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31)
1.
[당신은 63번째 스테이지에 입장했습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당신의 기척을 감지하고 분노합니다!]모래바람은 나를 감쌌다가 가라앉았다.
마치 한 번만 잡아주고 이내 놓아버리는 손길처럼.
태양에 바싹 말리고 바람에 고와진 모래알들의 향을 느끼며, 나는,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이제는 굳이 메세지로 말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구렁이 씨?”
전음(傳音)은 안 썼다.
상대는 모든 수수께끼와 비밀을 관장하는 성좌.
보이지 않는 곳을 엿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엿듣는 것쯤이야 아마 쉬울 거다. 한마디로 말해, 도청의 전문가라는 뜻이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당신의 무례함에 비늘이 떨립니다!]음.
나는 한쪽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쩌면 교섭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저, 대화해보면 의외로 잘 통하는 남자예요. 그렇게 숨어서 영원을 보낼 게 아니라면 잠깐 티타임이라도 가지면서 얘기하시지요?”
[‘미궁에 거하는 눈’은 어디서 수작질을 부리냐며 일갈합니다!]과연.
‘죽어도 본인의 목소리를 안 들려줄 생각이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행여라도 그걸로 자기 위치가 들킬까봐 조심하는 거야. 무티아가 나한테 발리는 걸 지켜봤으니…. 차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안 나겠지. 자아, 그럼……. 지금부터 숨바꼭질이라도 벌여야 하나?’
미궁.
사방이 드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실 저걸 ‘벽’이라 지칭해야 하는지 알쏭달쏭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벽 중에는 상공을 아득히 뛰어넘어 성층권까진 가뿐히 터치할 것 같은 ‘벽’은 없었으니까.
심지어, 하늘은 돔 형태로 폐쇄되어 있었다. 달걀껍질이 지상을 뒤덮은 형태였다. 아마 벽을 타고 올라가봤자 하늘의 껍질에 가로막힐 것이다.
‘땅바닥은?’
나무 재질.
뱀의 비늘과 같은 문양이 소용돌이치는 나무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시험 삼아 검을 휘둘러봤지만 벽도 바닥도 멀쩡했다.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다. 아마, 파괴하기가 매우 어렵도록 설정된 것 아닐까.
“……세계 자체가 미로로 되어 있는 스테이지인가.”
나는 중얼거렸다.
“곤란하네. 구렁이 씨는 계속해서 위치를 바꿀 거잖아요. 저는 여기 지리를 모르는 반면 구렁이 씨는 빠삭할 테고요. 상대가 도망만 쳐도 제가 잡을 길이 없는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서 공격하지 않은 까닭은, 이미 그 목소리를 들어봤기 때문이다.
“태고의 지팡이 님?”
“그냥 간단하게 마법사라고 불러. 마법사거든.”
평생 웃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얼굴로 [태고의 지팡이]는 말했다. 마법사는 내게서 6m쯤 떨어진 거리를 유지한 채 하품하고 있었다.
“별로 대단한 사람도 아니야. 그저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마법사였을 뿐.”
“아니, 충분히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니야. 별로 대단하지 않아. 기둥이 되기 전엔 열세 마리의 용제(龍帝)를 홀로 참살했고, 일곱의 용국을 정벌한데다, 세계의 근본이자 출발점인 공허극점(空虛極點) 균열에 사상 최초로 도착해서 깃발을 꼽았지만, 단지 그뿐인 마법사에 불과해.”
“……혹시 그냥 저한테 자랑하고 싶은 건가요?”
“사왕. 놀라울 만치 성공한 사람들이 왜 놀라울 정도로 겸손한지 아니? 그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내가 겸손해질수록 상대방이 초라해지거든. 상대를 초라하게 만들면서도 나 자신은 완전히 무죄하지. 오직 권력자만이 진정으로 솔직하게 겸손해질 수 있단다. 그런 의미에서 성공한 자들이 겸손한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야. 어때? 내가 너에게 깨달음을 주었니?”
“방금 말에서 제가 깨달은 건 마법사님의 인성이 썩었다는 것뿐이군요….”
“축하해. 벌써 많은 걸 깨달았구나.”
짝. 짝. 짝.
마법사는 손뼉을 쳤다. 손이 아니라 입으로. 그러니까 입을 움직여서 ‘짝, 짝, 짝’ 발음을 한 것이다. 나는 마법사의 입뼉을 들으면서 이 기둥 또한 범상치 않은 또라이임을 직감하였다.
“본론으로 돌아가죠. 왜 제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까?”
마법사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어 뭔가를 적었다.
종이엔 [본론]이라 적혀 있었다.
마법사는 종이를 벽에 붙이고 뒤로 세 걸음 걸었다가 다시 앞으로 세 걸음 돌아왔다.
