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28)
1.
-걸작이군요.
고대.
시간을 헤아리는 것이 의미 없을 정도로 억겁의 세월이 반복되어, 세월마저 지치고, 시간조차 지쳐, 모든 것이 멈춰버린 신전이 있었다. 그곳에 한 마리의 아름다운 용(龍)이 살았다.
-……어떤 놈이냐.
살았다, 고 표현하는 건 아귀에 안 맞을지도 몰랐다.
황금색으로 찬연했던 비늘은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앗아가버린 황금안 또한, 눈에서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목소리. 목소리를 내어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용은 자신의 성대가 낯설었다. 폐에서 목구멍을 타고 전해지는 울림이 낯설었다. 폐를 둘러싸고 있는 살집이 낯설었으며 살집을 관통하는 뼈가 낯설었다. 귀를 기울이면, 들리고 있는 심장 박동이 낯설었다.
결론은 명백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용은 자신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대답해봤자 이해되는 건 없을 거예요. 이름이란 같은 좌표에서 살아가는 자들끼리 안부를 전해묻는 주소. 소인은 그대와 다른 곳에서 왔기에.
-다른 곳?
-본산 세계라 불리는 곳이지요.
인간은 손등으로 금발 머리를 넘겼다.
‘예사 인간이 아니다.’
황금안이 가늘어졌다.
가장 미세한 손짓에서 가장 가느다란 눈짓까지. 저 인간이 스스로 통제하지 않는 근육은 없었고, 의미를 짚지 않는 자세가 없었으며, 의도를 잉태하지 않은 목소리가 없었다.
‘요물(妖物)이로군.’
그리고 용은 깨달았다. 비늘이 녹슬고 심장이 낡았어도 마주한 상대를 평가하는 자신의 육감은 아직 살아 숨 쉬었다.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용은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이 걸작이라는 것이냐?
-이곳이요. 그대가 머무르는 신전이요. 그대는 회귀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용제(龍帝)이지요. 그대를 모시게 된 인간들은 한 명도 빠짐 없이 회귀하였고, 회귀한 자들은 자연스레 성공가도를 달렸어요.
좋은 기분이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곧이어 당신을 모시지 않는 놈이 병신으로 취급받게 되었지요. 너도, 나도, 너라 부를 수 없는 저 멀리의 타인, 나를 부르지 못할 세계 반대편의 사람까지, 모두 당신을 신앙하게 되었어요. 그 결과가 이것.
인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인간이 회귀자가 되어버린 세계.
-…….
-아니, 모든 인간이 회귀를 소원하게 된 세계일까요. 아무도 시간의 이점을 가지지 못해요. 모두가 시간을 가지려 했기에. 아무도 시간을 가지지 못했어요.
이 세계는 멈추어 있었다.
메두사 신전에 붙박힌 석상들처럼 인간들은 멈춘 채 미동조차 안 했고, 세상은 늙을 일도 낡을 것도 없어 그저 정지한 순간인 채 숨을 멈추었다
한 마리의 용을 제외하면.
-안타깝군요.
오직 용만은 모든 것이 멈추어진 세계에 홀로 남아, 유일무이한 신이 되어, 부동의 원동자가 되어, 황금의 일점으로서 머물렀다.
-당신은 그저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었을 뿐인데 말이지요. 회귀를 관장하는 신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 결말은 필연적인 정지(停 止)라니. 사교계 죽돌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농담이에요.
-그래서? 나를 조롱하러 왔는가, 인간이여?
용은 으르렁거렸다.
-싸움을 거는 것이라면 싸움을 걸겠다 말을 하여라. 거절하지 않으마.
-설마요 집주인이 입주민이랑 싸워봤자 뒷말만 무성한걸요.
-집주인? ……입주민?
-소인은 탑(塔)을 만들고 있어요.
인간이 양손을 모았다.
-그곳에 와주시면 좋겠어요. 물론, 여러 제한 조건들을 짊어지게 되겠지만. 무티아.
-…….
-만일 신이 살아야 한다면.
어디선가.
-신도 최소한 두 번의 기회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시계 바늘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는 그렇게 생각했다.
2.
[‘폐허를 추수하는 소’의 존재가 흐릿해집니다.]무티아의 뿔이 잘려나갔다.
“신이시여!”
“무티아님!”
“아아! 아아아아!”
“죽여버릴 테다!”
성좌의 사도들은 비명을 질렀다. 경악했다. 분노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사도들은 나에게 당했던 고통 따원 잊어버린 양, 틀림없이 잊지 못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망치를 고쳐 잡고서 다시 뛰어들었다.
용감하게.
