번에는 네가 온전히 너의 시간을 걷도록, 어느 회귀자도 너의 시간선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주마. 진짜 인생을 걷게 해주겠다. 네 성좌를 버려라. 그리고 내 권속에……
“늦었어.”
“뭐?”
무티아가 반문한 순간 이미 나의 마천은 움직였다.
휘익!
내가 빼어든 칼날이 지옥을 수평으로 갈랐다.
오러가 지나간 자리에서 슥, 신전의 기둥이 어긋났다.
무너졌다.
마치 하얀 무가 썰리듯, 무티아의 권능이 피어낸 신전 기둥은 너무도 간단히 양단되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지금, 네 이놈! 무슨……!”
“[가짜 인생]이니 [진짜 인생]이니. 그런 말장난을 하려거든, 라비엘을 만나기 전에 나를 찾아왔어야 했고, 스승님을 뵙기 이전에 나를 현혹해야 했고, 흑룡주의 미소를 보기 전에 나를 설득해야 했다.”
나는 이글거리는 황금을 노려보며 말했다.
“탑주는 내가 최선의 인생을 살지 못했다고 했지. 너는 내가 진실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고 하는군.”
황금 너머를 향해서 말했다.
“어떤 인생이 가짜이고 진짜인지는 시간의 순서 따위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 나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고, 내가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어, 그것이 사랑이 되고, 우정이 되고, 손길이 되어, 함께 걸어가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진정한 인생이다.”
나는 무표정하게 검을 쥐었다.
“나는 우리다. 나를 우리로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어. 그리고, 우리는 이 세계에밖에 없지.”
“…….”
“우리의 진정한 세계는 오직 이곳이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
“자아.”
무티아.
권능, 회귀.
“당신의 별자리가 자아내는 음악 소리는 다 들었습니다.”
제1책.
지면 부수어 가두다.
파훼破毁.
제2책.
인공의 콜로세움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몰아세우다.
파훼破毁.
제3책.
이 백 명의 사도를 총동원하여 합공하다.
파훼破毁.
제4책.
성좌의 권능을 동원하여 사왕을 늙게 하다.
파훼破毁.
제5책.
원본의 시간을 보여주어 유혹하여, 자신의 권속에 들게 하다.
파훼破毁.
한 번에 최소한 두 가지를 노리며, 그리하여 검제의 후인인 나를 꺾기 위해, 한 번에 다섯 가지의 책략을 들고 나온 성좌는, 이제 나를 가로막기 위한 망치 이외엔 아무것도 지니지 못했다.
“먼저.”
“…….”
“당신의 긍지를 가지겠습니다.”
일섬(一閑).
분명히 무티아는 망치를 고쳐 쥐어 휘둘렀고, 아마도 나의 공격을 맞받아 치려고 했던 것 같았지만,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 세상에 드러난 결과는 참혹했다.
털퍼덕.
기나긴 뿔.
무티아의 이마 양쪽에 달려 있던 것들 중 오른쪽 뿔이, 힘없이 나뒹굴어서, 모래바람에 휩싸였다.
“아…….”
그리고.
[‘폐허를 추수하는 소’의 존재가 흐릿해집니다.]찬연하던 황금빛이 조금 흐려졌다.
32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