“짜잔.”
“…….”
“돌아옴.”
이 모든 사건이 벌어진 약 15초의 시간을 나는 담담히 무시하기로 했다. 자고로 또라이를 상대하려면 나 역시 똘끼로 무장할 필요가 있는 법이다.
“그래요. 미친 마법사님. 왜 제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요?”
“성좌들은 불공평한 존재야. 평범한 인간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데, 물리적으로 강할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위대하지.”
마법사는 마치 자기가 정상인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불공평 속에도 일말의 공평이 있어.”
“공평?”
“응. 수수께끼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정답이 있기에 수수께끼야. 미로는 아무리 난해하여도 탈출구가 있기에 비로소 미로지. 답 없는 수수께끼는 그저 짜증나는 문장의 나열에 불과하고, 문 없는 미로는 단지 싫증나는 장소의 연속에 불과해.”
마법사는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야 성좌들이 그토록 깔보는 ‘평범한 인간’의 삶과 다를 바가 없지.”
“…….”
“설령 비틀린 정답이라 하더라도. 설령 뒤틀린 탈출구라 하더라도. 답 없는 세상에 답을 내리고, 문 없는 삶에 문을 내어주는 것이 성좌의 역할. 아니. 성좌의 존재의의 그 자체라 할 수 있어.”
즉.
“히시미트 크리츠는… [미궁에 거하는 눈]은 도망치지 않는다는 겁니까?”
“모든 궁전에는 옥좌가 있는 법이지. 미궁도 궁전이야. 왕은 옥좌에서 도망치는 순간 왕이 아니게 되어버리는걸.”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사방의 벽을 노려보았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이를 갑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권능을 발현합니다!]그리고 내 도발적인 시선에 반응한 것처럼, 그때, 세계가 일변하였다.
2.
세상은 여전히 벽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더 이상 시선이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 벽이 아니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탑에 맹약을 요청합니다.] [성역 지정.] [승인.]벽들의 외피가 녹아서 흘러내렸다.
껍질이 벗겨져 흘러내린 벽의 속살은 유리였다.
투명한 유리창.
더 이상 시선이 가로막히지도 않으며 그러기에 자유롭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는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유리를 바라봤으며, 거기서.
“……마네킹? 피규어?”
수많은 인형들이 유리벽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수없이 많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무수하다는 것.
하늘 끝까지 닿을 정도로 높고 어디까지 이어졌을지 모를 정도로 광활한 유리들이었다. 유리의 미궁이었다. 그 유리창마다 인형들이 빼곡히 줄지어, 층을 층층으로 이루고 겹을 겹겹이 둘러, 나열되었다.
[그는 감추고 폭로하는 자이니, 경배하여라.]삐그덕.
가장 근처의 유리창에 매달려 있던 마네킹이 문득 머리를 들었다.
입이 열렸다.
“그는 감추고 폭로하는 자이니, 경배하여라.”
마네킹의 왼쪽, 오른쪽, 위쪽에서 정지해 있던, 또 다른 인형들이 입을 열었다.
“그는 감추고 폭로하는 자이니, 경배하여라.”
다시금 그들을 둘러싼 인형들이.
“그는 감추고 폭로하는 자이니, 경배하여라.”
직선으로 쭉 이어진 통로의 양옆에서 마네킹들이, 골목의 막다른 벽에서 마네킹들이, 구불구불 구부러진 길의 직각에서 마네킹들이, 내가 보이는 곳에서만 수십 수백 수천 수만의 마네킹이, 보이지 않는 곳에선 그야말로 무한에 가까운 숫자의 마네킹이, 삐끄덕! 유리창 너머로, 끼기익. 삐그덕, 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디 나를 찾아볼 속셈이라면 찾아보아라.”
수천수만 겹으로 이루어진 목소리.
인형마다 제각기 따로노는 목소리가 불협화음을 내었다.
“이 중에 나의 본체가 있느니라.”
“…….”
이들 중에.
수억 체,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인형들이 전시된 이곳에, [미궁에 거하는 눈]은 숨어 있는 것이다.
나는 입가를 올렸다.
“숨바꼭질 치고 술래한테만 너무 불리하네요.”
“이래 봬도 공정한 게임이다.”
바로 오른쪽 유리벽에 전시된 인형이 입술을 움직였다.
“찾지 못하겠다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내려가거라. 아니면, 영원히 나의 유리궁전에서 헤매는 것도 좋으리라!”
인형들은 저마다 특징이 있었다.
어떤 인형은 등신대 피규어에 가깝게, 아니, 실물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정교했다. 얼굴이 있었다. 눈동자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숨을 쉴 것처럼 생생했으나, 시간이 그대로 정지됐는지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또 어떤 인형은 마네킹이나 다름없었다. 목각 인형. 얼굴이 없고 표정이 없으며 관절이 고스란히 드러난 마리오네트.