하지만 불꽃은 자신에게 뛰어드는 나방들의 용기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저한테 원본(原本)을 운운할 자격이 없습니다. 무티아.”
나는 무티아한테서 시선을 놓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아아아아아악!!”
내 칼에 어깨죽지가 비스듬히 잘린, 그것과 동일한 고통을 안게 된 사도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그 뒤로도 달려드는 사도는 많았다. 하여, 비명에 끊임이 없었다.
“아마 제가 가진 [회귀자의 태엽시계]도 당신이 만든 스킬이겠지요. 제한조건이 엄격하게 걸려 있지만 아무튼 회귀의 권능이 담겨 있으니까요.”
“힉! 아아악! 아, 크윽! 읍,”
“다시 말해서 당신이 염제의 원흉. 염제가 [회귀자의 태엽시계] 덕분에 성공했고, 그 성공의 그늘에 가려져 제가 불운한 삶을 보냈다면, 결국 당신이 마지막 원인입니다. 삶을 망가트린 장본인이 고쳐주겠다며 으스대다니. 도리에 안 맞지요.”
“아아아아아아!”
“물론 저는 제 인생을 돌려달라고 당신한테 빌지 않을 겁니다. 돌아갈 생각도 없고요. 하지만, 저 말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 이— 당신의 권능에 의해 비틀린 것입니까?”
터벅.
나는 지옥에 비명을 자아내며 걸어갔다.
사도들이 만든 방어를 뚫고, 인산의 벽과 인해의 강을 건너, 무티아게게 다가갔다.
“저는 당신을 벌할 자격이 있습니다.”
“…….”
“인간이 되어 살아갈 각오는 되었습니까. 황금의 성좌.”
“나는,”
무티아의 이빨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오래된 협곡 사이에 부는 바람처럼 위태로운 소리였다.
“그저……. 내 궁전 앞에 와서 무릎을 꿇은 아해가 있었다. 청명한 아이였다. 투명한 인간이었다. 그저, 어미가 마차에 치여 죽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분하다고.”
비명이 울렸다.
“마차를 탄 귀족을 탓할 생각도 없고, 복수할 생각도 없으며, 단지. 단지 그날 집을 나서는 어미에게, 길을 조심하라고. 빗길에 미끄러지기 쉬우니 조심히 걸으라고. 조심해서 돌아와달라고. 그 한 마디만,”
비명이 울렸다.
“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 마음이 어여뼈.”
비명이 울렸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이더냐!”
모든 폐허의 주인은 울부짖었다.
“나는 그저 너희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할 줄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고, 자라면서 더욱 그리 되었다! 단지 그뿐이다! 할 수 있었던 일을, 했다. 나의 태생이 잘못되었더냐. 나의 생애가 틀려먹었더냐. 네가, 네놈이, 무슨 권리로! 감히! 나를!”
“당신은 먼저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사도의 비명과 무수한 방해, 공격, 불처럼 작열하는 성좌의 눈을 마주하고도 계속 걸었다.
“뭐?”
“금사매의 소원을 들어준 것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실비아가 소망했고 당신은 응답했다. 단지 그뿐인 일이니까요.”
터벅.
“그로 인하여 라비엘의 인생이 망가졌지만, 역시 불만은 없습니다. 덕분에 저는 라비엘과 만나게 되었어요. 이 모든 일은 [기억이 고여드는 연못], [만상의 대도서관장], 하무스트라의 대리인으로서 제가 벌인 일입니다.”
터벅.
“당신은 금사매 영애를 대리인으로 세웠다. 저는 하무스트라의 대리인이 되어, 금사매를 쓰러트렸다. 그것이 사건의 진상입니다. 신성과 신성이 부딪혀서,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벌여, 승부가 난 거예요.”
터벅.
“왜 거기에 이의를 제기합니까?”
“…….”
“정확히는, 왜 저한테 불만을 품지요? 결투 도중에 부당한 일이 있었다면 그때 하무스트라한테 말했으면 됐잖아요. 어째서? 왜 그때는 묵묵히 패배를 받아들였으면서, 이제 와서, 하무스트라도 아니고 한낱 대리자에 불과했던 저에게 재결투(再決關)를 요청합니까? 아니. 사실 결투조차 아니에요. 당신이 멋대로 기습했으니까.”
그래.
성좌가 헌터를 공격하는 일이 ‘평범한 사건’일 리 없다.
헌터가 성좌한테 싸움을 걸었다면 모를까, 무티아 급의 성좌가 직접 헌터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건 성좌들이 훌륭한 인격자여서가 아니라.
‘탑주(塔主)가 제한을 걸어두고 있겠지.’
헌터에 대한 배려.
학살 금지.
오직 스테이지 기믹에 어울릴 경우에만 허가되는 행위, 등등.
무티아 본인조차 조금 전에 일갈하지 않았던가.
『네가 올려본 탑은 그토록 무정한 존재였는가!』
내가 모르는 제한 조건들이 성좌들에겐 걸려 있을 것이다.
이 탑은 1층~10층을 튜토리얼 구역으로, 11층~49층을 초보자 구역으로 설정해둘 만큼, 철저히 난이도를 관리하니까.
어찌 보면 헌터보다 오히려 성좌들한테 불리해 보일 정도로.
“묻겠습니다.”
“…….”
“무티아.”
그런 탑에서 무티아가 나를 공격할 수 있었던 이유.
[금사매 사건]이라는 이미 끝난 과거를 가지고, 하무스트라와 무티아 간의 대리 전쟁으로써 마무리된 일을 들먹이며, 다소 무리를 하면서까지 내게 결투를 청할 수 있었던 까닭.내가 조용히 내 추론을 입에 담았다.
“저는 성좌가 되었습니까?”
“…….”
정적이 감돌았다.
그건 이백 명에 이르던 사도들이 마침내 내 칼 아래 모두 쓰러졌기에, 더는 비명을 지를 사도조차 없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침묵이었다. 결코 나의 추론에 허를 찔려, 콜로세움 지옥에 떨어진 모두가 입을 다물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절묘하게 타이밍이 맞아 떨어져, 마치 나의 질문에 62층 스테이지 전체가 침묵해버린 것 같았다.
“제가 평범한 헌터가 아니라 성좌에 오른 거라면 당신의 행동도 전부 납득됩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기에 내가 말했다.
“성좌가 일개 헌터를 마음대로 공격하는 건 금지되어 있겠지만, 성좌와 성좌 간의 결투라면 훨씬 더 규칙이 느긋할 겁니다. 동급이니까. 동격이니까. 탑도 거기까지 빡빡하게 굴진 않겠지요.”
언제부터일까.
정확히 어떤 타이밍에 나는 성좌에 버금가는 지위를 인정받게 된 것인가.
“시기는 아마도 61층을 클리어하자마자, 일까요?”
이번 스테이지에 돌입했을 때 한 가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때는 미처 신경쓰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수상쩍었다.
바로 성좌들이 일제히 나에게, 정확히는 내 세력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당신을 죽여버리겠다고 맹세합니다.』
『사랑과 정욕의 화신은 당신을 찢어 죽여버리겠다고 맹세합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는 전쟁을 준비합니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가 당신의 말살을 맹세합니다.』
물론 여우님이 성좌들을 도발하긴 했다.
하지만 단지 도발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여태껏 나를 수족으로 삼기 위해 계속해서 간을 보던 성좌들이, 50층에서 내가 어떤 미친짓을 벌였는가 빤히 실시간으로 구경한 자들이, 단번에 나한테 등을 돌린다?
‘메세지로 장난을 친 거라고 생각하면 간단하지.’
하지만.
무티아와 일전을 주고받은 작금에 이르러선 내 의심도 깊어졌다.
예컨대, 어떤 [모종의 이유] 때문에 성좌들은 이제 나를 공격하는 데 부담이 없어졌다.
예컨대, 나, 김공자가 더는 초보자가 아닐뿐더러—- 어쩌면 평범한 헌터조차 아니게 되었다.
예컨대, 본인 스스로 성좌가 될 생각도 의지도 없었던 배후령도 어째선지 [검의 성좌]라는 직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예컨대, 성좌가 되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순간 자연히 벌어지는 일이라면.
“검제 양반.”
-오냐.
“성좌들이 메세지 발송하잖아요 그거 어떻게 하는 겁니까?”
배후령이 피식 웃었다.
-난 그거 안 해봐서 몰라. 하지만 그냥 메세지를 발산시킨다는 생각만 해도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겠냐? 네 검은 인간의 모습이 아닌데도 마음껏 메세지를 쓰잖아. 딱히 복잡한 시스템이 있을 거 같진 않다만.
“확실히 그렇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해볼까요.”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서 떠올리는 건,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일말의 흐릿함도 없이 떠올릴 수 있을 사람.
‘잘 지내고 있습니까.’
문득,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그려졌다.
나에게는 한 컵 정도의 물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물이 아니라 하얀 세제 가루였을지도 모른다. 그 컵에 담긴 무언가가 한스푼, 딱 한 숟가락만큼 줄어들었다.
그러자.
[‘비명을 모으는 하늘’이 ‘은백합 공작’에게 안부를 전합니다.]나는 눈을 떴다.
“응. 역시.”
“…….”
무티아는 이빨을 꽉 문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방긋 웃어주었다.
“이게 되네.”
32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