인형들은 각각 정교함의 레벨이 달랐다. 완벽한 완성품에서 아직 조각칼을 댄 것 같지도 않은 미완성품까지, 수많은 꼭두각시 인형들이 실에 매달린 채, 서로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저는 이웃집 자녀를 죽인 살인자입니다.』
모든 인형이 종이 팻말을 한 장씩 들고 있다는 것.
『가장 친한 친구를 속였어요.』
그것 하나만은 공통점이었다.
『저는 신전의 사제와 불륜했습니다.』
『미후대공(獨候大公)의 독살을 꾀한 자는 나다.』
『아버지를 죽였다.』
『저를 거두어준 귀족을 증오합니다.』
『나는 군주의 원수와 내통하여 본가를 멸망시켰다.』
인형들이 든 팻말은 내용이 다 달랐다.
심각한 내용도 있었고 시답잖은 내용도 있었지만.
“……전부 비밀들이군요.”
나는 팻말들이 의미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 기밀.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비밀이 적혀 있는 겁니다. 그걸로, 그 사람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게.”
“과연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놈이로고.”
끼기이기긱-.
전방의 꼭두각시가 입을 열었다. 관절이 삐걱거리면서 낸 소음은, 아마도 [미궁에 거하는 눈]이 의도한 비웃음 소리였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내게 소원을 빌었던 자들이다. 최소한 한 번은 나의 권능에 몸을 기댄 것들이지. 이제 갓 별자리에 든 너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내 권역은 광활하니라!”
“딱히 이 정도로 무지막지한 세계를 만들고 싶진 않은데….”
하무스트라는 대도서관. 무티아는 모래 신전. 그리고 히시미트 크리츠는 유리 전시장인가.
“주로 어떤 소원을 들어주십니까?”
“[부디, 싫어하는 저놈의 약점을 알려주세요.]”
“…….”
“[제가 저지른 짓을 아무도 모르게 해주십시오.] [제발.] [저놈을 죽이고도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게.] [놈들이 제 과거를 파헤쳐도 제 비밀들을 알지 못하도록.] [그 여름에 벌어진 일을.] [제가 완전무결한 무죄인 것처럼.]”
끼기익, 끼긱.
일곱 체의 마네킹이 동시에 비웃음을 흘렸다.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속 깊이 빌어보았을 소원이 바로 나의 영역이도다. 너희 인간들은 밝히고 싶은 비밀도 많거니와, 숨기고 싶은 비밀은 더욱더 많더구나!”
히시미트 크리츠.
미궁에 거하는 눈.
키워드는 뱀, 알, 미궁, 비밀, 수수께끼, 모순, 비밀의 유지와 보안.
자물쇠와 열쇠.
폭로.
“물론 나는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비밀을 엄수시킨다. 나의 권능 아래서 그들은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키지 않는 축복을 누리나니, 다만, 그들이 숨긴 비밀들은 오직 이곳에선 적나라하게 전시되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
“그래서 당신이 제 스킬의 [트라우마 페널티]에 관련될 수 있었던 거군요.”
마네킹 일곱 체가 동시에 머리를 기울였다.
“으음?”
“사람의 과거야말로 비밀의 총체입니다. 가장 깊은 상처를 간직한 과거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절묘한 열쇠예요.”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탑주는 이 힘이 [만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무스트라의 사도였던 자신의 조상에게 도달한다고 말해준 바 있지만. 동시에 [엿본다]는 부분에서 제 스킬은 당신의 권능과 맞닿아 있는 겁니다.”
마네킹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아하, 그러하다! 정답이로군! 그렇다. 사람의 과거란 [기억]이고 곧 [이야기]지만, 동시에 [비밀]이기도 한 것이다. 너는 그것을 훌륭히 폭로하였다.”
내 시야의 구석에서 어느 마네킹이 끼긱, 손을 들었다.
“현명한 폭로자에게는 상이 주어져야 하는 법.”
목재로 이루어진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기뻐하거라. 내 작은 선물을 안겨주마.”
“당신이 어디 있는가에 관한 힌트입니까?”
“보면 알 것이다.”
따라갔다.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는 또 다른 마네킹이 있었고, 그 마네킹이 다시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으므로, 나는 열여섯 번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여 걸었다.
그리고.
“…….”
멈칫.
마침내 도착한 장소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어떠한고. 어린 별아.”
얇디 얇은 유리 저편으로 어느 인형이 입술을 움직였다.
마리오네트의 생김새는 정교했다.
내가 잘 아는 목소리였으며,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이 아이의 비밀을 알고 싶지 않느냐?”
그곳엔.
성기사(聖驗士)와 똑같이 생긴 인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332화.